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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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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惟政| Yujeong
통도사 소장 사명당영정(泗溟堂影幀)[1]
본관 풍천 임씨[2]
출생 1544년 10월 17일
(중종 39년, 음력 1544년 10월 2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상서이동면 고라리
(現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생가로 642[3])
사망 1610년 10월 12일
(광해군 2년, 음력 1610년 8월 26일)
(향년 65세, 65년 2개월 26일 / 23,828일)
경상도 합천군 각사면 치인리 해인사
(現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병사 ( 입적)
묘소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4]
학력 <사략> 수학 ( 1551년)
황여헌의 문하 ( 1557년)
불교 출가, 신묵의 문하 ( 1559년)
선과 급제 ( 1561년)
과회 노수신의 문하 ( 1562년)
서산대사 휴정의 문하 ( 1575년)
직업 승려, 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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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풍천 임씨 정승공파[5]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공훈 알 수 없음[6]
최종
관등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속성과
속명
임응규(任應奎)
이환(離幻)
송운(松雲), 종봉(鍾峯)
당호 사명당(泗溟堂)
종교 유교 (성리학)[7], 불교[8]
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작품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부모 부: 임수성 (任守成, ? - 1559)
모: 불명 (? - 1558)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 개요2. 생애3. 저서4. 여담5. 대중매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옳은 일이 아니고는 이로움을 찾지마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어서 비추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어서 다 안다. 참으로 내 것이 아니거든, 털 한올이라도 탐하지 마라.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종이와 부채를 건네며 유정에게 글을 요구하자 써 준 글귀 중[9]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장(僧將).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으로 더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존경하는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 지칭할 때가 많다.[10] 승려의 몸으로 국난이 닥치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 조약 등 공훈을 세워 민족 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2. 생애

그대 보지 못했던가?
세거리 마을에 형 형 하면서 절하고
떠들썩한 저자에 아버지 아버지 하며 아는 것을.

또 보지 못했던가?
주리면 밥 생각 목마르면 물 생각하여
앉으나 누우나 움직이나 고요하나 항시 따르는 것을.

고래가 성내어 바닷물 모두 마셔버리면
밝은 달에 산호가지는 훤히 드러난다네.
종문[11]의 옛 곡조 어떻게 부를 건가 생각컨데
돌 조각상 한밤중 옥피리를 불리라.[12]
송원의 가장 큰 어르신인 노승에게 준 글귀

중종 39년(1544) 음력 10월 2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상서이동면 고라리(現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400번지)에서 아버지 임수성(任守成, ? ~ 1559)[13]과 어머니 달성 서씨(? ~ 1558)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명종 12년(1557) 13세 나이로 황여헌(黃汝獻)을 사사(師事)하다가 1558년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 ? ~ ?)에게 선(禪)을 받아 신묵(信默)의 가르침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불교 오의(奧義)를 깨달았다. 명종 16년(1561) 선과(禪科)[14]에 급제해 대선(大選)이 되었는데 조선 시대의 승과라는 점에서 특기할만한 일이다. 문정왕후의 영향으로 잠깐 불교가 부흥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문정왕후 시기 승과로 휴정과 유정 등 임진왜란 시기 승병을 이끈 지도자들이 대거 등장했으므로 참으로 절묘한 시점이었다. 승과 합격자들의 이후 활약만 봐도 문정왕후의 호불 정책은 적어도 본전은 건지고도 남았다. 사명당은 당시의 학자이자 시인들이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 하곡(荷谷) 허봉(許篈),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 ~ 1587) 등과 교제했다. 허봉과 교제하면서 허봉의 남동생을 제자로 들여서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이후 노수신의 문하에서 < 노자>, < 장자>, <문자』, < 열자>와 시를 배웠다.

