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6:41:26

보팔 가스 누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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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팔 참사
Bhopal disaster
파일:보팔 가스 참사.jpg
가스 누출이 발생한 유니온 카바이드 보팔 공장의 모습.
사고 발생으로부터 1년 뒤인 1986년 초에 찍힌 사진이다.
사고 요약도
<colbgcolor=#f5f5f5,#2d2f34> 사고 일자 1984년 12월 2일 05시 30분 (UTC+05:30)
참사 D[dday(1984-12-02)]일 ([age(1984-12-02)]년)
사고 유형 화학사고, 산업재해
사고 지점 인도 마디아프라데시 주 보팔
( 유니온 카바이드 인도 현지법인 보팔 공장)
원인 유니온 카바이드 보팔 공장의 E610 저장 탱크에서 아이소사이안화 메틸 누출
사망자 19,787명 이상[1]
(사고 현장에서 3,787명 사망 + 후유증으로 인한 16,000명 사망)
부상자 558,125명 이상

1. 개요2. 배경3. 전개4. 참사의 원인
4.1. 직접적 원인4.2. 안전 체계의 붕괴4.3. 대규모 인명 피해
5. 결과6. 후유증7. 이후8. 영향9. 창작물에서10.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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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4년 12월 2일 인도 마디아프라데시 주 보팔에서 발생한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 영어로는 '보팔 재앙(Bhopal disaster)' 또는 '보팔 가스 참사(Bhopal gas tragedy)'라고 불리며, 사건 이후로 '보팔'이라는 이름은 죽음과 기업, 정부의 부적절한 대처와 태만을 뜻하는 말로 남게 되었다.

공장 주변의 마을에서 살고 있던 500,000명의 사람들이 독성 가스인 아이소사이안화 메틸에 노출되어 2,259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으며, 1일이 채 지나지 않아 1,528명이 추가로 사망하여 총 3,787명이 사망했고, 2006년에 인도 정부에서 공개한 진술서에 의하면 재해 이후로 16,000명 이상이 가스 관련 질병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추정하였다. 결과적으로 최소 20,000명 이상이 기업의 부주의로 인해 목숨을 잃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도 영구적인 후유증을 앓아야만 했다.

2. 배경

이 사건은 유니온 카바이드 인도 현지법인(UCIL; Union Carbide India Ltd) 보팔 공장에서 일어났는데 유니온 카바이드(Union Carbide)는 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화학기업이자 부동액 프레스톤으로 유명한 기업이다. 이 기업은 인도 등 개발도상국에 다수의 공장을 두고 있었으며 개발도상국들도 이러한 투자를 매우 반겼다. 보팔 공장은 1969년에 설립됐으며 사고 당시에는 15년 된 공장으로 인도 투자자들과 유니온 카바이드가 49.1% : 50.9%로 합작투자한 공장이었다. 당시 인도에서는 외국 기업이 지분의 51% 이상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투자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 공장은 시작부터 문제점이 많았다. 보팔이 선택된 이유는 운송 기반시설이 좋았기 때문이지만 이 공장 부지가 위치한 곳은 경공업 및 상업활동지구로 설정된 곳이지, 잠재적 위험이 있는 산업을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공장은 원래 다른 곳에서 준비한 화학물질을 이용해 살충제를 생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비용을 절감하고 시장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원재료 역시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재료를 생산하는 것은 위험한 과정이었다.

UCIL 보팔 공장은 위험물질의 유출 등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당시 기술로선 최첨단인 여러 안전 장치들을 두고 지속적으로 이를 개선해 나갔으며 공장 입지 자체도 인구가 거의 살지 않는 황무지를 선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업 과정에서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 공장의 안전설비와 생산 과정은 미국에서 준수하는 기준에 한참 못 미쳤는데 말이다. 1976년부터 일부 근로자들이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눈치채고 사측에 항의했으나 무시당했다.

