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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생아
항간에 차남 후미히토 친왕과 장녀 구로다 사야코는 미치코 황후의 친자가 아니라 ' 아키히토 덴노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라는 소문도 있다. '후미히토 친왕의 생모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여배우'라는 소문도 있다.[1]그런데 최근에는 한술 더 떠, 후미히토는 서자라는 소문뿐 아니라 '남편 아키히토 덴노의 묵인 하에, 몰래 친정인 쇼다 가문에서 아이를 하나 데려와 양자를 삼았던 것'이라는 소문도 돈다. 서자는 그나마 아키히토 덴노의 자식이기라도 하지만, 후자가 사실이면 정말로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런데도 이런 소문이 도는 걸 보면,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후미히토를 미치코 황후가 낳은 친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압도적인 모양이다.[2]
2014년에는 세 자녀들에 대한 각종 논란이 심각할 정도로 많았다.
2. 가해자가 된 피해자
2.1. 큰며느리 마사코 황후
무엇보다 아들을 낳지 못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 부부는 결혼 후에도 오랫동안 아기를 낳지 못한 반면, 먼저 결혼한 차남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에게서는 금방 두 딸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가 태어나, 황실과 국민들로부터 갖은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차남 부부는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자주 천황 내외를 방문했고, 천황 내외는 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했다. 고모 사야코 공주도 조카들을 귀여워했다. 천황 내외와 차남 내외는 매우 친밀해졌다. 반면 불임으로 고생하던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는, 점점 가족들과의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천황 내외, 차남 일가, (아직 미혼이던) 사야코 공주끼리만 모여 있으면 매우 화목하고 화기애애한 가정의 모습이었지만, 여기에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 부부가 끼면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서로 불편해했고, 점점 만나는 일이 줄어들었다.
황태자 부부는 결혼한 지 8년하고도 반 년 만인 2001년 12월에야 어렵게 아기를 낳았지만, 딸이었다. 그래서 황태자 부부의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를 장래에 여성 천황로 즉위시키자는 논의도 활발했지만, 5년 후 차남 부부가 아들을 낳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이 외에도, 오랜 기간 외국에서 성장하여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활달한 마사코 황태자비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황실과 맞지 않는다고도 한다. 마사코는 왕실 외교, 국제교류, 해외 순방 등등 외교관이었던 전직을 살려 활동하고 싶었으나[3] 시부모는 아들 출산에 전념할 것만을 강권하였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마사코 황태자비의 방문을 요청해도 궁내청에서는 나루히토 황태자만 보내거나, 차남 부부 내지는 사야코 공주를 대신 보냈다고 한다.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는 솔직하며 아첨하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아랫동서 키코 비에 비해 시부모 및 시가 식구들에게 사근사근하고 애교있게 굴지 못한다고 한다. 아키히토 상황의 가쿠슈인 동창으로 절친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4]는 이에 대해 " 마사코 황태자비가 키코 비처럼 약삭빠르고 상냥하며 시부모에게 순종했다면, 가족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서로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것 같다.
2018년 2월 9일에 올라온 궁내청발 기사를 보면, 미치코 상황후는 평소 키코 비처럼 주간지 기사를 체크하면서 주간지 기사가 장남 일가와 차남 일가를 비교하는 것을 보며 마음 아파 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의 주간지는 우익 성향이 많아, 황태자 일가보다 차남 일가를 더 치켜세워주는데, ' 마사코 황태자비보다 키코 비가 황후에 더 걸맞고, 미치코 황후도 그렇게 확언했다.'는 주간지 기사가 보도되었을 때, 미치코 상황후는 심야였음에도 교통 통제까지 감안해가면서 마사코 황태자비를 만나러 그 날로 동궁으로 갔다고 한다. 이 기사에 대해서는 궁내청 간부도 분노했다고. 미치코 상황후는 두 며느리 중 누가 더 황후에 걸맞은지 발설한 적이 없는데다, 이미 결정된 사안인데 주간지에서 멋대로 떠드니 화가 안 나는 게 이상할 따름이다. 오히려 이후에는 맏며느리 마사코가 공무에 많이 나서는 모습을 보이면서 안도하는 일이 많아졌다고도 한다. 어쨌든 미치코 상황후가 당시 심야에 혼자서 동궁으로 간 것은 주간지에 대한 무언의 항의이자, 지금은 둘째 며느리보다 맏며느리를 챙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그동안 성격과 가정 환경의 차이 등 이런저런 사정으로 충돌은 컸어도, 상황은 냉정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018년 한 해 동안 미치코 당시 황후는 맏며느리 마사코 당시 황태자비를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는 것을 대내외에 확실시하는 행동을 보였다. 우선 쇼켄 황태후 이래로 데이메이 황후 - 고준 황후를 거쳐 자신에게까지 전해진 양잠 사업( 누에치기)을 전수했고[5] 자신의 명예총재 자리를 매우 파격적인 모습으로 물려주었다. 그날 미치코 당시 황후는 자신이 명예 총재에서 물러나는 행사에 마사코 당시 황태자비와 키코 비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갑자기(예정에도 없이)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를 앞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잡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것도 호시탐탐 황후 자리를 노리던 작은며느리 키코 비 앞에서(!).