선조 8년(1575) 32세 나이로 선종(禪宗)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에게서 가르침받아 각성했다. 이 일화에 설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져 사명대사가 자기 재주를 과시하다가 서산대사와 도술 대결을 벌인 후 이길 수 없음을 알고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야사가 나왔다. 이후 유정은 금강산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유람했다. 선조 19년(1586)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로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했다. 선조 22년(1589)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기축옥사에 죄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파일: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대사 박서보 작 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대사 (박서보 작)[15]
10월에 상남(湘南)[16]으로 의병이 건너가니
나팔소리, 깃발(旗) 그림자. 강 옆 성에 흩날린다.
칼집 속 보검은 한밤중에 울부짖나니
원컨대 요사(妖邪)를 베어 성명[17]에 보답코자….
의승병을 이끌고 평안도 순안으로 가던 유정대사가 읊은 시

선조 25년(1592), 49세 나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순안에 가서 휴정의 휘하에 활약해서 의승도대장이 되었다. 1593년 3월 선교양종판사에 제수되었고 1593년 8월 경상도 선종 총섭에 임명된 적이 있다.

유점사에 있을 때 인근 9개 고을의 백성을 구출하기도 하고 휴정이 늙어서 물러나자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체찰사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594년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하고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와 나눈 문답은 두고두고 명언으로 전해진다. 자신의 진으로 몸소 찾아온 유정에게 가토가 "조선의 보배가 무엇이오?" 하고 묻자, 사명당은 "조선의 보배는 조선 것이 아니라 일본 것이오." 하고 답했다. 가토가 의아하게 여겨 그 보배가 무엇인지 묻자, 사명당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하오." 하고 답했다. 조선에게 최악의 적장[18]인 가토의 목을 베어 바친다면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받고 부유하게 살 수 있음을 뜻하는 것. 이 대답을 듣고 가토가 놀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명언은 일본에도 널리 퍼져 유정이 포로석방을 타진하고자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이 "이 사람이 보배 이야기를 했던 그 화상(설보화상)인가?"라고 입을 모았다고. 당시 일본에서도 이 문답이 널리 퍼졌던 모양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앞에서 '네 목을 따서 바치면 여럿 팔자 고친다'는 식의 말을 하기란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하기 힘들다. 유정의 대범함이 잘 드러나는 말. 기요마사와 4번 회담을 치렀으며 선조에게 토적보민사소, 을미상소언사를 올려 전시 대처와 부국강병에 대한 의견들을 전했다.

퇴속(退俗)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 도장이나 관인)을 되돌리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島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이르러 공을 세워 종2품 가선대부(架善大夫)[19]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20]에 올랐다.

有約江湖晩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 오래되었지만)
紅塵已十年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
白鷗如有意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듯)
故故近樓前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
일본 교토의 고쇼지(興聖寺)가 소장하고 있는 한시 유묵.[21]

1604년(선조 37년)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대부(嘉義大夫) 직위인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와 어마(御馬: 임금이 타던 말)를 하사받았다. 이 과정에서 데려온 포로들이 조선의 권문세족이나 지방관리들에 의해 별 연고없는 반반한 처자는 첩/종으로삼고(남편이 있으면 남편을 없앴다), 남자는 노비로 삼는 짓이 빈번히 일어나자 선조에게 '이거 좀 막아야하지 않음?' 하고 진언했다. 선조는 송환포로를 털어먹는데 얽힌 관리가 한둘이 아니기도 했고, 하층민 송환포로따위엔 별 관심이 없어서 걍 씹었다.

그 뒤 휴정이 입적한 이듬해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에 애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병을 얻어 광해군이 국토 서쪽을 지키게 했으나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입적했다. 사명당에게 약을 지어 보내는 등 병세를 걱정하던 광해군은 입적 소식을 매우 슬퍼했다고 하니, 조선시대 숭유억불이 일상인 가운데 왕에게 이렇게까지 대우받았던 승려도 없었다. 입적 후 다비한 사리는 합천 해인사 인근의 홍제암 부도에 안치했다.

