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0:43:10

소나타 악티카

<colbgcolor=#00008b><colcolor=#f0f8ff> 파일:SA_firstinline_logo_web-800.png
파일:Sonata Arctica 2024.jpg
결성 핀란드, 케미, 1995년 겨울
출신지 핀란드 파일:핀란드 국기.svg
장르 파워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심포닉 메탈, 멜로딕 메탈(멜로딕 헤비 락)[1]
활동 기간 1995년 ~ 1996년 (이름 없음)
1996년 ~ 1997년 (Tricky Beans)
1997년 ~ 1999년 (Tricky Means)
1999년 ~ 현재 (Sonata Arctica[2])
구성원 토니 카코 (보컬, 키보드, 1996[가입시점]~)
토미 포르티모 (드럼, 1995[가입시점]~)
헨릭 클링엔베리 (키보드, 2002~)
엘리아스 빌야넨 (기타, 2007~)
파시 카우피넨 (베이스, 2013~)
레이블 Atomic Fire Records 파일:독일 국기.svg
Avalon Label(アヴァロン・レーベル, 아발론 레이블) 파일:일본 국기.svg
1. 소개2. 커리어3. 라이브
3.1. 보컬 역량에 관해
4. 다른 밴드와의 관계5. 구성원6. 디스코그래피7. 기타

[Clearfix]

1. 소개

핀란드 파워 메탈 밴드. 1995년 겨울 핀란드 북부의 도시 케미(Kemi)에서 결성되었다.

원래는 트리키 빈스(Tricky Beans)라는 이름의 하드 록 밴드였으나 1997년부터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영향을 받아 트리키 민스(Tricky Means)로 이름을 바꾸고 파워 메탈의 길로 들어선다. 밴드의 이름은 나중에 소속 레이블의 권유에 따라 소나타 악티카(Sonata Arctica)로 바뀌었다. 데뷔 당시 토니 카코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10대라는 점에서 파워 메탈 리스너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혜성 같은 신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데뷔했다.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은 편이라 이들의 곡 중에서 Silence 앨범 수록곡 Black Sheep이 한때 리듬게임 기타프릭스& 드럼매니아 시리즈에 판권곡으로 수록되기도 했다. 라이브 앨범 3장 중 2장(Songs Of Silence, For The Sake Of Revenge)이 일본에서 한 라이브를 담은 앨범일 정도.

2010년 1월 12일 멜론 악스에서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취소된 흑역사가 있다.메탈의 불모지 한국

작곡/작사 담당인 보컬리스트 토니 카코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늑대이다보니 7집과 11집을 제외한 모든 앨범에 늑대가 주인공인 "늑대 노래"[5]가 있다. 스토커를 소재로 한 가사[6]도 많은 편. 6집까지는 암울한 가사를 가진 곡이 상당했으나 8집을 기점으로 밝고 희망찬 곡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초기 작품에선 스트라토바리우스식 멜로딕 파워 메탈이 두드러지며, 헬로윈의 계보를 잇는 모던 멜로딕 파워 메탈계에서 프로그레시브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밴드로서 당시 등장했던 수많은 양산형 프록/파워 메탈계의 원조가 되는 밴드. 파워 메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앨범은 1~4집과 8집, 11집 정도이며 그 외의 앨범은 파워 메탈적인 요소가 적고 락 또는 프로그레시브적인 경향이 많이 들어간다[7]. 그런 만큼 8집 및 11집을 제외한 후기 앨범들은 일반적인 파워 메탈을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나름의 인기가 있으나 파워 메탈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평이 많이 박하다.

2. 커리어

밴드는 1995년 겨울~1996년 초에 걸쳐 마르코 파시코스키[8]와 베이시스트 펜티 페우라가 기타리스트 야니 리마타이넨과 드러머 토미 포르티모, 보컬 토니 카코를 차례로 영입하면서 핀란드 북부의 도시 케미에서 결성되었다. 밴드의 첫 리허설은 1995년 12월 20일에 진행되었는데, 당시에는 밴드에 토니 카코와 토미 포르티모가 없었다. 1996년 5월 29일 첫 번째 공연을 선보이기 직전까지도 밴드에는 이름이 없었으나 보컬인 토니 카코가 트리키 빈스(Tricky Beans)[9]라는 이름을 떠올려냈고, 그게 밴드의 첫 이름이 되었다. 트리키 빈스 시절의 장르는 마르코 파시코스키에 따르면 메가데스와 스핀 닥터스(Spin Doctors)[10]를 섞어놓은 하드 록이었다. 토니 카코는 마르코에게서 밴드가 무슨 음악을 하는지 전해들었을 당시에 끔찍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1997년 밴드의 세 번째 데모인 Peacemaker를 발표한 후, 밴드는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음악에 반한 끝에[11] 하드 록에서 파워 메탈로 음악성을 바꾸게 된다. 그러는 김에 토니는 밴드의 이름을 이전보다 덜 우스꽝스러운 이름인 트리키 민스(Tricky Means)로 바꾸기로 했는데, 마르코는 새 이름은 도대체 뭔 의미로 지은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토니 젖꼭지 밴드보다 덜 우스꽝스러운 건 사실이긴 한데 세 번째 데모 발매 후 금전적으로 부담을 느낀 마르코는 세 번째 데모를 내는 대신 라플란드의 스키 리조트에서 공연을 돌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밴드 멤버들에게 투어를 돌며 돈을 벌자고 제안했으나 토니가 이제 막 새로운 스타일을 적용했으니 데모도 새로 내야 한다며 아직은 투어를 돌 때가 아니라고 하자 마르코는 그럼 자기는 다른 일을 하겠다고 말하고는 11월 28일 Hepolahti에 있는 학교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밴드를 떠났다. 마르코는 당시에는 라이브 공연은 물론이고 모여서 연습을 할 때조차 드물었고 밴드에 목표라는 게 없었다면서 자신의 첫 번째 탈퇴 사유를 해명했다.

마르코의 탈퇴 이후 야니는 자신의 중학교 동창이자 토미 포르티모의 이웃인 얀네 키빌라티에게 같이 밴드를 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얀네가 베이스를 빌리고 첫 연습을 함께한 후, 토니는 잘 왔다며 그를 환영해 주었고 그렇게 그의 밴드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들이 Tico Tico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네 번째 데모에는 Mary-Lou, UnOpened, 8th Commandment, FullMoon이 수록되었다. 데모 녹음 당시 야니, 토미, 토니의 엄청난 실력을 본 아흐티 코르텔라이넨(Ahti Kortelainen)은 이런 데모를 그냥 썩히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며 그들이 원한다면 자신과 연줄이 있는 Spinefarm Records에 데모와 추천서를 보내겠다고 했다. 토미가 기억하기로 그들은 "맘대로 해요(Whatever)."라고 답했고 아흐티 코르텔라이넨은 밴드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데모인 FullMoon을 Spinefarm Records로 보냈다.