1980년대 초에는 흉년 기근이 닥치면서 농부들이 살충제에 투자할 돈이 없어졌고 수요도 줄어들었다. 보팔 공장은 생산량을 줄였고 UCC는 바이어를 찾아나섰으며 1981년부터 포스겐이나 사염화탄소 등 각종 독극물들이 누출되어 근로자들이 사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등 크고 작은 재해가 잇따르면서 불길한 전조가 나타났다.

3. 전개

운명의 1984년 12월 2일 23시를 갓 넘겼을 무렵 한 직원이 이상 현상을 발견했는데 농약 제조에 쓰이는 독성 화학물질인 아이소사이안화 메틸(methyl isocyanate; MIC)을 저장하는 610번 탱크의 온도가 갑자기 미친 듯이 오르고 있었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온도를 표시하는 바늘이 한 바퀴 돌았다고 한다. MIC는 들이키면 체내의 수분과 반응해 에 출혈을 일으키며 극소량이라도 인체에 노출되면 매우 심각한 반응을 초래하는 굉장히 위험한 물질이었다.

당황한 공장 측은 당장 사용 가능한 모든 안전대책을 총동원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하나도 작동하지 않거나 무위에 그쳤고 시간만 흘러갔다. 이미 MIC의 유출이 시작되고 있었던 12월 3일 00시 50분 공장 내부의 가스 농도가 심각하게 높아진 데다 610번 탱크의 콘크리트에마저 균열이 발생해서 보팔 공장은 비상 사이렌을 울리는 것과 동시에 전 근로자 대피명령을 하달했다.

마침내 12월 3일 새벽 2시 15분 610번 탱크가 폭발했고 저장되어 있던 42톤 규모의 MIC 가스가 본격적으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스는 남동풍을 타고 땅바닥에 바짝 붙어 주민들의 거주지로 흘러갔고 이내 몇 분 후 주변 마을에선 갑자기 숨쉬기가 어렵고 목과 눈이 따가운 증세가 발생하여 사람들이 단체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들 중에는 달리다가 쓰러진 사람도 있었고 공장에서 일을 했던 직원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고 차를 타고 빠져나간 사람도 있었다.

첫 환자가 새벽 2시에 병원에 도착하는 것을 기점으로 단 몇십 분만에 주변의 모든 병원은 마비 상태에 몰렸다. 환자들은 병실에서, 복도에서, 병원 밖 길거리에 나앉아 하염없이 치료를 기다렸다. 그러나 병원 역시 상태가 열악한 데다 병원 의사들이 무면허인 경우가 많았고 면허가 있는 병원들마저 의사들이 가스 중독에 대한 치료법을 모르거나 심지어 해독제마저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2] 보팔의 병원과 영안실은 금세 꽉 찼다.

보팔 공장은 2시 10분 사이렌과 함께 대피 경보를 울렸으나 사람들이 대피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초대형 참사가 터지고 말았다. 가스를 들이마신 사람들은 목과 눈이 화상을 입어 타들어가고 구토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끔찍하게 죽어갔다. 공포에 질린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탈출을 시도하면서 도시는 대혼돈에 휩싸였다. 이 와중에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수상 아르준 싱은 주민들을 내팽개쳐두고 혼자만 살겠다고 보팔 외곽에 위치한 자기 궁전[3]으로 도망갔고 이로 인해 고발당했다.

4. 참사의 원인

4.1. 직접적 원인

직접적인 원인으로 610번 MIC 저장 탱크에 1,000~2,000갤런(약 3,785~7,570 L)의 이 유입된 것이 지목되었다. 대량의 물과 MIC의 만남은 곧 화학적 작용을 통해 급격한 온도 상승을 일으켰고 여기에 탱크 내부의 이 화학작용을 촉진시키며 탱크의 폭발을 일으킨 것이었다. 화합물질은 치명적인 가스로 바뀌어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새어나갔다.

