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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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2대 국회의장비서실장 | |
<colbgcolor=#008ca2><colcolor=#fff> 제19·21·22대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박우섭 朴祐燮 | Park Woo-seop |
|
출생 | 1955년[1] 7월 22일 ([age(1955-07-22)]세)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2] | |
본관 | 무안 박씨 |
재임기간 | 제19대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 |
제22대 국회의장비서실장 (차관급) | |
2008년 4월 11일 ~ 2008년 7월 10일 | |
제21·22대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 |
2010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 |
가족 |
아버지 박주학, 어머니 김기배 형제 2남 4녀 부인 이미영[3][4] 슬하 2남 (장남 박기모) |
학력 |
용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미생물학 / 학사) 인하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 석사) |
종교 | 감리회[5] |
병역 | 단기사병 (질병 사유[6]) |
소속 정당 |
|
경력 |
민청련 1대~4대 총무부장 민청련 5대 운영위원장 민청련 9대 부의장 민청련 11대 의장 신민주연합당 창당발기인 민주당 부대변인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남구 갑 지구당위원장 제22대 국회의장비서실장 ( 임채정 의장) 제19·21·22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장 (민선 3· 5· 6기 / 한나라당· 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7] 국민의당 최고위원 더불어민주당 동구·미추홀구 을 지역위원장 |
링크 | |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제22대 국회의장 비서실장. 연우무대를 창립한 구성원 중 하나로 사실주의계열 공연예술인 출신이기도 하다. 정치계파상 분류를 하려면 민평련계[10]로 분류는 되지만, 내부에서 비주류에 해당되어 사실상 범민평련계 겸 비노 정도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는 김지하, 임진택, 채희완 같은 문예운동계 선배의 뒤를 이어 박인배 등과 함께 2세대 문예 민주화운동, 문예 노동운동계의 정통파로 활동했으나, 1983년부터 민청련 결성을 주도하면서 문예운동세력에서 공개적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옮겨갔고, 87년 개헌 이후 90년대 초반 민청련 의장 역임 후 90년대부터 중앙정치계 진출을 통해 정체성이 문예운동가 쪽에서 공개 민주화운동 출신 정치인쪽으로 완전히 변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중앙정치 진출로의 부침에서 특정 계파들과의 트러블까지 생기면서 힘을 받기 어려운 정치인이 되어 민주화 운동경력[11]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게 되었다.[12]
연극배우 겸 연출가 출신 정치인답게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장 재임 시절(2기~3기)인 2010년대에 영화공간주안[13]이나 학산소극장, 시민미디어센터 등 연극영화 관련시설을 미추홀구에 대량유치한 걸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
1954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경찰인 부친 박주학[14]과 모친 김기배[15]의 2남4녀 중 셋째이자 둘째아들[16]로 태어났다. 경찰이었던 부친이 충청도 내에서 발령이 날때마다 이사를 다녀야했기에, 서산군 태안면으로 이주하여 서산태안초등학교에 재학하다가, 당진군 당진면으로 이주하여 당진기지초등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때 당진초등학교로 전학가서 졸업하였다. 상류층 출신은 아니라 어릴때 부유하지 않았으나, 부친이 파출소장이나 경찰서 계장을 하는 등 60년대 초반 기준으로는 평균보다 나은 경제사정[17]으로 가난하지는 않게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박우섭은 초등학교에 도시락을 못싸온 아이들과 자기 도시락을 나눠먹고, 학교 끝나면 당진의 냇가에서 그들과 쥐불놀이를 하며 놀곤 했다.[18] 부모가 개신교(감리교)인이라 자연스레 어릴때부터 개신교인이 되었다.[19]국민학교때 당진에서 공부를 잘하는 걸로 유명했던 그는 졸업후 서울에 있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서울로 유학하여 용산중학교[20], 용산고등학교(23회),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생물학과[21]를 졸업하였다. 단, 운동권내에서 박우섭은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 72학번인게 유명한데[22], 주민등록이 늦어진 케이스로 추정된다. 실제 나이는 1954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공연예술활동으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 신입생때 서울대 단과대 풍물패 중 하나로 유명한 '두레'에 있으며 학생운동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되었으나, 이내 연극에 빠져 두레활동을 금방 그만두고[23] 서울대 문리대 연극회에 들어가 연극배우 생활을 하며 연우무대 초기 구성원으로까지 활동했다.[24]
1983년 민청련 설립 초기, 홍보부장이던 청년기 30살 박우섭의 모습.
김근태 석방 직후, 민청련 간부들의 기념사진. 혼자 넥타이를 매고 있는 두번째 줄 남성이 박우섭이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연행되었던 1000여명의 학생 중 하나였다. 시위 주동자는 아니어서 오래 잡혀있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주동자 중 하나로 잡혀간 이해찬이 경찰서에서 경찰들에게 엄청나게 폭행[25]당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26]고 한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계속 주요시위에 참여하여 1975년 4월 3일 긴급조치 반대 시위 때도 잡혀가서 한달간 잡혀 있었다. 이후 서울대에서 무기정학을 당해버렸고[27]곧바로 징병 영장이 나와서 1976년 가을까지 방위로 복무하였다.
소집해제 후에는 이미 퇴직한 아버지 대신 경제활동을 해야 했기에 대한항공에 고졸공채로 입사해 1976년말부터 1978년 가을까지 2년이 조금 안되는 기간동안 회사원 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와중에도 1977년에 연우무대 창립에 참여해서 연극인 생활을 병행했다. 회사생활을 2년도 못한건 잘렸기 때문인데, 학생운동하던 후배들 몇명을 숨겨주다가 1978년 10월에 경찰에 체포되어 범인은닉 혐의로 잠시 구속되었지만 오래되지 않아 검찰이 수사 후 기소유예로 결정하여 풀려났기 때문이다. 출소한 이후 1979년에는 연극만 했고[28]온전히 예술인 겸 문예 노동운동가로 살려고도 고민했다고 하는데, 1년도 안되어 그해 가을 박정희가 죽고 연말에 전두환의 쿠데타로 신군부까지 들어서면서, 기껏 군사독재가 끝난걸 또 연장시킨 전두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1980년부터 김근태 같은 선배들처럼 공개적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목숨을 건 생활을 하며 공개운동 지도자로 사회적 정체성이 변해버리게 되었다.
1980년대 구속 당했던 민청련 간부 명단. 당시 운영위원장이던 박우섭.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수배되었고 인천과 부천 등지[29]로 도망쳐 3년간 이리저리 숨어사는 생활[30][31]을 하였다. 도망자 6명이 사는 인천 구월동 신축주공아파트 월세방을 본진으로 하면서, 비상사태[32] 때마다 수도원이나 지인집 등을 옮겨다니며 살았는데, 그러던 도망자 생활 중에도 경인지역 공장노동자들의 노동연극을 주도하거나 다른 연극인들을 노동연극단체와 연결하는 등 노동문예운동에 계속 관여하였다.