3. 저서

  • 『사명당대사집』 7권
  •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4. 여담

  •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22]가 있다. 이 비석은 한국 불교사에서 큰 의의가 있으니, 무려 2백 년 만에 세워진 고승비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고승비는 신라, 고려 때는 활발히 제작되다가 숭유억불을 채택한 조선 시대 들어서는 건국 직후인 태조 연간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고 15세기, 16세기 200여 년 동안 단 하나도 건립되지 못하였다. 이 홍제존자비를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고승비가 세워져 19세기까지 고승비 170여 개가 세워졌다.
  • 인터넷상에 흔히 선조 또는 광해군이 유정에게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설명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은 허균이 홍제존자비의 비문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올린 사시(私諡)이다. 유정이 입적하자 광해군이 안타까워하며 장례에 쓸 물품을 적당히 지원해주라고 명령하긴 했지만, 광해군이나 이후의 조선 임금이 법호나 시호를 내린 적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법명 '유정'으로만 기록했다.
  • 저서로는 문집 《사명당대사집》7권, 《분충서난록》이 있다.
  • 유정이 승려가 된 사연을 두고 희한한 야사가 하나 있다. 이야기에 따라 며느리가 자결하거나 며느리가 자결하려고 할 때 사명대사가 설득해서 며느리를 잘 돌려보냈다는 버전이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사명대사가 승려가 된 건 13세 때이니 그냥 낭설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진사로 있었을 때 아들 하나를 낳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후처와 후처가 낳은 아들을 맞아들였을 때 후처는 전처에 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불리할 것 같아서 임 진사 아들이 장가를 갈 때 종을 불러서 그 아들을 살해했다. 그 바람에 같이 자던 며느리는 신랑을 살해했다는 살해 누명을 받게 되었으며,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어느 집에서 묵을 때 그 종이 후처의 명령으로 살해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중에 임 진사 집으로 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 임 진사는 종의 집으로 찾아와 아들을 죽인 증거를 찾아낸 다음 후처와 후처 소생들을 다 곳간에 가두어서 불태워 죽인 다음에 재산의 일부는 며느리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다 사용한 뒤 인생 무상을 느껴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 외교 활동을 하던 시절 야사가 제법 많고 판본도 다양한데 사명대사를 이야기하면 이 이야기들이 가장 유명하다.
    사명당이 일본에 사절단으로 입국시 일본에서 지위가 높은 누군가가 '조선에서 오는 중이 영험하다던데 어디 시험 좀 해볼까?' 하는 생각에 항구에서 궁궐로 오는 길에 1만여 자가 넘는 글씨가 빼곡히 쓰인 병풍을 쭉 세워 놓고 사명당을 가마에 태운 다음 그 병풍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궁궐에 당도하자 그는 "이름 높은 스님께서 오셨구려! 어디 오시는 길에 병풍이 있던데 보았소?" 하고 물었는데, 사명당은 "아 그거요?" 하더니 병풍 속 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밤새도록 좔좔 읊었을 뿐 아니라 오자가 하나 난 것까지 완벽히 짚어내어 일본인들을 데꿀멍시켰다. 판본에 따라서는 줄줄 외우다가 딱 한 폭만 말하지 못하자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그런 것도 있었나? 난 못 봤소." 였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한 폭이 바람 때문에 접혀서 가려져 있었다고도 한다.



    숙소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오셨으니 대사 목욕이나 하셔야죠?" 하면서 욕탕으로 안내했다. 사명당은 욕탕에 들어서자 깜짝 놀랐는데 욕탕에 독사들이 드글드글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시험하려는 의도를 알아챈 사명당이 쥐고 있던 염주를 탕 안에 던져 넣자 염주가 무언가에 부딪쳐 탕 소리가 났고 독사들에게 닿지 않았다. 제 아무리 이라도 온열탕에서 무사할 리 없으므로 욕탕의 밑바닥 두꺼운 유리판을 덮고 그 밑으로 독사들을 풀었던 것이다. 사명당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사명당이 침소에 들어가자 방바닥이 미친 듯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사명당을 태워 죽이려는지 숙소에 을 잔뜩 땐 탓이다. 일본에는 온돌이 없어서 불을 지필 수 없다는 걸 고려해서 특별히 무쇠로 만든 방을 준비했다는 판본도 있다.[23] 사명당은 "이 놈들이 역시나…"하면서 얼음 빙() 자와 겨울 동() 자를 쓴 부적을 천장과 벽에다 붙여놓고 명상에 잠겼다. 사명당이 뛰쳐나오길 기다리던 일본인들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죽었나 싶어 방을 열었더니 방 안에 고드름이 얼어있었다.[24] 어떤 판본은 이를 보자 반대로 얼려 죽일 수 있나 싶어 방 주위에 얼음으로 둘러싸고 소금을 쳐 놨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방문을 여니 찜질방이 되었더라는 얘기도 있다. 당연히 일본인들은 KO패를 인정하고 만다.



