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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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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22 다카쓰 신고 |
1군 |
73
시마 모토히로(수석코치 겸 배터리코치) · 89
이토 도모히토(투수코치) · 98
이시이 히로토시(투수코치) 78 오마츠 쇼이츠(수석타격코치) · 74 스기무라 시게루(타격코치) · 87 후쿠카와 마사카즈(타격코치) 75 모리오카 료스케(내야수비·주루코치) · 82 마츠모토 유이치(외야수비·주루코치 겸 작전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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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
88
이케야마 타카히로(2군 감독) · 77
오바나 타카오(투수 수석코치) · 72
오노데라 치카라(투수코치) · 84
마츠오카 켄이치(투수코치) 79 시로이시 노리유키(수석 겸 수비·주루코치) · 81 사토 신이치(외야수비·주루코치) · 76 미야데 류지(타격코치) 83 키누가와 아츠시(배터리코치) · 95 도바시 카츠유키(육성수석코치) 92 야마모토 테츠야(육성투수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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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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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3180>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No.76 | |
미야데 류지 宮出隆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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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77년 8월 18일 ([age(1977-08-18)]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에히메현 우와지마시 |
출신학교 | 우와지마히가시 고등학고 |
신체 | 192cm, 90kg |
포지션 | 투수, 1루수, 3루수,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5년 드래프트 2위 |
소속팀 |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6~2009)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09~2010)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11~2012) |
지도자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군 타격코치 (2013~2014)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군 타격코치 (2015~2019)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군 수석코치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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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의 前 야구선수. 야쿠르트에서 오랫동안 뛰다가 라쿠텐으로 이적했지만 다시 돌아와 야쿠르트로 복귀해 은퇴한 뒤 바로 야쿠르트의 코치가 되어 2021년에는 수석코치로 재직중이다. 투수로 데뷔했으나 2002년에 타자로 전향했다.2. 프로 입단 전
우와지마히가시 고등학교의 에이스로서 나중에 야쿠르트의 팀원이 되는 이와무라 아키노리와 배터리를 결성했다. 1994년 코시엔에서 1루수로 출전해 3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 고교 통산 34홈런을 기록했다.1995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야쿠르트가 미야데를 2순위로 지명하고 계약금 7천만엔, 연봉 6백만엔에 입단했다.
3. 선수 경력
3.1. 야쿠르트 1기
3.1.1. 짧았던 투수 시절
미야데의 선발 데뷔전 경기 |
1998년 4월 5일 요미우리 3차전 8회초에서 세 번째 투수로 등판해 2이닝 무실점으로 막으며 프로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또한 4월 22일 주니치 4차전에서 첫 선발 등판을 하여 5이닝 2자책으로 프로 첫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 이 승리가 1998년 시즌의 유일한 승리.[1]
1999년부터 중간계투로 나와 21경기 2승 4패 평균자책점 5.82, 2000년 3승 1패 평균자책점 4.22를 기록했다. 2001년에는 셋업맨으로 개막전에 등판하기도 했지만 4월 중순에 무릎 반월상 연골이 손상되어 수술을 해야 했다. 그 이후 투구를 했지만 무릎에 물까지 고이게 되자 더 이상 투수 미야데로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투수로서의 통산 기록은 49경기 6승 5패 100탈삼진 평균자책점 4.73이다.
3.1.2. 타자 전향
미야데의 타격 영상 |
투수였을 때도 선발 데뷔전 경기에서 2루타를 친 것을 비롯해 1999년 타율 .333 6타수 2안타 1타점, 2000년 타율 .500 8타수 4안타[2] 1타점을 기록한 적이 있어서 팀에서 미야데가 타격에 강점이 있다는 것을
이듬해인 2003년부터 1군에 콜업되면서 본격적인 타자로 활약했고 60경기 타율 .277 159타수 44안타 5홈런 18타점으로 타자 전향 2년차로서 좋은 결과를 냈다. 특히 5월 25일 한신전에서 후지카와 큐지에게 1군 첫 홈런을 따내는데 성공했다.[3] 그러나 2004년에는 빌리 마틴[4]이 용병으로 들어와 포지션 문제로 출장 빈도가 급감해졌고 그만큼 성적도 떨어졌다.[5] 결과는 타율 .235 2홈런 6타점.
