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5:40:02

메넬리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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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8b22><colcolor=#fff>
에티오피아 제국 솔로몬 왕조 제61대 황제
메넬리크 2세[1]
ዳግማዊ ምኒልክ
파일:800px-Emperor_Menelik_II.png
출생 1844년 8월 7일
에티오피아 제국 앙골라 테라
사망 1913년 12월 12일 (향년 69세)
에티오피아 제국 아디스아바바
재위기간 에티오피아 황제
1889년 11월 3일 ~ 1913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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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8b22><colcolor=#fff> 가문 솔로몬 가문[2]
아버지 네구스 하일레 멜레코트
어머니 워이제로 에지가예후
배우자 테이투 베투 (1883년 ~ 1913년)
베파나 가체프 (1865년 ~ 1882년)
알타시 투아드로스 (1864년 ~ 1865년)
자녀 자우디투
웨슨 세지드
쇼아 레가드
종교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신장 183cm[3]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쇼아의 왕2.3.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되다2.4. 에티오피아 통합2.5. 아드와 전투2.6. 개혁2.7. 사망
3. 가족 관계
3.1. 아내3.2. 자식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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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티오피아의 황제. 이탈리아의 침공을 격퇴해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쟁취했으며 에티오피아의 근대화를 이끌어낸 명군.

2. 생애

2.1. 초기

에티오피아의 황가인 솔로몬 왕조의 셰와 분가 출신으로, 그는 자라 야콥 황제의 증손자 다위트 2세의 삼남 야콥 대공의 차남(...) 세그와 칼 대공의 후손이다. 그의 가문은 메넬리크 2세의 8대조인 네가시 크레스토스 대부터 쇼와 지역의 사실상 독립적인 왕으로써 다스려왔다.

1844년 8월 17일 에티오피아 암하라 지역의 앙골랄라 테라에서 쇼아의 왕족 네구스 하일레 멜레코트와 왕녀 워이제로 에지가예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워이제로 에지가예후는 하일레 멜레코트의 조모이자 당시 쇼아의 왕 사일레 셀라시에의 모친인 우이세로 제네보크의 하녀였다. 대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하일레 멜레코트와 워이제로 에지가예후는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쇼아의 왕이자 메넬리크의 할아버지인 사일레 셀라시에는 메넬리크를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왕위 계승권이 있음을 공표했다. 그후 왕위에 오른 하일레 멜레코트는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다.

1855년 네구스 하일레 멜레코트가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11살이 된 아들 메넬리크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쇼아는 하일레 멜레코트가 사망한 직후 에티오피아의 황제 테워드로스 2세에게 정복되었고, 메넬리크는 포로로 잡혀 마그달라의 산거지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테워드로스는 어린 왕자를 잘 대해줬고 심지어 1864년에 자신의 딸 알타쉬 테워드로스를 그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한편, 메넬리크의 삼촌 하일레 미카엘은 테워드로스 2세 황제에 의해 메리다즈마치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쇼아를 다스렸다. 그러나 하일레 미카일은 에티오피아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축출되었고 왕족이 아닌 아토 베자베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아토 베자베는 황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자신을 쇼아의 왕으로 칭했다.

당시 쇼아의 왕족들은 왕족 중 한 사람이 쇼아를 통치한다면 마그달라에서 억류된 채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에 큰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왕족이 아닌 자가 쇼아의 왕을 칭하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메넬리크를 마그달라에서 탈출시키기로 하고 탈출 계획을 세웠다. 총신 모하메드 알리와 울로의 여성 섭정 월키투의 도움으로, 메넬리크는 1865년 7월 1일 밤에 마그달라를 탈출하여 부인 알타쉬를 버리고 쇼아로 돌아갔다. 이에 격노한 테워드로스 2세는 29명의 인질을 학살하고 12명의 쇼아 귀족들을 몽둥이로 난타해 죽게 했다.