    다른 판본에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명당을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마 위에 앉히려 하자 사명당이 결국 폭발하여 팔만대장경을 외우자 일본 전역에 태풍이 불어 대 홍수가 나버리고[25]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제서야 잘못을 빌자 일본인의 대를 끊기 위해 매년 일본인 여자 아이의 가죽 300장과 일본인 남자 아이의 불알을 석 섬 서 말씩 조공으로 바치라 해서 결국 도쿠가와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간신히 모면했다고도 전한다.[26] 이후 귀국한 사명당은 금부도사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27]
  • 상당수 내용이 < 임진록>과 겹치고 거슬러 올라가면 < 최고운전>의 흔적까지 보이는데 소설을 바탕으로 야사를 지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 심지어 유몽인이 민중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 문학 또는 구비 문학인 야담을 모은 < 어우야담>을 바탕으로 생겨난 야사도 있다.
    사명당이 절에 거주할 때, 왜군이 쳐들어와서는 행패를 부리는데, 장수와 필담을 나눴던 일화가 있다. 장수가 "죽고 싶지 않거든 이 절의 보배를 가져오라"[28] 했으나, 사명당이 "절에서 풀 뿌리와 나무 껍질로 배를 채우는 승려들에게 무슨 보물이 있겠는가?" 한 후, "그대도 학식과 견해가 있을진대, 장수된 이로서 이쯤하고 물러가라." 하고 필담을 끝낸 후, 탄복한 장수가 절 앞 귀퉁이에 "이 절에는 고승이 계시니, 왜군은 굳이 올라가 절을 뒤지지 말 것."이라 적어 그 절은 안전했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전하는 야사.
  • 서산대사를 찾아가서 도술 내기를 한 이야기가 있다. 이 도술 이야기는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찾아갔을 때 나눈 선문답이 과장되었다.

    사명당이 서산대사가 머무는 암자로 올라가며 시냇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고 있었는데 어린 상좌 한 명이 내려오며 '스승님께서 시냇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며 올라오는 분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이 때 사명당은 소매 속에 새를 한 마리 숨겨가서 서산 대사에게 '이 새는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라고 묻자 서산 대사는 '그야 당신 마음에 달린 것이지요. 하지만 살생을 하지 않으실 분이니 살아있겠지요.'라고 대답한 후 돌계단 중간에 서서 '내가 내려갈까요, 도로 올라갈까요?'라고 반문했다. 사명 대사는 한참 생각한 후 '손님을 맞으러 오셨으니 응당 저를 맞이하려 내려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서산 대사는 그 말대로 내려와 사명당을 맞아들였다. 이후 사명당은 계란 백 개를 쌓았올렸는데, 서산대사는 계란 백 개를 허공에서 거꾸로 쌓아내렸다. 사명당은 바늘 백 쌈을 가져오게 하더니 그것을 국수로 변하게 했다. 그러자 서산대사는 그 국수를 먹더니 입에서 바늘 백 쌈을 뱉어냈다. 사명당이 손을 들자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산대사가 손을 들자 떨어지던 비가 모두 거꾸로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날이 개었다. 이에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도술에 감탄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 이런 야사들의 공통점은 사명당의 성격이 괄괄하다는 것. 이야기가 와전되고 바뀌는 와중에도 인물상 자체가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이다.[29]
  • 수염이 덥수룩하지 않은 영정이 없다시피 하고 본인의 시 재마도객관에서도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수염을 많이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휴정이 머리는 깎았으면서 왜 그냥 두었냐고 묻자 머리를 깎은 건 속세를 떠났다는 뜻이고 수염을 둔 것은 대장부의 기개를 나타낸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 경상남도 밀양시에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비가 있는데 국난이 있을 때마다 땀 흘리는 비석으로 유명하다.
  • 허균의 동복 형 허봉과 친한 관계였으며, 허균은 사명당의 제자가 되어서 불교와 문학을 배웠다.
  • 한국에서 임진왜란이 전쟁으로만 기술되기 때문에 승병으로써의 사명당만 강조되지만, 실제 사명당은 불교 승려라는 위치때문에 전중,전후 강화협상과 조일 외교 복원과정에서 외교사절이자 교섭자로 상당한 활동을 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기요마사가 유정을 두고 "귀국에서는 당신만이 거짓이 없고 다른 사람은 신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든지 이에야스가 그의 사람됨에 감복했다고 하고 억불 기조가 강했던 조선보다도 일본에서의 평가가 높았다는 등 호의적으로 기술된 편이다.
  • 스승인 서산대사보다 압도적인 인지도와 조선과 일본 양국에서 인정받는 전무후무한 승려라고 볼수있고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의 경우중 하나다.

