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04:22:15

상해시대도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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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시대도정부
上海市大道政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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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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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1938년
<rowcolor=#e80000>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중화민국 중화민국 유신정부
<colbgcolor=#ffd509><colcolor=#e80000> 수도 푸둥[1]
정치 체제 공화제, 자치정부
국가원수 시장(쑤시원(蘇錫文))
통화 일본 엔
1. 소개2. 배경3. 역사4. 군대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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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일전쟁의 전투 중 하나인 제2차 상하이 사변으로 인해 건국되어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존재했던 일본의 괴뢰 정부.

2. 배경

1937년, 제2차 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 중국과의 빠른 외교적 해법을 강구할 것을 주문했다. 더욱이 일본군 대본영 또한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 관동군이 행했던 만주국 건국과 같은 일을 벌이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우선 중지나 방면군에게 점령한 상하이 지역의 통치와 지방의 세부 행정을 맡기기 위해 우호적인 지방 당국을 설립할 것을 주문하였다.

3. 역사

1937년 11월, 상하이의 권력을 쥐기 위해 점령 일본군에게 친일 중국인 유력자들이 접근해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예전 중국국립은행의 간부이자 전 상하이 상공회의 회장이었던 푸샤오안(傅筱庵)이 일본군에 협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푸샤오안은 그 자신이 상하이 정권을 이끌 생각이 없었기에 그 정권의 수장에 지치대학의 교수인 쑤시원(蘇錫文)을 추천하기에 이른다.[2] 그 이후 일본은 쑤시원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수립에 착수한다.

그 해 12월 5일, 쑤시원을 시장으로 하여 상하이 시 다다오 정부가 출범했다. 새로운 상하이 시 당국은 출범하자마자 빠르게 도시 공공서비스의 복구에 착수했다. 장쑤성의 전직 공안 간부 출신인 장쑹린을 경무국장에 앉히고, 그의 지도 아래 경찰 행정을 재건했다. 재정은 중국을 공격하는 일본군의 전선지역 그리고 기타 중국 점령지역 등지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수출입에 관세를 매겨 충당했다. 쑤는 일본군의 요청으로 만철에서 보낸 일본인 전문가들을 고문으로 하여 상하이의 기타 행정을 빠르게 복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와 그의 정부는 일본 정치가들 사이에서 골칫거리로 전락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정부가 범죄자, 종교인, 마약상들의 도움을 지대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쑤의 측근들이 마약상, 범죄자, 종교인들로 채워지다 보니 시의 행정 사업에 투입된 자금은 횡령되기 일쑤였고, 그것은 일본군 당국의 상하이 정부에 대한 선전에도 차질을 빗게 만들었다. 일본군은 일본인 고문만으로는 역부족인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 조치로서 12월 말엽, 북중국 점령지에서 친일 협력자인 왕지후이를 데려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경찰의 업무를 제외한 도시의 행정 사업은 마비되기 일쑤였다. 이런 와중에 1938년 3월 량홍즈가 일본이 점령한 난징에서 유신정부의 수립을 선언하고 상하이 시 다다오 정부가 유신정부에 흡수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5월 3일 다다오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신정부에 합병되었음을 선언하며 소멸하였다.

4. 군대

다다오 정부군은 대부분이 수비대 병력이다.

5. 기타

푸샤오안은 지난날 장제스와의 갈등으로 투옥된 인물로서, 그 일로 정치적, 개인적 원한을 장제스에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석방된 이후, 만주국으로 도망쳐 장제스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몇년동안을 그곳에서 일본군의 보호하에 머물렀던 인물이다. 훗날 그는 중화민국 유신정부, 뒤이어 왕징웨이 정권 하에서 상하이 시장을 역임하다가 저우포하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푸샤오안은 1940년 10월 10일 국민당의 지시를 받은 하인 주성위안(朱升源)에 암살되었다.

쑤시원은 상하이 조야에 불교 도교의 혼합에 관련된 연구를 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특성은 그가 다다오 정부(대도정부)라는 정부명을 지은 것, 국기를 만들 때 노란색을 바탕색에 넣고 불교와의 관련성을 부각한 것, 도교의 태극을 넣고 도교의 색채를 드러낸 것으로 반영되었다. 쑤시원은 참으로 운 좋게도 1945년 병사했다. 살아남았다면 반드시 한간으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6. 관련 문서



[1] 상하이시 푸둥신구. [2] 본래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쑨원 시절 재정 쪽에서 커리어를 쌓은 인물이었으나 대만으로 넘어가 일본인들과 친분을 쌓은 대표적인 친일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