10명도 안되던 초기 민주화운동청년연합[33], 즉 민청련 결성 계획부터의 주동 세력(당시 민청협 이후 인천시 구월동에 숨어 살거나 인천부천을 왔다갔다 하며 살던 사람들이 많아 소위 구월동사람들이라 불리운다. 그중에 김근태도 있었다.)이었고, 최민화와 함께 김근태를 의장으로 추대하며 초기 민청련을 이끌던 인물. 이후 공권력의 민청련을 향한 공세가 시작되고, 의장 김근태가 잡혀간 이후에는 박우섭 본인도 잡혀가기도 하고, 출소하고 나서 민통련 활동과 민청련 부의장 활동을 병행하기도 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1989년 11대 의장이 되었다. 먼 미래에는 파가 갈리지만, 고등학교 1년선배 겸 서울대 동기[34]로 함께 7080시대 민주화운동을 한 절친 이해찬[35]과도 민청련에서 함께 활동했었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중 하나인 총무국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3. 정치 활동
1991년 신민주연합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통합 야당 민주당이 출범하자 부대변인을 지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에 인천직할시 북구 을(현 계양구 일대) 선거구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이병현에 밀려 탈락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조순 서울특별시장 후보 캠프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신한국당 심정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공천에서 유필우 전 인천광역시 정무부시장에 밀려 탈락하자[36]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민봉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구청장인 무소속 정명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다시 한나라당을 탈당하여[37] 무소속으로 있다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영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38] 같은 해 이호웅의 국회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2006년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원복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8년 4월부터 같은 해 7월까지 임채정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5년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제1차 전당대회에서 박력있는 연설로 호응을 모았으나 최고위원에서 6위로 낙선하였다. # 현장의 열기로 대의원 득표 1위를 기록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당원 투표와 여론 조사에서 밀린 것이 큰 듯. 그러나 안철수의 비서실장을 지낸 원내 정치인인 문병호 등을 앞섰다.
2016년 7월 13일 인천남구을 지역위원장에 정의당과 단일화로 사퇴한 후보를 배려하지 않았다고 탈당서를 제출하였다가 주변의 만류로 취소, 2016년 8월 1일 인천시당 위원장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2017년 2월 손학규를 따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여 국민의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최고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바른정당과의 합당에 반대하여 2018년 1월 31일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
2019년 5월 24일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하였고, 6월 25일 남구 을 지역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21대 총선 동구·미추홀구 을 예비후보로 등록하였지만 경선에서 남영희에게 밀렸다.[39]
이후에는 사회단체 운동에 매진하는 등 사실상 정치계와 거리를 두고 있다. 한때 일부 언론에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인천광역시장 예비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출마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4.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152484><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fff><rowbgcolor=#15248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인천 남 갑 |
[[새정치국민회의| |
26,304 (27.96%) | 낙선 (2위)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3,745 (17.58%) | 낙선 (3위) | ||
2002 |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인천 남구청장 |
|
62,454 (50.80%) | 당선 (1위) | 초선[40] |
2006 |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열린우리당| |
43,818 (31.60%) | 낙선 (2위) | ||
2006 |
하반기 재보궐선거 ( 국회의원) |
인천 남동 을 | 4,203 (12.29%) | 낙선 (3위) | [41] | |
2010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인천 남구청장 |
[[민주당(2008년)| |
86,996 (53.32%) | 당선 (1위) | 재선 |
2014 |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새정치민주연합| |
86,214 (50.20%) | 3선[42] |
여담으로 구청장선거는 민주당계 정당 침체기였던 2006년 지방선거를 제외하면 모두 당선 되었지만, 국회의원 선거는 3번 출마했는데 모두 낙선하였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때 동구·미추홀구 을 지역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남영희에게 밀려 낙천되었다. 비슷한 케이스가 용산구 기반인 성장현과 서천군 기반인 나소열, 순천시 기반으로 하는 노관규와 유사한데, 성장현과 노관규도 국회의원 선거는 모두 낙선했지만 각각 용산구청장[43], 순천시장 선거는 모두 당선되었다.
5.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신민주연합당| |
1991 | 정계 입문 |
|
1991 - 1995 | 합당[44]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5 | 탈당[45] |
[[새정치국민회의| |
1995 - 2000 | 창당 |
[[새천년민주당| |
2000 | 합당[46]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0 - 2002 | 탈당[47] |
|
2002 - 2004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4 | 탈당[48] |
[[열린우리당| |
2004 - 2007 | 입당 |
[[대통합민주신당| |
2007 - 2008 | 합당[49] |
[[통합민주당(2008년)| |
2008 | 합당[50]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8 | 탈당[51] |
[[통합민주당(2008년)| |
2008 | 복당[52] |
[[민주당(2008년)| |
2008 - 2011 | 당명 변경 |
[[민주통합당| |
2011 - 2013 | 합당[53] |
[[민주당(2013년)| |
2013 - 2014 | 당명 변경 |
[[새정치민주연합| |
2014 - 2015 | 탈당[54] |
|
2015 - 2016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6 - 2017 | 탈당[55] |
[[국민주권개혁회의|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7 | 창당준비위원회 |
[[국민의당(2016년)| |
2017 - 2018 | 합당[56]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8 - 2019 | 탈당[57] |
|
2019 - 현재 | 복당 |
6. 기타
- 문화예술운동 쪽 민주화운동가 출신이라 예술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어, 정치인으로서는 특이하게 영화 출연 경력이 있다.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선배인 장선우 감독의 꽃잎에서 의사 역할 단역으로 나왔고,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에도 단역으로 나왔다고 한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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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 동 | 남 | 연수 | 남동 |
김홍섭 | 이화용 | 박우섭 | 정구운 | 윤태진 | |
부평 | 계양 | 서 | 강화 | 옹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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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 동 | 남 | 연수 | 남동 |
김홍섭 | 조택상 | 박우섭 | 고남석 | 배진교 | |
부평 | 계양 | 서 | 강화 | 옹진 | |
홍미영 | 박형우 | 전년성 | 유천호 | 조윤길 | |
* 강화군수
안덕수 사퇴 (2011.12.2.) * 중구청장 김홍복 구청장직 상실 (2012.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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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섭 | 이흥수 | 박우섭 | 이재호 | 장석현 | |
부평 | 계양 | 서 | 강화 | 옹진 | |
공석 | 박형우 | 강범석 | 이상복 | 조윤길 | |
* 부평구청장 홍미영 사퇴 (2018.2.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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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진 | 정현복 | 조길형 | 최수일 | 최명희 | |
최양식 | 하계열 | 한규호 |
}}} }}}}}} |
[1]
이건 주민등록 나이이고, 실제 나이는 다르다. 서울대학교 72학번으로, 주민등록이 늦어진 빠른 1954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본인이 실제나이를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어도 용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1년 선배
이해찬(1952년생)보다 두살이 어리다고 말한적이 있다.