이로써 시아버지의 남편에 대한 양위 발표와 시어머니의 공개적인 지지로 맏며느리이자 차기 황후로써 마사코의 입지는 확고해졌고, 황실의 서열은 바로 잡혔다.
하지만 생전 퇴위 이후 황후가 된 마사코는 그동안 수십년간 와병생활을 한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첫 공무였던 트럼프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외교관으로써의 놀라운 능력을 국민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이에 따라서 또 다시 미치코 상황후에 의한 시집살이 때문에 저런 엄청난 능력을 가진 황후가 그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온갖 고생한 거 아니냐면서 일본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미치코 상황후가 양 눈의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는 기사나 7월 말에 상황과 함께 황실 별장에 요양을 하고 있다는 소리[6]에 네티즌들은 병 요양은 일단 고쿄에서 나온 다음에도 할 수 있다면서 온갖 비난을 퍼부었는데 이에 주간지들은 일제히 미치코 상황후에 대한 옹호 기사들을 낸 상태이다.
2.2. 작은며느리 키코 비
작은며느리
키코 비와 함께. |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보다 시부모와 수월하게 지낸다고 한다. 남편 후미히토 친왕, 시누이 구로다 사야코와 같은 학교인 가쿠슈인을 다닌 덕분에 시집오기 전부터 황실 가족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친하게 지냈고, 시집와서도 적응이 빨랐던 것이다. 미치코 황후는 키코를 '키코 짱(ちゃん)'이라 부르며 귀여워했고,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를 임신하고 출산할 때도 잘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차남 부부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자주 천황 부부를 방문하면서 더욱 친밀해졌다. 게다가 결국에는 황실 역사상 40여 년 만에 아들까지 낳았으니…
그러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사이가 마냥 화기애애할 수만은 없는지, 키코 비와 친정어머니 가와시마 카즈요(川嶋和代)가 결혼 전 미치코 황후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꾸중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8] 게다가 키코 비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늘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말하지만 집안에서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 시종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키코 비의 사진들을 보면, 젊은 시절까지는 해맑고 순수하던 미소[9]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이상하고 억지스러운 미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히사히토 친왕의 출산 역시, (차남 내외도 야망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일단은 천황 부부가 강요한 거라고 한다. 2003년 6월, 궁내청 장관 유아사 토시오(湯淺利夫)는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황태자 부부가 둘째를 낳기 바랍니다."라고 말한 바 있고, 같은 해 12월의 기자회견에서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황실의 번창을 생각한다면 차남 부부가 셋째를 낳기 바랍니다. 두 공주와의 나이 차이를 고려한다면, 이제 빨리 셋째를 낳아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궁내청 장관의 입을 통해 나온 발언이지만, 이는 결코 궁내청 장관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천황 내외의 의견인 것이다.[10]
그러나 그렇게 강요했음에도, 히사히토 친왕이 암묵적으로 황태손으로 여겨지긴 해도 공식적으로는 황태손의 지위에 있지는 않다 보니[11],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만 있는 황태자 일가보다 세 자녀가 있는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생활비가 더 적다. 그래서 키코 비가 그 스트레스를 시종들에게 푼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러나 최근 2018년 4월 중순에 나온 기사를 보면,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인해 미치코 황후- 키코 비 사이에 균열이 발생했다고 한다. 정리하면 첫 손주의 결혼을 망친 것에 대해 키코 비가 교육을 잘못했고 황족관도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요즘 키코 비는 "두 폐하를 뵐 면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다.
