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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a9a9a><colcolor=#fff> 국적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 [[우크라이나| ]][[틀:국기| ]][[틀:국기| ]] → 무국적[1] |
출생 | 1954년 8월 7일 ([age(1954-08-07)]세)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아반스키구 포쳇 마을[2] | |
학력 | 키이우 대학교 ( 법학 / 박사) |
직업 | 변호사, 기업인, 정치인 |
경력 | 제2 - 4대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 |
1997년 4월 ~ 2006년 5월 25일 | |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부의장 | |
1998년 7월 9일 ~ 2000년 2월 1일 | |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제1부의장 | |
2000년 2월 1일 ~ 2001년 12월 13일 | |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 | |
2002년 6월 12일 ~ 2005년 1월 21일 | |
사회 운동 "우크라이나의 선택" 대표 | |
2012년 4월 14일 ~ 2022년 2월 24일 | |
제9대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 | |
2019년 8월 29일 ~ 2023년 1월 13일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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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우크라이나 정교회 ( 모스크바 총대주교) |
부모 |
부: 볼로디미르 네스테로비치 메드베드추크 (1918 ~ 1981) 모: 파이나 그리고리예브나 메드베드추카 (1925 ~ 1980) |
배우자 |
마리나 레베데바 나탈리아 가브릴류크 (1952) 옥사나 마르첸코 (1973) |
자녀 |
이리나 (1982) 다리야 (2004)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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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르 메드베드추크는 우크라이나의 변호사, 기업인( 올리가르히)이자 정치인으로, 레오니드 쿠치마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다.2. 생애
1954년 8월 7일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아반스키 구역 포쳇 마을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소비에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활동을 한 블라디미르 메드베드추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0년대 중반 부친의 고향인 지토미르주로 돌아왔고 키이우주로 이주해 학업을 마쳤다. 197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경찰학교 입학을 희망했으나 부친의 과거로 인해 낙방했다. 1971년 키이우 철도 모토빌롭카역 우체국에서 프리랜서 경찰로 잠시 근무했다.1972년부터 1978년까지 키이우 대학교에 입학해 법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73년부터 콤소몰 자원 인민 부대의 작전 분리 지도자가 되었지만 1974년 두 명의 콤소몰 동지들과 함께 미성년자에게 상해를 입힌 것으로 재판에 넘겨져 1974년 4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도 제적당했다. 그러나 1974년 6월 판결을 뒤집고 재수사가 이루어졌고 11월 무죄를 선고받아 대학에 복학하게 된다.
2.1. 변호사 활동
1978년부터 1989년까지 키이우 변호사 협회의 변호사로 일했다. 1989년 1월부터 1991년까지 키이우 셰브첸코프스키 구역 법률 사무소의 책임자가 되어 40여명의 하위 변호사들을 거느렸다.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우크라이나 변호사 연합의 회장이렀고 소련 변호사 연합 이사회의 회원이었다.그러나 반체제 인사들을 변호할 때는 변호사 윤리를 어겨서라도 항상 패소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피고인이 메드베드추크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거부해도 변호를 맡거나 검사가 찾아내지 못한 반체제 인사들의 유죄를 들어내는 건 약과요, 반체제 인사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형량을 추가해달라고 요청하거나 피고인이 유죄가 아니라고 주장함에도 유죄라고 부장하는 등 변호사 윤리를 버리고 반체제 인사들을 잡아 넣는 데 주력했다.
2.2. 기업, 정치 활동
1990년대 초반부터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레오니드 쿠치마 등 유력 정치인들과 결탁해 FC 디나모 키이우 구단주로 시작해 우크라이나 신용은행부터 과학, 심지어 언론 관련 기업까지도 운영하는 올리가르히가 되었다. 또한 대통령 휘하 노사, 법률, 반부패 관련 위원회에도 참여하는 등 정치에도 관여했다. 1997년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의 고문이 되었다.1995년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에 참여했고 1997년 4월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최고 라다 의원이 되었다.
1998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98년 7월 친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노선으로 최고 라다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10월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의 대표가 되었다. 199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도 레오니드 쿠치마를 지지하며 선거대책본부를 이끌었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최고 라다 제1부의장 직을 역임했고 2002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되었다. 이 당시에는 친유럽주의 노선을 타며 친유럽 법안에 찬성하기도 했다.
2002년 6월부터 2005년 1월까지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쿠치마의 정책에 관여하면서 정치적 비중을 늘려 나갔다.