[2]
무안 박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3]
반도상사 공장 노조원으로 1980년대초 노조원 문예교육으로 탈춤공연을 가르치던, 수배자 신분의 박우섭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였다. 결혼을 약속한 뒤 그녀가 임신하자, 당시 박우섭이 민주화운동 동지 5명과 함께 숨어 살던 인천시 구월동 주공아파트에 그녀를 데려가 동거했다고 한다. 방2개 짜리 소형 아파트였는데, 한방을 쓰게 된 박우섭 부부 때문에 나머지 5명이 좁은 방 한칸에 살았다고 한다. 이미 임신한 상태였으나, 도망자 생활 중 언제 결혼식을 할지 몰라,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개신교 신자였음에도
김근태와
인재근 부부의 권유로 1982년 여름 인천 주안성당에서 비밀리에 혼인성사를 했다. 그런뒤 부인이 1983년초 장남 박기모를 낳자, 몇달뒤 고향 당진으로 돌아가 당진의 감리교회에서 정식 결혼식을 하였다. 부인 이미영은 결혼 뒤 민청련을 만든 남편 박우섭을 도와 민주화운동을 하였고, 민청련 의장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 및 다른 민청련 간부 부인들과 함께 민청련 가족모임을 이끌며, 그 유명한 김근태 고문사건때 고문반대 및 석방시위도 하였다.
[4]
민청련 가족모임의 민청련 탄압 반대 시위자로 참여한 이미영 여사. 사진 속 머리띠들을 자세히 보면 머리띠에 "탄압말라"라는 글자가 쓰여진 사람은 자켓입은 여성 한명 뿐인데, 그 자켓입은 여성이 박우섭의 부인 이미영이다. [5] 미추홀구 주안5동 인천은혜감리교회에 출석한다. # [6] 민주화 운동가들 중에 감옥에서의 수감생활로 군면제된 사람이 많지만, 그는 하필 군복무 이후에서야 수감생활 경험이 생겼다. 그마저도 20대 때는 한두달 정도씩 2번 살다가 풀려나온게 다였고, 30대 때 민청련 간부가 되어서야 체포 후 1년 이상 수감생활을 했다. 중이염으로 방위판정 후 1975년 여름부터 1976년 가을까지 방위로 복무했다. 당시 방위 제도상(근무시간 합쳐서 12개월=365일=1일 8시간 기준 2920시간, 휴일 휴무나 토요일 오전근무 등 빠지는 시간을 다 복무에서 빼버렸기에 보통 12개월보다 3개월 정도 더 근무했다. 나중에 80년대가 돼서야 휴일포함 복무기간 제도가 생겼다.) 실제 복무기간이 다 달라서 대략 15개월 복무로 추정. [7] 3선 다 미추홀구 이름이 남구일때 당선됐으나, 마지막 구청장 임기종료 전에 미추홀구로 바뀌었기에 미추홀구청장으로 퇴임했다. [8] 발음이 비슷한 걸 이용한 언어유희로, 박우섭이 모든 종류의 연설 때마다 도입부에 청중들에게 본인의 이름을 두번만 불러봐 달라면서 하는 시그니처 멘트. 부모님이 본인에게 웃으며 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다면서 농담을 하며 청중의 호응을 유도하는 멘트다. 청년운동가였을 때부터 연설할 때 썼었다고. [9]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정치 연설회 자리의 특성상 어수선한 분위기가 잦아지는 경우가 오면, 그가 자기연설에 대한 청중의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 쓰는 멘트다. 잔치는 언제나 그 순간 잔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라는 인생철학이라고. [10] 2017년 민주당 탈당 때문에 손학규계라는 설도 있으나, 실제 민주화운동은 손학규가 아니라(박우섭이 한창 민주화운동할때 손학규는 민주화 운동을 멈추고 해외 유학을 가서 상당기간 학자의 길을 걸었다) 김근태와 직접 한 사람(수배자 시절 김근태와 같은 주공아파트에 숨어 살았다)이라 그렇게 부르기도 어려운 포지션. 참고로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2002 대선때도 경선 당시 박우섭은 노무현이 아닌 김근태를 지지했다. 2007년 대선때는 경선에서 이해찬을 지지했고, 2012년에는 손학규를 지지했다. 전체적으로 민평련계로의 색깔이 강한 사람이, 존경하던 선배 김근태의 청년기 동지로서의 손학규를 김근태가 부재하게 된 뒤에 대체자로 지지했다고 보는게 그나마 자연스럽다. 박우섭 본인이 계파에 얽매이는 정치를 지양하지만, 그동안의 정치적 발언을 보면 자신을 민평련계로 생각하는 편. [11] 김근태, 이해찬 등 7080 민주화 운동하면 생각나는 사람들과 같은 조직에서 지도자로 활동한 원로다. [12] 90년대에 빨리 국회의원이 됐다면 민평련계 주요 포지션 정치인이 되었을 거라는 평가도 있으나, 본인의 정치소신에 대한 고집이 너무 강한데다가 정치계에 들어오고 나서 생각보다 선거운과 공천운이 다 안 따른 정치인이라 비주류로 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 입문 후 1997년 대선때도 야권 후보로 김대중이 아닌 정대철(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정일형의 아들)을 지지하다가 동교동계에 찍혔고, 2002년 대선 경선때는 노무현이 아닌 김근태를 지지하다가 뜻대로 안되던 상황에 지방선거 당내 공천까지 안 풀리자 탈당해버리고, 민봉기의 권유로 한나라당에 가서 경선으로 후보가 되어 선거 당선으로 구청장이 되면서 친노세력에게 찍힌데다가, 한나라당에 갔다는 것 때문에 김근태를 지지하다가 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민평련계에서도 소외되었다. 그런 뒤에는 2004년에 다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으로 돌아가면서 한나라당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지만, 민평련계에서도 환영을 못 받는 등 모든 계파에서 주류가 되기 힘든 위치가 되었다. 이후에도 07대선 경선은 이해찬, 12대선 경선은 손학규를 지지하면서 계속 삐딱선이미지와 비주류이미지를 정치계 내에서 굳혀가서 민주당 주요계파인 동교동계, 친노, 친문세력 모두에게 찍히는 상황에다가, 민평련계에서도 중심에 가지 못해 적극 지원을 못 받는 비주류 정치인 위치가 굳혀졌다. 그가 그나마 본인 정치지역 외 중앙언론에서 주목받았던 건 딱 한번인데, 정치인 된지 25년이나 지나서 20대 총선 김종인 비대위 비례대표 공천 파동때 박우섭이 가장 앞장서서 크게 반발했던 때뿐이다. 이미 97대선 경선때 김근태계(민청련) 내에서도 일부가, 김대중을 경선없이 대통령후보로 추대하자고 하던 동교동계에 반기를 들고, 자신이 김대중의 직계 제자 출신 정치인이었음에도 당시 김대중이 아닌 정대철을 밀며 경선을 요구하던 김상현(젊을때 김대중에게 웅변, 즉 연설을 직접 교육받았기에, 동교동계 대부분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김대중을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극소수에 속하던, 동교동계라는 개념을 넘어 정통 김대중계 정치인이었다.) 쪽에 박우섭이 서자, 민평련계 정치인들이 박우섭에게 "어쩌려고 동교동계에게 찍힐 짓을 대놓고 하느냐?"며 만류가 있었다고. [13] 독립영화 및 예술영화 매니아들에게 꽤 유명한 곳으로 인천 이외 지역에서도 찾아오는 인천 유일의 예술영화관이다. [14] 2005년 별세. 충청도에서 경찰간부를 하다가 1974년 유치장에 들어간 아들을 인맥을 써서 풀어준 후 1975년 강요에 가깝게 퇴직을 당했다. 