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21:13:48

아돌포 페데르네라

EL Grafico선정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 5인
[1]
안토니오 사스트레 호세 마누엘 모레노 아돌포 페데르네라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아돌포 페데르네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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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클럽
}}} ||
아돌포 페데르네라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946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아돌포 페데르네라
}}} ||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인
파일:external/1.bp.blogspot.com/adolfo+pedernera.jpg
이름 아돌포 페데르네라
Adolfo Pedernera
본명 아돌포 알프레도 페데르네라 아살리니
Adolfo Alfredo Pedernera Assalini
출생 1918년 11월 15일
아르헨티나 아베야네다[2]
사망 1995년 5월 12일 (향년 76세)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신체 171cm / 체중 70kg
직업 축구선수(센터 포워드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CA 리버 플레이트 (1935~1946)
CA 아틀란타 (1946~1947)
CA 우라칸 (1947~1948)
미요나리오스 FC (1948~1953)
감독 미요나리오스 FC (1951~1953)
CA 우라칸 (1954)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55)
클루브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 (1955)
CA 우라칸 (1955~1956)
CA 인데펜디엔테 (1957)
아메리카 데 칼리 (1960~1961)
콜롬비아 대표팀 (1961~1962)
클루브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 (1962)
CA 보카 주니어스 (1963~1964)
CA 보카 주니어스 (1966~1967)
킬메스 AC (1968)
CA 인데펜디엔테 (1969)
아르헨티나 대표팀 (1969)
CA 우라칸 (1970)
타예레스 데 코르도바 (1975)
CA 반필드 (1976)
아메리카 데 칼리 (1977)
CA 산 로렌소 (1978)
국가대표 파일: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svg 21경기 7골 ( 아르헨티나 / 1940~1946)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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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지휘자(El Maestro)
등번호 -[3]

}}} ||

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4.1.2. 국가대표4.1.3. 개인
4.2. 감독
4.2.1. 클럽
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내 축구 인생에 있어 최고로 기억되고 있는 선수는 바로 아돌포 페데르네라다. 마라도나가 매우 특별하고, 환상적인 선수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선수다. 또 한 명의 최고 펠레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매우 어렵다. 하지만 페데르네라야말로 모든 면에 걸쳐 가장 완벽했던 선수였다고 생각한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78년 CA 산 로렌소 감독을 맡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페데르네라의 아버지도 축구 선수였던터라 4살의 페데르네라 역시는 축구장에 드나들며 축구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면서 페데르네라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그를 훌륭한 선수로 키우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다. 어린 시절의 페데르네라는 크루세로스 데라플라타(Cruceros de la Plata)와 CA 우라칸 등 여러 클럽을 돌아다녔고 실력을 인정받아 그는 15살에 CA 리버 플레이트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1.1. 아르헨티나
페데르네라의 주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였지만 그는 기타 다섯 공격 포지션 어디에서도 뛸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17세부터 CA 리버 플레이트의 정규 1군 멤버로 뛰기 시작하였고 같이 입단한 호세 마누엘 모레노와 기존의 공격수들과도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1939년에 베르나베 페레이라 대신 앙헬 라브루나가 들어왔고 아웃사이드 라이트의 자리에도 후안 카를로스 무뇨스가 들어오면서 리버 플레이트는 더욱 강력해졌다. 그리고 1942년에 루스토까지 들어오면서 전설의 라 마키나가 완성되었다. 비록 5명이나 되다보니 라 마키나의 모든 선수가 모인 경기가 드물기는 했지만 그들 하나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선수였고 리버 플레이트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호세 마누엘 모레노가 잠시 멕시코로 외도한 후에도 네스토르 로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등의 전설적인 선수들이 팀에 들어왔지만 리버는 3위에 그쳤다. 결국 이에 실망한 페데르네라는 이적을 주장, 100만 페소에 CA 아틀란타로 팔려갔다.