사측에서는 이 물의 유입에 대해서 직원의 사보타주로 주장만 할 뿐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으나 노동조합 측에서는 MIC 탱크와 바로 근처에 있는 처리시설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고 설계상 존재하지 않는 파이프의 존재에 대한 현지 직원들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그 외에 저장탱크에 가해진 과도한 압력도 사고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4.2. 안전 체계의 붕괴

보통 화학플랜트는 이런 일에 대비해서 늘 견고한 안전 시스템을 갖추기 마련이며 UCIL 보팔 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전 시스템들은 아래와 같은 이유들로 무력화되었는데 그 이유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사람들의 정신줄을 뽑아내는 수준으로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 가장 근본적인 점이 MIC 탱크와 연결되는 일부 파이프를 화학처리시설에서 끌어와서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학처리시설에선 폭발의 원인인 물을 이용해 막힌 부분을 뚫어 주는 작업을 자주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파이프라인엔 물과 MIC의 혼입을 막는 장치가 달려 있지 않았다. 원인은 담당자가 파이프 부설이 있기 1주일 전 해고된 뒤 대체인력이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방지 장치는 아주 간단한 것으로 겨우 '손바닥만한' 크기의 동그란 판이었다.
  • MIC 저장 탱크의 내부 온도를 0도로 유지시켜야 하는 냉각 시스템이 무려 5개월 동안 가동되지 않았으나 공장 근로자 중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
  • 또 MIC 저장 탱크를 만약에 대비해 질소로 충전시켜 보호하는 장비가 있었으나 고장으로 인해 충전용 질소 탱크의 기압이 1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리 및 개선 보고는 경영진 선에서 지속적으로 무시되고 있었다.
  • 냉각 시스템을 재가동하지 않으면서 610번 탱크의 온도 경보기도 리셋시켜 버렸기 때문에 온도가 미칠듯이 오르는 급박한 와중에도 경보기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 냉각 시스템과 온도 경보기의 무력화에 대비하여, 유독가스가 배출될 경우 이를 자동으로 세정시켜 주는 세정기(Scrubber)도 있었으나 1개월 넘게 고장나 있었다.
  • 세정기까지 고장나는 막장 사태에 대비해 유출된 가스를 즉각 태워버리는 강력한 소각 시스템(Flare stack)이 대비하고 있었으나 파이프가 고장나서 당시에 작동이 불가능했었다. 실무진 측에선 누누이 신규 파이프를 요구했으나 역시 묵살당했다.
  • 가스 유출 + 세정기 무력화 + 소각장비 무력화라는 최악 중의 최악, 그리고 최후의 상황까지 대비하여 MIC 증기를 수용액화시켜 확산을 막도록 소방호스를 비롯한 방수장치가 있었고 다행히 이 장치는 제대로 작동했으나 장치가 제대로 작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와 수압이 작아 앞서 말한 소각 시스템 굴뚝까지 물이 닿지 못했다. 이 역시 경영진 선까지 보고되었고 본사에서도 더 큰 방수 설비가 필요함을 권고하였으나 실질적 예산 투입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 심지어 근로자 대피명령을 하달할 때마저도 막장이었는데 전술했다시피 근로자 대피명령은 12월 3일 새벽 0시 50분에 이루어졌지만 이때는 사이렌을 공장 내에서만 간략하게 울린 다음 근로자들만 대피시켰고 밖에서도 들을 수 있게 사이렌이 제대로 울린 것은 가스가 본격적으로 누출되기 직전인 새벽 2시 10분이었다.
  • 여기에 더해서 새벽 1시부터 공장 근처에 거주하던 주민과 근로자들이 가스 누출로 인해 대피하고 있다는 경관들의 보고를 받은 보팔 경찰이 1시 25분과 가스가 본격적으로 누출되기 5분 전인 새벽 2시 10분 보팔 공장에 두 번이나 문의했는데 보팔 공장은 그때까지도 공장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면서 사건을 은폐했다. 차라리 이때라도 경찰에 알렸다면 인명피해를 그나마 줄일 수 있었을 지 몰랐을 일. 가스 누출 사실이 경찰에 통보된 건 가스가 누출된 지 몇 분 후 한 직원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이 막강한 안전 시스템이 연쇄적으로 붕괴된 이유는 본사 측에서는 '현지 인도인 직원들이 영어로 된 기기 매뉴얼을 몰라서 혹은 너무 복잡한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주장했으며 노동조합 측에서는 '본사측의 운영비용 감축 압박으로 인하여 위험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안전비용을 삭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4.3. 대규모 인명 피해