그리고 2018년 여름에 들어서는 '미치코 황후가 키코 비를 불신한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미치코 황후는 예전부터 키코 비의 자녀교육 방침에 좀 불신이 있었는데,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으로 아예 불신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그러면서 미래의 천황이 될 히사히토까지 걱정한다고. 황실 안팎에서도 논란이 극심한지라[12] 그동안 유일한 후계자를 낳아 황실 내 입지를 확실하게 다져 놓았던 키코 비는 황실의 신뢰, 국민의 신뢰를 전부 잃어가는 중이다.
3. 자녀 교육문제설
장녀이자 막내인 사야코 공주는 미치코 황후에게 의지가 되는 소중한 딸이었으나, 시집간 후에 평민 생활에 적응을 못해서 몰래 세금을 타 쓴다는 소문이 있다(2014년경부터). 그렇다 보니 어머니 미치코 황후의 교육이 잘못되었다거나, 사야코 공주가 서녀라는 등 별별 소문이 돌고 있다.또한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와 차남 후미히토 친왕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미치코 황후가 가운데서 중재를 못 해서 그런 거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사실 후미히토 친왕은 어렸을 때부터 장난끼가 많기로 유명했는데, 성장하면서 단순히 장난꾸러기 수준이 아니라 날라리 + 바람둥이가 되어버렸다. 대학생 시절에 가와시마 키코를 비롯해 많은 여자들을 거느렸다거나[13], 결혼하기도 전에 키코 비를 여러 번 낙태시켰다거나, 결혼 후에는 해외 순방에서 태국인 여자와 바람을 피웠으며 이미 사생아까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난봉꾼으로 유명하다. 얌전한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엄격했던 것과 달리, 후미히토 친왕에게는 미치코 황후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아, 서자라는 소문이 있다.[14][15] 하지만 미치코 황후의 세 자녀들 중 후미히토 친왕이 미치코 황후를 제일 닮았다는 평도 있다.[16]
정말 옛날 이야기 중 미치코 황후를 음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실 나루히토 친왕은 아키히토 황태자의 아이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다!!"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부부의 결혼이 1959년 4월의 일이고, 나루히토 친왕이 1960년 2월생, 즉 결혼하자마자 임신한 아이라서 이런 소문이 돈 듯하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루머 중 하나.[18]
3.1. 논란
한편 후미히토가 저렇게 망나니가 된 제일 큰 원인이 미치코 황후에게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미치코 황후가 차남 후미히토가 어떠한 문제를 일으켜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 국내에서도 매우 유명한 사실이다. 다만 고준 황후와 구 황족 & 화족들이 미치코 황후에게 극심한 시집살이를 시켰던 시절, 미치코 황후를 후궁 취급하면서 '네가 감히 왜 후미히토에게 뭐라뭐라 하느냐!'라고 했던 것도 있다고 한다.정작 나가코 태후는 며느리가 낳은 세 손주들을 차별하지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미치코 황후를 미워했으니 미치코 황후의 파격적인 육아교육에 얼마나 트집을 잡았을지, 손주들이 보는 앞에서 미치코 황후를 얼마나 대놓고 무시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나루히토는 장남이자 황위계승자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교육시키고, 막내딸 사야코 공주는 심신이 모두 지친 미치코 황후가 유일하게 의지할 만한 상대였다. 후미히토는 그 사이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데다 할머니가 공공연하게 어머니를 무시하고 다니니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성장과정에서야 정신없고 바빠서 그랬다 쳐도,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황실 질서가 개판 5분 전이 되도록 후미히토의 행위를 방관만 한 것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다만 아키히토가 일본의 우경화에 부정적인 입장이고 그동안 후미히토의 뒤를 봐준 것이 궁내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키히토는 후미히토를 씨앗으로 삼아 궁내청 극우세력의 폭주가 충분히 무르익기를 기다려 나루히토에게 대숙청과 함께 궁내청을 일거에 갈아엎을 기회를 물려주려 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 되었건 결국 아키히토와 미치코 황후에게 후미히토는 자식으로서 큰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 되니, 뭔가 짠할 지경이다.