CA 아틀란타는 페데르네라가 있음에도 강등을 당했고 페데르네라는 새 팀을 찾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CA 우라칸에 가서 2시즌을 보낸 뒤 디 스테파노, 로시와 함께 콜롬비아 미요나리오스 FC로 이적했다.
2.2.1.2. 콜롬비아
5000여 명이 공항에 나가 페데르네라 환영해줄 만큼 미요나리오스 FC 팬들의 환영 열기는 대단했고, 그 기대를 충족하듯 페데르네라는 데뷔전에서 아틀레티코 무니시팔을 6:0으로 작살을 내놓았다. 디 스테파노 로시에 따르면 그들이 이끌던 미요나리오스는 5 and dance 전략이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5골 이상 차이가 벌어지면 더 이상 골을 넣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들은 이것을 9연승을 하면서 지켜왔다.

그리고 미요나리오스의 전력 역시 강력해서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SK 라피트 빈, 그들의 원 소속팀 CA 리버 플레이트와 우라칸 등 강팀들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당시 콜롬비아 리그의 최강팀으로 발돋움하였다.

1951년부터 페데르네라는 미요나리오스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고 미요나리오스는 1952년에는 레알 마드리드 CF의 홈구장 에스타디오 누에보 차마르틴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4:2로 꺾기도 하였다. 이에 화가 난 레알 마드리드 CF 복수를 노렸지만 오히려 미요나리오스에 2번을 더 패배하고 말았는데, 이 2번의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구단의 역사를 뒤바꿀 한 선수에게 꽂히게 된다.

하지만 페데르네라는 리마 팩트[4]에 의해 1953년 미요나리오스를 떠나게 되었다.

2.2.2. 국가대표

페데르네라는 1940년대 라 알비셀레스테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때 주축 선수로 자리했다.

1941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아르헨티나는 페데르네라를 포함한 라 마키나의 맹활약으로 우승, 1942년 대회에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1946년 대회에서는 호세 마누엘 모레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페데르네라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는 5전 5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MVP는 페데르네라의 몫이었다.

2.3. 감독

미요나리오스 FC에서의 선수 생활을 타의로 정리하게 된 페데르네라는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감독했다.

1962년 월드컵에서 페데르네라는 콜롬비아 대표팀을 이끌고 역사상 첫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지만 콜롬비아는 1무 2패로 탈락했다. 그래도 콜롬비아는 레프 야신이 골문을 지키던 소련과 4대4로 비겨 첫 승점을 따냈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페데르네라는 CA 보카 주니어스의 감독을 맡았고 이때가 그의 감독 커리어 중 가장 성공적인 시기였다. 1964년, 페데르네라는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의 감격을 누렸지만 이듬해, 교통사고로 감독직을 잠시 비웠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페데르네라는 볼 컨트롤과 상대 수비수의 허점을 파고드는 패스에 대단한 능력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주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였지만 직접 득점보다는 동료들에게 공격 기회를 만드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폴스 나인 성향의 센터 포워드였다. 그러다 페데르네라 본인에게 기회가 포착되면 정교하고 강력한 슈팅으로 직접 득점도 노렸다.

IFFHS의 20세기 선수 랭킹에서 남미 선수 중 12위에 올랐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1.2. 국가대표

4.1.3. 개인

4.2. 감독

4.2.1. 클럽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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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카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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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1934 1938 1950 1954 1958
1962 1966 1970 1974 1978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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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 후반 선정 [2] 1934년 월드컵의 레전드 라이문도 오르시와 같은 고향이다. [3]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4] 비정상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뛰던 선수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1940년대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돈 문제 등으로 인해 구단과 선수 간의 충돌이 잦았다. 이 때문에 페데르네라를 포함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아르헨티나를 떠나 다른 나라로 많이 이적했는데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가 특히 수혜를 많이 입었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영입으로 인해 미요나리오스는 강력한 전력을 갖출 수 있었고 그들은 ballet azul-파란 발레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1951년 FIFA는 이렇게 넘어간 선수들에 대해 제동을 걸기 시작했고 이적 과정에서 여러가지 비정상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미요나리오스는 페데르네라와 디 스테파노 등 주축 선수들을 돌려줄 수 밖에 없었다. 페데르네라와 네스토르 로시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갔지만 디 스테파노는 스페인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평가는 현재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