5. 대중매체

  • 1963년작 영화 사명당이 있다. 사명대사역에 배우 김진규 이외에 최남현, 허장강 등이 출연하는 당시로서는 대작이다.
  • 게임 < 임진록>에서는 지팡이에서 나오는 번개로 공격하는 장수로 낙뢰술과 기우제를 쓸 수 있다. 기우제와 지진술을 쓸 수 있는 사이쇼 조타이와 쌍벽을 이루는 스님 장수.
    임진록 2 본편에서는 곽재우와 동행[30]하는 승병장으로 묘사하였다. 신중하면서도 의로운 고승으로 연출되었다. 조선의 반격에서는 등장 미션이 적고 메인 브리핑에도 나오지 않았다.
  • 게임 <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레벨 90이 되면 자신의 스승인 서산대사로 전직한다. 제자와 달리 서산대사의 뇌격진은 엄청난 범위와 엄청난 데미지로 등장과 동시에 조선 데미지 딜러 역할을 바로 가져왔다. 소환시 대사가 "사명대사 대령했습니다."
  • 김은정의 만화 < 아스피린>에서는 단군이 다스리는 조선의 수석 마법사이자 의 조언자로 등장하는데 실존했던 사명대사에게서 이름만 빌려온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이다.[31] 단군, 사방신 등과 함께 흑막을 이루는 인물로 수석 마법사답게 강력한 마력을 지녔고 단군처럼 성격은 대체로 능글맞고 교활하다. 단군처럼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이지만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아직 젊고 잘생긴 청년의 모습이다. 전 수석 마법사는 사명당과 단군의 짜짜꿍에 의해 숙청당했는데 작중 내내 단군의 곁에 붙어다니며 그와 함께 정국을 논하거나 무엇인가 음모를 짜는 듯하다.
  • 80년대 계몽사에서 출간된 사명당 위인전에선 마성의 남자로 그려진다. 유정이 승려가 되기 전 친누이를 비롯해 총 3명의 여성이 유정의 출가를 말리지만, 유정의 뜻을 꺾지 못했고, 이후 이들도 유정의 뒤를 따라 출가해 비구니가 된다.