4. 세 손녀들과의 관계
미치코 황후도 그렇고 아키히토 덴노도 그렇고, 첫 손주이며 맏손녀인 마코 공주에 대해서는 관심과 기대가 크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손녀들에 비해 너무 편애하는지, 마코 공주가 국제기독교대학 입학의 정당성 논란에 이어 영국 레스터 대학원(석사) 유학도 모자라서 2016년 9월부터 국제기독교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공부와 직장[19]과 공무를 동시에 하겠다고 하는 데도, 반대하지 않는다고 한다.참고로 마코 공주의 칠촌 고모로 아버지 토모히토 친왕의 독려로 여성 황족 최초로 박사 학위를 자력으로 취득한 아키코 공주조차도 비판했는데, 그걸 당시 미치코 황후가 항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내부에서 작은 논란이 있었다.둘째 손녀인 카코 공주를 키코 비가 임신했을 당시, 마사코 황태자비가 결혼한 지 1년만이었고, 그 때문에 키코 비는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 비로부터 "큰며느리가 임신하기도 전에 작은며느리가 계속 임신하다니, 황실 내 서열을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랍니다."라고 한 소리 들은 적이 있었다. 미치코 황후가 키코 비의 둘째 임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소문은 없지만, 카코 공주가 지금과 달리 어렸을 때는 굉장히 조용한 성격이었던 걸로 봐서는 카코 공주의 탄생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을 듯.[20]
셋째 손녀인 아이코 공주에 대해서도 아이코와의 사이가 어떻다든지 하는 말은 없다. 다만 아이코 공주의 어머니인 마사코 황태자비와의 관계를 봐도 그렇고, 히사히토가 태어난 뒤로 히사히토를 편애했던 걸 봐도 그렇고 그다지 돈독한 관계는 아닌 듯하다. < 일본 왕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 황태자비|마사코>라는 책에 의하면,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는 아이코 공주의 탄생을 기뻐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다시 임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따금 기사에 '공무를 간 곳에서 손녀(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의 선물을 샀다.'라는 말이 쓰이는 것으로 보아, 큰아들의 유일한 자식이니 마음 쓰는 모양.[21] 2019년에는 미치코 상황후 자신이 궁내청 관계자를 통해 “손녀 아이코 공주가 학교에서 첼로를 배워서, 이제 (손녀와 함께) 실내악을 할 수 있다는 게 은퇴 후의 가장 큰 낙이다”[22]라고 발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
다만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는 성인(20대)이고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가 어린 손주들이라 선물을 사다줄 수 있긴 하지만, 일부러 저런 언급을 한 걸 보면 주위 시선 때문으로 보인다.
4.1. 아이코 공주의 장기 무단 결석
그런데 2016년 10월 초쯤,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3학년인 아이코 공주가 장기 무단 결석을 4주째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할머니 미치코 황후를 만난 벼내기 농사 이후로.그런데도 궁내청에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고, 미치코 황후의 만 82세 생일인 10월 20일에 공개된 생일 기념 메시지에는 "모든 가족들이 건강하게 아무 일 없이 잘 지내 줘서 다행"이라고 되어 있고, 마코 공주에 대한 칭찬은 했다고 한다.
미치코 황후가 맏손녀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거야 흔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아이코 공주가 아프다는 발표가 있었으니 분명히 아프단 보고를 받았을 텐데도 굳이 모든 가족들이 건강해서 다행이라고 언급한 것도 이상한데, 마코 공주 외의 나머지 손주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것도 이상하다. 심지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손자 히사히토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그래서 아이코 공주의 무단장기결석이, 궁내청이나 할머니 미치코 황후가 뭔가 압력을 넣은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존재한다. 하지만 미치코 황후의 배후설은 남편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 퇴위 발표가 2016년 8월 8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귀가 안 맞는다.
아키히토가 장남 나루히토에게 양위하기로 공개적으로 발표한 마당에, 아내인 미치코 황후가 장남 일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앞장서서 일으킨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천황 내외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고, 이후 둘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다는 보도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정황상 " 아이코 공주의 몸은 학교에 갈 만한 상태인데, 이 기회에 궁내청에서 여론을 나쁘게 만들려고 학교에 못 가게 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는 몸은 정말로 아픈 것이지만 궁내청에서 정보를 제대로 말하지 않는 식으로 장남 일가에 행패를 부리는 것임을 우호적으로 암시한 것일 수도 있고 이후 언론 보도를 통해서 궁내청측이 가쿠슈인측에 아이코 공주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게 확인되면서 미치코 황후의 배후설은 일단 부정된 상태이다.