밴드의 회상에 따르면 Spinefarm과의 계약은 사기 당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아흐티가 토니에게 Spinefarm에서 밴드의 곡을 컴필레이션 앨범에 싣고 싶어 한다며 당시 Spinefarm 소속 매니저였던 Ewo Pohjola의 번호를 줄지 묻자 토니는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했고 그 다음날 Ewo에게서 전화가 왔다. 3집까지 계약하는 건 어떻겠냐는 말에 토니가 즉각적으로 동의하면서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Spinefarm은 그들에게 밴드명을 Tricky Means에서 다른 것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당시 멤버들은 3년 간 지켜온 이름을 갑자기 바꾸라는 말에 당황했지만 곧 "소나타 악티카(Sonata Arctica)"가 그들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이름임을 깨닫고 수긍했다. 밴드가 Spinefarm과 계약했다는 소식을 토니에게서 전해들은 마르코는 한동안 분노했으며 잠깐이지만 밴드를 위해 연주할 기회가 돌아온다면 절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집을 발매하기 전, 밴드의 데뷔 앨범은 스트라토바리우스의 티모 톨키가 프로듀싱할 것이고 당시 나이트위시의 보컬 타르야 투루넨이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다는 루머가 기사화되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12] 밴드는 1999년 7월 15일 그들의 데뷔 싱글인 UnOpened를 발매했다. 그러나 이 싱글의 초판본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싱글에 수록된 UnOpened는 원래보다 훨씬 느렸고 그 탓에 보컬인 토니 카코의 목소리도 이상하게 들렸다. 야니가 말하길 마치 발정난 소 울음 소리(...) 같았다고.[13] 재미있는 건 일본 레이블인 Marquee에서 이 버전을 듣고도 그들과 계약하기를 원한 것.

프론트맨인 토니 카코를 제외한 모두가 10대였을 때 발매된 이들의 데뷔 앨범 Ecliptica는 스트라토바리우스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멜로디와 쏜살 같은 스피드, 그리고 청량감으로 파워 메탈씬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침 이들의 전성기인 2000년대 초반은 당시 그들의 롤 모델이었던 스트라토바리우스가 쇠퇴할 즈음이었기에 그들과 유사한 음악성을 보여준 소나타 악티카는 파워 메탈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색채가 강했던 1~2집에서는 음악성이 단조롭다든지 깊이가 없다든지 하는 비판이 늘 있어왔고, 이러한 비판들에 따라 3집부터 프로그레시브적인 요소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자신들만의 음악을 선보였다. 4집 앨범인 Reckoning Night에 이르러선 이전 앨범들보다 프로그레시브적인 면을 더욱 강화했고 퀸의 영향을 받아 오버더빙을 다양한 곡에 적용하기 시작했으나, 당시까지는 그래도 프로그레시브적 요소와 파워 메탈적 요소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여전히 '파워 메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음악성을 보였기에 많은 구 팬들은 지나치게 프로그레시브하거나 락적인 느낌이 드는 일부 트랙만을 나쁘게 바라볼 뿐 앨범 전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작품인 Unia를 기점으로 두 요소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곡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리 지나치게 어둡고 우울해졌으며, 달리는 걸 멈추고 발라드와 미드 템포 곡으로 앨범을 가득 채웠다. 전반적으로 파워 메탈스러움이 줄었고 헤비해졌으며 기타의 비중이 이전보다 감소하면서 키보드의 비중이 늘어났다. 이런 변화가 데뷔 때의 전형적인 파워 메탈의 쾌감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상당수의 구 팬들이 당황하고 실망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밴드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대신 변화를 이어갔다[밴드의입장].

6집 The Days of Grays에서는 5집의 어두움과 헤비함은 그럭저럭 유지하였으나 프로그레시브함이 조금 줄어들었고 서사성과 서정성 위주로 음악성을 선회했다. 심포닉 요소의 도입을 시도하면서 키보드의 비중이 5집보다도 늘어났으며 박력과 메탈다움이 줄어들어 또 한 번 호불호가 크게 갈리게 되었다. Unia 팬 중에서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이후 7집 Stones Grow Her Name에서는 토니가 '연주하기 쉽고, 대중들이 즐기기 쉬운 단순한 음악'에 흥미를 갖게 됨에 따라 지난 두 앨범과는 전혀 다른 단조로운 아레나 록 음악을 선보인 결과 소악이 4집까지 보여준 파워 메탈을 사랑하는 팬층과 Unia 및 TDoG 시절의 어둡고 복잡한 음악을 사랑하는 팬층 모두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고 말았다.

파워 메탈로의 회귀를 선언하며 로고도 예전의 것으로 돌려놓은 8집 Pariah's Child에서는 초창기의 멜로딕 파워 메탈과 5~7집의 음악성을 융합했는데 팬들 사이에서는 밋밋한 믹싱과 완전한 회귀라고 보기 힘든 어중간함으로 호불호가 갈렸다. 이는 2010년대에 발매된 이들 앨범에 공통적으로 제기된 문제.

Pariah's Child 발표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갑자기 뜬금없이 1집 Ecliptica를 현재의 라인업으로 재녹음하여 밴드 15주년 기념으로 10월 24일에 발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팬들은 충분히 예전 버전도 좋은데 굳이 재녹음을 해야하냐는 의문을 표했고, 차라리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새 앨범을 내는거 더 낫겠다는 둥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결국 2014년 10월에 나온 Ecliptica 재녹음 앨범은 안 좋은 녹음 상태라이브에서나 할 법한 애드립이 군데군데 섞여있다와 엉성한 믹싱, 원래보다 낮아진 음역과 속도감 등으로 대다수의 팬들에게 욕만 얻어먹었다[15]. 그나마 건질만 한 건 트리키 빈스 시절 곡을 리메이크한 일본반 보너스 트랙 "I'm Haunted" 정도.

또한 Pariah's Child 발표 이후 밴드의 역사와 일부 곡의 해석을 담은 "Sonata Arctica Book"을 내놓았다. 2015년 해당 책의 영어 버전이 e북으로 출간되었으나 2024년 현시점에선 합법적인 루트로는 구할 방법이 없어 일부 팬들이 PDF 파일을 아카이브해 두었다.

2015년 9월 12일에 이들을 위한 헌정 앨범인 "A Tribute to Sonata Arctica"가 나왔다. 헌정 앨범에 참여한 밴드로는 산드리아, Van Canto, Stream of Passion, Timeless Miracle 등이 있다. 다만 몇몇 곡을 제외하면 팬들의 평가는 많이 좋지 않은 편.

2016년 10월 7일에 9집 앨범 The Ninth Hour가 발매되었다. 각종 인터뷰에서 '따뜻한 믹싱을 원했다' '느리고 부드러운 느낌을 원했다'는 식으로 말한 만큼 이전 앨범들에 비해 느리고 말랑말랑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결과물로 나왔다. 믹싱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는 의견이 리뷰어 및 일반 팬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왔으며, 결국 참지 못한 어느 한 팬이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을 리마스터해 유튜브에 업로드하기까지 했다(...).[16] 판매량이 영 시원치 않았는지 이 앨범을 끝으로 국내에는 더 이상 라이센스반이 나오지 않고 있다.

2019년 9월 6일에 10집 Talviyö가 발매되었다. 메탈의 색채가 거의 소멸되어 락의 색채만이 남았으며, 믹싱은 더욱 악화되어 라이브를 듣는 게 차라리 나을 지경에 이르렀다. 토니 카코의 보컬 역량도 성대 결절이 의심되는 수준으로 쇠락한 상태[17]이다. 파워 메탈은 커녕 메탈이라고 하기도 힘들다보니 극소수의 팬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팬들은 이 앨범을 최악의 앨범으로 본다. 팬들은 6집 The Days of Grays부터 본격화된 키보드의 비중 증가와 줄어든 기타 솔로, 그리고 5집부터 서서히 믹싱이 부드럽고 따뜻한, 원래 하던 파워 메탈과는 거리가 먼 쪽으로 변해가는 고질적인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하고 있다.

