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3-18 23:46:40

사명대사기적비


파일:pan001658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jpg
1912년 사명대사기적비 모습
1. 소개2. 비문의 내용3. 비석에 대해4. 전문
4.1. 원문4.2. 해석문
5. 관련 문서

1. 소개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편(乾鳳寺四溟大師紀蹟碑片)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승병장僧兵將으로 활동한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의 생애가 기록된 비편이다.
원래의 비석은 1800년에 세워졌는데, 일제강점기 때 파손되었다. 현재는 4개의 비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남아 있는 비편에는 ‘유명조선국사명대사기적비명有明朝鮮國泗溟大師紀績碑銘’이라는 전액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찬자인 남공철南公轍(1760-1840)의 『금릉집金陵集』 권16 「비명碑銘」에도 ‘건봉선원사명대사기적비명乾鳳禪院泗溟大師紀蹟碑銘’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에도 사명대사기적비의 전문全文이 수록되었다. 이를 토대로 2017년 11월에 사명대사기적비를 새로 제작하여 기존의 비편 옆에 세웠다.

-출처:2018 금석문 탁본조사 보고서-

2. 비문의 내용

대사의 법명法名은 유정惟政이며, 속성은 풍천 임씨이다. 밀주密州(현재의 경상남도 밀양) 사람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는데, 중덕中德을 따라 건봉사 낙서암樂西庵에서 삭발하였다. 서산대사 휴정休靜(1520-1604)에게 사사하여 『연화경蓮華經』을 배웠다.
만력萬曆 20년(1592)에 왜구倭寇가 조선을 노략질하였다. 휴정은 묘향산妙香山에서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1598)과 함께 평양平壤에서 왜병倭兵을 대파하였다. 소경왕(선조, 재위 1567-1608)이행재소行在所로 휴정을 불러서 만나보았다. 선조가 친히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하사하고 휴정에게 명하여 팔도도총섭의병장八道都摠攝義兵將으로 삼았다. 임금의 수레가 환도還都하는 데에 미쳐서 정사를 잡은 대신들 중에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휴정은 임금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늙어서 장차 죽을 것이니 병사兵事를 제자 유정에게 맡기고 해골을 받아 돌아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그의 뜻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유정을 역마驛馬에 태우고 경사京師에 이르도록 명하고 마침내 대중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길, “만이蠻夷는 본래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입니다. 유정을 보내어 강화를 성사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였다. 대사에게 정1품의 관계를 하사하고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보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이르자 마침내 삼도三塗와 오계五戒로써 일본의 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설명하니 그 말이 모두 청정淸淨함과 죽음을 없애는 가르침이었다. 강화가 성립되어 장차 돌아가려고 하니 일본은 압송한 조선의 남녀 3천여 명을 풀어주었다. 또한 신라 자장법사(590-658)가 당나라에 들어가 얻은 여래아如來牙 10매를 후에 왜적에게 약탈당했다. 대사가 간절히 요청하여 돌려받아 건봉사에 보관하였다. 밀주에는 옛날부터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우祠宇가 있는데, 선조가 ‘표충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 후, 정조(재위 1776-1800)가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업적에 더욱 감동하여 일찍이 영변寧邊의 옛 사당인 수충사酬忠祠를 확충하고 표창하였다.

-출처:2018 금석문 탁본조사 보고서-

3. 비석에 대해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비문을 짓고, 허질許晊(1734-1804)이 썼다. 각자는 파손되어 알 수 없다. 하지만 기존의 자료를 토대로 미루어 볼 때, 각자는 성철性哲(?-?)임을 확인할 수 있다.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으로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비편은 4개로, 재질은 모두 화강섬록암이다. 비문은 원래 3면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편 1은 이수 부분으로 보인다. 크기는 높이 58cm, 너비 131cm, 두께 85cm이며, 깊이 약 4cm의 장방형 홈이 있다. 비편2는 2개의 비편을 임시로 접합하였다. 비신의 상단부분으로 크기는 높이 33cm, 너비 79cm, 두께 64.5cm이다. 비편2의 세 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그 중 전면 우측 부분이 파손되었다. 비편 3은 비신 우측 중앙 부분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높이 33cm, 너비 48cm, 두께 51.5cm이다. 비편 4는 비신 하단부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며, 크기는 높이 33cm, 너비 65cm, 두께 32cm이다. 비편과 함께 발견된 3단의 하대석은 현재 복제비(2017)의 하대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2018 금석문 탁본조사 보고서-