파일:가스 참사 시체.jpg
공터를 가득히 메운 수많은 시체들의 모습
공장이 설립된 1969년만 해도 보팔은 매우 작은 도시였고 공장 주변은 황무지라 인구가 얼마 없었다. 하지만 일자리가 매우 부족한 개도국들의 특성상 큰 공장을 지으면 그 주변에 인구 밀집지대가 반드시 형성된다. 10년도 안 되어 급격한 이촌향도 현상으로 공장 주변에는 근로자와 가족들이 사는 무허가 주택이 난립했고 공장이 지어진 직후인 1970년 36만 명 가량이었던 보팔 시의 인구는 1984년 약 80만명으로 불어났다[4]. 보팔 시는 급격히 커진 도시인 만큼 인프라가 매우 열악했고 이런 곳에 대형 재해가 터졌으니 50만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하늘도 무심하게도,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남동풍만 불지 않았어도 유독물질이 공장에 묶여 약간의 시간이라도 벌 수 있었겠지만 하필이면 사고 당시 보팔 전역은 남동풍이 부는 상태여서 유독물질이 결국 주택가로 흘러가 버렸다는 점이다.

5. 결과

결국 직접적인 사망자가 최소 3,787명, 추정치로는 16,000명 이상[5], 부상자는 55만 명 이상에 달하는 충격적인 인명 피해를 내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망자와 부상자 중에는 특히 어린이 노인 등의 노약자가 많았는데 이는 이들이 잠자고 있다가 미처 대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아동들은 직접적으로 가스에 노출되기 쉬운 데다 젊은이들보다 유독물질에 더 취약한 편이다.

물론 유독가스의 특성상 건장한 젊은이라고 딱히 더 잘 견디고 그러는 상황은 아니었다. 살기 위해 달렸던 사람들이 더 빨리, 많이 죽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달리느라 숨이 가빠져서 보다 호흡을 많이 하고 그 결과 가스를 더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물에 뛰어들었다가 수용액화된 가스를 마시고서 죽은 사람도 많아 당시 보팔의 강엔 시신들이 물과 함께 흘렀다고 한다.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상당수는 실명 등의 중상을 입어야 했으며 가임여성들은 이후 유산 기형아 출생 등으로 고생해야 했다. 인도 정부는 유가족 1가구당 고작 835달러만 지급했는데 골때리게도 이 돈마저도 몇 년이나 지급이 미뤄졌다.

물론 턱없이 적은 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엔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다. 당시의 인도는 지금보다도 더한 빈곤국가였으며 1984년의 인도 1인당 GDP라고 해봐야 고작 288달러였다. 즉 835달러라면 당시 인도인의 3년치 월급이었다. 2017년 기준으로 인도의 1인당 GDP는 1,942달러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1인당 소득인 1,573달러를 여유있게 능가하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아프리카에서도 막장으로 취급받는 콩고민주공화국이나 짐바브웨조차 인도보다 1인당 GDP가 월등히 높았다. 인도의 1인당 GDP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1인당 GDP를 앞선 것이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고 2010년대 중반의 일이다.