2021년, Nuclear Blast 창업자의 새로운 회사인 Atomic Fire로 소속 레이블을 옮겼다.

2023년, 소속 레이블인 Atomic Fire가 Reigning Phoenix Music의 자회사가 되었다.

2024년 3월 8일에 파워 메탈로의 회귀를 다시 한 번 선언한 11집 Clear Cold Beyond가 발매되었다. 이전부터 계속 지적되었던 문제들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전성기 시절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의 빠른 템포의 곡을 많이 수록한 결과 많은 팬들에게서 8집과 동등한 또는 그보다 조금 나은 앨범이 나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대세인 의견은 첫 4개 앨범과는 비교할 수 없고 7번째로 좋은 앨범이라는 것. 일각에선 돈 때문에 열정 없이 만든 것 같다거나, 소악답지 않게 멜로디가 약하다거나, 작곡이 너무 단순하고 보컬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등의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팬덤 바깥이자 이번 앨범의 목표층이라 볼 수 있는 파워 메탈 서브레딧에서의 반응이 꽤 긍정적인 건 고무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국내 노래방에 있는 곡으로는 TJ미디어에 Blank File(20050)과 Full Moon(20742)이 수록되어 있으며, 금영엔터테인먼트에는 Blank File(60432), Full Moon(60934), San Sebastian(60850), Weballergy(60710)이 수록되어 있다. 부르다 목나가는건 일상다반사

3. 라이브

초창기에는 라이브 실력이 영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멤버들의 연주력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순전히 보컬인 토니 카코가 파워 메탈 밴드의 프론트맨치고 초고음을 힘겨워하는 것은 물론 라이브에서의 기복이 상당히 심했기 때문이다. EP "Successor"에 수록되어 있는 Fullmoon 라이브의 삑사리는 파워 메탈을 좀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보컬이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했던 1999년이나 키보디스트를 따로 구하면서 보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2000년에는FullMoon 부르다가 삑사리 낸 게 이 시절이긴 하지만 보컬이 연주 전체의 속도감을 줄일 정도는 아닌 역량을 보여줬다. 그러나 2001년경 보컬 컨디션이 독감 때문에[18] 전체적으로 나빠지면서 2003년부터 일부 곡의 보컬 음역대와 속도를 토니 카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는 고육지책을 택했다. #그놈의 독감만 아니었어도...

라이브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인 시점인 2004년은 토니 카코의 최전성기였다고 해도 될 만큼 라이브 실력이 뛰어난 해였다. 이 시절의 라이브 공연 중 일부는 컴필레이션 앨범 "The Collection"에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그러나 토니 카코의 전성기는 짧았다. 원래부터 목이 약했던 것인지, 아님 무리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토니 카코의 고음역대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카코는 고음을 이전보다 줄이고 자신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감정 표현과 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토니 카코와 밴드는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의 악명에 비해 준수한 라이브 실력을 보여줬으나 2018년부터 토니 카코의 보컬 역량이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며 밴드 전체의 라이브 실력이 완전히 나락가버렸다. 나머지 멤버들의 연주력 자체는 쇠퇴하지 않았지만 토니가 뭘 부르든 안 나오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내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으니 라이브 실력을 좋게 평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

밴드는 2019년, 2022년에 어쿠스틱 투어를 돌았고 토니의 목은 2022년이 되어서야 회복되었다. 목소리가 과거보다 많이 탁해졌고 음역대도 훨씬 낮아졌지만 그럼에도 Talviyö 시절에 비하면 선녀 같은 수준. 토니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혀에 힘이 너무 들어가는 바람에 성량이 줄어 고음을 내지를 수 없게 되었었다고 한다.

2024년 11집을 발매한 이후의 라이브에선 11집 트랙에 한해 음원과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나은 라이브를 선보였다. # 다만 영상의 The Cage, FullMoon 등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전성기 시절의 곡을 2000년대 초중반처럼 부르는 건 아예 불가능해 보인다. The Cage에선 무리하게 고음을 올리다가 삑사리를 내기도 한다... 2024년 유럽 투어에서 오랜만에 "My Land"를 불렀다. 2020년에 불렀던 때보다 키를 올려서 부를 만큼 목이 회복되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듯. 2025년 3월 말에 있을 일본 공연에서는 San Sebastian과 Wolf & Raven을 부를 예정이다. #키를 얼마나 낮춰놓을지 기대된다

원래 과거의 인기곡보단 신곡 위주로 트랙 리스트를 편성하는 편이긴 하나, 토니의 목에 문제가 생긴 2010년대 후반부터 목이 회복될 때까지 팬들이 좋아할 법한 파워 메탈 곡은 "FullMoon"만 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파워 메탈 곡의 비중을 줄여버리는 바람에[19] 파워 메탈 팬들 사이에서 이제 소악은 말랑한 락과 지루한 발라드만 연주하는 밴드라는 인식이 생겨버렸다. 그렇지만 11집 발매 이후의 투어에서는 이전에 비해 트랙 리스트의 구성이 상당히 괜찮아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첫 번째 라이브 앨범인 Songs Of Silence(2002)에서는 보컬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확연하게 느껴지는데 결국 나중에 토니 카코가 인터뷰에서 도쿄 라이브 당시 몸상태가 안 좋았다고 밝혔다.

2005년 도쿄 라이브를 담은 라이브 앨범인 For The Sake Of Revenge(2006)에서는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이후 연륜이 쌓이면서 과거와 같은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라이브 앨범 Live In Finland(2011)에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라이브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대신 믹싱이 조금 아쉽다

3.1. 보컬 역량에 관해

앞서 언급하였듯 보컬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의 연주력은 쇠퇴하지 않았다.


2016년까지의 토니 카코의 보컬 음역.

토니 카코는 2017년까지 최소한의 기량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9집 앨범 발매 이후 있었던 The Ninth Hour 월드 투어 후반부터 갑작스럽게 무너지고 만다.[20]

토니 카코의 역량이 급격하게 쇠퇴한 원인을 추측하기는 쉽다. 토니 카코 본인이 옛날부터 얘기했듯이, 그는 초창기에 티모 코티펠토를 따라하려고 했다. 코티펠토보다 기본적인 음역대가 살짝 낮은데도 말이다. 2012년 인터뷰에서 밝히길, 토니 카코는 1집을 비롯한 초창기에는 투어를 계속해서 다니고 나이를 먹다보면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달라지고 음역대가 좁아질 거라는 걸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원래 했어야 할 것보다 한 옥타브를 올려서 곡을 작곡했으며, 작곡 당시에도 스튜디오에서조차 부르기 버거웠다고 한다.

또한 토니 카코는 라이브 실력이 한창 물올랐던 시기에 유난히 라이브에서 창법에 스크래치를 자주 넣었다. 스크래치를 많이 넣은 것 자체도 문제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그가 살면서 보컬 레슨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그간 보여준 창법이 완전히 독학의 결과물이었다는 것. 이런 창법을 자신이 버거워하는 초고음역에서 지속하려고 하니 목이 광속으로 망가져버린 듯.인터뷰에서는 목 안 망가뜨리고 오래 노래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레슨을 받아야겠다고 하는데... 결국 다 망가지고 나서야 받았다

토니 그 자신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느끼긴 했는지, Unia부터 고음을 줄이고 서정성에 중점을 두는 등 방향성을 바꿔봤지만 효과는 미미했으며 결국 토니 카코의 목소리는 2017년을 끝으로 망가져버렸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Talviyö를 녹음할 때보다 나아진 것일 뿐이다.그냥 한 번쯤 제대로 휴식기를 가지는 게 나았을지도

2020년대에 들어선 목이 또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 적당히 힘을 뺀 채 자신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부르고 있다.