4.1.1. 레이와 시대
3월 17일 동궁어소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천황 내외 결혼 축하 기념행사에서, 아이코 공주는 사촌동생이자 2019년 5월 1일자부터 천황 서열 계승 순위 3위가 되는 히사히토와 함께 천황 내외에게 꽃다발을 선물했다. 아이코 공주의 꽃다발을 받은 할머니 미치코 황후는 상당히 기뻐하며 눈물을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 "손녀라서 찬밥했다"는 소문은 그저 편견인듯 하다.2019년 6월 초 나온 기사에서 한 황실 전담 기자는 상황 내외가 황실의 정통성을 잃지 않기 위해 여성 천황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미치코 상황후는 아이코 공주의 의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며 만일 아이코 공주 본인이 황위 계승을 바란다면 충분한 교육과 공무 경험을 쌓고 난 후에 황위계승을 논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아이코 공주가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황태녀로 인정하는게 아니라 황실의 혈통을 잇기위해, 그리고 아이코 공주도 좀 더 왕족으로서의 교육과 공무 경험을 쌓은 후에 여계로 인정할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현 황실 상황에서는 상황후의 바람대로 되기는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
그 이유는 오랫동안 황태자 자리를 비워두면 그 자리는 마코 공주 결혼 문제 등으로 비난 받고 있지만 일단 천황 승계서열 1위 및 2위가 있는 아키시노노미야 일가가 차지할 확률이 급속도로 올라가 국민들의 황실에 대한 반감이 심해질 가능성이 있기에,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아이코 공주[23]가 빨리 황태녀 자리에 오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4.2.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
4명의 손주들 중 가장 기대와 관심이 큰 맏손녀 마코 공주였으나, 마코 공주의 결혼 준비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 약혼자인 코무로 케이의 불안정한 직업, 종교 문제[24], 어머니 코무로 카요의 채무 문제 등등 때문에, 마코 공주의 결혼 준비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2018년 2월 6일, 원래 2018년 11월 4일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무려 2020년으로 연기했다. 게다가 코무로 케이는 3년간 미국 로스쿨에서 공부한다며 유학을 떠났다. 이러면서 미치코 황후는 마코 공주에 이어 키코 비까지도 불신하게 되었다.
마코 공주가 어머니 키코 비와 여동생 카코 공주가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않자, 2018년 12월 30일 영국 타임즈 보도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을 보다못한 미치코 황후가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는 보도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과연 미치코 황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지 주목이 되었지만…
그러나 마코 공주는 1월 22~23일에 조부모와 부모가 부재 중일 때 코무로 케이와 같이 ('코무로 문서'라고 불리는) 한 문서를 발표했다. 내용은 '그 돈은 이미 증여받았으니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 덕분에(?) 궁내청은 새벽부터 패닉에 빠졌다. 코무로 문서 때문엔 일본 사회는 2주 동안 떠들썩했다. 특히나 이미 마코 공주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마코 공주는 가족들 중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고집부리는 중인 듯하다.
일본 황실의 '미야케 내의 일은 미야케 외부에서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칙 때문에, 미치코 황후는 2019년에 마코 공주에게 공무를 3개나 배당하여 바쁘게 해서 두 사람 사이를 소원하게 하는, 다소 소극적인 방법을 취했다.
그 이후에도 계속 코무로 케이 관련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하려는 미치코 상황후의 소극적인 방법에 반감을 품은 일본인들이 늘어났다.
2019년 7월 9일 보도에 의하면 미치코 상황후는 지인에게 손주가 걱정된다고 털어놓았고, 궁내청 관계자는 " 마코 공주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마코 공주가 해외 출국 전 아키히토 상황과 미치코 상황후를 만난 것은 상황 내외가 파혼을 진행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은 것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 교섭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5. 유일한 손자 히사히토와의 관계
어렵게 얻은 귀한 손자이자 현 황실전범상 장래 일본 황실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남성 황족인 히사히토를 아주 오냐오냐하고 반대로 아이코 공주는 찬밥 신세라고 알려졌으나, 히사히토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히사히토가 언론에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아 조부모와 손자의 관계도 전혀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현재 아키시노노미야 가문간의 관계를 볼 때 마냥 좋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거기다 위에도 언급하였듯이 미치코 황후는 키코 비의 자녀 교육 문제를 아예 불신하고있고 그래서인지 아이코 공주의 여계 덴노도 생각중이라고 한다. 즉 히사히토의 자질을 상당히 의심 중인 것으로 보인다.