아들의 민주화운동을 많이 반대하다가 이후 마음을 바꾸고 지지하게 되어, 아들의 민주화 동지들을 숨겨주는 일들을 시작으로 민주화운동가들 지원에 관련된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즉 아들로 인해 아버지도 민주화운동가가 되었던 것. 훗날 한겨레신문 지국장을 하였다. [15] 2015년 별세. [16] 본인이 태어나지 않았을때, 아기였던 나이에 병으로 돌아가신 친형님이 있다고 한다. 625전쟁 중에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부모님에게 들었다고 한다. 즉 직접 만나본 적이 전혀 없는 형님이 있던 것. 과거 언론에서는 외아들로 나왔지만, 훗날 실질적으로 외아들로 살았던게 와전된 것이라고 본인이 밝혔다. 또한 여동생 중 1명도 본인이 어렸을때였던 1960년대초에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17] 물론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손에 꼽는 빈곤국이었기에, 그때 기준 서민 중 나은 편이라고 해봤자 현재 기준 기초생활수급자 수준의 경제환경과 다를 바 없었고, 형제도 많았던 형편상 경찰간부라고 해도 별반 나을게 없어 박우섭의 모친이 보따리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루 두끼만 매일 먹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주기적으로 굶는 일이 잦던 당시 일반인들은, 굶지는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그 집이 여유 있었다고 말할 뿐, 현재의 경제적 여유 개념과는 실질적 유사점이 없다. [18] 예산 태생이나 예산에서 오래 살지 않아 특별한 기억이 없고, 당진에서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살았으며, 교회도 당진에서부터 다녔으며, 본인이 서울로 유학을 갔을때도 부모가 당진에서 정착하고 평생 살아서 민주화운동가 생활때도 당진을 본가로 하며 수도권에서 왔다갔다 하던 관계로, 박우섭은 예산이 아니라 당진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19] 충남 개신교는 유관순 열사(천안 개신교인)로 대표되는, 개신교 독립운동계의 성지 세력 중 하나라 (북한쪽에서는 평양개신교, 남한쪽에서는 충청개신교, 국외에서는 만주개신교가 독립운동쪽으로는 알아준다) 충남 개신교는 반독재 성향도 강한 편이었다. 유관순으로 잘 알려진 1919년 4월 1일의 충청도 만세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충남 개신교인 세력. 이화학당 휴교 후 귀향으로 삼일운동을 천안 개신교계에 알린 유관순과 그녀의 사촌언니 및 유관순의 부모 등 일가가 처음 뜻을 합쳐 천안 만세운동 세력들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천안 뿐만 아니라 수많은 충남 및 충북(충남 인접지역) 개신교 세력이 연합하였다. [20] 박우섭은 충청도, 동기생 최낙정은 경상도에서 올라온 촌놈이라고 핍박을 받았고 그래서 더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21] 박우섭이 대학을 입학한 시절은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시대다. 즉 박우섭은 신입생때 지금의 대학로에서 대학을 다녔다. 후에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의 운동권 탄압의 일환(서울대분산 문제도 있었기에 이게 모든 이유는 아니지만)으로 서울대학교가 70년대 당시 서울 중심에서 먼 촌동네 취급 받던 관악산으로 대이주를 하고, 여러 변화를 겪으며, 학제가 많이 바뀌어서 미생물학과는 현재 학부에서는 농생대 응용생물화학부 응용생물학과 내 개별전공으로로 변해있고, 대학원에서는 농생명공학부 식물미생물학과로 변했다. [22]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까지 학생운동 및 민주화운동시기, 학번별로 민주화운동 작업을 관리하던 시절, 몇몇동기들과 함께 서울대학교 72학번 운동권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게 바로 박우섭이다. [23] 본인이 음감이나 박자감 같은 음악적 능력이 좋지 않아서 노래도 잘 부르는 편이 아니었는데 풍물패에 오래 있는게 힘들게 느껴진 상황에서 연극반이 너무 좋아져서 거기만 갔다고 한다. [24] 박우섭이 연우무대 초기멤버인게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건 박우섭이 연우무대가 창립된지 얼마 안되던 초기에 수배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공개활동을 잘 못하고, 도망자 신분으로 활동을 할 때는 가명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박우섭이 연우무대에 있으며 수배자 신세이던 시절 1980년대초 인천 부평공단 쪽에서 노조운동하던 노동자들 연극공연을 연출하기도 했고 다른 연극인들을 부평공단 노동연극으로 유치해오기도 했다. 박우섭이 인천과 연고가 없음에도 인천 정치인이 된건 80년대초에 인천 내에서 구월동과 부평 및 부천을 오가며 문예운동을 했기 때문. 문재인 정권 이전 이명박정부말 박원순서울시장 취임 직후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된 예술인 겸 노동운동가 박인배(서울대학교 물리학과 72학번, 2017년 5월 사망)와도 대학 및 연극회 동기로 젊을때부터 함께 활동했다. 단, 1983년 가을의 민청련 활동 이후로는 목숨을 건 공개 민주화운동가 겸 도망자 생활과 체포 및 구속의 연속으로 살아서 연우무대건 그 외 공연이건 활동을 할 여력이 없어 사실상 연이 끊겼고, 그 시절 이후에는 완전히 정치계로 들어가서, 공연계에 관심은 있었지만 깊게 관여하지 못했다. [25] 경찰들이 일부러 같이 연행된 학생들 앞에서 본보기로 삼으려고 미친듯이 때렸다고 한다. 말을 걸다가 때리는게 아니라 그냥 나오라고 한 다음에 철창 앞에서 바로 주먹으로 때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맞아 이해찬이 쓰러지자, 여러 경찰들이 쓰러진 이해찬을 계속 주먹과 발로 무자비하게 때렸다고 한다. [26] 속으로 "저렇게 끝없이 맞았는데도 아직 살아있는게 놀랍다"고 느낄 만큼 경찰들이 이해찬을 그냥 계속 패고 또 팼다고 한다. 유치장 바닥이 거의 피웅덩이로 보였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한다. 경찰이 폭행을 멈춘 뒤에는 "해찬이형이 이미 죽어서 때리던걸 멈춘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벌벌 떨었다고. [27] 1994년 사면복권으로 입학 22년만에 학위증을 받았다. [28] 1979년 10월 연우무대 연극으로 공연된,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연극 <한줌의 흙>의 각본을 썼고, 배우로도 참여했다. 1980년 3월에도 황석영의 희곡집으로 각색공연한 연우무대 레전드 연극인 < 장산곶매>에 출연했었다. 당시 주연배우로 함께 한 사람은 노무현 정권 문화부장관이자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 지니의 한국어 더빙 성우로 유명한 예술인 김명곤. 그러나 그게 사실상 마지막 공연이 되었고, 5월에 수배자 신세가 되고 그게 끝난 뒤에도 공개민주화투쟁 지도자가 되어 연극계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29] 고향 당진에도 잠시 갔다가 금방 다시 도망쳤다고 한다. 