4. 다른 밴드와의 관계

상술한 것 같이, 같은 나라 출신 밴드인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인 토니 카코는 스트라토바리우스의 "Visions"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 스트라토바리우스 커버도 꽤 한 듯. 라이브 앨범 Songs Of Silence에 수록된 False News Travels Fast의 뒷부분에 스트라토바리우스 노래를 이은 적이 있으며 스트라토바리우스 및 랩소디와 함께한 투어에서 스트라토바리우스 티를 입고 Black Diamond를 부르기도 했다. # 밴드 초기 라이브에서 UnOpened의 인트로를 스트라토바리우스의 Years Go By와 믹스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많은 밴드의 곡들을 커버했다. 2000년에는 스트라토바리우스 라이브 투어의 서포트 밴드가 되어 동행하기도 했으며, 스트라토바리우스의 보컬 티모 코티펠토가 2집 Silence에 보컬로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앨범 Destiny의 보너스 트랙인 Cold winter night에는 소나타 악티카의 기타리스트가 참여 하기도 했다. 또한 소나타 악티카 3집앨범 Winterheart's Guild에는 스트라토바리우스의 키보디스트 옌스 요한슨이 참여한다. 이후 야니가 소나타 악티카를 나간 뒤 스트라토바리우스의 멤버들과 Cain's Offering으로 함께 협업하게 된다.

나이트위시와도 꽤 친한듯. 토니 카코가 나이트위시의 리더 투오마스 홀로파이넨과의 관계가 친밀하여 한 때 투오마스가 밴드의 방향성 문제로 고민할 때 함께 여행을 하면서 고민을 나누기도 했으며[21], 2004년과 2005년에는 같이 라이브 투어도 다니고 Symphony Of Angels란 이름의 한정판 라이브 앨범도 냈다.베이시스트/보컬인 마르코 히에탈라와는 Northern King라는 4인조 보컬 유닛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북유럽 메탈의 슈퍼스타 유닛이라는 명칭답게 상당히 고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토니 카코는 항상 이 자신의 음악적인 첫 사랑이며 (소악이 아닌 자신의) 음악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밴드라고 인터뷰했으며, 데빈 타운센드의 팬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5. 구성원

  • 현재 멤버
    • 토니 카코(Tony Kakko) - 리더, 보컬, 키보드[22] (1996[가입시점]~) : 1975년 5월 16일생. 밴드의 거의 모든 곡을 작사/작곡했다. 2024년 인터뷰에서 키보디스트 헨릭이 밝힌 바에 따르면 좀 유쾌한 성격이라는 듯. 1994년 Flamenco라는 밴드[24]에서 마르코 파시코스키와 인연을 맺었으며 군 문제가 해결된 이후 소나타 악티카의 전신인 트리키 빈스에 합류했다. 가장 사랑하는 밴드이자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받은 밴드는 이며 2012년 인터뷰에서는 데빈 타운센드의 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토니 카코 본인과 마르코 파시코스키의 회상에 따르면 마르코가 토니에게 처음으로 스트라토바리우스의 "Episode"를 들려줬을 때 도저히 못 듣겠다면서 극혐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Visions는 굉장히 좋아했다고. 2018년 12월 핀란드 사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2024년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를 위한 새 밴드 힘멜크라프트를 결성했다[25]. 그의 솔로 1집은 3월 1일경 일본에 선행 발매되었으며 Unia와 The Days of Grays를 사랑한 팬들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 토미 포르티모(Tommy Portimo) - 드럼 (1995~) : 1981년 9월 5일생. 1995년 말~1996년 초쯤[가입시점], 이전에 함께 밴드 활동을 해본 적이 있었던 야니 리마타이넨의 제안으로 밴드에 합류하게 됐다. Sonata Arctica Book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원래 마르코와 야니는 마르코의 동창이었던 Juha라는 이름의 드러머를 영입할 예정이었으나 그 사람이 연습에 참여할 수 없게 되면서[27] 밴드에 들어오게 됐다고. 토니와 더불어 유이하게 남아있는 원년 멤버이다.
    • 헨릭 클링엔베리(Henrik Klingenberg) - 키보드 (2002~) : 1978년 10월 21일생. 2024년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프로그레시브적인 성향을 보이는 음악을 좋아한다고 한다.
    • 엘리아스 빌야넨(Elias Viljanen) - 기타 (2007~) : 1975년 7월 8일생. 원래는 군 문제 때문에 투어에 불참하게 된 야니를 땜빵할 목적으로 영입된 기타리스트였으나 야니가 결국 밴드를 떠나게 되면서 2007년 정식 멤버로 합류하였다.
    • 파시 카우피넨(Pasi Kauppinen) - 베이스 (2013~) : 1978년 8월 19일생. 세 번째 라이브 앨범 "Live In Finland"를 믹싱한 믹싱 엔지니어 겸 베이시스트이다. 2013년 마르코 파시코스키가 밴드를 떠나기로 한 후 마르코의 추천을 받아 밴드에 들어왔다. 8집 Pariah's Child부터 어쿠스틱 앨범들까지의 앨범들을 직접 믹싱했다[28].
  • 이전 멤버
    • 펜티 페우라(Pentti Peura) - 베이스(1995-1997) : 마르코 파시코스키와 함께 트리키 빈스를 창립한 베이시스트이다. 밴드에게 필요한 연습실을 찾아주는 것으로 밴드의 결성에 나름 기여한 인물이었으나 연습에 참여하지 않는 등 밴드 활동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97년 밴드에서 쫓겨났다. 소나타 악티카 책에 수록된 야니의 회상에 따르면 음악가로서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빌리 시언이 할 법한 온갖 멋져보이는 트릭은 다 연습하면서 기본기에는 크게 신경을 안 썼다고.
    • 야니 리마타이넨(Jani Liimatainen) - 기타, 백킹 보컬 (1995-2007) : 1980년 9월 9일생. 15세였던 1995년에 마르코 파시코스키에 의해 영입됐다. 초기 소나타 악티카의 사운드를 상징하는 기타리스트이다. 그러나 작곡보단 편곡 위주로 밴드의 음악성에 관여했다보니 소나타 악티카 재직 시절 야니가 작곡 및 작사한 곡은 의외로 단 하나뿐이다[29]. 5집 당시 병역 문제를 포함해 개인적으로 겪고 있던 문제들로 다른 멤버들과 갈등을 겪은 후 소나타 악티카를 탈퇴했다[30]. 이후 여러 뮤지션과의 협업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다. 2022년, 솔로 앨범 My Father's Son을 내놓으면서 오랜만에 토니 카코와 협업했다. 2023년 10월에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야니가 투어 게스트로 소나타 악티카에 복귀할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 때, 토니 카코는 팬들이 좋아하긴 하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일축했다.
    • 마르코 파시코스키(Marko Paasikoski) - 기타(1995-1997), 베이스(1997-1998, 2000-2013) : 펜티 페우라와 함께 소나타 악티카의 전신인 트리키 빈스를 창립한 멤버이다. 1994년 Flamenco라는 밴드에서 처음으로 토니 카코를 만났으며, 소나타 악티카가 데뷔 이전 마지막 데모를 준비하던 시절에 밴드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떠났다. 그러나 밴드가 거의 자기가 탈퇴하자마자 계약 제의를 받고 데뷔해 인기를 떨치는(...) 바람에 그 선택을 매우 후회했다는 듯. 2000년경 얀네가 개인 사정으로 밴드를 떠나면서 토니의 제안을 받아 재영입되었다.[31] 4집부터 토니와 함께 믹싱 스타일에 관여하는 등 밴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2013년 자꾸 다른 멤버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 때문에 토니와 다툰 후[32] 밴드는 물론이고 아예 음악계를 떠나 마사지 치료사가 되었다. 토니가 친구로서 무척 좋아했으며 밴드를 떠난 멤버들 중 유일하게 그리워하는 인물이다.
    • 얀네 키빌라티(Janne Kivilahti) - 베이스, 백킹 보컬 (1998-2000) : 데뷔 이전 마르코 파시코스키가 밴드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퇴했을 당시 그의 공백을 채운 베이시스트. 1집 Ecliptica와 EP Successor에서 베이스를 연주했다. 토미가 회상하길 상당히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었기에 투어 활동을 전혀 즐거워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것이 문제가 되어 2000년 6월 30일 케미에서 열린 공연을 끝으로 자발적으로 밴드를 떠났다.
    • 미코 하르킨(Mikko Härkin) - 키보드 (2000-2002) : 토니 카코가 라이브에서 겪는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영입된 키보디스트. 토니 카코는 미코 하르킨이 탈퇴하고 난 후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미코가 밴드에 돌아오고 싶다고 하면 그를 받아주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 번 나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절대 돌아올 수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6. 디스코그래피

