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북제주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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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장 ▶ |
<colbgcolor=#C5222B><colcolor=#fff> 초대 북제주군수 박명효 朴明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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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세기 후반 추정 |
전라남도
제주목 중면 삼도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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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불명 |
재임기간 | 초대 북제주군수 |
1946년 8월 11일 ~ 1946년 11월 14일 | |
경력 |
탐흥회 고문 민립대학 설립 제주본부 감사 도제추진실시위원회 위원 초대 북제주군수 도청건립추진위원회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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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초대 북제주군수이다. 해방정국 제주도 우익진영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장남인 박창택(朴昌澤)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장을 지내는 등 법조계에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아들, 즉 박명효에게는 큰손자가 되는 사람이 역시 법조계에서 활동한 박영수(朴英洙)이다.구체적인 당적은 기록돼 있지 않지만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주도지부 결성 만 1주년 기념대회'에서 반탁운동에 관련한 위원장으로 선출된 기록이 있다.
2. 생애
조선 말기에 조천 조방장(助防將)을 지낸 박경보의 아들로 태어났다.[A]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들 박창택이 1910년생이기 때문에 19세기 후반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들을 낳은 뒤에도 별다른 활동이 없었으나 1925년 6월 박우상(朴雨相)과 함께 제주지역의 소년 민족주의 단체인 탐흥회(耽興會)의 고문으로 추대되며 기록으로 첫 등장한다. # 비슷한 시기에 민립대학 설립 제주본부의 총회에서 감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해방 직후의 기록에서는 힘있는 지역 유지로 재등장하며 제주도 내 우익의 거두로 불린다. 당대 제주지역에서 영향력이 강한 4명의 박씨를 사박(4朴)이라 불렀는데, 박종실·박치순·박우상과 함께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A]
이전부터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별개의 도를 구성하고자 하는 일부[3] 여론을 의식해 도제 추진운동을 벌였다. 동명의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8월 미군정청 법률 제94호로 제주도(濟州道)가 설치되며 결실을 거뒀다. 박명효는 당시 우익진영에 의해 제주도지사로 추천받았으나 이는 무산되고 제주도를 구성하는 2개군[4] 중 북제주군의 초대 군수로 임명되어 동년 11월 14일까지 약 3개월간 도정을 맡았다. #
이후 1947년에는 반탁운동에 참여한 기록이 남아있다. # 1949년 1월에 제주도청 건물이 공무원의 방화로 소실되자 신청사를 건립하고자 하는 도청건립추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52년 12월 16일 새 청사(현 제주시 광양9길 10번지)가 건립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이때 건립된 청사는 1980년 연동에 다시 새 청사가 지어질 때까지 30년간 제주도청의 역할을 하였고 현재도 제주시청 건물로 쓰이고 있다.
박명효가 활발하게 활동한 1946년~49년의 제주도 하면 4.3 사건으로 인한 비극적인 분위기를 빼놓을 수 없겠으나, 4.3과 관련한 박명효의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947년 봄의 심각한 식량난 당시 전라남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도움을 호소한 것, 그리고 4.3의 직접적 계기가 된 '3.1절 발포사건' 당시 관이 구성한 '제주도 제주읍 3․1절 발포사건조사위원회'에 임명된 것이 각각 《제주신보》, 《대동신문》에 보도되었을 뿐이다. 박명효가 공직에 있던 기간도 1946년 8월~11월의 3개월로 3.1절 발포사건 이전이다. 단, 2003년 작성돼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제주 4․3의 전개과정과 미군정의 대응전략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박명효가 활동한 조사위원회가 미군정 및 치안당국의 의견을 충실히 대변했단 것까지는 사실이다.
몰년은 미상이다.
3. 가족 관계
아버지는 박경보로 조선 말에 조천 지역에서 조방장을 지냈다.슬하에는 3남 2녀를 뒀다. 장남 박창택(朴昌澤)은 판사를 하는 등 법관 생활을 했고 그의 아들이 훗날 박근혜 특검으로 유명한 박영수이다. 차남은 박창우이고, 삼남 박창재는 초등학교의 교장을 지냈다.[A]
4. 제주 원도심 박씨초가
박명효 일가가 거주하던 초가집이 흔히 제주 원도심으로 불리는 삼도2동 인근에 위치한다. 박명효 본인도 이곳에 거주했지만 그 윗세대부터 대대로 살아왔던 곳으로 그 역사는 21세기 초 기준으로 300여년에 이른다. 박명효가 사망한 이후 박창택 판사도 이곳에 거주했기 때문에 '박판사네'로 불리기도 한다.오래돼봤자 현대식 건축물이 넘쳐나는 제주도심에서 사실상 유일한 초가집인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통해 초가를 정리할 때에도, 이후 제주 첫 대규모 체육행사였던 1984년 전국소년체육대회를 위해 2차 정리를 할 때에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아는 사람들은 아는 관광지라지만 여전히 거주지로 쓰이는 주택이기에 방문 시 유의해야 한다. 제주지역 언론에 따르면 박창택 판사의 아내인 안 할머니와 그녀의 딸이 박씨초가에 살고 있으며 특히 안 할머니는 2023년 100세의 고령임에도 가족 의례를 챙기는 모습이 경향신문 포토에 포착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