6. 관련 문서



[1]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0-2호이다. 그의 진영(眞影)은 많이 전해지지만 별로 외모가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 [2] 정승공파(政丞公派) 12세 응(應) 항렬. [3] 지번 주소로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400 [4] 유정의 기념관이 위치한 곳이며 이 곳에 유정의 비석이 있다. 이 곳에 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 시조 12세손 [6] 선무원종공신1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공신인 것으로 추정된다. [7] 1559년 출가 이전 [8] 1559년 출가 이후 [9] 1594년 왜군이 서생포(울산), 거제도, 창원 등에 성을 쌓으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유정이 권율 도원수의 지시에 따라서 서생포(울산)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를 찾아가서 네 차례 회담을 하였다. [10] 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송운(松雲)이라는 당호를 더 즐겨 썼다. [11] 선종 [12] "종문(선종)의 옛 곡조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서 노승이 사명당에게 선종의 가르침을 물어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이 매우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이는 일종의 선문답이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해석하자면 고래가 바닷물을 다 마실 리도 없고 돌 조각상이 옥피리를 불 리도 없으니,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 또한 그렇게 신비하게 숨겨져 있고, 또한 밝게 빛나며 아름다운 노래로 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13] 任守으로 표기된 자료도 있다. [14] 승려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 또는 임진왜란 당시에 공을 세운 승려들에게 내려 준 승려 자격증. [15] 1592년 금강산 유점사가 작품의 배경이다. [16] 평안남도(平安南道) 중화군(中和郡). 평양(平壤)에서 불과 40여 km 떨어진 곳. [17] 임금이 내린 명령 [18] 가토는 한양을 점령한 뒤 왕릉을 파헤치고 경복궁을 불태웠으며 조선의 왕자들을 포로로 잡기까지 했다. [19] 종2품 하계의 계급 이름. [20] 중추부의 동지사 보직. [21] 선조 38년(1605) 강화협상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고쇼지를 창건한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에게 남긴 것으로, 2018년 BTN불교TV가 사명대사 다큐멘터리 촬영 중에 존재를 확인하여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됐다. [22] 홍제는 사명대사의 다른 별칭이다. 널리 구제한다는 뜻. [23] 〈임진록〉에서는 구리로 만든 방에다 넣고 밖에서 불을 피워 방을 달궜다고 한다. 〈 맹꽁이 서당〉에서는 숙소에 불을 지피라고 명령받은 부하가 "맹꽁이 서당처럼 말이죠?" 라고 개그를 친다. [24] 이 일화는 〈 머털도사와 108요괴〉에서도 나온다. 내기 요괴 머털이를 오래 못 버티게 하려고 장작을 마구 쑤셔넣어서 온돌방을 데웠는데 문을 열어 보니까 방 안에 고드름이 얼어있고 머털이가 "으. 춥다. 문 닫아라." 라고 한다. 이 야사에서 몹시 추운 것을 빗대는 '사명당의 사첫방'이라는 속담이 나왔다. '사첫방'은 손님이 묵는 곳을 뜻하는 '사처'의 방이라는 말.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에 실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잘 안 쓰이는 속담이다. [25] <임진록>에서는 이 내려와 왜왕이 기대고 있던 누각을 신나게 흔들어댔다고 한다. [26] 하도 쇼킹한 스토리라서 아동용에서는 다시는 전쟁 못 일으키게 를 왕창 뜯어냈다고 바꾸었다. 왜왕이 "어떻게 그 많은 쇠를 마련하겠습니까?"라고 변명하자 "전쟁 일으키려고 만든 무기 녹이면 되지 않나?" 하고 데꿀멍을 하게 만든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어느 패전국이라도 차라리 죽을 각오로 다시 싸울지언정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아무리 조선이 일본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그 과정에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말이다. 전해지는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사명대사가 인피를 공물로 요구하자 일본의 공주 하나가 "나부터 벗겨라."라고 저주하며 자진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 조선인의 일본인에 대한 분노가 이만큼 컸다는 반증이다. [27] 판본에 따라서는 바다 위에 구리 방석을 올려놔 그 위에 앉도록 했는데 사명당은 구리 방석을 가볍게 들어 바다에 내던지고 태연하게 앉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철로 지은 집에 가두고 불을 질렀는데도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8] 일본에서는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특별한 탄압이 없었고 덕분에 불교는 쑥쑥 자라나 헤이안 시대 말 그 강력한 후지와라 씨를 억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누렸던 시라카와 덴노조차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으며 센고쿠 시대에 이르면 일개 절 하나가 아예 영주 노릇까지 할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장수가 여기도 그러려니 하고 보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을 법도 하다. 근데 일본에서 그랬으면 그 절에 소속된 승병들에게 개털렸을 거라는 게 함정. [29] 동시대인인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유정은 고승이지만 휴정에 비하면 인품이 비루하다고 나온다. [30] 실제 역사와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표현하는 장수의 숫자에 한계를 둔 당시 게임 시스템 내에서 나쁘지 않은 각색이었다. [31] 이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다 마찬가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