2005년에는 클린업의 5번으로 올라오며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돌파, 99경기 타율 .320 8홈런 46타점 5도루를 기록했고 2006년에는 레귤러 우익수로 출전하며 기회를 더 많이 받아 134경기 타율 .275 9홈런 59타점 1도루를 기록해 타율은 떨어졌지만 장타에서 더욱 더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2007년에는 미야데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주전 3루수인 이와무라 아키노리가 메이저 리그 도전으로 이탈해 3루수 자리가 비었는데 공격력 강화를 위해 3루수로 낙점받기도 했다. 그러나 스프링캠프 때 한신과의 연습경기에서 두 번의 수비 기회에 두 번 다 실책하자[6] 심각함을 느껴 수비 특훈도 했지만 3루수로서의 수비율은 .875를 기록해[7] 결국 3루 자리는 이이하라 야스시에게 뺏기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애덤 리그스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해 1루수 자리가 비자 바로 1루수로 바꿔 포지션 중 제일 많은 68경기에 출전했고 괜찮은 수비를 선보였다. 타격에선 주로 5, 6번 타자로 111경기 타율 .279 9홈런 46타점 3도루로 이번에도 좋은 활약을 했지만 9월 17일 주니치전에서 야마이 다이스케의 투구를 오른손에 맞아 골절되고 그대로 시즌아웃 되었다.
2008년에는 1루수는 하타케야마 가즈히로가 주전으로 낙점됐고, 외야수는 후쿠치 카즈키가 이시이 가즈히사의 FA 보상선수로 합류하면서 자리가 없었고 그만큼 자신도 부진하며 출전 수가 대폭 급감해 여러모로 아쉬운 시즌이 되었다.
그러다 2009년 시즌 개막 전인 3월 23일에 이치바 야스히로와의 맞트레이드로 드래프트 지명 당시 야쿠르트 감독이었던 노무라 카츠야가 이끄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했다. 등번호는 9번을 받았다.
3.2. 라쿠텐 시절
미야데의 라쿠텐 이적 후 첫 히어로 인터뷰 |
2009년 시즌 전반기는 타율이 1할대까지 떨어져 상태가 좋지 않아 1군 등록과 말소를 반복했지만 7월 14일 세이부전에 대타로 출장해 미츠이 코지로부터 2년 만에 결승점이 되는 우측을 넘기는 홈런을 기록해 이적 후 첫 히어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 경기를 계기로 컨디션을 올려 나카지마 토시야의 부상으로 자리가 비자 주전 선수로 도약했고 그 결과 82경기 타율 .303 3홈런 21타점 5도루를 기록해 전반기에 비해 매우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8]
그러나 2010년에는 또 다시 부진하면서 출전 수가 다시 급감했고 시즌 종료 후 10월에는 팀의 추계 캠프에 참가했지만 10월 27일에 결국 방출당하고 말았다.
3.3. 야쿠르트 2기
미야데와 후쿠치의 합동 은퇴식 영상 |
얼마 지나지 않아 11월 10일에 친정팀인 야쿠르트가 미야데를 영입하면서 3년 만에 야쿠르트로 복귀했고 등번호는 이치바 때문인지 야쿠르트에서 써오던 43번이 아닌 49번을 받았다.
다시 돌아왔을 땐 백업으로 활동할 수 밖에 없었지만 2011년 28경기 타율 .300 3타점, 2012년 37경기 타율 .296[9] 3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백업으로서 좋은 활약을 했고 그렇게 2012년 10월 6일에 현역 은퇴를 발표하고 시즌 최종전인 10월 7일 히로시마전에서 2루 플라이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미 시즌이 끝난 11월 23일,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팬 감사 데이에 같이 은퇴를 선언했던 후쿠치와 합동 은퇴식을 했다.
타자로서의 통산 기록은 701경기 458안타 타율 .277 39홈런 216타점 15도루.