당시 본인이 진행하던 문예교육(탈춤)을 받던 여성 공장 노조원(현재의 부인 이미영 여사)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 상황이었음에도 도망을 다녀야해서 결혼을 못했고 1983년까지 결혼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1983년초에 부인이 첫째 아들을 출산하고도 몇달 뒤에야 당진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다. 훗날 몇년뒤 부인이 둘째아들을 낳을 때 쯤에는 그전에 구속되어 감옥에 있었다. [30] 그 와중에도 1982년에, 같이 숨어사는 생활을 하던 민주화운동 동지 소준섭과 함께, 지금도 518운동 관련 레전드문서 중 하나인 "광주백서"라는 팜플렛을 만들기도 했다. 소준섭이 70년대말에 구속되었을때 감옥에서 만난 광주 출신 운동가에게 연락을 하여 두사람이 1980년 518때 광주에 있던 여러 계층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하고 자료를 모아, 수많은 기록들을 하나의 백서로 정리한 것. 물론 콘텐츠는 소준섭과 그 광주 운동가가 다 만든 것이고, 박우섭은 이를 곳곳에 넘기기 위해 수백장으로 찍어 내는 일을 했다. 이는 후에 그 유명한 황석영의 넘어넘어를 만드는데 원작자가 모은 자료 외에, 외부에서 참고한 핵심자료 중 하나로 쓰였다. [31] 참고로 이 넘어넘어라는 책은 원래 황석영이 주도해서 쓴게 아니라 자료를 모아서 원본을 쓴 원작자들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권력 눈치보던 출판사들의 거부로 그들 저자 명의의 책 출판이 여의치 않자 문학계에서 잘나가던 황석영에게 부탁하여, 어떻게든 대중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 하니 황석영 당신의 저자 명의로 출간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출판한 거였다. 황석영은 수락후 내용은 건드리지 않고, 한달간 기술적인 편집, 즉 다 쓴 책 내용 속 일부의 문체 일관성 문제나 글의 부드럽지 못한 부분들만 원작자들과 상의 후 고치는 일, 원래 본인 문체로 보이게 수정하기 등 내용과 무관한 딱 편집자일 정도만 하였다. 거의 30년이 지나서 2014년에 개정판을 내기로 하면서 원작자 2인과 황석영이 뭉쳐 3인 저자로 새롭게 편집방식을 현대화에 맞게 크게 고치며, 그 20여년간 새롭게 나온 518정보들까지 다 모아서 새로운 책으로 출판했다. [32] 본인들의 위치가 노출된 것 같다는 첩보가 들어오거나 여러가지로 걸릴 확률이 생기면 도망쳤다고 한다. 후에는 2명이 경찰에 잡혀서, 이 소식을 들은 나머지 4명이 도망치기도 했다. [33] 설립 당시 집행부 의장 김근태, 부의장 장영달, 홍보부장 박계동, 총무부장 박우섭, 재정부장 홍성엽, 사회부장 연성수. 상임위원회 의장 최민화, 부의장 이해찬, 이을호. 참고로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을호는 민청련 운영을 계속하다가, 김근태가 전두환 정부의 민청련 탄압으로 잡혀갈때 같이 잡혀가서 끔찍한 고문을 당해, 김근태처럼 심각한 고문후유증을 겪어 정신질환자가 된 비운의 운동가이다. 전주출신으로 고등학교때 전교1등만 하던 전주의 수재로 유명했었다고 하며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운동권 지도자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의 부인 역시 이화여대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으로, 함께하던 남편이 잡혀가 고문으로 환자가 되어버린 뒤에도 남편을 돌보면서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정치인이 되어 서울시의원을 역임하였다. [34] 이해찬이 서울대 공대 입학 후 서울대 다른 과를 가려고 재수를 했다. [35] 이해찬은 문재인보다 정치계 선배인만큼 친노이나 비문 출신에 20대총선 당시 문재인이 밀어붙인 김종인 비대위원장 취임 후 김종인세력에 의한 컷오프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결국 친문세력과 연합하여 문재인 정권의 탄생을 주도했고, 문재인 정권내 당대표까지 역임했다. 박우섭 역시 문재인보다 정치입문이 빠른 만큼 원래 비노출신이었음에도, 반노나 반문세력은 아니었으나, 김종인 비대위 출범 후에 가장 적극 반발하며 정치방향이 갈리게 된다. 박우섭은 결국 민주당 탈당까지 해버리고 손학규가 있던 국민의당으로 가버려 실질적 반문세력이 되었었다.(당시 재선 구청장 신분이었는데, 탈당 및 국민의당 입당 이후 3선까지 가능한 구청장선거 출마요구를 거부하고 야인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민주당으로 복귀는 했으나, 김종인의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시절의 행태를 매우 싫어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과거 경력상, 김종인만 적극적으로 비난했지 문재인 전 대표 겸 대통령을 비난한적이 없음에도 여전히 비문이나 반문 색채로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36]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추대 주장을 거부하고 경선을 주장하면서 동교동계에 제대로 찍혔던 게 공천탈락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37] 이때 한나라당 정치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38] 당시 열린우리당은 경인 지역에서 참패했다. 당선된 경인 지역의 기초단체장은 구리시장 한 명. [39] 그러나, 남영희도 안상수와 윤상현과의 표 분열에도 불구하고, 현역 의원인 무소속 윤상현 후보에 171표 차이로 밀려 아깝게 낙선하였다. [40] 2004.2.21 한나라당 탈당, 12.23 열린우리당 입당 [41] 전임자 이호웅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42] 2017.2.8 더불어민주당 탈당, 2.17 국민의당 입당, 2018.1.31 국민의당 탈당 [43] 다만 2006년 지방선거는 민주당계 정당 침체기여서 구청장 선거에서 낙선한거는 제외하고 모두 당선되었다. [44] 민주당과 신설 합당. [45]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 [46]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 [47] 총선 공천 불복으로 인한 탈당. [48] 당내 노선차이로 인한 탈당. [49]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 [50] 민주당과 신설 합당. [51] 국회의장비서실장 취임으로 인한 자동 탈당. [52] 국회의장비서실장 퇴임으로 인한 자동 복당. [53]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 [54]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 [55] 당내 노선차이로 인한 탈당. [56] 국민의당에 흡수 합당. [57] 당내 노선차이로 인한 탈당.
