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佛氏雜辨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유명한 삼봉 정도전이 태조 7년(1398)에 탈고한, 성리학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한 저서. 불씨(佛氏)란 유학자들이 부처를 낮춰 부르던 단어로, <불씨잡변>이란 제목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부처씨의 주장에 대한 여러 변박 정도가 된다.[1]
정도전의 스승인 이색이 활동하던 시기는 고려 말 불교 세력의 극심한 폐단으로 새로운 사회를 원하는 목소리가 커져 불교가 가라앉고 최신 학문인 성리학이 전래되어 유교가 떠오르던 때였다. 이에 정도전이 <심문천답>, <심기리편>, <불씨잡변> 등 불교를 비판하는 책을 쓴 것이다. 정도전은 책을 집필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목숨을 잃었다.
2. 내용
총 19개[2]의 항목으로 구성되는데 다음과 같다.- ① 불씨 윤회지변(佛氏輪廻之辨)
- ② 불씨인과지변(佛氏因果之辨)
- ③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辨)
- ④ 불씨작용시성지변(佛氏作用是性之辨)
- ⑤ 불씨심적지변(佛氏心跡之辨)
- ⑥ 불씨매어도기지변(佛氏昧於道器之辨)
- ⑦ 불씨훼기인륜지변(佛氏毁棄人倫之辨)
- ⑧ 불씨자비지변(佛氏慈悲之辨)
- ⑨ 불씨진가지변(佛氏眞假之辨)
- ⑩ 불씨 지옥지변(佛氏地獄之辨)
- ⑪ 불씨화복지변(佛氏禍福之辨)
- ⑫ 불씨 걸식지변(佛氏乞食之辨)
- ⑬ 불씨선교지변(佛氏禪敎之辨)
- ⑭ 유석동이지변(儒釋同異之辨)
- ⑮ 불씨입 중국(佛氏入中國)
- ⑯ 사불득화(事佛得禍)
- ⑰ 사천도이담불과(舍天道而談佛果)
- ⑱ 사불지근연대우촉(事佛至謹年代尤促)
- ⑲ 벽 이단지변(闢異端之辨).
이렇게 19개 항목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불교의 핵심교리인 윤회ㆍ 인과ㆍ 자비 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불교를 민심을 현혹시키는 사교(邪敎)라고 단정지었다. 성리학자였던 만큼,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성리학의 핵심개념인 이(理)와 기(氣)를 활용하였다.
<불씨잡변>에서 정도전이 구사한 논리를 대충 요약하면 "세상 삼라만상의 보편적 원리에는 이(理)가 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주재하는 핵심요소 또한 이(理)이다. 이(理)가 만물의 원리인 만큼 인간의 마음이 곧 본성이다. 그런데 불교는 인간의 마음과 본성(心性)을 구분지으니 잡소리가 분명하다." 정도이다. 또한 양나라와 같이 불교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고 사회가 흐트러진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여 주장을 보충하였다. 즉 전체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불교는 그 근본에서부터 인간과 우주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고,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義)를 망각케 하여 사회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3. 비판과 의의
《불씨잡변》에 등장하는 비판은 당시 타락한 불교에 대한 불만[3]과 사대부들이 지닌 유교적 관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그 내용도 냉정히 말하면 불교 교리에 대한 기호론적인 이해는 사실 전혀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이 책에서 정도전이 이해한 불교는, 애착을 끊는다며 부모와 자식간의 인륜을 저버리고 출가를 조장하는 허무주의이자,[4] 성리학의 이기론과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도(道)[5]와 기(氣)[6]를 혼동하는 데다 실질적으로는 기(氣)의 작용을 강조하여 자기모순에 빠지는 형이하학이자,[7] 현실 세계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 유아론이자,[8] 증명할 수 없는 내세관과 업설을 구실로 백성을 위협하고 착취하는 협박이자,[9] 깨달음을 구실삼아 막행막식을 용인하는 비윤리적 가르침이었다.[10]
그러나 조선 성리학의 역사 속에서《불씨잡변》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이 있다. 바로 성리학이 원나라로부터 전래하고 아직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적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의 핵심 관념인 이기론을 나름대로 훌륭히 구사했기 때문. 또한 역사적으로 보자면 조선 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에 기여했으며, 동시에 삼국시대 이후 천 년 넘게 한반도에 존재한 불교 사회를 유교 사회로 변모시키는 신호탄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불교 내부에서도 사찰이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윤회를 빙자하여 많은 사람들을 혹세무민한 것을 수치로 인식한다.[11] 정도전은 비록 이 책을 남기고 숙청당했지만, 조선 초기의 이러한 기조는 조선 500년 내내 숭유억불을 일관적으로 미는 사상적 토대가 됐다.
