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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 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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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가티에서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생산했던 4도어 패스트백 세단. 디자인은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담당하였다.2. 제원
차량 제원 | ||
모델명 | Bugatti EB 112 | |
제조사 | 프랑스, 부가티 | |
최초생산년도 | 1993년 | |
엔진 형식 | 6.0L V12 | |
미션 형식 | 6단 수동변속기 | |
최고출력 | 456PS(335kW; 450HP) | |
0-100km/h | 4.3초 | |
최고속도 | 약 300km/h | |
구동방식 | F4 | |
전장 | 5070mm | |
전폭 | 1,960mm | |
전고 | 1,405mm | |
축거 | 3,100mm |
3.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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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erior |
디자인에 대해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데, 대체로 전면부에 대한 평이 좋지 않다.
4. 역사
1947년 부가티의 창립자 에토레 부가티의 죽음과 경영난으로 프랑스의 최고급 자동차 메이커였던 부가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후 1989년 이탈리아의 사업가 로마노 아르티올리가 부가티의 판권을 사들여 "Automobili Bugatti S.p.A"라는 이름으로 사명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당시 재규어 XJ220과 페라리 F40을 필두로 한 80년대 "슈퍼카 붐"에 재빠르게 합류하고자 자사의 첫 슈퍼카를 발표했는데[1], 그것이 바로 부가티 EB 110이었다.이후 로마노는 라인업 확장을 위해 이탈리아의 여러 전설적인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그가 설립한 자동차 디자인 전문업체인 이탈디자인에 부가티 EB 110의 4도어 세단 버전의 설계를 의뢰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부가티 EB 112였다. 우아한 곡선 디자인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 세단이 아닌 대형 4인승 패스트백 형태로 디자인되었으며, 무려 6.0L V12 엔진을 얹어 450마력을 낼 수 있었고, 제로백은 4.3초에 최고속도는 약 186mph(300km/h)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차의 전망은 발표된 시점부터 이미 어두운 편이었는데, 우선 이 차가 처음 발표된 1993년은 회사가 이미 점차 기울고 있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EB 112는 애초에 컨셉트카를 목표로 설계된 차량이다 보니 제작도 단 3대만이 계획되었고, 그마저도 한창 제작 중이던 1995년 회사가 최종 부도나면서 프로젝트가 전면 중지됐다. 이후 미완성된 3대의 "차체"들은 모나코 출신 사업가인 길도 팔란카 파스토어(Gildo Pallanca Pastor)[2]가 잔여 부품들과 함께 구매했고, 그의 노력 끝에 1998년 회색[3](s/n 39002)과 검은색(s/n 39003) 2대를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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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디자인이 소유하고 있는 나머지 빨간색 한 대[4]는 가장 처음 설계된 1번 차량(s/n 39001)으로, 부가티가 여러가지 시범적인 설계를 반영한 프로토타입으로 추정되는데, 후미등이 차체 트렁크 부근 후면부에 있는 다른 양산형들과 달리 뒷범퍼에 위치해 있으며, 공기역학적인 파츠들이 장착되어있는 등, 약간의 차이점이 있는 모습이다.
비록 부가티의 손으로 직접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EB 112의 디자인은 이후 제작된 후배 프로토타입들인 EB 118과 EB 218의 유선형 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 둘은 또다시 부가티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한 부가티 베이론 16.4의 유선형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현재 부가티의 상징과도 같은 유선형 디자인은 이 차량이 있었기에 정립될 수 있었으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현세대의 부가티 모델들이 EB 110처럼 뾰족한 이탈리아식 '쐐기 디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5]
게다가 포르쉐 파나메라나 아우디 A7과 같이 프리미엄 시장에서 고성능을 지향하는 동시에 패밀리 세단으로도 손색 없는 4도어 패스트백 차량들과 디자인 언어와 콘셉트가 굉장히 유사한데, 90년대에 이러한 디자인 및 콘셉트를 먼저 보여줌으로써 시대를 앞서나간 차량이었다고 볼 수 있다.