(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 반대)
민청련 가족모임의 민청련 탄압 반대 시위자로 참여한 이미영 여사. 사진 속 머리띠들을 자세히 보면 머리띠에 "탄압말라"라는 글자가 쓰여진 사람은 자켓입은 여성 한명 뿐인데, 그 자켓입은 여성이 박우섭의 부인 이미영이다. [5] 미추홀구 주안5동 인천은혜감리교회에 출석한다. # [6] 민주화 운동가들 중에 감옥에서의 수감생활로 군면제된 사람이 많지만, 그는 하필 군복무 이후에서야 수감생활 경험이 생겼다. 그마저도 20대 때는 한두달 정도씩 2번 살다가 풀려나온게 다였고, 30대 때 민청련 간부가 되어서야 체포 후 1년 이상 수감생활을 했다. 중이염으로 방위판정 후 1975년 여름부터 1976년 가을까지 방위로 복무했다. 당시 방위 제도상(근무시간 합쳐서 12개월=365일=1일 8시간 기준 2920시간, 휴일 휴무나 토요일 오전근무 등 빠지는 시간을 다 복무에서 빼버렸기에 보통 12개월보다 3개월 정도 더 근무했다. 나중에 80년대가 돼서야 휴일포함 복무기간 제도가 생겼다.) 실제 복무기간이 다 달라서 대략 15개월 복무로 추정. [7] 3선 다 미추홀구 이름이 남구일때 당선됐으나, 마지막 구청장 임기종료 전에 미추홀구로 바뀌었기에 미추홀구청장으로 퇴임했다. [8] 발음이 비슷한 걸 이용한 언어유희로, 박우섭이 모든 종류의 연설 때마다 도입부에 청중들에게 본인의 이름을 두번만 불러봐 달라면서 하는 시그니처 멘트. 부모님이 본인에게 웃으며 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다면서 농담을 하며 청중의 호응을 유도하는 멘트다. 청년운동가였을 때부터 연설할 때 썼었다고. [9]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정치 연설회 자리의 특성상 어수선한 분위기가 잦아지는 경우가 오면, 그가 자기연설에 대한 청중의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 쓰는 멘트다. 잔치는 언제나 그 순간 잔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라는 인생철학이라고. [10] 2017년 민주당 탈당 때문에 손학규계라는 설도 있으나, 실제 민주화운동은 손학규가 아니라(박우섭이 한창 민주화운동할때 손학규는 민주화 운동을 멈추고 해외 유학을 가서 상당기간 학자의 길을 걸었다) 김근태와 직접 한 사람(수배자 시절 김근태와 같은 주공아파트에 숨어 살았다)이라 그렇게 부르기도 어려운 포지션. 참고로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2002 대선때도 경선 당시 박우섭은 노무현이 아닌 김근태를 지지했다. 2007년 대선때는 경선에서 이해찬을 지지했고, 2012년에는 손학규를 지지했다. 전체적으로 민평련계로의 색깔이 강한 사람이, 존경하던 선배 김근태의 청년기 동지로서의 손학규를 김근태가 부재하게 된 뒤에 대체자로 지지했다고 보는게 그나마 자연스럽다. 박우섭 본인이 계파에 얽매이는 정치를 지양하지만, 그동안의 정치적 발언을 보면 자신을 민평련계로 생각하는 편. [11] 김근태, 이해찬 등 7080 민주화 운동하면 생각나는 사람들과 같은 조직에서 지도자로 활동한 원로다. [12] 90년대에 빨리 국회의원이 됐다면 민평련계 주요 포지션 정치인이 되었을 거라는 평가도 있으나, 본인의 정치소신에 대한 고집이 너무 강한데다가 정치계에 들어오고 나서 생각보다 선거운과 공천운이 다 안 따른 정치인이라 비주류로 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 입문 후 1997년 대선때도 야권 후보로 김대중이 아닌 정대철(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정일형의 아들)을 지지하다가 동교동계에 찍혔고, 2002년 대선 경선때는 노무현이 아닌 김근태를 지지하다가 뜻대로 안되던 상황에 지방선거 당내 공천까지 안 풀리자 탈당해버리고, 민봉기의 권유로 한나라당에 가서 경선으로 후보가 되어 선거 당선으로 구청장이 되면서 친노세력에게 찍힌데다가, 한나라당에 갔다는 것 때문에 김근태를 지지하다가 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민평련계에서도 소외되었다. 그런 뒤에는 2004년에 다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으로 돌아가면서 한나라당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지만, 민평련계에서도 환영을 못 받는 등 모든 계파에서 주류가 되기 힘든 위치가 되었다. 이후에도 07대선 경선은 이해찬, 12대선 경선은 손학규를 지지하면서 계속 삐딱선이미지와 비주류이미지를 정치계 내에서 굳혀가서 민주당 주요계파인 동교동계, 친노, 친문세력 모두에게 찍히는 상황에다가, 민평련계에서도 중심에 가지 못해 적극 지원을 못 받는 비주류 정치인 위치가 굳혀졌다. 그가 그나마 본인 정치지역 외 중앙언론에서 주목받았던 건 딱 한번인데, 정치인 된지 25년이나 지나서 20대 총선 김종인 비대위 비례대표 공천 파동때 박우섭이 가장 앞장서서 크게 반발했던 때뿐이다. 이미 97대선 경선때 김근태계(민청련) 내에서도 일부가, 김대중을 경선없이 대통령후보로 추대하자고 하던 동교동계에 반기를 들고, 자신이 김대중의 직계 제자 출신 정치인이었음에도 당시 김대중이 아닌 정대철을 밀며 경선을 요구하던 김상현(젊을때 김대중에게 웅변, 즉 연설을 직접 교육받았기에, 동교동계 대부분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김대중을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극소수에 속하던, 동교동계라는 개념을 넘어 정통 김대중계 정치인이었다.) 쪽에 박우섭이 서자, 민평련계 정치인들이 박우섭에게 "어쩌려고 동교동계에게 찍힐 짓을 대놓고 하느냐?"며 만류가 있었다고. [13] 독립영화 및 예술영화 매니아들에게 꽤 유명한 곳으로 인천 이외 지역에서도 찾아오는 인천 유일의 예술영화관이다. [14] 2005년 별세. 충청도에서 경찰간부를 하다가 1974년 유치장에 들어간 아들을 인맥을 써서 풀어준 후 1975년 강요에 가깝게 퇴직을 당했다. 아들의 민주화운동을 많이 반대하다가 이후 마음을 바꾸고 지지하게 되어, 아들의 민주화 동지들을 숨겨주는 일들을 시작으로 민주화운동가들 지원에 관련된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즉 아들로 인해 아버지도 민주화운동가가 되었던 것. 훗날 한겨레신문 지국장을 하였다. [15] 2015년 별세. [16] 본인이 태어나지 않았을때, 아기였던 나이에 병으로 돌아가신 친형님이 있다고 한다. 625전쟁 중에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부모님에게 들었다고 한다. 즉 직접 만나본 적이 전혀 없는 형님이 있던 것. 과거 언론에서는 외아들로 나왔지만, 훗날 실질적으로 외아들로 살았던게 와전된 것이라고 본인이 밝혔다. 