6. 가톨릭신자(?)
1993년 9월 유럽 순방 중, 일정에 없었던 바티칸 방문은 미치코 황후의 요청이었다. 이때 미치코 황후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고, 피아노 연주로 아베 마리아까지 연주했다. 그것도 미치코 황후 본인이 직접 즉흥적으로 성가대의 합창에 반주를 자청한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치코 왕비는 독일 유학파로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친정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음악 관계자들도 인정할 만큼 피아노를 잘 쳤으며, 하프도 수준급으로 다룰 정도였다.[25]하지만 미치코 당시 황후의 바티칸에서의 이 연주가 일본에서 여성지를 통해 전해진 뒤, 이 당시 나가코 태후와 협력 관계에 있던 보수언론들은 "미치코 황후는 혹시 가톨릭 신자가 아닌가? 어떻게 일본의 고유 민족신앙인 신토보다 기독교에 저렇게 더 친화적일 수 있지?", "일본 전통 방식보다 서양식 생활을 선호하다니, 일본의 전통이 뒤흔들릴 일이다." "미치코 황후는 일본 국민이 바라는 황실의 안주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고 맹렬히 공격해댔고, 결국 미치코가 실어증으로 쓰러지는 한 가지 계기가 되었다. 당시 아키히토 덴노는 황후와 친분이 있던 피아니스트 다네토 이즈미를 고쿄로 초청하는 등 클래식 음악으로 아내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고, 이듬해 건강을 회복한 미치코 황후가 “어떤 비판이라도 나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여기겠다”며 고개를 숙이면서 보수우익의 공격은 사그라들었다.
미치코 황후의 친정인 쇼다 가문은 가톨릭 집안이고 친정 식구들 대부분 세례를 받은데다 본인도 가톨릭계 재단인 세이신 학원이 운영하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졸업했기에 미치코 황후 역시 가톨릭 신자이리라는 것은 아주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가톨릭 신자라고 한들 그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도 전혀 아니다. 나가코 태후나 일본의 보수우익들이나 단순히 늘 하던(?) 공공연한 트집을 잡았을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바티칸에서의 연주로 인해 미치코 당시 황후가 겪었던 고초는 고준 황태후가 미치코 상황후에 대해서 가졌던 클래식 실력에 대한 열등감, 질투 비슷한 것이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
경향신문의 기사 UCA뉴스
[1]
우스운 것은
후미히토 친왕 역시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여배우와 그렇고 그런 소문이 있었다는 것. 그런데도 그는 아내
키코 비와 함께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공연을 관람하여 사람들이 비웃었다.
[2]
나루히토와
구로다 사야코는
부친을 닮은 외모 같은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는데,
후미히토는 외모든 학력(…)이든 정말 돌연변이(…) 수준으로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
[3]
나루히토 황태자의 끈질긴 청혼에도 황실로 시집오기를 망설였던 오와다 마사코에게, 황실 측은 '황실의 일원이 되어서도 해외순방이나 국제교류 등의 활동을 하며,
외교관 시절처럼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시집온 후로는 거의 그럴 기회가 없었다. 남편이 시아버지의 생전 퇴위와 함께 천황으로 즉위한 뒤에야 겨우 그 재능을 조금씩 발휘하기 시작했지.
[4]
'긴부라 사건(銀ブラ事件)'의 주인공. 가쿠슈인 고등과 3학년이던 1952년 초에 당시 황태자였던
아키히토와 함께 시종들 몰래
긴자로 놀러 나갔다가, 잠시지만 황태자 실종사건이 일어났다. 들킨 뒤에 동궁대부(東宮大夫)와 경찰에게 엄청나게 깨진 것은 안 봐도 비디오.
하시모토 류타로 前
총리는 이 사람의 사촌동생이다.
[5]
황후가 양잠 업무를 주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덴노의 업무 가운데 벼농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또한 2019년부터 나루히토가 부황에게 이어받게 된다.