4. 지도자 경력
은퇴한 다음 해인 2013년부터 바로 야쿠르트의 2군 타격 코치로 취임했다.2015년부터 1군 타격 코치로 승격했다. 이때 1군에 올라오면서 2017년까지는 1군 베이스코치도 겸했다.
2020년부터는 1군 수석 코치로 전환됐다.
5. 여담
- 결혼해서 2명의 아이가 있다고 한다.
- 팀 내에서도 최고의 연습량을 소화하기도 했고 2007년에는 나이가 적지 않음에도 『 젊은 유망주 』 로 소개되는 일도 있었다.
- 성실하고 인품이 좋은 선수라고 동료들 사이에서 인망이 매우 높다고 한다.
- 190의 장신에서 내뿜는 폭발적인 타격에서 한때 로베르토 페타지니와 빗대 『 미야지니(ミヤジーニ) 』 라는 별명으로 토종 거포로 꼽히기도 했다.
- 또 2005년에는 역시 장신이라는 특징 때문에 같은 해에 요미우리에 있었던 용병 마무리 투수 버트 미아디치[10]와 빗대 『 미야디치(ミヤデッチ 또는 ミヤディッチ) 』 라 불렸던 적도 있었다.
- 라쿠텐 이적 후의 회견에서 "입단했을 때 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노력하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6. 관련 문서
[1]
이 경기에서 미야데의 타격 실력을 알 수 있었는데 주니치의 선발
이마나카 신지가 야쿠르트의 타자들에게 4점을 내주며 당시 9번 타자였던 미야데까지 왔는데 2사 1, 2루 상황에서 이마나카의 한가운데에 들어온 커브를 놓치지 않고 과감히 돌려 좌측 펜스를 맞추는 통렬한 2루타로 프로 첫 안타와 첫 타점을 기록했다. 이 기록이 1998년에 기록한 유일한 안타였는데 선발 데뷔전 영상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람이 조금만 더 도와줬다면 홈런도 가능했을 정도로 투수 치고는 큰 타구를 날렸다. 이 안타로 주니치가 어지간히 멘탈이 털렸는지 이마나카는 1이닝을 마치지 못한 채 강판당해야 했다. 그 다음 투수로 야마다 타카시[11]가 구원 등판했으나 야쿠르트의 불붙은 타선을 여전히 막지 못했고 결국 1이닝에만 13점이나 실점하고 말았다.
[2]
2루타 1개 포함.
[3]
참고로 그 경기는 미야데의 고향인 에히메의
마츠야마 중앙공원 야구장에서 열린 경기였다.
[4]
1976년 6월 10일 생 이자
미국
텍사스주 애빌린 출신의 타자. 1998년
메이저 리그 드래프트 34순위로
뉴욕 메츠에 입단했던 선수로 2004년에 야쿠르트에 입단했다. 본 포지션은 내야수였지만 야쿠르트에 들어와선 외야수로 출전했다. 하지만 타율 .241 6홈런 18타점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만 남긴 채 방출당했다.
[5]
그 당시엔
알렉스 라미레즈,
이나바 아츠노리,
마나카 미쓰루가 있어서 경쟁이 어려운 점도 한몫했다.거기에
아오키도 있었다.
[6]
당시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이 "이와무라는
센트럴리그 최고의 3루수니까 마음이 편하다."라는 말도 했었다.
[7]
18경기에 출전해 실책 3개를 기록했는데
풀타임 3루수로 계속 뛰었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상상에 맡기자.
[8]
특히 이 해 왼손 투수를 상대로 .340의 타율을 기록해 좌완 킬러의 면모를 보였다.
[9]
이 해 역시 왼손 투수를 상대로 타율 .349를 기록했다.
[10]
1976년 2월 3일 생이자
미국
캘리포니아주 토런스 출신의 투수.
애너하임 에인절스에서 12경기를 등판했고 2005년에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150에 상회하는 빠른 직구와 슬라이더를 가지고 있지만 제구력이 좋지 않고 퀵 모션도 느려서 도루도 자주 허용했다. 결국 15경기 7.17의 평균자책점만 남긴 채 방출당했다. 참고로 미아디치의 키는 193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