이름 |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아리아노스 (Lucius Flavius Arrianus) |
출생 | 86년~ 89년 사이 |
사망 | 180년 이전 |
직위 | 집정관, 카파도키아 총독, 원로원 의원 |
대표작 |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 인디카, 담화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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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가, 철학가, 역사가. 저서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로 유명한 인물이다.2. 생애
86년에서 89년 사이 로마 제국 비티니아 속주의 수도 니코메디아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으며, 니코메디아에 있는 데메테르와 코레 신전의 사제를 지냈다. 부친 대에 로마 시민권을 받았기에, 그는 제국의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그리스 문학 및 수사학 교육을 받은 뒤 108년경 에피루스 지방의 니코폴리스로 가서 철학을 공부했다. 니코폴리스에서는 92~93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로마에서 철학자들을 추방할 때 함께 쫓겨난 스토아 학파 철학자 에픽테토스도 있었는데 이 철학자의 강의를 듣고 크게 감명받았다. 오늘날 에픽테토스의 생애가 알려질 수 있었던 건 아리아노스가 스승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아테네에 들리기도 했는데, 크세노폰과 자신을 비교하는 발언을 자주 해서 '어린 크세노폰'이라 불렸다고 한다.이후 공부를 마친 뒤 군대에 입대하여 도나우 강 국경지대에서 복무했다. 126년경 그리스 문화에 푹 빠져 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친구가 되었고, 황제의 추천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129년 또는 130년에 보결 집정관이 되었으며, 132년 카파도키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카파도키아는 북쪽으로는 흑해까지 뻗어 있고, 동부 해안은 트라페준타부터 디오스쿠리아까지 이르는 로마 동방 전선의 중요한 숙주였다. 이 속주엔 2개 군단과 대규모 지원군이 주둔했다. 그리스인에게 이런 지휘권이 주어지는 건 전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엔 바르 코크바 반란이 진압된지 얼마 되지 않아 동방의 정세가 여전히 혼란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것을 볼 때, 그는 군사적 역량을 어느정도 갖췄던 듯하다.
134년경, 캅카스 산맥 너머에 거주하는 알란족이 카파도키아를 침략할 기미를 보였는데 군대를 소집한 뒤 알란 족을 아르메니아 바깥으로 몰아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알란 족과의 전투 대형>을 저술했는데, 여기엔 군대의 구성, 행군, 대열, 전술이 설명되어 있다. 그밖에 총독 시절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권의 저서 <흑해 주유기>, <전술 편람>도 전해진다. 흑해 주유기는 황제에게 제출한 공식 보고서를 바탕으로 트라페준타에서 디오스쿠리아까지의 여행에 대한 서술, 흑해 전체에 대한 설명으로 이뤄졌다. 이 여행의 목적은 관할 지역의 수비 상황을 시찰하는 것이었다.
아리아노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서거한 138년 6월 이전에 총독 직책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후로 별다른 관직을 맡지 않고 아테네에 거주하면서 집필에 몰두했다. 이후 아테네 시민권을 얻었고, 145~148년 집정관에 올랐으며, 172~173년 원로원 의원을 맡았다. 180년, 풍자작가 루키아노스는 그가 이미 죽었다는 걸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평생 학문에 애착을 품은 일등 로마인이었다."
3. 저서
아리아노스는 생전에 다양한 저서를 집필했다. 그는 크세노폰에 대한 경쟁심을 종종 드러냈으며, 사냥에 관한 크세노폰의 저서를 보완한 형태의 짧은 글을 구성했는데, 크세노폰의 저작 <수렵론>과 동일한 제목을 달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을 서술한 저서 이름에도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를 본땄다. 그 외에 스승 에픽테토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다룬 글을 여러 편 집필했으며, 시라쿠사 지역의 디온과 코린트 지역의 티몰레온의 전기를 썼고, 소아시아의 악명 높은 노상강도 틸리보루스의 삶을 다룬 책도 집필했다. 그러나 많은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8편의 저서만이 전해지는데, 그나마 온전히 전해지는 건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와 <인디카>이고, 나머지는 일부만 전해진다.3.1.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Ἀλεξάνδρου Ἀνάβασις)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는 아리아노스가 남긴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역사서이다. 총 7권으로 이뤄진 이 저서는 아리아노스 본인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그는 저서에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 이름은 밝힐 필요가 없고, 나라와 가족 그리고 내가 맡은 관직을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쓴 이 책이 나의 국가, 친족, 관직의 지위보다 더 중요하다고. 어린 시절부터 그러했다. 실제로 내게는 이 책이 나의 국가이며, 친족이며, 관직이다.