또한 여동생 중 1명도 본인이 어렸을때였던 1960년대초에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17] 물론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손에 꼽는 빈곤국이었기에, 그때 기준 서민 중 나은 편이라고 해봤자 현재 기준 기초생활수급자 수준의 경제환경과 다를 바 없었고, 형제도 많았던 형편상 경찰간부라고 해도 별반 나을게 없어 박우섭의 모친이 보따리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루 두끼만 매일 먹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주기적으로 굶는 일이 잦던 당시 일반인들은, 굶지는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그 집이 여유 있었다고 말할 뿐, 현재의 경제적 여유 개념과는 실질적 유사점이 없다. [18] 예산 태생이나 예산에서 오래 살지 않아 특별한 기억이 없고, 당진에서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살았으며, 교회도 당진에서부터 다녔으며, 본인이 서울로 유학을 갔을때도 부모가 당진에서 정착하고 평생 살아서 민주화운동가 생활때도 당진을 본가로 하며 수도권에서 왔다갔다 하던 관계로, 박우섭은 예산이 아니라 당진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19] 충남 개신교는 유관순 열사(천안 개신교인)로 대표되는, 개신교 독립운동계의 성지 세력 중 하나라 (북한쪽에서는 평양개신교, 남한쪽에서는 충청개신교, 국외에서는 만주개신교가 독립운동쪽으로는 알아준다) 충남 개신교는 반독재 성향도 강한 편이었다. 유관순으로 잘 알려진 1919년 4월 1일의 충청도 만세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충남 개신교인 세력. 이화학당 휴교 후 귀향으로 삼일운동을 천안 개신교계에 알린 유관순과 그녀의 사촌언니 및 유관순의 부모 등 일가가 처음 뜻을 합쳐 천안 만세운동 세력들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천안 뿐만 아니라 수많은 충남 및 충북(충남 인접지역) 개신교 세력이 연합하였다. [20] 박우섭은 충청도, 동기생 최낙정은 경상도에서 올라온 촌놈이라고 핍박을 받았고 그래서 더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21] 박우섭이 대학을 입학한 시절은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시대다. 즉 박우섭은 신입생때 지금의 대학로에서 대학을 다녔다. 후에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의 운동권 탄압의 일환(서울대분산 문제도 있었기에 이게 모든 이유는 아니지만)으로 서울대학교가 70년대 당시 서울 중심에서 먼 촌동네 취급 받던 관악산으로 대이주를 하고, 여러 변화를 겪으며, 학제가 많이 바뀌어서 미생물학과는 현재 학부에서는 농생대 응용생물화학부 응용생물학과 내 개별전공으로로 변해있고, 대학원에서는 농생명공학부 식물미생물학과로 변했다. [22]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까지 학생운동 및 민주화운동시기, 학번별로 민주화운동 작업을 관리하던 시절, 몇몇동기들과 함께 서울대학교 72학번 운동권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게 바로 박우섭이다. [23] 본인이 음감이나 박자감 같은 음악적 능력이 좋지 않아서 노래도 잘 부르는 편이 아니었는데 풍물패에 오래 있는게 힘들게 느껴진 상황에서 연극반이 너무 좋아져서 거기만 갔다고 한다. [24] 박우섭이 연우무대 초기멤버인게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건 박우섭이 연우무대가 창립된지 얼마 안되던 초기에 수배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공개활동을 잘 못하고, 도망자 신분으로 활동을 할 때는 가명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박우섭이 연우무대에 있으며 수배자 신세이던 시절 1980년대초 인천 부평공단 쪽에서 노조운동하던 노동자들 연극공연을 연출하기도 했고 다른 연극인들을 부평공단 노동연극으로 유치해오기도 했다. 박우섭이 인천과 연고가 없음에도 인천 정치인이 된건 80년대초에 인천 내에서 구월동과 부평 및 부천을 오가며 문예운동을 했기 때문. 문재인 정권 이전 이명박정부말 박원순서울시장 취임 직후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된 예술인 겸 노동운동가 박인배(서울대학교 물리학과 72학번, 2017년 5월 사망)와도 대학 및 연극회 동기로 젊을때부터 함께 활동했다. 단, 1983년 가을의 민청련 활동 이후로는 목숨을 건 공개 민주화운동가 겸 도망자 생활과 체포 및 구속의 연속으로 살아서 연우무대건 그 외 공연이건 활동을 할 여력이 없어 사실상 연이 끊겼고, 그 시절 이후에는 완전히 정치계로 들어가서, 공연계에 관심은 있었지만 깊게 관여하지 못했다. [25] 경찰들이 일부러 같이 연행된 학생들 앞에서 본보기로 삼으려고 미친듯이 때렸다고 한다. 말을 걸다가 때리는게 아니라 그냥 나오라고 한 다음에 철창 앞에서 바로 주먹으로 때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맞아 이해찬이 쓰러지자, 여러 경찰들이 쓰러진 이해찬을 계속 주먹과 발로 무자비하게 때렸다고 한다. [26] 속으로 "저렇게 끝없이 맞았는데도 아직 살아있는게 놀랍다"고 느낄 만큼 경찰들이 이해찬을 그냥 계속 패고 또 팼다고 한다. 유치장 바닥이 거의 피웅덩이로 보였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한다. 경찰이 폭행을 멈춘 뒤에는 "해찬이형이 이미 죽어서 때리던걸 멈춘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벌벌 떨었다고. [27] 1994년 사면복권으로 입학 22년만에 학위증을 받았다. [28] 1979년 10월 연우무대 연극으로 공연된,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연극 <한줌의 흙>의 각본을 썼고, 배우로도 참여했다. 1980년 3월에도 황석영의 희곡집으로 각색공연한 연우무대 레전드 연극인 < 장산곶매>에 출연했었다. 당시 주연배우로 함께 한 사람은 노무현 정권 문화부장관이자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 지니의 한국어 더빙 성우로 유명한 예술인 김명곤. 그러나 그게 사실상 마지막 공연이 되었고, 5월에 수배자 신세가 되고 그게 끝난 뒤에도 공개민주화투쟁 지도자가 되어 연극계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29] 고향 당진에도 잠시 갔다가 금방 다시 도망쳤다고 한다. 당시 본인이 진행하던 문예교육(탈춤)을 받던 여성 공장 노조원(현재의 부인 이미영 여사)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 상황이었음에도 도망을 다녀야해서 결혼을 못했고 1983년까지 결혼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1983년초에 부인이 첫째 아들을 출산하고도 몇달 뒤에야 당진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다. 