#
[6]
상황/상황후 모두 퇴임 이후 건강 상태가 엉망이었기에 요양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7]
키코 비의 저 특유의 미소는 일본 황실의 공무활동을 하면서도 어느 각도로나 저 표정으로 찍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섬뜩하다, 억지미소가 너무 심하다는 악평을 받기도 한다.
[8]
미치코 황후, 가와시마 카즈요,
가와시마 키코가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자리였는데, 시종이 차를 내오자 카즈요가 딸 키코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미치코 황후는 "딸이 어머니에게 시중을 받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이러면 안 됩니다!!"라며 큰 목소리로 꾸짖었고, 모녀는 무척 민망스러워했다고 한다.
[9]
일명 '키코 짱 스마일'이라고도 한다.
[10]
사실 이 부분도 딱히 아키히토 상황이나 미치코 상황후의 인격 탓을 하기도 뭐한 게 원래 군주제 국가에서 군주들의 1순위 고민이 황실을 유지하고 이어나갈 후사를 보는 것이라, 나루히토 덴노나 마사코 황후와는 달리 사고방식도 전근대적인 보수성이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는 세대일 아키히토 상황이나 미치코 상황후로써는 황실의 후사를 잇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11]
일본 황실재정 관련 법률인 <황실경제법>에 따르면, 4조에서
천황과 황태자 일가가 속한 직궁가에는 '내정비', 6조에서는 기타 황족들에게 그보다 단계가 낮은 '황족비'를 따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황태자 일가보다 생활비를 적게 받도록 되어 있다.
히사히토는 천황의 친손자이긴 해도 황태자의 아들이 아니라서, 원칙적으로는 방계 황족이다.
[12]
여성 미야케(황족 가문) 창설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
아이코 공주를 천황으로 옹립하거나
구황족을 복귀시키라.'는 말까지 자주 나오고 있다.
[13]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는
가쿠슈인 대학 시절
테니스, 자연문화연구회 등의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며 교제했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이 동아리이지 실제로는 후미히토 친왕의
하렘이었다고 한다. 후미히토 친왕은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보면 꼬붕을 시켜 동아리에 데려오도록 했고, 그렇게 모인 여학생들 중 끝까지 후미히토 친왕의 곁에 남은 여학생이
가와시마 키코였다는 것.
[14]
근데 어느 국가 왕실을 막론하고, 차기 국왕이 될 후계자는 엄격히 키우고, 그 외의 자녀는 비교적 자유롭게 키우는 편이긴 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조선시대 때
태종은 당시 세자인
양녕대군에게는 엄격한(?) 편이었으나, 당시 왕위계승권에서 멀었던
효령대군과 충녕대군(
세종대왕) 등의 다른 아들들은 보다 자유롭게 키웠다고 한다.
[15]
그런데 사실 그것도 있지만,
나루히토 친왕이 태어나고 2~3년쯤 지난 1963년에
미치코 황태자비가
유산했던 것도 소문의 한 가지 사유가 된다. 이때 유산의 원인이 포상기태, 즉 태반의 영양막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여 뱃속에서 아이가 자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태가 위중했기 때문에 예전부터 수술 당시에
자궁적출을 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면 아이를 낳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포상기태는 단순히 종양 세포만 떼어냈다 하더라도 재발 가능성 때문에, 완치 판정 전까지 적어도 1년은
피임이 이루어져야 한다.
[16]
이것 때문에 "
후미히토 친왕은
아키히토 덴노의 아들이 아니라,
미치코 황후의 친정인 쇼다 가문에서 아키히토 덴노의 묵인 하에 데려온 친척 아이"라는 소문이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 천황 내외가 사후
화장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증거인멸을 위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있어, 더욱 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17]
맏이인
나루히토 황태자의 이름을 딴 것.
[18]
이 루머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지는 아키히토의 젊은 시절 얼굴과 나루히토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둘이 판박이처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19]
박물관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20]
키코 비도 딸만 둘을 낳아 시부모 내외로부터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작은며느리라서, 큰며느리인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보다는 아들 출산에 대한 부담이 덜했다. 그런데도 키코 비가
카코 공주를 낳고서 (둘째도 딸이라는 것을 알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한 첫 마디가, "아들을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신생아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전에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일본 황실의
시집살이와
아들 타령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다. 그렇다면 황태자비의 부담은 어느 정도일까.