2.2. 쇼아의 왕

파일:Menelik,_king_of_Shewa_1877.png
1877년 무렵 메넬리크

메넬리크가 쇼아로 돌아오자, 아토 베자베는 즉시 군대를 모아 메넬리크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수천 명의 국민들이 선왕의 아들에게 몰려들었고 심지어 베자베의 병사들마저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리하여 베자베를 몰아내고 쇼아를 장악한 메넬리크는 안코바르에 들어가서 왕위에 올랐다. 메넬리크는 자신이 쇼아의 왕일 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 황제 레브나 덴겔의 직계후손이라며 에티오피아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드러냈다. 하지만 자신을 잘 대해줬던 테워드로스 2세와 정면 대결하는 것은 원치 않았던 그는 에티오피아와 맞서지 않고 쇼아에서 내정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1868년 영국군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때, 그는 직접적으로 호응하지는 않았지만 영국군에게 물자를 제공해 그 대가로 현대 무기를 제공받았다.

얼마 후 테워드로스 황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개인적으로 상심이 컸지만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될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울로족의 반란과 그의 두번째 부인 베파나의 왕위 찬탈 음모, 쇼아 남쪽의 아르시 오로모에 대한 군사 원정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메넬리크는 당장 에티오피아 황위를 노리지 못하고 이집트에 망명가 있던 요하네스 4세를 모셔와서 차기 황제로 옹립했다. 메넬리크는 교활하고 전략적으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쌓았다. 그는 주민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도록 3일간의 호화로운 축제를 개최하고 이슬람교도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프랑스 및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요한네스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1876년, 이탈리아 탐험가 마체르세 오라지오 안티노리는 메넬리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주 친근하고, 무기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지적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또다른 이탈리아인은 메넬리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소년 같은 호기심을 간직했다. 그는 훌륭한 지능과 현대 무기에 대한 풍부한 이해력을 보여줬다."
메넬리크는 아주 이해타산적인 태도로 대화하고 빠르게 말했으며 절대 화내지 않았다. 그를 개인적으로 대면한 서양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으며 이야기의 요지를 단번에 알아냈으며 군사적인 역량이 매우 출중해 현대 무기를 대거 수용하는 동시에 자신의 군대를 단시일에 정예화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에티오피아의 황제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다.

2.3.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되다

1889년 3월 10일, 요한네스 4세는 수단의 마흐디 국과의 전쟁 도중 갈라바트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4] 데자즈마치 멩게사 요한네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3월 25일, 메넬리크는 요하네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자신을 에티오피아의 황제로 선언했다. 메넬리크는 요한네스 4세가 솔로몬 시바의 여왕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후손이며 자신과 그의 딸 자우디투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의 마지막 후예이니 명실상부한 황위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강력한 경쟁자였던 멩게사 요한네스가 자신의 영지인 티그라이에서 분쟁에 휩싸이는 등의 행운과 솔로몬 왕조의 피가 모계로 흐르는 요한네스 4세-멩게사 요한네스에 비해[5] 부계로 솔로몬 왕조의 피를 이어받는 거의 유일한 후예였다는 점 덕분에 교회 및 에티오피아 귀족들 대부분에게 충성 서약을 받은 후 1889년 11월 3일 엔토토산 마리아 성당에서 수많은 고위 인사들과 성직자들 앞에서 쇼아 주교 아부나 마테우스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에티오피아 북부를 순방하며 각 지방 관리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2.4. 에티오피아 통합

메넬리크가 에티오피아 황제로 즉위했을 무렵, 에티오피아는 16세기부터 시작된 고질적인 전쟁으로 대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에티오피아 제국 내부의 수많은 부족들이 저마다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이웃 부족과 전쟁을 벌였고 자신들에게 간섭하려는 황제에게 반기를 들기 일쑤였으며 여러 황제들이 부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에티오피아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의 위협이 끊이지 않았고 노예상인들이 에티오피아와 그 주변 민족들을 계속 노예로 잡아갔다.