  • 1집 - Ecliptica (1999년 11월 22일)
    • 대표곡 Blank File / Replica / FullMoon
  • 2집 - Silence (2001년 6월 21일)
    • 대표곡 Weballergy / San Sebastian / Wolf & Raven

    전작보다 곡의 구성이 다채로워졌으며 더욱 세련된 멜로디를 들려준다.
  • 3집 - Winterheart's Guild (2003년 2월 21일)
    • 대표곡 The Cage / Victoria's Secret / Broken
      이 앨범부터 밴드는 자신들만의 개성을 선보이며 스트라토바리우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시작한다. 이전보다 음악이 낭만적이고 감성적으로 변화하였으며 스트라토바리우스의 키보디스트 옌스 요한슨이 게스트로 참여했다.
  • 4집 - Reckoning Night (2004년 9월 22일)
    • 대표곡 Don't Say A Word[33] / My Selene[34] / White Pearl, Black Oceans
      전성기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앨범. Sonata Arctica 공식 책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2004년 9월 22일 한국에서 최초로 발매되었다.[35] 뛰어난 완성도를 지녔지만 블라인드 가디언이 연상될 만큼 오버더빙을 많이 활용했으며 실험적인 면도 이전보다 강해진 탓에 호불호가 갈린다. 어떤 사람들은 5집 이전에 이 앨범부터 소악이 이상해지고 있었다고 여기기도 할 정도. 앨범 수록곡 중 The Boy Who Wanted To Be A Real Puppet은 5집 Unia로의 변화를 암시한 곡이라고 봐도 될 만큼 앨범에서 실험적인 면이 강하다.
  • 5집 - Unia (2007년 5월 25일)
    • 대표곡 Paid In Full / It Won't Fade[36] / Caleb
      앨범명인 Unia는 핀란드어로 '꿈들(Dreams)'이라는 뜻이며, 우니아라고 읽는다. 이 앨범은 의도적으로 파워 메탈에서 벗어나고자 한 결과물로, 프로그레시브적인 요소를 늘렸고[37] 템포를 늦춤은 물론 믹싱 또한 의도적으로 파워 메탈을 연상시킬 수 있는 요소를 배제하고 락에 가까운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밴드 공식 책에 따르면 믹싱 엔지니어에게 드럼에서 파워 메탈적인 느낌을 없애고 싶으니 드럼 소리를 부드럽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고. 이런 갑작스러운 음악성의 변화는 밴드의 소속 레이블은 물론 대다수의 팬들을 경악시켰고 소나타 악티카 팬층이 본작을 전후로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38] 이 앨범이 야니가 참여한 마지막 앨범이지만 밴드 공식 책에 실린 야니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이 앨범을 좋아하지 않으며 여기에 자신이 기여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 2024년 인터뷰에 따르면 토니 카코 본인이 기억하기론 이 앨범이 오케스트레이션의 도입을 최초로 시도한 앨범이라고 한다. #
  • 6집 - The Days of Grays (2009년 9월 16일)
    • 대표곡 Deathaura / Flag In The Ground[39] / Juliet
      키보드의 비중이 이전보다 늘어났고 서정성을 더욱 중시한 앨범. 기존 팬들이 가장 편하게 들을 수 있을 법한 곡은 Flag In The Ground로 약간은 파워 메탈 팬들의 눈치를 보면서 만든 듯한 곡이다. The Days of Grays는 굉장히 여유롭게 만들었던 Unia에 비해 데드라인에 쫓기면서 급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탓인지 전반부는 일부 팬들에게 역대 최고로 지목되곤 하는 반면 후반부는 호불호가 갈린다. 보너스 트랙 중 Nothing More는 키보디스트 헨릭이 작곡했다.
  • 7집 - Stones Grow Her Name (2012년 5월 16일)
    • 대표곡 Only The Broken Hearts Make You Beautiful[40] / Somewhere Close To You[41] / I Have A Right[42]
      유일하게 가사에 늑대나 늑대인간을 연상시키는 가사가 한 줄도 없는 앨범. 토니 카코가 밝힌 바에 따르면 5집과 6집 같은 음악은 작곡하기 즐겁긴 하지만 자신들이 라이브에서 연주하기 힘들며 대중성도 부족하기에 좀 더 단순하고 대중적인 락 음악을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과거 밴드 멤버들이 5~6집의 주인공이 키보드라면 이 앨범의 주인공은 기타라고 밝혔듯 이전보다 기타의 비중이 늘었긴 하나 팝적인 면이 너무 강해 The Ninth Hour, Talviyö와 함께 최악의 앨범으로 뽑힐 때가 많다. 그래도 기타 톤이나 녹음 상태는 좋아하는 사람이 꽤 있는 편.
  • 8집 - Pariah's Child (2014년 3월 28일)
    • 대표곡 - The Wolves Die Young / Cloud Factory / Blood
      본 앨범은 밴드가 파워 메탈로 회귀했다는 식의 홍보가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으로, 이 앨범부터 밴드는 다시 예전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평가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만9집, 10집이 각각 문제점이 많아서 재평가 받은 거다 초창기 팬들이 기대하던 1, 2집 시절의 스트라토바리우스식 파워 메탈이 아니라 5~7집처럼 여러 실험적인 사운드를 파워 메탈로 재해석한 앨범이라 호불호가 갈린다. 그럼에도 11집이 나오기 전까지는 대다수의 파워 메탈 팬들이 본작을 "참고 들어줄 수 있었던 마지막 앨범"으로 꼽았다. 이 작품부터 어쿠스틱 앨범까지 베이시스트 파시 카우피넨이 믹싱을 담당하였다.[43]
  • 9집 - The Ninth Hour (2016년 10월 7일)
    • 대표곡 - Closer To An Animal / Till Death's Done Us Apart / White Pearl, Black Oceans II
      토니 카코가 8집 발매 이후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가 감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고생을 했던 앨범으로, 6집에 이어 또 한 번 데드라인에 쫓기며 급하게 만들어졌다. 믹싱이 이상한 것도 바로 그 이유. 8집에 비해 작곡 퀄리티는 높아졌으나 발라드 곡이 이전보다 많아져 늘어지고 말랑한 느낌을 준다. 처음 샘플이 유출되었을 땐 팬들에게서 '기타가 들린다'는 이유로(...)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실제 결과물은... 이 앨범의 일본반 보너스 트랙인 "The Elephant"는 토니가 20분만에 만든 곡이다. #
  • 10집 - Talviyö (2019년 9월 6일)
    • 대표곡 - Whirlwind / Cold / Storm The Armada
      앨범명인 Talviyö는 핀란드어로 '겨울밤'이라는 뜻이며, 탈비위외에 가깝게 발음된다. 엘리아스가 발음하는 걸 직접 들어보자. 길었던 The Ninth Hour 월드 투어 후반부터 심각한 이상이 생긴 토니 카코의 목 상태에 맞춰 곡을 만들다보니 탄생한 괴작. 대다수의 곡이 너무 늘어지고, 말랑한 하드 록에 가깝다. 9집까지만 해도 비음이 좀 섞인 미성을 지녔던 토니는 이 앨범에서 아예 코맹맹이가 되어버렸으며 음이 조금만 올라가도 목소리가 갈라진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9집에서 지적된 믹싱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44] 2024년 인터뷰에서 토니 카코는 이 앨범을 보컬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녹음할 걸 그랬다며 후회하는 한편 자신은 이 앨범의 수록곡들을 좋아하고 기회가 된다면 파워 메탈로 리메이크해 재녹음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 11집 - Clear Cold Beyond (2024년 3월 8일)
    • 대표곡 - First In Line / California / Dark Empath
      본 앨범은 8집에 이어 또 한 번 이번엔 정말로 파워 메탈로 회귀하겠다고 선언한 앨범으로 특이사항으로는 1집부터 7집까지의 믹싱을 맡았던 미코 카밀라(Mikko Karmila)가 다시 믹싱 엔지니어로 돌아왔다는 것과 토니의 목소리가 Talviyö 시절에 비해 많이 회복되었다는 것이 있겠다[45]. 결과적으로는 그동안 보여준 모든 스타일을 초창기의 빠른 파워 메탈로 풀어낸 것에 가까운 결과물이 나왔다. 호불호가 조금 갈리긴 하지만 아무리 못해도 8집과 동급 또는 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은 되고[46]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첫 걸음으로 삼기에는 충분한 앨범이라는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EP
  • Successor (2000년 10월 18일)
  • Orientation (2001년 2월 22일)
  • Takatalvi (2003년 11월 5일)
  • Don't Say a Word (2004년 8월 30일)