[21]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가 2004년 유명한 '인격 부정 발언'으로 "궁내에 마사코 황태자비의 커리어와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발언한 뒤에 천황은 이를 질책했는데, 당초에는 이러한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의 발언이 아내를 못마땅해 하는 황궁 및 궁내청의 일부 보수 원로들에 대한 반론으로 여겨졌지만, 점점 갈수록 “황실에서 덴노와 황후를 제외하고 대체 누가 황태자비를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즉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가 궁내청이 아니라 덴노 즉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직접 겨냥해서 한 말이라는 해석이 불거졌다. 이후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는 황궁을 찾지 않았던지, 2006년 12월 아키히토 당시 덴노가 생일 기자회견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아이코는 유치원 생활을 갓 시작한 데다, 감기에 자주 걸려 우리와 만날 기회가 적은 것이다. 언젠가는 만날 기회가 늘어 단란한 얘기를 할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했고, 이를 들은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는 2007년 2월 회견에서 “아이코에 대한 폐하의 심경을 소중히 받아들여 앞으로는 폐하와 만날 기회를 많이 만들어가겠다”고 약속했지만, 2007년 한 해 동안 (일본 언론에 따르면) 나루히토 당시 태자가 아이코 공주를 데리고 입궐한 것은 13~14차례로 대부분은 일본 황실 공식 행사에 따른 사무적인 것이었지 나루히토 자신이 자의로 입궐한 것은 세 번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2008년 2월 13일 하케다 신고(羽毛田信吾) 궁내청 장관이 "덴노와 황후께서 손녀이신 아이코 공주를 보고 싶어 하시는데, 황태자께서는 '노력하겠습니다'라고만 하고 최근 1년간 방문 횟수가 전혀 늘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발언했던 것을 보면 꽤 나루히토는 2월 21일, 생일을 이틀 앞두고 열린 생일 기자회견에서 “폐하의 아이코에 대한 배려는 항상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면서 “입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하면서도 가족간 문제에 대해서는 “프라이버시 측면에서 얘기하는 것은 삼가고 싶다”고 직접 대응을 피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마사코 황태자비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하게 보도했고, 1월 1일 황실의 신년 축하행사에는 오전만 참석한 채 오후에는 동궁 처소로 돌아가 양친들을 초청해 함께 지냈다고도 전하면서 덴노가 궁내청 장관을 통해 해당 발언을 전하게 한 것은 "몸 아프다고 공식 행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거냐", "어른에 대한 예의는 못 챙기면서 사적으로 자기 할 건 다하고 다니나봐?"라는, 마사코에 대한 불편함의 표시라고 해석했다.
#
[22]
미치코 상황후는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1930년대에 이미 집에서 피아노를 쳤고, 태자비 시절에도 구사쓰에서 열리는 클래식 축제를 찾아가 아티스트를 직접 격려하기도 했다. 피아노는 물론 하프도 연주할 수 있다고. 다만 미치코 상황후는 이 클래식 애호 때문에 한 번 구설수에 휘말려, 결국 시어머니 고준 황후가 2000년이 타계할 때까지 대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은 없었다.
[23]
2019년 기준 아이코 공주의 천황 등극 찬성론자는 대략 80% 정도로
히사히토의 탄생 직전 여론조사 60%대에서 20%나 증가한 상태이다.
[24]
코무로 카요가
사이비종교인지
신흥종교인지를 믿는다는 소문이 있다.
[25]
미치코 황후를 싫어했던 고준 황태후조차도 미치코의 클래식 소양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이쇼 시대(1912~1926년)부터 클래식 음악이 일본에서 황족 교육의 필수과목으로 자리잡으면서 일본의 황족들은 어릴 때 클래식 악기를 배우는 게 당연시되었고, 고준 황후 자신도 클래식에 관심이 많아서 아키히토 등 자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1952년 넷째 아쓰코 공주의 결혼 혼수품으로 피아노을 넣기도 했으며, 고준 황후 자신이 환갑을 맞은 1966년에는 황궁에 200석 규모의 콘서트홀 도카가쿠도(桃華樂堂)를 짓고 이곳에서 1971년부터 일본 음대 졸업생들의 연주회를 열게 했으며, 이후 이 연주회에는 황후와 황태자비가 참석한다는 관례가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클래식을 좋아했던 것과는 별개로 정작 고준 황후 자신이 클래식 자체에 대한 재능은 그닥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