메넬리크는 이렇듯 수백년간 혼란에 휩싸여 있었던 에티오피아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했다. 메넬리크는 정치적 합의를 통해 북부 영토 대부분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예외는 고잠이었지만, 그들도 1882년 6월 6일 엠바보 전투에서 군대의 절반 이상을 섬멸당하는 패배를 당하고 다시 복속되었다. 또한 1898년 티그레이의 왕으로 인정해줬던 선제 요한네스 4세의 아들 멩게사 요한네스가 이탈리아의 빽을 믿고 반란을 일으키자 즉각 진압했다. 한편, 그는 짐마, 웨레가, 체포와 같은 대부분의 서부 및 중부 지방에 대해선 중앙정부와 메넬리크의 일가를 따르는 부족장들이 자율적으로 다스리게 했고, 라스 고바나 다체, 라스 미카엘 알리[6], 술탄 아바 지파, 쿰사 메레다, 하베지오르기스 디네그데, 발차아바 네프소, 조트 툴루 등 원주민 병사들과 연합해 에티오피아 남부의 영토를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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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1889년경 메넬리크의 원정. 색칠된 땅들은 모두 당시 에티오피아의 영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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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1896년경 메넬리크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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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4년경 메넬리크의 원정

1880년대 초반부터, 메넬리크는 남, 동, 서부의 땅과 사람들을 하나의 제국으로 재통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원정을 단행해 오로모인, 시다마, 구라즈, 월리아타 등 남부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지마, 레카, 우레가와 같이 순순히 메넬리크에게 투항한 지역은 이전처럼 자치를 누렸고 중앙 정부는 자치 정부에게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메넬리크는 피정복민들의 종교적 믿음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자였지만 무슬림들에게도 잘 대해줬고 그의 친구들 중엔 무슬림이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다가 무력으로 정복된 지역에 대해서는, 메넬리크가 무자비하게 응징했다. 그의 군대는 피정복민에게 고문, 학살 등 잔혹행위를 자행했다. 디지족과 카피코 왕국의 사람들에게 대규모의 잔학행위가 벌어졌다. 학자들은 메넬리크 군대에게 맞서다 전사하거나 학살당하거나 고문당해 죽거나 기아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효가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메넬리크의 러시아 출신 군사 보좌관 알레산드로 블라토비치에 따르면, 메넬리크의 군대는 오로모 인구의 절반 이상을 학살해 오로모 주변 겔라 일대의 모든 부족들에게 어떤 종류의 반란도 생각할 가능성을 배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정복 전쟁 와중인 1888년에서 1892년까지 에티오피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이 닥쳤다. 이 기근으로 총 인구의 3분의 1인 3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근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소에게서 비롯된 전염성 바이러스가 가축에게 돌아 90% 이상의 소가 폐사하는 바람에 벌어졌다.[7]

이러한 정복 행위를 벌인 이유는, 제국 확장과 중앙집권화와 같은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바로 토지 때문이었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경제는 당시 전형적인 중세식 경제로서 토지가 모든 경제의 기반이자 핵심이었고, 토지가 없는 이들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들었다. 그런데 판관의 시대를 거치며 점점 토지를 잃고 하위층으로 떨어지는 농민들이 많아졌고, 반대로 귀족과 셰와와 같은 고위 군사 계급들에 의한 토지 집중 현상은 더 심해졌다. 메넬리크 2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영토를 정복해 그 땅을 사람들과 측근들에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토지 집중 현상을 다소 해결했다.

한편, 메넬리크는 제국의 수도 건설에 착수했다. 사실 에티오피아는 17세기에 파실리데스 황제가 곤다르를 수도로 정한 이후 이 지역은 매우 번영했으나, 판관의 시대를 거치며 점점 쇠락했고 결정적으로 테워드로스 2세가 곤다르를 두번이나 파괴 및 방화하고 수단의 마흐디 국으로부터도 파괴를 당하는 바람에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테워드로스 2세는 고잠의 데브레 타보르로 수도를 옮겼으나 도시 규모상 도저히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기 힘들었던지라 제대로 된 수도의 기능은 하지 못했으며 이에 요한네스 4세는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정사를 봐야 했다. 메넬리크 역시 여러 곳에서 야영하며 그곳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가 1887년 엔토토 산 남쪽의 온천에서 야영한 후 이곳에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수도 이름을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라고 지었다. 이 지역은 중세시대 군사기지 용도로 건설된 도시로서 오로모 인들의 침략 이후 버려져 목축 지대였다. 메넬리크의 장군들은 수도 근처의 땅을 배정받아 그곳에 자신들의 집을 지었다. 아디스아바바는 급속하게 성장해 1910년까지 약 7만명의 영주민이 있었으며 임시 거주자는 그보다 5만명 많았다. 그리고 메넬리크가 죽은 후인 1917년에는 지부티-아디스아바바를 연결하는 철도가 건설되었다.