라이브 앨범
  • Songs Of Silence - Live In Tokyo (2002년 11월 20일)[47]
  • For The Sake Of Revenge (2006년 5월 12일)[48]
  • Live In Finland (2011년 11월 11일)

컴필레이션 앨범
  • The End of This Chapter (2005년 8월 30일)
  • The Collection (2006년 11월 15일)

재녹음 앨범
  • Ecliptica - Revisited: 15th Anniversary Edition (2014년 10월 24일)

어쿠스틱 앨범
  • Acoustic Adventures – Volume One (2022년 1월 21일)
  • Acoustic Adventures – Volume Two (2022년 9월 30일)

7. 기타

  • 8집 이후 출간된 Sonata Arctica Book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1집 Ecliptica는 원래 당시 소속 레이블이었던 Spinefarm Records이 "My Land"라는 이름으로 발매할 예정이었으며 앨범 커버에 프린팅까지 해둔 상태였으나 밴드 멤버들의 격렬한 반대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49] Talviyö는 핀란드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발음하려고 애쓰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는 듯. #
  • 2집은 원래 더 긴 이름을 붙일 예정이었으나 2집을 준비할 당시 토니 카코의 여자친구(현 부인)가 Silence를 추천하면서 그것이 앨범명으로 결정되었다.
  • 7집까지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던 마르코 파시코스키가 어린 시절 존경했던 인물은 카이 한센이다. 안타깝게도 후술할 이유로 환상이 깨져버렸다
  • 토미 포르티모와 마르코 파시코스키가 소나타 악티카의 공식 책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2001년 그들이 감마레이의 유럽 투어에 서포트 밴드로 참여했을 때 드러머 대니얼 짐머만을 제외한 모두가 서포트 밴드들을 무시했고 사운드체킹을 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공연에서 소나타 악티카의 차례가 끝난 후 많은 수의 관객이 감마레이의 공연을 보지 않고 떠나버리는 등 감마레이보다 소나타 악티카의 인기가 더 높은 상황이 벌어지자 카이 한센이 특히 화가 난 티를 많이 냈으며 안 그래도 적은 사운드체킹 시간을 더 줄여버렸다고.
  • 컨셉 앨범은 없지만 곡들 간 스토리가 이어지거나 똑같은 등장인물과 테마를 공유하는 곡들이 있다. 전자는 White Pearl, Black Oceans(4집) - White Pearl, Black Oceans II(9집)가 대표적이며 , 후자는 2집의 'The End of This Chapter'부터 시작된 스토커 테마의 케일럽(Caleb) 사가[50]가 있다.
  • 소나타 악티카의 4집까지를 좋아하는 팬들은 5집을 기점으로 파워 메탈의 색채를 잃고 있다고 불만을 품었고 10집에 와선 완전히 무너져버린 모습에 실망하고 있다. Sonata Arctica Book 등에서 토니 카코가 밝힌 바에 따르면 파워 메탈은 작곡하기가 너무 쉬워서(음악이 단순해서) 흥미가 떨어지기에 방향성을 바꾸고 싶다는 입장이라 앞으로도 파워 메탈 밴드로 돌아올 가능성은 상당히 요원해 보였으나... 8집과 11집에서 초창기로 회귀할 움직임을 조금이나마 보였으며, 11집의 발매를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들에서 여러 멤버들이 오랜만에 빠른 곡을 연주하는 게 즐거웠다고 밝혔고 토니 카코 본인도 다음 앨범도 11집처럼 파워 메탈일 것이라는 식의 발언을 한 적이 있기에 어쩌면 다시 기대를 가져봐도 좋을지도 모른다.[51] 다만 방향성은 파워 메탈로 돌아갈 수 있어도 카코의 목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절망적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소나타 악티카가 자신들의 음악성을 "빠르게 편곡된 하드 록" 내지는 "멜로딕 메탈", "멜로딕 헤비 락" 등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들의 선배 밴드 모터헤드, 특히 선배 메탈 음악인 레미 킬미스터의 입장과 비슷한데, 레미와 모터헤드는 초지일관 전설이 된 반면 토니와 소나타 악티카는 기존의 멜로딕 파워 메탈에서 파워 메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하고 우울한 메탈로, 이후에는 힘 빠진 말랑말랑한 락으로 변질되며 팬층을 분열시키고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1] 2~3집 시절에 토니 카코가 인터뷰에서 자신들을 파워 메탈 밴드보단 멜로딕 메탈 밴드로 생각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2005년에는 자신들의 음악은 파워 메탈보단 빠르게 편곡된 하드 록 또는 팝 록 메탈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밴드는 자신들의 음악을 멜로딕 록이라고 부른다고 말했으며 의도적으로 락에 가까운 음악을 했던 7집 시절에는 자신이 정할 수 있다면 밴드의 장르를 멜로딕 헤비 락이라고 하고 싶다고 했다. 8집에 이어 또 다시 파워 메탈로 회귀한 11집 발매를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드래곤포스가 하는 '엄청나게 빠르고 격렬한' 파워 메탈에 비하면 자신들은 옛날부터 파워 메탈이 아닌 축에 속했으며 토니 본인은 소나타 악티카를 파워 메탈 밴드보단 멜로딕 메탈 밴드에 가깝게 여긴다는 것을 밝혔다. [2] 국내 라이센스반에선 주로 "소나타 아티카"로 표기되었으나 실제 발음은 소나타 알티카 내지는 악티카에 가깝다. [가입시점] 토니 카코는 밴드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에서 자신이 1996년에 합류한 원년 멤버라고 밝혔다. 이상한 건 8집 시절 출간된 책에서 토니와 같은 시기에 들어왔다고 언급된 토미가 자신은 1995년 11월쯤 밴드에 합류했다고 말했다는 것. 아마 '합류 의사를 표한 게' 아직 병역 의무를 수행중이던 1995년 11월~12월쯤이고 실질적으로 합류한 시점은 전역한 후인 1996년인 게 아닌가 싶다. 토미 포르티모는 자신이 1995년 11월쯤 합류했다고 하나, 8집 시절에 출간된 책에는 1995년 12월 20일에 있었던 밴드의 첫 연습은 보컬과 드러머가 없는 상태로 진행됐으며 토미가 토니 카코와 같은 시기에 합류했다고 적혀있다. 토미의 기억과 Sonata Arctica Book에 적힌 정보 모두 오류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토미 포르티모가 합류 의사를 표한 게 1995년 11월이고 실질적으로 밴드의 일원이 된 건 1995년 12월 말 ~ 1996년 초인 듯. [가입시점] [5] 1집 FullMoon, 2집 Wolf & Raven, 3집 The Cage, 4집 Ain't Your Fairytale, 5집 It Won't Fade(토니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곡은 야니와의 불화를 소재로 한 곡이기도 하다.) 