단, 불씨잡변에서는 주희의 초기 견해인 성체심용(性體心用)을 따라 성품(性)을 마음작용(心)보다 우선시하며 불교를 비판한 데 비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리학자들은 주희의 후기 견해인 심통성정(心通性情)의 관점에 주목하여 심의 중요성을 크게 평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도전은 성과는 달리 심 자체는 선악이나 진리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고 여겼으나, 정도전과 동시대 사람이었던 권근은 물론 이황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은 심이 태극과 무극의 개념을 품고 있다고 해석했다.[12]
4. 여담
삼봉 정도전이 이 글을 탈고한 시점은 태조 7년(1398)이었지만, 그해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이 살해당하면서 한동안 <불씨잡변>은 잊혔다. 그러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정도전의 먼 친척이 이 글을 발견하여 세상에 다시 빛을 보았다. 서문은 권근[13]과 신숙주가 작성했다. 초간본은 별도의 단행본으로 제작했으나, 이후 후손들이 정도전의 글을 모은 삼봉집을 편찬하면서 여기에 합편하였다.도올 김용옥이 MBC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강의를 할 때, 불씨잡변을 강의하며 마치 정도전이 빙의한 듯 불교를 무자비하게 까내렸는데, 이 때문에 당연히 불자들과 불교계가 발끈 뒤집어졌다. 물론 김용옥은 유불선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이 강의를 하기 몇 년 전에는 지상파에서 불교 강의도 했고, 달라이 라마와도 만나는 등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지라 불교계가 이를 충분히 반박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워낙 과몰입을 해놔서 화제가 되었던 것.[14] 김용옥이 어떻게 강의했는지는 옆의 해당 블로그를 참조. #
북한에서는 불씨잡변을 부분적으로나마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인과응보, 윤회, 지옥설 등 "황당한 교리들"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철학사상발전에서 일정한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15] 그러나 북한의 입장에서는 불교나 성리학이나 유물론이 아니라 관념론이라는 점은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마냥 좋게 보는 것은 아니다.
[1]
'잡변'이란 말을 '잡소리에 대한 반박' 내지는 '
불씨가 지껄이는 잡소리 내지 개소리'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원래 잡(雜)이라는 한자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뜻이다. 가령 범죄자 여럿을 치죄하기를 잡치(雜治)라고 하고, 여러 가지를 기록한 것을 잡기(雜記)라고 하며, 여러 가지 주제를 자유로이 읊은 시를 잡영(雜詠)이라고 한다. 또한 변(辨)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므로 '잡변'이란 말은 '잡다한 변박'이라고 해야 자연스럽고, 책 목차도 '불씨XX지변'으로 명명한 항목이 많음이 이를 말해준다. '불씨XX지변'이라고 명명한 글 여러 개를 모았으니 <불씨잡변>... 하필 '잡'이라는 한자를 사용한 것은 "불씨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굳이 거창한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하는 멸시의 의도가 있을 수 있다.
[2]
정확히는 20개지만 맨 마지막 항목은 저자 자신의 부록 설명 정도이므로 실질적으로는 19개다.
[3]
당장 원문의 내용만 보더라도 각 편의 서문들마다 당시
불교의 비행이 중심적이었다. 예를 들어 교리를 대충 들어놓고 그 교리에 따라 '당시
승려가 어떻게 민중들에게 약을 파는가' 따위였다.
[4]
정작 불교에서는 단멸론과 상주론을 모두 취하지 않는다.
[5]
법칙
[6]
작용
[7]
이는 불교가 일부 부파(예: 설일체유부)를 제외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實有)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유는 서구 철학의
이데아와도 맥이 닿아 있다.
[8]
실제로 불교 종파 중에서는
유식학파의 주장이 특히 이런 경향이 강하다. 동아시아
대승 불교권에서는
보살의 수행 경지를 잘 설명해 준다는 점으로 인해 널리 퍼졌고, 신라와 고려의 여러 불교 종단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불교의 목적은 관념론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집착을 여의고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9]
윤회론의 증명 가능성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는 재가자의 입장에서 피상적으로 교육받고 이해한 불교의 내세관에 가깝다. 불교에서의 육도윤회는 개인의 마음 상태를 반영하는 세계다.
[10]
이는
선불교를 의식한 비판인데,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 선종의 요지를 문자 그대로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후기로 갈수록 선종이 활기를 잃으며 막행막식하는 승려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은 사실이나, 선종에서는 이를 무조건 긍정하지는 않는다. 비록 깨닫고 난 후라도 지금껏 억눌려온 번뇌와 생활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다면 보림 수행을 통해 닦아나가야 할 것(돈오점수)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11]
오늘날의
기독교와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그 당시 불교에 대한 적대감은 불교계 스스로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12]
이러한 변화에는 성리학계 내부에서 오간 여러 논의가 큰 영향을 미쳤지만, 《수능엄경》처럼 성리학과의 유사성으로 인해 유학자들에게도 많이 읽혔던 일부 불교 경전이 부수적으로 끼친 영향도 있었다.
[13]
정도전이 살아생전에 부탁했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정몽주와 정도전의 교분이 두터웠던 걸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정도전과 가장 가까웠던 지기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갈라서는 권근과 이숭인이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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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출처: 《철학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