4. 전문

4.1. 원문

乾鳳寺泗溟大師紀蹟碑
高城 乾鳳寺泗溟大師紀蹟碑
有明朝鮮國泗溟大師紀蹟碑銘(篆 題)
有明朝鮮國八道都摠攝義兵大將弘濟尊者泗溟大師紀蹟碑銘幷 序
      嘉善大夫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原州牧使原任  奎章閣直閣知製
      敎南公轍撰
     通政大夫行寧越都護府使兼原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討捕使許晊書幷篆
金剛山自毗廬分爲二歧斷髮嶺以西曰內帖鴈門以東曰外帖內帖之表訓寺是西山大師施敎之地也外帖
之乾鳳寺是泗溟大師募義之地也二子者雖出於浮屠而西山以其節泗溟以其功故地以人而重寺之名於
是乎甲于國中按圖誌唐乾元間山人貞信設道場奉彌陀觀音兩」
菩薩像於此號爲乾鳳寺寺舊藏師畵像及 願佛銀塔香鑪鐵杖橇鞋珊瑚念珠各一金袈裟一襲而世傅如
來牙事尤神奇其說近於述異而所」
謂石塔者至今尙存山中人皆言夜或有瑞氣爲虹云師名惟政本姓任氏密州人也世有簪纓稍長從恩師中
德落髮於寺之樂西菴而師事西」
山大師休靜學蓮華經六萬九千餘言萬曆二十年倭寇朝鮮休靜自妙香山募僧徒爲義兵與提督李如松大
破倭兵于平壤斬首二千級  昭」
敬王召見行在 親畵墨竹圖以賜之仍  命爲八道都摠攝義兵將及 車駕還都執政大臣多主和議休
靜請於  上曰臣老且死願以兵事付弟子惟政乞骸骨歸 昭敬嘉其志許之 命惟政乘馹至京師遂統其衆
朝廷謂蠻夷素好佛道宜遣惟政以成和遂  賜一品命服以使」
臣禮送之師至日本乃以三塗五戒說蠻王及平秀吉其言皆以淸淨去殺爲宗於是和事成將還贖得被虜男
女三千餘口先時新羅慈藏法師」
入西竺得如來牙十枚後爲倭所掠去師乃懇辭乞還以藏于寺卽石塔是也儒與佛異敎學士大夫甞譏斥之
不欲同中國曰慈悲與仁義異旨」
而見性不若格致習靜有違誠敬毫釐之差去聖人之道遠甚雖然觀於西山與師之所樹立則其於君臣父子
之義何如哉彼冠儒衣儒細究性」
理高談仁義而無其實者不可同日而語也佛名而儒行者吾道而己矣儒名而佛行者異端而己矣問之則非
校之則是吾當進之矣問之則是」
校之則非吾當退之矣當 朝廷與日本搆和也賢人君子進無可死之地則歸潔其身可也西山之去吾知其
必有以也如師者不與之同其去」
而又爲之力賛其議何也蓋西山近於經而其節高泗溟近於權而其功博然和議之成當時之士多主其事雖
非師而不患其不成也況日本崇」
信佛敎堯舜孔子之道所不可化則事固有因其勢而導之者又師之忠信可以行蠻貊之邦而服人之心此豈
區區游說之士所可得而 國家」
之享有其利者今三百年矣然則西山之退身守道泗溟之屈志濟物各有其義而其忠於爲國一也同時從西
山學者又有海眼與靈圭海眼起」
義嶺南靈圭甞與趙文烈公憲從死錦山之役者也密州舊有師妥靈之祠  穆陵時賜號曰表忠及我  聖
上卽阼以來尤起感於西山泗溟之」
事甞就寧邊故祠而表章之 本朝專尙儒術未甞廣度僧尼崇侈寺刹而  二聖之眷眷於此者徒以忠義爲
獎也豈不盛哉余按關東以本寺」
遺蹟論移禮部又將請於  朝施行而其徒有以紀蹟之碑來屬者遂捐錢百緡而施之作募緣文五軸以相其
役銘曰」
佛自西竺流入中原歷漢及梁迄唐宋元儒譏異端不與同門孰如大師自禪而悟義以爲車信以爲路㧞乎其
類益見所樹有儼師像金剛之刹」
傍有石塔藏如來骨琉璃之咽珊瑚之舌千輪妙相若相傅鉢萬曆年間島夷逆命西山奏功弟子曰政 王曰彼
寇維予之讎干戈八年百姓不」
休凡厥廷臣孰紓予憂公卿曰吁維茲蠻猾僻處卉服俗本崇佛寧因勢導難以理奪於是起師裝送日本滄溟
萬里天長地遠三月候風四月揚」
帆乃見酋長言出至誠雍容談笑和事遂成從此八路倭氛廓淸士女歌舞同我太平西山高節泗溟偉功或去
不去其義則同䟦涉山河紺馬火」
龍銅鑪鐵杖木鞋珠囊千載摩挲如聞佛香西山如雲泗溟如水水流有迹雲去無止」
崇禎紀元後庚申四月 日立