더 씁쓸한 것은 이건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거다. 2018년 5월에 우타르프라데시 바라나시에서 건설중인 고가도로가 붕괴해 4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사망자 보상금은 고작 50만 루피로 한화로 850만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인도의 1인당 GDP가 2019년 추산으로도 2,000 달러에 불과하고 특히 인도에서도 비하르 주 다음으로 낙후되어 GDP가 1,000 달러에도 채 못 미치는 우타르프라데시 주라는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게 후려친 금액은 아니지만.
인도인에게 800달러가 넘는 돈이라면 너무나도 과한 보상이다. 한 450달러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유야 어쨌든 이러한 업보로 말미암아 유니온 카바이드는 제대로 망했다. 심지어 대참극을 벌여 놓고도 당시 미국인 현장 책임자는 위의 망언을 하여 전 인도를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이 말은 인도 전역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고 많은 인도인들은 이 말을 한 사람을 죽여 버리겠다고 분노하여 그는 본국인 미국으로 달아났지만 결국 해고됐다. 하여튼 이 망언 덕에 이 업체는 인도 전역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사고 소식을 들은 당시 UCIL CEO였던 워렌 앤더슨은 인도 정부가 재앙의 후유증을 감당할 수 있게 도울 기술진을 꾸려 황급히 인도로 날아왔으나 공항에서 바로 체포, 구금되었다.[6] 기술자들은 가스 누출의 원인을 평가하고 지역사회로 의료장비와 물품을 실어오기 시작했고 길거리에 온통 사람과 동물의 시체가 어지러이 널려있는 것을 목격했다.

앤더슨은 호출되면 언제라도 다시 인도로 돌아와 법정에 서겠다는 약속을 한 뒤 2,100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강제출국당했고 유니온 카바이드의 주가는 제대로 폭락했다. 거기다 엄청난 이미지 추락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 매출이 떨어졌다. 사고 10일 뒤 앤더슨은 미국 의회에서 자신의 회사에는 안전의 책무가 있고 두 번 다시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행동을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후 몇 달 간 이 비극에 희생된 자신의 직원들을 위해 12만 달러 규모의 구호기금을 설립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1985년 4월에는 기금이 700만 달러로 늘어났다.

6. 후유증

수천 명에 달하는 생존자들은 , 시력 상실, 신경장애, 면역장애 등의 후유증과 계속 싸우게 되었다. 보팔 참사 이후 공장 주변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많은 정신적, 육체적 기형으로 고통받는 경우가 많으며 사실 1969년에 공장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이미 이 지역에서는 기형아들이 태어나고 있었는데 공장의 위험 폐기물들이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를 일절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독성이 있는 물을 마신 것이 선천적 장애를 일으켰다는 장기적 연구 역시 안타깝게도 전혀 없다.

심지어 사건 이후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이 다시 낳은 아이들, 즉 3세대에 해당하는 아이들( 21세기 이후 출생)에게서도 2세대와 똑같은 선천적 장애가 발생하고 있다. 해당 지역에 상수도가 2010년에 이르러서야 설치되었기 때문에 이전까지 오염된 지하수를 마시면서 살아 왔던 2세대 아이들의 몸에 또 다시 독소가 축적되었던 것이다.

공장에 남게 된 독극물은 한참 동안이나 방치되었다. 시설에 녹까지 슬고 있어 문제가 되었으며 심지어 예산 문제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아이들이 공장을 놀이터 삼아 노는 형편이었다가 드디어 인도는 2012년 독일의 독극물 처리업체와 계약을 체결했으며 독극물을 선박으로 독일까지 실어나른 다음 독일에서 소각하여 처리한다고 한다. 그러나 독극물만 사라진 상태지 여전히 공장 부지는 오염된 상태여서 여전히 문제가 된다. 사회활동가들은 안전 문제를 이유로 독성 폐기물을 다른 곳으로 옮겨 소각하려는 정부의 계획에는 반대했다. 2015년에 해당 부지에서 가져온 소량의 폐기물을 시험삼아 소각해 보았는데 방출되는 내용물은 다행히 허용 한계 안쪽이었다.