훗날 몇년뒤 부인이 둘째아들을 낳을 때 쯤에는 그전에 구속되어 감옥에 있었다. [30] 그 와중에도 1982년에, 같이 숨어사는 생활을 하던 민주화운동 동지 소준섭과 함께, 지금도 518운동 관련 레전드문서 중 하나인 "광주백서"라는 팜플렛을 만들기도 했다. 소준섭이 70년대말에 구속되었을때 감옥에서 만난 광주 출신 운동가에게 연락을 하여 두사람이 1980년 518때 광주에 있던 여러 계층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하고 자료를 모아, 수많은 기록들을 하나의 백서로 정리한 것. 물론 콘텐츠는 소준섭과 그 광주 운동가가 다 만든 것이고, 박우섭은 이를 곳곳에 넘기기 위해 수백장으로 찍어 내는 일을 했다. 이는 후에 그 유명한 황석영의 넘어넘어를 만드는데 원작자가 모은 자료 외에, 외부에서 참고한 핵심자료 중 하나로 쓰였다. [31] 참고로 이 넘어넘어라는 책은 원래 황석영이 주도해서 쓴게 아니라 자료를 모아서 원본을 쓴 원작자들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권력 눈치보던 출판사들의 거부로 그들 저자 명의의 책 출판이 여의치 않자 문학계에서 잘나가던 황석영에게 부탁하여, 어떻게든 대중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 하니 황석영 당신의 저자 명의로 출간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출판한 거였다. 황석영은 수락후 내용은 건드리지 않고, 한달간 기술적인 편집, 즉 다 쓴 책 내용 속 일부의 문체 일관성 문제나 글의 부드럽지 못한 부분들만 원작자들과 상의 후 고치는 일, 원래 본인 문체로 보이게 수정하기 등 내용과 무관한 딱 편집자일 정도만 하였다. 거의 30년이 지나서 2014년에 개정판을 내기로 하면서 원작자 2인과 황석영이 뭉쳐 3인 저자로 새롭게 편집방식을 현대화에 맞게 크게 고치며, 그 20여년간 새롭게 나온 518정보들까지 다 모아서 새로운 책으로 출판했다. [32] 본인들의 위치가 노출된 것 같다는 첩보가 들어오거나 여러가지로 걸릴 확률이 생기면 도망쳤다고 한다. 후에는 2명이 경찰에 잡혀서, 이 소식을 들은 나머지 4명이 도망치기도 했다. [33] 설립 당시 집행부 의장 김근태, 부의장 장영달, 홍보부장 박계동, 총무부장 박우섭, 재정부장 홍성엽, 사회부장 연성수. 상임위원회 의장 최민화, 부의장 이해찬, 이을호. 참고로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을호는 민청련 운영을 계속하다가, 김근태가 전두환 정부의 민청련 탄압으로 잡혀갈때 같이 잡혀가서 끔찍한 고문을 당해, 김근태처럼 심각한 고문후유증을 겪어 정신질환자가 된 비운의 운동가이다. 전주출신으로 고등학교때 전교1등만 하던 전주의 수재로 유명했었다고 하며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운동권 지도자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의 부인 역시 이화여대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으로, 함께하던 남편이 잡혀가 고문으로 환자가 되어버린 뒤에도 남편을 돌보면서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정치인이 되어 서울시의원을 역임하였다. [34] 이해찬이 서울대 공대 입학 후 서울대 다른 과를 가려고 재수를 했다. [35] 이해찬은 문재인보다 정치계 선배인만큼 친노이나 비문 출신에 20대총선 당시 문재인이 밀어붙인 김종인 비대위원장 취임 후 김종인세력에 의한 컷오프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결국 친문세력과 연합하여 문재인 정권의 탄생을 주도했고, 문재인 정권내 당대표까지 역임했다. 박우섭 역시 문재인보다 정치입문이 빠른 만큼 원래 비노출신이었음에도, 반노나 반문세력은 아니었으나, 김종인 비대위 출범 후에 가장 적극 반발하며 정치방향이 갈리게 된다. 박우섭은 결국 민주당 탈당까지 해버리고 손학규가 있던 국민의당으로 가버려 실질적 반문세력이 되었었다.(당시 재선 구청장 신분이었는데, 탈당 및 국민의당 입당 이후 3선까지 가능한 구청장선거 출마요구를 거부하고 야인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민주당으로 복귀는 했으나, 김종인의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시절의 행태를 매우 싫어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과거 경력상, 김종인만 적극적으로 비난했지 문재인 전 대표 겸 대통령을 비난한적이 없음에도 여전히 비문이나 반문 색채로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36]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추대 주장을 거부하고 경선을 주장하면서 동교동계에 제대로 찍혔던 게 공천탈락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37] 이때 한나라당 정치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38] 당시 열린우리당은 경인 지역에서 참패했다. 당선된 경인 지역의 기초단체장은 구리시장 한 명. [39] 그러나, 남영희도 안상수와 윤상현과의 표 분열에도 불구하고, 현역 의원인 무소속 윤상현 후보에 171표 차이로 밀려 아깝게 낙선하였다. [40] 2004.2.21 한나라당 탈당, 12.23 열린우리당 입당 [41] 전임자 이호웅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42] 2017.2.8 더불어민주당 탈당, 2.17 국민의당 입당, 2018.1.31 국민의당 탈당 [43] 다만 2006년 지방선거는 민주당계 정당 침체기여서 구청장 선거에서 낙선한거는 제외하고 모두 당선되었다. [44] 민주당과 신설 합당. [45]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 [46]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 [47] 총선 공천 불복으로 인한 탈당. [48] 당내 노선차이로 인한 탈당. [49]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 [50] 민주당과 신설 합당. [51] 국회의장비서실장 취임으로 인한 자동 탈당. [52] 국회의장비서실장 퇴임으로 인한 자동 복당. [53]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 [54]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 [55] 당내 노선차이로 인한 탈당. [56] 국민의당에 흡수 합당. [57] 당내 노선차이로 인한 탈당.
(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