4.1. 이후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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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도 팔란카 파스토어가 촬영한 부가티 EB 110들과의 단체샷. 회색 39002번 차량을 제외한 두 대가 촬영에 합류했다.[6] |
첫번째 차량인 빨간색(s/n 39001)은 중간에 잠시 파란색으로 바뀌었었다가 다시 빨간색으로 재도색되었고, 현재 차량의 디자인과 설계를 맡았던 이탈디자인에서 소유 중이라고 한다.
회색(s/n 39002) 차량은 길도 팔란카 파스토어의 다른 사업체들 중 하나였던 "모나코 레이싱 팀"을 통해 한 러시아인 개인한테 팔린 후, 2003년부터 스위스 제네바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차량 등록이 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후 해외 반출이나 차량 말소, 폐차 기록 하나 없이 지금도 제네바에 있다고 전해졌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2021년 12월 갑자기 독일에서 경매 매물로 올라왔다고 한다. # 사실 이 차량은 러시아인 개인한테 팔리던 시절부터 소유주의 범죄 연루 논란[7]이나 차량 불법 거래 의혹 등 온갖 고난에 시달렸었는데, 다른 두 차량들에 비해 소식도 뜸하고 목격담도 거의 없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자동차 마니아들과 파파라치들의 관심 대상이었고, 행적에 대한 정보 부족 때문에 가짜 뉴스나 거짓 정보, 괴담 등도 셋 중 가장 많은 편이다. 차량의 존재가 알려진 위치도 매번 바뀌는 걸 보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아직도 새 주인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중인 듯 하다.
검은색(s/n 39003) EB 112는 길도 팔란카 파스토어 본인이 직접 모나코에서 타고 다니다가[8] 2016년 독일 자동차 수집가인 Marc Gindorf에게 판매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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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s/n 39002)은 2003년 차량 등록 이후 제네바의 한 벤틀리 주차장 구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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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모나코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
5. 여담
부가티에서 해당 차량 디자이너인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85번째 생일을 맞이해 39001번(빨간색) EB112를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며 조르제토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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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엄 | - | 타입 41 루아얄 | |
세단 | - | 타입 101 기요르 · EB 112 · EB 218 · 18/3 시론 | |
퓨어 스포트 |
볼리드 · 미스트랄 · 투르비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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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카 | - | 타입 32 · 타입 35 · 타입 51 · EB 110 LM | |
코치빌드 | 디보 · 첸토디에치 · 라 부아튀르 누아르 | ||
리막의 차량 |
[1]
이 때 그는
람보르기니 미우라,
쿤타치,
디아블로 등과 같은 여러 명차들의 디자인을 담당한 유명 디자이너 마르첼로 간디니에게 디자인을 의뢰했다.
[2]
그는 현재 자동차 회사인
벤투리의 CEO이기도 하다.
[3]
정확히는 'Dark Anthracite(어두운 연탄색)'. 실제 사진들을 찾아보면 3번 차량과 크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4]
문서 최상단의 대표 이미지속 차량.
[5]
물론, 차세대 부가티가 유선형 디자인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형태에 약간의 쐐기형 디자인을 첨가해 차별화한
부가티 볼리드와 EB110을 오마주한
부가티 첸토디에치가 있다.
[6]
위에서부터 각각 EB110 SC(#SS39044) 양산형, 미국형 프로토타입인 은색 모델(#SS39017)과 파란색 모델(#SS39030). 그 중 가운데 39017번 차량은 빙판 위에서 최고속도를 측정하는 '세계 빙속 기록' 갱신에 성공했던 차량이다.
[7]
해외에서 한 때 이 사람이
러시아 마피아 간부 출신이다라는 등의
찌라시가 돌기도 했다.
[8]
때문에 한 때 모나코에서 목격담이 다수 전해져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