-판독자:이영관-

4.2. 해석문

건봉사사명대사기적비

사명당(泗溟堂) 유정대사(惟政大師) 비문(碑文)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사명대사(泗溟大師) 기적비명(紀蹟碑銘) (篆題)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의병대장(義兵大將) 홍제존자(弘濟尊者) 사명대사(泗溟大師) 기적비명(紀蹟碑銘) 서문을 병기함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 원주목사(原州牧使) 원임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지제교(知製敎) 남공철(南公轍)이 찬술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영월도호부사(行寧越都護府使) 겸(兼) 원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原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토포사(討捕使) 허질(許晊)이 글씨를 쓰고 전액을 아울러 썼다.

금강산(金剛山)은 비로봉(毗盧峯)으로부터 나뉘어져 두 갈래가 된다.
단발령(斷髮嶺) 이서(以西)지역은 내점(內岾)이라 하고 안문(鴈門) 이동(以東)은 외점(外岾)이라 한다.
내점의 표훈사(表訓寺)는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가르침을 베푸시던 곳이고 외점의 건봉사(乾鳳寺)는 사명대사(泗溟大師)께서 의병을 모으시던 곳이다.
두 분은 비록 부도(浮屠)에서 나왔지만 서산은 그 절개로써, 사명은 그 공으로 유명하였다. 땅은 사람 때문에 귀중해 지니 절의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나라에서 제일이 되었다.

도지(圖誌)를 살펴 보건대 당(唐) 건원(乾元) 년간에 산인(山人) 정신(貞信)이 도량(道場)을 열어 그곳에 미타(彌陀)와 관음(觀音) 두 보살상(菩薩像)을 받들었으니 이 도량을 건봉사(乾鳳寺)라고 한다. 이 절에는 옛날부터 스님의 화상(畵像)과 원불은탑(願佛銀塔), 향로(香鑪), 철장(鐵杖), 취혜(橇鞋), 산호(珊瑚), 염주(念珠)가 각각 하나씩, 금가사(金袈裟) 1습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 여래(如來)의 어금니가 보관되어 있어 일이 더욱 신기하니 그 설치가 이적을 서술하는 것에 가깝고 이른바 석탑(石塔)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여전히 존재하였다. 산중(山中)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밤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 무지개가 되었다고 한다.