이 책은 기원전 336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필리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마게도니아 왕위에 오르는 것부터 시작하여 10년에 걸친 원정 전반을 다루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아리아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아리스토불로스의 저서를 기초로 삼고, 다른 역사가들의 저서 중 참고할 만한 기록도 넣었다고 밝혔다.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로스의 진술이 일치할 경우, 정확하다는 가정 아래 나는 그 내용을 수용했다. 두 인물이 말한 사실이 다를 때는 더 그럴듯하고, 흥미롭게 생각되는 쪽을 택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로스 외에도 많은 사람이 알렉산드로스의 일생을 글로 남겼다. 사실 역사 속 인물 가운데 알렉산드로스만큼 관련 진술이 많으면서 동시에 진술들이 서로 상충되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로스가 이 주제에 관해 가장 신뢰할 만한 저자로 생각된다. 두 인물은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종군했을 뿐만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는 나중에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왕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이 두 인물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에 글을 썼다. 따라서 어떤 압박도 받지 않았을 것이고, 사실을 날조함으로써 득이 될 만한 것도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다른 저자들의 진술 중에는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어 온 이야기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나는 그중에서 흥미롭고 사실이라 생각되는 이야기들을 이 책에 포함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로스가 이 주제에 관해 가장 신뢰할 만한 저자로 생각된다. 두 인물은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종군했을 뿐만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는 나중에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왕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이 두 인물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에 글을 썼다. 따라서 어떤 압박도 받지 않았을 것이고, 사실을 날조함으로써 득이 될 만한 것도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다른 저자들의 진술 중에는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어 온 이야기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나는 그중에서 흥미롭고 사실이라 생각되는 이야기들을 이 책에 포함했다.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행적을 서술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자주 덧붙였다. 그는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제자답게 알렉산드로스의 행위를 스토아 학파의 기준으로 평가했다. 아리아노스는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목숨을 구해줬으나, 훗날 술에 취한 채 알렉산드로스를 향해 비난을 퍼붓다 알렉산드로스에게 창에 찔러 죽은 클레이토스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알렉산드로스가 술에서 깬 뒤 자신의 행동을 깊이 뉘우친 것에 극찬했다. 이는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덕목이다"라는 스승 에픽테토스의 지론에 따른 것이었다.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과도한 야심을 여러 차례 질책했으며, 신이 되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평가를 내렸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는 전통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관한 기록들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현존하는 문헌 기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아리아노스의 저서에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흠모가 눈에 띄게 드러나는데, 이 때문에 알렉산드로스가 저지른 악행을 축소하거나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경향이 많다. 가령 테베인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고 도시를 파괴한 일에 대해, 그리스 동맹군이 테베의 운명을 정하였으니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작 그들에게 테베의 운명을 정하도록 '허락'한 알렉산드로스의 책임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한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인들을 마케도니아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려 했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야만족의 풍습을 따랐다"라는 식으로 편견에 치우친 관점으로 바라봤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의 시대에 출현했던 종족들을 저서에 옮겨 적은 점, 고고학적 증거와 일치하지 않은 기록이 여럿 있는 점, 페르시아에 대해 편파적인 내용이 많다는 점을 근거로, 현재 학계에서는 아리아노스의 저서의 신뢰성을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그렇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은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로스의 저서를 참고한 만큼, 학자들은 그의 저서를 통해 두 인물의 저서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유추하고 있다.
3.2. 인디카(Ινδική)
인디카는 인도 대륙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개한 원정을 다룬 저서이다. 이 책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포루스를 꺾고 인더스 계곡을 정복하는 과정과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네아르코스가 인도에서 페르시아만으로 항해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아리아노스는 이 저서에서 고대 인도의 역사, 지리 문화를 상세하게 설명했는데, 현재 고대 기록이 희귀한 인도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유산으로 취급받고 있다.3.3. 담론, 엥케이리디온
- 에픽테토스의 담론(Ἐπικτήτου διατριβα)과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Ἐγχειρίδιον Ἐπικτήτου)
에픽테토스의 담론은 108년경, 아리아노스가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강연을 청강하고 집필한 작품이다. 본래 8권이 집필되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남은 건 4권이다. 에픽테토스 본인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현재 전해지는 그의 사상은 온전히 아리아노스가 서술한 이 저서에 담겨 있다. '철학자 황제'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책에 깊이 감화되어 참회록에서 이 책의 내용을 여러 번 인용했으며, 중세 시대에 수도원 생활의 원리에 대한 지침서로 많이 사용되기도 했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은 에픽테토스의 담론에서 파생된 것으로, 에픽테토스의 스토아 철학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계율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형이상학을 지양하고 일상 생활에 철학을 적용하는 에픽테토스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 책 역시 수도원 생활을 위한 지침의 역할을 하였으며,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전개된 신 스토아주의(Neostoicism)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