사고가 났던 보팔 공장은 사고가 난 후에도 한동안 살충제를 계속 제조하였다. 물론 이 사람들이 바보여서 이런 건 아니고 위험물질인 MIC가 차 있는 다른 탱크를 비우기 위해서였는데 그 방법이 살충제를 제조하여 없애는 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꼬박 1주일이 걸렸고 그 기간 동안 수십만명이 살던 보팔은 주민들이 모두 대피해 떠나 유령도시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2년 뒤 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함께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산업재해이자 환경 재앙으로 각인되고 있으나 체르노빌 사고가 원자력 사고라는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묻히고 있다.

이 사고의 영향인지 인도에 건설되는 화학플랜트에 들어가는 기기는 EN 10204 Type 3.2가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EN 10204는 자재 인증에 대한 유럽규격으로 Type 3.2는 철판이나 파이프를 제작할 때부터 OWNER의 감독관이 파견되어서 쇳물 단계부터 검증하는 가장 까다로운 등급이다. 유럽에 설치되는 기기라도 Type 3.2가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인도는 반대다. 그만큼 충격적인 참사였다는 것이다.

7. 이후

처음에 유니온 카바이드는 법적 책임을 면해 보려고 1989년 인도 정부와 재판 없는 합의를 통해 4억 7천만 달러를 지불했다. 하지만 이는 가스 노출에 따른 장기적인 건강 문제와 피해자 수를 크게 과소평가한 것이었고 결국 2001년 인도 정부와 함께 자금을 대어 피해자들을 치료할 병원을 건립하고 10만 명의 비용을 감당할 건강보험 기금을 조성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생존자들은 만성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가족들과 함께 보상을 기다려야 했다. 일부 집단청구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유니온 카바이드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 형사소송은 몇 년 동안 질질 끌면서 이어졌고 2010년에야 최종 판결이 났다. 참사 당시의 경영자 7명이 업무상 과실로 유죄를 선고받았는데 형량은 징역 2년에 벌금 2,000달러. 인도 법에서는 이게 법정최고형이다. 그나마 이들은 모두 자국민인 인도인이며 이 중에 미국인은 한 명도 없다. 자국의 법이 닿지 않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CEO 워런 앤더스는 1991년 보팔 당국에 의해 과실치사로 고발되었고 인도 정부는 그를 살인 혐의로 기소하려고 했으나 미국이 인도 정부의 송환을 거절해 끝내 인도 법정에 그가 서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인도 정부도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정부 요인들이 뇌물을 받아먹고 여러가지 악재들을 나 몰라라 했다는 주장도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으며 당시 보도를 은폐하려던 것이 드러나기까지 했다. 물론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은폐는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결국 80년 역사의 초거대기업이었던 유니온 카바이드는 1999년 다우 케미칼에 88억 9천만 달러에 인수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뉴욕에 있던 본사 건물 JP모건 체이스 은행이 사들였고 2019년 철거되어 재건축 예정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해당 건물은 자발적으로 철거된 건물들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215m)이 되었다.

다우 케미칼은 보팔 참사에 대한 법적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단호하게 거부해 왔다. 법정 소송은 1989년에 종결되었고 희생자들에 대한 지속적 진료와 새로운 보상 요구, 공장부지 오염 제거의 책임 등은 이제 모두 마디아프라데시 주 정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주 정부는 1998년부터 해당 지역의 통제를 맡았다. 인도 정부는 이런 교착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일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2012 런던 올림픽 후원사 중 하나가 다우 케미칼인데 인도 정부 및 선수들은 다우 케미칼의 스폰 철회를 요구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올림픽 보이콧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2020년에는 LG화학 도 인도에서 비슷한 사고를 쳤다. LG폴리머스인디아 가스 누출 사고 문서로. 한국 언론에서도 보팔 사고를 같이 언급할 정도로 닮은 점이 많았다.[7]