스님의 이름은 유정(惟政)이고 본래의 성은 임씨(任氏)이며 본관은 밀주(密州)였다.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다. 조금 자라서 은사(恩師)인 중덕(中德)을 좇아 절의 악서암(樂西菴)에서 삭발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를 사사하여 연화경(蓮華經) 6만 9천여 마디를 배웠다.

만력(萬曆) 20년에 왜구(倭寇)가 조선(朝鮮)을 노략질하니 휴정(休靜)은 묘향산(妙香山)에서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의병(義兵)으로 만들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平壤)에서 왜병(倭兵)을 대파하였고 목을 벤 것이 2천급이었다. 소경왕(昭敬王)3)이 행재소(行在所)로 불러서 만나보았고 친히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사사하고는, 명하여 팔도도총섭의병장(八道都摠攝義兵將)으로 삼았다. 임금의 수레가 환도(還都)하는 데에 미쳐서 정사를 잡은 대신들 중에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휴정(休靜)은 상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늙어서 장차 죽을 것이니 병사(兵事)를 제자 유정(惟政)에게 맡기고 해골을 받아 돌아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소경(昭敬)은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그의 뜻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유정(惟政)을 일마(馹馬)를 타고 경사(京師)에 이르도록 명하고 드디어 그 대중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이르기를, 만이(蠻夷)는 본래 불도(佛道)를 좋아하니 유정(惟政)을 보내어 강화를 성사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1품의 관계를 하사하고 사신의 예식으로 그를 보냈다. 스님이 일본(日本)에 이르자 마침내 삼도(三塗)와 오계(五戒)로서 오랑캐 왕 및 평수길(平秀吉)에게 설명하니 그 말이 모두 청정(淸淨)과 죽음을 제거하는 것으로 종지를 삼았다. 그래서 강화가 성립되어 장차 돌아가려고 하니 잡힌 남녀 3천명을 풀어주었다. 이전에 신라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서축(西竺)에 들어가 얻은 여래아(如來牙) 10매가 뒤에 왜적에게 약탈되었던 것을 대사는 마침내 간절한 말로 요구하여 돌려받아서 절에 보관하였으니 곧 석탑(石塔)이 이것이다.