2004년 유리 루첸코는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부정선거 책임은 메드베드추크에 있다며 메드베드추크를 비판했다.
2004년 딸 다리야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대성당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푸틴이 메드베드추크 딸의 대부가 된 것이다.
2005년에 차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06년 총선에 반 오렌지 혁명 정당 연합인 야권전선 "네 탁!" 비례대표 3번으로 출마했으나 257,106표로 1.01%를 얻는 데 그쳐 득표율이 봉쇄조항 3%에 미달해 낙선했다.[3] 출범 당시에는 7~10%의 지지율을 보여줬지만 지역당과 우크라이나 사회당, 우크라이나 공산당, 나탈리야 비트렌코 블록( 우크라이나 진보사회당 + 러시아-우크라이나 연합당)과 표가 갈려 1%대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지역당도 지원해 지역당의 승리를 이끌어냈고, 총선 참패 이후 사민당 대표 직에서 사퇴했고 지역당으로 사민당의 야권 인사들이 합류할 수 있게 도왔다.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사민당 후보 출마설이 돌았지만 레오니드 크라우추크가 이를 반박했다.
2012년 우크라이나의 선택이라는 친러 사회 운동 단체를 설립해 강경 유럽회의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지역당까지 비판했다.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인 2013년 11월무터 2014년 2월까지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메드베드추크와 54회 통화한 것으로 알려지며 메드베드추크가 러시아 측 스파이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키이우에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고 있을 때 메드베드추크는 크림 반도, 스위스로 도피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미국은 메드베드추크에 대한 제재를 가했다.
10년 전 친유럽주의 행보와는 정 반대인 극단적 친러 반유럽 행보 때문인지, 2014년 돈바스 전쟁 개전 이후 러시아의 이미지가 나빠지자 블라디미르 푸틴과 사적으로 친한 메드베드추크는 정치 활동을 중단했다. 대신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크 인민공화국과의 협상단 대표로 나서 포로 교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2014년 총선에서 측근 4명을 당선시키고, 특수 항공편을 이용해 왕래가 금지된 모스크바와 키이우를 수 차례 왕래했다. 또한 지역 차원의 공공 협회 네트워크를 구축해 여러 지역들이 단체로 자치권을 요구하는 것을 주도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2018년 야권전선과 인생을 위하여의 통합을 주도했다. 2018년 7월 말, 야권전선 측 TV 채널인 NewsOne TV의 야권전선 지도부 선출을 위한 특별 방송 시청자 투표에서 뜬금없이 인생을 위하여에 갓 입당한 메드베드추크가 "돈바스의 평화 회복" 부문에서 1위를 했다. 이는 9월 21일 탈당하고 나시당을 창당한 예우헨 무라예우 등의 불만을 블러일으켰고 메드베드추크와 돈바스 평화 부서의 부장은 차기 당대회에서 결정하기로 의결했다. 9월에는 인생을 위하여의 메드베드추크와 야권전선의 라비노비치가 합당 협상을 주도했다.[4] 인생을 위한 야권연단 대표를 맡아 대표적인 친러 정치인으로 불렸다. 여러 친러적 행보로 우크라이나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2021년 9월 반역과 테러 혐의로 수감됐다.
2019년 올리버 스톤이 만든 유로마이단 및 돈바스 내전 관련 다큐멘터리에 등장하여 증언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가택연금 상태에서 우크라이나를 탈출해 러시아로 도망가려다가 우크라이나 보안국에 다시 체포되어 감금 상태였다. 그러나 9월 21일 대규모 포로 교환을 통해 아조우 연대 포로들과 맞교환 하는 방식으로 러시아로 보내졌다. #
2023년 1월 10일 우크라이나 보안국과 국가이민청의 자료에 근거해 헌법에 따라 시민권 박탈 조치를 내렸다. 1월 13일에는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직도 박탈당했다.
포로 교환 이후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보안국은 메드베드추크가 러시아 시민권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드미트리 페스코프가 이를 반박했다. #
[1]
우크라이나 보안국은 메드베드추크가
러시아 시민권자라고 주장했으나
드미트리 페스코프가 이를 반박했다.
#
[2]
현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아반스키구 포쳇 마을
[3]
이 선거에서는 네 탁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소속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전 대통령과 5번 공화당 대표
유리 보이코도 낙선했다.
[4]
양당 통합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견제하고 친유럽 노선을 방해하기 위해 2017년 1월부터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추진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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