8. 영향

행정학· 정책학적 측면에서는 전 세계 환경정책의 기조 자체를 바꿔 버린 사건으로 인식된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70~ 80년대 신자유주의를 행정에 받아들인 소위 신공공관리론(New Public Management)의 영향이 절대적인 시기였다. 환경정책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기존의 정부에서 오염물질 배출 제한을 설정하고 직접 감시하는 CAC(Command & Control) 방식 환경정책의 비효율성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가해졌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MBR(Market Based Regulation) 방식의 환경정책이 제안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MBR 방식의 환경정책은 환경 문제의 해결을 시장원리( 수요 공급)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정부실패에 지친 나머지 시장경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추앙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MBR 방식을 주장한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정부와 시민의 역할을 축소하고 오염물질의 관리를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해 해결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MBR 정책 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오염물질 배출권 거래'다. 각 국가나 회사별로 오염물질 배출량의 한계를 정해 놓고 남는 배출량을 국가나 회사들이 '거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국가별로 이산화 탄소 배출량을 거래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MBR 방식의 환경정책을 주장한 학자들은 환경이나 인간의 생명에 무관심한 거대 기업이 부패한 정부와 결탁할 경우 MBR 방식의 환경정책은 환경문제를 극도로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그것이 최악의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보팔 가스 누출 사고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이 사고 이후 행정학에서의 환경정책은 CAC로의 회귀와 함께 정부와 시민의 적극적인 개입을 전제로 하는 IBR(Information Based Regulation)로 변화했다.

9. 창작물에서

  • 1995년 개봉한 영화 언더 시즈 2에서는 악당 트래비스 데인이 탈취한 위성병기로 중국에 위치한 화학공장을 공격할 때 이 사고를 언급하며 예상되는 인명피해 규모를 비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 김수용의 소설 《울산, 보팔 혹은 우황청심환》에서도 언급된다.
  • 제1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김기홍 작가의 《피리부는 사나이》에서 중요 사건의 배후로 언급된다.
  • 2019년 6월 이 사건을 다룬 연극 <보팔>(Bophal, 1984~)이 한국에서 공연되었다. 포그머신을 사용해 탱크 폭발 장면에서 정말로 무대 위에서 연기가 발생하는 연출을 보여줬다.
  • 2023년 인도에서 제작 및 방영된 4부작 TV 시리즈인 <더 레일웨이 맨 : 1984 보팔,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8]는 이 참사 속에서 활약한 철도청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신들의 목숨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보팔 시민들을 외부로 이송함과 동시에 구호 인력과 물자를 파견하는 데에 최선을 다한 이들의 이야기로, 참사 당일 보팔 시의 아비규환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0. 관련 자료

  • 로버트 F. 하틀리. 《윤리경영 - 고객이 존중하는 기업 만들기》(2006) 21세기북스
  • 샤나 호건 외. 《범죄의 책》(2017) 지식갤러리
  • 《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2015)


[1] 정확한 수치는 불명으로, 일각에서는 20,000명 이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 보팔 가스 참사를 배경으로 다루는 <더 레일웨이 맨 : 1984 보팔,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의사나 간호사들이 환자들에게 하는 처방은 고작 안약 넣기다. 이후에 한 의사는 본인들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힘들다며 당황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3] 인도는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지만 중앙과 떨어진 대부분의 지역은 몇백년 전부터 그곳을 다스리던 왕족(라자라고 부른다)의 후손들이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세습 통치를 하는 경우가 있다. [4] 40여년이 지난 현재는 약 200만명으로 불어난 상태. # [5]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최대 20,000명까지 늘어난다. [6] 그러나 경찰서가 아니라 가택연금이라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7] 공교롭게도 LG화학 역시 극초기 유니온 카바이드와 협력관계였다. [8] 원제 <The Railway Men : The Untold Story of Bhopal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