유교와 불교는 가르침을 달리하므로 사대부들이 일찍이 불교를 기롱하고 배척하여 함께 하고자 아니하여 말하기를, “자비(慈悲)와 인의(仁義)는 종지가 다르고 견성(見性)은 격물치지(格物致知)만 못하며 고요함을 익히는 것은 정성과 경건을 멀리함이 있다. 터럭 끝만큼의 차이는 성인의 도와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서산(西山)과 스님이 수립한 것을 보면 군신 부자의 의에 무슨 모자람이 있겠는가. 저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성리(性理)를 세세히 탐구하고 인의(仁義)를 높이 이야기하면서도 실질이 없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라는 이름이 있으면서도 유가로서 행하는 것은 내 도(吾道)이지만 유가의 이름이 있으면서 불가로서 행하는 것이 이단(異端)일 뿐이니 그것을 물으면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을 고치면 옳으니 내가 마땅히 그것에 나아갈 것입니다. 조정이 일본과 강화를 맺을 때에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이 나아가서 죽을 만한 곳이 없으니 돌아가서 자기 몸을 깨끗이 하자는 것은 옳다. 서산이 떠났던 데에는 그가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스님 같은 분은 서산과 함께 떠나지 않고 더욱이 힘써 그 의논을 찬성하였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서산은 경에 가까웠으므로 그 절개는 높았으며, 사명은 권도(權道)에 가까웠으므로 그 공은 넓었다. 그러나 화의를 성립시키는 것은 당시의 선비들이 그 일을 주장하는 것이 많으니 비록 스님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물며 일본은 불교를 높이고 믿으므로 요순(堯舜)과 공자(孔子)의 도로 교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일은 진실로 그 대세를 타서 인도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또 스님의 충성과 믿음은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구구하게 유세하는 선비들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국가가 그 이익을 누리는 것이 지금까지 3백년이니 그렇다면 서산대사가 물러나 도를 지켰던 일과 사명대사가 뜻을 굽혀 대중을 구제하였던 일이 각자의 의(義)가 있는 것이지만 그 충성이 나라를 위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같은 때에 서산대사를 따르는 사람에는 또 해안(海眼)과 영규(靈圭)가 있었다. 해안은 영남에서 기의(起義)하였고 영규는 일찍이 조문열공(趙文烈公) 헌(憲)과 금산 싸움에서 좇아 죽은 분이다.
밀주(密州)에는 옛날부터 스님의 영을 모신 사우가 있는 데 목릉(穆陵) 때에 표충(表忠)이라고 이름을 하사하였다. 우리 성상이 즉위하신 이래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일에 더욱 감동하여 일찍이 영변(寧邊)의 옛 사우에 나아가 그것을 표창하였다
본조(本朝)는 유술(儒術)을 존숭하여 일찍이 승려를 널리 제도시키고 사찰을 높인 적이 없었지만 두 성상이 여기에 마음을 쓰신 것은 다만 충의를 장려하고자 한 때문이니 어찌 성대하지 않았겠는가.
내 생각에는 관동에 본사에 남긴 유적을 예부(禮部)로 논이(論移)하고 또 장차 조정에 시행하기를 청하여 기적비는 두어야 할 것이다. 와서 속하는 자들이 드디어 돈 100꾸러미를 덜어서 베풀고 모연문(募緣文) 다섯 두루미를 지어서 그 역사를 도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서역 천축으로부터 중원으로 들어 왔네.
한나라와 양나라를 거쳐 당과 송, 원나라까지
유가가 이단이라 헐뜯으며 더불어 동문으로 여기지 않으니 누가 대사를 알까?
스스로 선을 하여 깨달았으니 의를 수레로 하고 믿음을 길로 삼아서
여러 사람들 중에서 우뚝 빼어나서 수립한 바를 더욱 보았다네.
엄연한 스님의 상이 있으니 금강산의 사찰이라네.
곁에 석탑이 있으니 여래의 뼈를 모신 곳이라네.
유리의 목구멍 산호의 혀 천개의 바퀴 묘상이 전하여져 오는 듯하네.
만력 년간에 섬 오랑캐가 명을 거슬려서
서산대사는 공을 아뢰며 제자는 유정이라네.
왕이 말씀하시길, 저 왜구가/ 나의 원수로다.
전쟁이 8년이니 백성이 쉬지 못하도다.
모든 그 정신들 중에 그 누가 나의 근심을 풀어줄까?
공경이 끙 한탄을 하네. 이 오랑캐는 교활하여 치우친 곳으로 도망가 있네.
풍속은 본디 불교를 숭상하니 차라리 형세로 인도할 일이지.
이치로 굴복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네.
이에 대사를 일으켜 일본으로 보냈다네.
푸르고 아득한 만리 길 하늘과 땅이 아득히 장구 하구나.
삼월에 바람을 기다렸다가 사월에 돛을 폈다네.
마침내 왜왕을 만나 말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평화롭게 담소하며 강화가 드디어 이루어졌구나.
이 팔로를 좇아 왜적의 분위기를 깨끗이 하니
사녀(士女)들은 노래 부르고 춤추니 우리와 태평을 나누는구나.
서산대사의 높은 절개 사명대사의 위대한 업적이여
떠나는 것도 혹 떠나지 않는 것도 그 의는 동일한 것이라네. 산하를 돌아다니며 푸른 빛 말과 불 뿜는 용
동로(銅鑪)와 철장(鐵杖) 목혜(木鞋)와 주낭(珠囊)
천년동안의 마사(摩挲)에서 부처님의 향기 맡는 듯하네
서산은 구름과 같고 사명은 물과 같으니
물이 흐르면 자취가 남지만 구름이 떠나면 머문 곳이 없네.

숭정기원후 세 번째 경신년(정조 24, 1800년) 4월 일에 비를 세웠다.

-해석자:김혁-

5. 관련 문서

건봉사
사명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