및 The Vice, 6집 The Last Amazing Grays 및 In My Eyes You're A Giant, 8집 Blood, 9집 Among the Shooting Stars, 10집 Message From the Sun 및 The Raven Still Flies With You. [6] "Letter To Dana", "Shy", "The End of This Chapter", "Don't Say a Word" 등. 2024년 싱글 "Dark Empath" 발표 당시 토니 본인이 밝힌 것에 따르면 작사하기 재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7] 다만 토니 카코를 비롯한 멤버들은 자신들의 음악은 파워 메탈도, 프로그레시브 메탈도 아닌 멜로딕 메탈(멜로딕 헤비 락) 내지는 빠르게 편곡한 하드 록이라고 생각하였듯, 항상 멜로디와 서정성이 강조된 하드 록을 작곡하되 편곡의 중심을 파워 메탈에서 프로그레시브 메탈로, 프록에서 (어찌 보면 진짜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드 록으로 변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작곡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편곡 방식이 전성기 시절과 달라지고 토니 카코 본인이 점점 늙어가면서 음역대가 줄어듦은 물론 취향이 밝고 부드러운 쪽으로 변해감에 따라 대부분의 팬들에게 약빨이 먹히지 않게 된 것이다. [8] 당시엔 기타리스트였다. [9] 2001년 토니 카코는 인터뷰에서 과거 밴드의 자작곡이었던 "Tricky Beans"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했으나 8집 시절에 출간된 책에서 마르코 파시코스키가 한 말에 따르면 토니의 유두(...)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토니가 자신의 젖꼭지를 잡으면서 Tricky Beans라고 했다고... [10]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이다. [11] 밴드의 프론트맨인 토니 카코는 본래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Visions를 듣고 마음을 바꿨다. [12] 토미 포르티모에 따르면 타르야 투루넨이 게스트로 참여할 곡은 "My Land"였다. 다만 얘기만 나왔을 뿐 확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사를 본 토미의 친구들이 타르야에게 친구의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해 주기로 해서 너무 기쁘다고 하자 타르야가 당황했다고. [13]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나 관련자들이 추측하기론 아마도 샘플 레이트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이 실수 덕분에 UnOpened의 초판본은 수집가들이 구하려고 애쓰는 물건이 되었다. [밴드의입장] 토니 카코의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들이 30줄일 당시 과도하게 길었던 Reckoning Night 투어 이후로 모든 힘을 다 써버린 것처럼 느껴져 더 이상 20대처럼 젊었을 때 체력을 갖고 미친 듯이 노래할 수 없겠다고 느껴 음역을 낮췄다고 한다. 7집 시절인 2012년 인터뷰에서는 한 가지 음악만 하는 것을 지루하게 느끼기 때문에 계속 노선을 바꾸고 있는 것이라는 걸 똑같은 음악만 계속 하는 밴드는 쉽게 질린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밝혔고 9집 시절의 인터뷰에선 자신들만의 음악을 하는 대신 스트라토바리우스를 따라하려고 한 게 가장 후회스럽다는 걸 암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시엔 그렇게 '뇌를 빼놓고 만든 것 같은 빠른 파워 메탈'을 작곡하는 게 재미있었다는 듯. [15] 다만 소나타 악티카 본인들에게는 정말 억울한 비판인데, 자기들과 계약한 일본 쪽 레이블 'アヴァロン・レーベル(아발론 레이블, Avalon Label)'이 원곡들과 똑같은 연주를 해서 리메이크한 곡을 재발매하라고 강권해서 밴드에서 재해석할 권한도 없이 발매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80년 이후 쇠퇴해서 유럽에서조차 부업을 해야 밥벌이를 해먹고 살 정도의 밴드가 대부분이 되어버린 메탈 음악 시장의 음악인들이 일거리를 거절할 여지가 부족한 환경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6] 해당 팬 리마스터 버전은 2024년 기준으로 대부분이 저작권 문제로 내려간 상태다. [17] 사실 보컬 역량은 The Ninth Hour 월드 투어 후반부터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었는데, Talviyö 이전에는 그게 수면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18] 우습게 보면 안 되는 것이, 독감은 일반 감기와 달리 호흡기에 지대한 손상을 입히며, 위산 역류, 구토, 호흡기 질환 등의 몸이나 목이 아픈 것은 성대에 무리가 가게 하는 치명적인 질환이 된다. 당장 독감, 성대, 보컬에 대한 단어를 영어로 연관지어 검색하면 독감, 위산 역류, 구토가 치명적이라고 수도 없이 강조하는 자료가 대부분이다. [19] FullMoon 외에 My Land나 Black Sheep을 불렀던 때도 있긴 하지만 목 상태가 엉망이라 제대로 못 불렀다. [20] 다만 토니 카코의 보컬 역량이 쇠퇴하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성기 시절에 소나타 악티카에서 보여주었던 고음 위주의 파워 메탈 기준에서고, 카코 본인의 솔로 프로젝트인 힘멜크라프트의 곡들처럼 중저음이 중심이 될 때는 여전히 준수한 모습을 보인다. [21] 이 때 투오마스는 기타리스트 엠푸의 불만과 베이시스트 사미 반스카의 성실성 문제로 인해 밴드 활동을 힘들어했으며 Wishmaster 투어를 마치고 나이트위시를 해체할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니 카코와 여행을 다녀온 뒤 밴드 활동을 계속하기로 다짐하여 베이시스트를 마르코 히에탈라로 교체하고 보다 헤비한 사운드로 Century Child를 발매하여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22] 1집 시절에는 라이브 공연을 할 때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으나 미코 하르킨의 합류를 기점으로 라이브에선 키보드를 연주하지 않는다. [가입시점] [24] 이때부터 노래다운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작곡가로서의 자신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고. [25] 원래는 힘멜크라프트가 자신의 밴드라는 것을 비밀로 하고 싶어 했으나 레이블에서 그러면 앨범을 홍보할 수가 없다며 설득한 끝에 자신의 이름만은 공개하기로 했다. [가입시점] [27] 엄마가 비싼 드럼 세트가 망가질까봐 그걸 연습실로 옮기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28] 단, 10집 Talviyö와 어쿠스틱 어드벤처 1 & 2는 파시 혼자서 믹싱한 게 아니며 Mikko Tegelman과 협업했다. [29] 4집의 "My Selene". [30] 본인의 성격이 원래 말수가 적고 개인사를 털어놓고 싶어하지 않는 성격이다보니 다른 멤버들이 그를 도우려했을 때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리는 등 다른 멤버들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 성격은 탈퇴 이후 활동에서도 발목을 잡아 2024년 2월, 소악에서와 똑같은 이유로 Insomnium에서 방출당하고 말았으며 아네트 올존과의 The Dark Element 3집 제작에도 문제가 생겼다. 