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9:12:59

원산 총파업

파일:원산 총파업.jpg

1. 개요2. 배경3. 전개 과정

1. 개요

원산노동총파업(원산 총파업)은 원산노동자연합회가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일으킨 대규모 파업이다. 1928년 9월 원산 인근의 문평 제유공장에서 일본인 감독관의 폭행과 폭언에 반대해 일으킨 파업으로 원산노동자연합회는 일제 원산 상업회의소에 맞서 총파업을 결의하였다. 이로 인해 원산과 함경도 일본 기업들이 큰 타격을 입자 일제는 무력으로 강제 진압하였다.
원산노동총파업은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최대 규모 노동자 파업으로 노동자 계층이 항일 독립운동의 중요한 주체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노동운동이다.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4개월 동안 함경남도 원산 지역[1]의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며 벌인 대대적인 총 파업.

2. 배경

개항 이후부터 함경남도 원산 항구도시로 성장하여 많은 공장과 회사가 위치해 있었다.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그곳에 취업하여 생계를 이어갔는데 기업의 대부분이 일본인 소유여서 부당한 차별과 부당노동행위[2][3], 폭력이 빈번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단결하여 1920년대에는 여러 공장에 노동조합이 조직되었고 이 조합들이 힘을 합쳐 1925년 '원산노동연합회'[4]라는 일종의 연합체가 만들어졌으며 회장은 김경식이 선출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원산은 노동조합과 그 영향력이 특히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28년 9월 원산 인근의 문평제유공장[5]이라는 회사에서 자그마한 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의 원인은 '고다마'라는 성씨를 가진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무차별 구타를 자행한 것이었다. 노조에서는 고다마의 징계를 요구했으나 사측은 이를 묵살하고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이 근무를 거부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진통 끝에 노사 간의 협약이 체결되었으나 사측은 이마저도 무시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13일 파업을 결의하고 14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한편 원산 각지의 다른 공장에서도 파업의 조짐이 보였다.[6] 마침내 원산노동연합회는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3. 전개 과정

본격적인 총파업은 1월 22일부터 시작되었다.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이 있는 모든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일을 멈추었다. 파업 당일부터 두량노동조합과 해륙노동조합이, 23일에는 결복노동조합과 운반노동조합이, 24일에는 중사조합과 제면노동조합이, 27일에는 양복노조가, 28일에는 우차부조합과 인쇄직공조합이, 2월 1일에는 양화직공조합이 파업에 차례차례 가담하였다.[7]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의 숫자만 2200여 명에 달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지원하고자 금주를 결정하고 매일 5전의 돈을 모으기로 결정하였다.[8] 한편 파업 지도부는 파업 노동자들을 위하여 파업기금과 5개월 분의 식량을 준비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한 마음으로 총파업을 단행하자 원산의 행정과 산업은 마비되었다.

일제는 즉각 탄압에 들어갔다. 1월 20일 비상경계령이 선포되었고 함남 지역의 경찰관 1000여 명이 원산에 나타나 파업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공격했다. 일제 치하에 있었던 원산상공회의소는 21일 원산노동연합회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해 버렸고 24일부터는 일제가 군대를 원산에 주둔시켜 계엄령이라도 선포된 듯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 경찰의 수사도 시작되어 파업 지도자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일도 벌어졌다. 파업 노동자들은 해고 조치를 당했고 회사들은 새로운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공고를 냈다.

이런 극단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원산의 파업 노동자들은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규찰대'를 조직해 치안을 담당하고 회사들의 노동자 모집을 막았다. 또 유인물을 제작 및 배포하여 사람들에게 파업의 정당성을 널리 알렸다. 이러자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서도 수많은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단체들이 지원해 주었다. 신간회와 전국 각지의 단체들과 시민들이 성금을 보내 왔고 중국, 프랑스, 소련에서도 격려를 보내 왔다. 심지어 일본인 노동자들까지 파업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결국 파업은 점점 역량을 잃어 갔다. 3월 8일 일제는 회사들과 함께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조를 발족시켜 원산노동연합회를 압살하려 들었으며 원산노동연합회에도 탄압을 가해 순응적인 지도부를 출범시켰다. 이렇게 되자 3월 말 들어 파업의 성공은 불투명해졌다. 그러던 4월 1일, 일단의 노동자들이 함남노동회 등을 습격하고 관련 인물들을 폭행하는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황당한 것은 이 사건으로 현장에서 검거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즉, 내부 분란을 조장하기 위한 일제의 고의적인 행동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게다가 일제는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파업 노동자들을 향한 대대적인 탄압을 실시했다. 결국 이 일로 파업은 파국에 치달았고 4월 6일 원산노동연합회는 파업을 포기하고 4월 21일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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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6년에 지금의 북한 강원도 소속으로 개편되었다. 이북5도 기준으로는 함경남도 소속. [2]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 하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하루 보통 12시간을 초과하여 노동했고 일본인의 평균임금인 1원 16전의 절반도 못되는 수준인 평균 1일 58전을 임금으로 받았다. 유혜경. (2021). 일제시대의 노동운동과 노동운동의 성격. 경희법학, 56(4), 455-519.
원산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노동연합회가 설립된 곳이었음에도 최초 파업이 일어난 공장에서는 일본인보다 2시간 더 일하고 임금은 30% 덜 받았다고 한다.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前 KBS PD), 2019.01.10, 90년 전 원산총파업 때의 ‘5전(錢)의 정신’
[3] 당시 일본의 공장법에서는 여성 및 15세 미만인 자에 한하여 하루 12시간의 근로시간을 상한으로 하고 월 2회 휴일을 부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보호직공이라 할지라도 주 72~84시간을 합법적으로 노동시킬 수 있었다(출처: 일본 근로시간법제의 변천과 정책적 시사점 - 한국노동연구원). 따라서 대우가 더 열악했을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 시간은 그 이상이였을 것이다. [4] 이 단체는 직업별 7개의 노동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5] 이 공장은 영국 석유 회사 라이징 선(Rising Sun)의 소유였는데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산과의 거리는 별로 멀지 않았다. 여기서 생산된 기름을 콩기름 등과 구분하여 조개 기름이라고 불렀는데 로고가 조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가 바로 그 유명한 로열 더치 쉘의 전신이다. [6] 예를 들어 1929년 1월에는 부두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하다 해고당하는 일이 터졌다. [7] 파업에 참여한 일부 노조들은 시민들의 불편을 고려하여 원산노동연합회의 결정으로 얼마 후 파업을 풀었다. [8] 이 결정은 파업이 끝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