아네트 올존은 3집 제작에 긍정적이지만 야니가 연락을 아예 받아주지 않고 있다. [31] 토미의 회상에 따르면 재결합을 제안했을 당시 마르코가 '그때(밴드를 탈퇴한 때)는 내가 미쳤었나보다'라고 했다고. [32] 마르코가 호텔 로비에 1시간 일찍 왔음에도 그냥 자기 방으로 가버려 다른 멤버들을 약 25분간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길 거부한 순간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됐다. 당시 마르코가 상습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환멸감을 느낀 토니는 진심으로 소악을 떠나는 것을 고려하며 마르코에게 '네가 밴드를 나가는 게 맞겠냐, 아니면 내가 나가는 게 맞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33] 2집의 "The End Of This Chapter"의 후속곡으로 스토커 테마의 케일럽 사가(Caleb Saga)의 일부이다. Sonata Arctica 공식 책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야니가 소악 역사상 최고의 노래라고 생각하는 곡이다. 토니는 4집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악의 대표적인 명곡 중 하나로 생각한다고. [34] 야니가 소나타 악티카에서 작곡 및 작사한 유일한 곡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 셀레네와 그녀의 연인 엔디미온에 대한 곡이다. [35] "The EP("Don't Say a Word") was also released in Japan September 22, at the same time when Korea was first to release the Reckoning Night album." [36] 토니 카코가 인터뷰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5집의 늑대 노래이자 야니 리마타이넨을 저격하는과의 일에 대한 곡이다. # [37] 덕분에 이 앨범을 계기로 프로그레시브 메탈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 앨범은 프로그레시브 메탈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Sonata Arctica Book에서 야니가 지적했듯이 곡들 간의 유기성이 떨어지며, 세세한 부분들이 프로그레시브 메탈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기 때문. 그렇다보니 Prog Archives에 등재 요청이 두 번 올라왔을 때 한 번은 프록의 영향을 받은 앨범일지는 몰라도 프록 메탈 앨범이라기엔 모든 곡이 100% 프록인 게 아니라서 거절당했고, 또 한 번은 5명 중 세 명의 반대로 "이건 프로그레시브 메탈이 아니다"라는 결론과 함께 기각되었다. [38] 토니 카코도 이 앨범을 통해 음악성을 바꾸면서 더욱 큰 밴드가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린 게 후회스럽기는 한지 2024년에 Unia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앨범을 내기보단 그냥 휴식기를 가지면서 솔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게 더 현명한 행동이지 않았을까 싶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 [39] 트리키 빈스 시절 데모 곡 "BlackOut"을 리메이크한 곡이다. 원곡인 BlackOut은 정전 탓에 텔레비전이 꺼지는 바람에 좋아하는 여성이 출연하는 TV 쇼를 못 보게 되자 절규하는(...) 내용이다. [40] 밴드 공식 책에 담긴 내용에 따르면 원래는 헤비사우르스에게 줄 생각으로 만든 곡이었으며 가사도 익룡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41] 8집의 'Take One Breath', 9집의 'Fly, Navigate, Communicate'와 더불어 원래는 토니의 솔로 앨범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다. 소나타 악티카의 곡들 중 손 꼽히게 헤비한 곡이다. [42] 처음에는 보너스 트랙일 예정이었으며 빠른 속도의 파워 메탈 곡이었으나 나중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꿨다고 한다. [43] 파시는 이전부터 믹싱 엔지니어로서도 활동했던 인물로 2011년 라이브 앨범 "Live In Finland"의 믹싱을 담당한 것이 바로 그이다. 다만 파시의 믹싱 스타일은 불호 의견이 많았는데, 밴드 멤버들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미코 카밀라 시절에 비해 기타가 잘 들리지 않는다거나 보컬 트랙과 반주가 잘 어우러지지 못하고 따로 노는 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44] 이 탓에 말랑한 락이라는 점에서 결이 비슷한 9집을 좋아했던 사람들조차 10집을 싫어하며 그나마 Talviyö를 좋아하는 일부 팬들은 언젠가 믹싱을 새로 해 주거나 믹싱 연습용 스템을 공식적으로 제공해주길 바라고 있다. [45] 11집 발매를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 Talviyö 녹음 당시 보컬에 많은 문제를 겪고 있었다는 걸 밝혔는데, 성대 결절 같은 질병이 있었던 건 아니고 혀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성량이 부족해지고 고음을 내기가 어려운 문제가 생겼었다고 한다. # [46] 본작을 고평가하는 사람은 4집 이후에 나온 앨범 중 가장 낫다고 하고, 저평가하는 경우 음악이 너무 단순해져버렸다며 토니 카코의 솔로 프로젝트인 힘멜크라프트 1집이 훨씬 낫다고 한다. 주류 의견은 전성기 시절만은 못하지만 8집보단 낫다는 거다. [47] 아시아판 앨범 커버에 욱일기가 그려져있어 음악 외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일을 만들지 않던 소나타 악티카의 유일한 오점으로 여겨진다. [48] DVD판은 3월 31일 발매. [49] 토니 카코의 말에 따르면 앨범 내 수록곡의 이름이 아닌 것을 앨범명으로 삼고 싶었기에 직접 사전을 뒤져가면서 흥미로운 단어를 찾았다고 한다. 덕분에 "소나타 악티카 이클립티카"라는 발음하기 까다로운 이름을 지을 수 있었다고. [50] The End of This Chapter(2집), Don't Say a Word(4집), Caleb(5집), Juliet(6집), Till Death's Done Us Apart(9집), The Last of the Lambs(10집), Dark Empath(11집)가 여기에 속한다. 케일럽 사가는 인터뷰에서 토니가 13일의 금요일 시리즈 같은 옴니버스물에 가깝다고 밝힌 적이 있으며 11집의 세 번째 싱글인 "Dark Empath" 공개 당시에도 사건 발생순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똑같은 스토커 테마를 공유하는 곡들이라고 말했다. [51] 애초에 10집을 만들기 전부터 파워 메탈로 회귀할 마음은 있었다고 했다. 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시도조차 못해봤을 뿐... 무엇보다 그동안 소나타 악티카가 방황했던 건 토니 본인의 창작욕을 배출할 곳이 소악밖에 없었기 때문이니, 힘멜크라프트라는 파워 메탈 팬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아도 되는 배출구가 생긴 현재에는 정말로 상황이 다를 수도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