2.5. 아드와 전투

1889년 5월 2일, 메넬리크는 요한네스 4세의 아들 무엔차 요하네스에 맞서기 위해 울로 지방의 우찰레에서 이탈리아와 조약을 체결했다. 메넬리크는 조약에 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메랍 마일즈의 북쪽 영토(에리트레아)는 아비시니아에 속하지 않으며 내 지배하에 있지도 않다. 나는 아비시니아의 황제다. 에리트레아라고 불리는 땅은 아비시니아인들이 보유하고 있지 않다. 아비시니아는 자기 영토를 지키지만 외국 땅에서 싸우지는 않는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로부터 에리트레아를 양도받는 것에 합의하고 에티오피아에게 상품, 특히 무기를 에티오피아에게 제공하며 에티오피아 상인들에게 어떠한 차별 대우를 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이 조약은 에티오피아 정부가 데브레 비젠 수도원을 소유하지만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했다.

그러나 이 조약의 제17조 '에티오피아의 외교권'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이탈리아 측은 에티오피아가 외교권을 행사할 때 이탈리아의 자문을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해석했지만 메넬리크는 이탈리아의 자문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후 양측의 갈등이 고조화되었고 급기야 1893년 메넬리크는 우찰레 조약의 완전 폐기를 선언했다. 이에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 내전을 일으키기 위해 티그레이의 라스 무테샤에게 접근했지만 무테샤는 이탈리아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1894년 12월 15일, 이탈리아군은 에리트레아 총독 오레스테 바라티에리의 지휘하에 전격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이때 에리트레아인들이 이탈리아군을 에리트레아에서 몰아내려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일부 에리트레아인들은 에티오피아 진영에 가담해 이탈리아군에 맞서 싸웠다. 1896년 3월 1일, 두 군대는 아드와에서 만나 결전을 벌였고, 메넬리크의 탁월한 지휘에 힘입은 에티오피아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드와 전투 참조. 이후 메넬리크는 에리트레아를 공격했다가 이탈리아의 분노를 사는 것보다는 이 쯤에서 타협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아디스아바바에서 이탈리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서 이탈리아는 우찰레 조약 페기를 인정하고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2.6. 개혁

메넬리크는 1868년 영국이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테워드로스 2세를 자살로 몰아넣은 것을 지켜보며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러시아만이 쇼아 정부의 영토 확장과 중앙 집권 정책의 지원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893년, 메넬리크는 아디스아바바를 방문한 러시아 외교 및 군사 사절단과 협상해 러시아와의 강력한 동맹을 체결했다. 이후 러시아는 1893년부터 1913년까지 수천 명의 고문과 자원병을 파견해 에티오피아군을 후원했다. 또한 러시아 적십자 자원봉사들이 아드와 전투가 끝난 지 3개월 후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해 병원을 세운 후 의료지원을 해줘서 전염병이 창궐하던 에티오피아가 안정화되는 데 기여했다.

또한 1890년대 중반까지 노예 무역을 금지하고 악명 높은 노예시장을 파괴하고 노예 상인들을 신체 절단형으로 처벌했다. 사실 테워드로스 2세와 요하네스 4세도 노예 무역을 금지했지만 모든 부족이 이에 따르지 않았고 노예 상인들이 에티오피아 전역에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러한 관행을 완전히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메넬리크는 제국을 통합한 후 노예 무역 금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지만 그 역시 이 오래된 관행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단순히 과거의 악습 금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에티오피아에 서구의 기술과 행정을 도입했다. 그는 아드와 전투 후 프랑스, 영국, 러시아, 독일 등 여러 강대국들과 협상을 벌여 그들의 기술력을 습득했다. 또한 그는 에티오피아 최초의 근대 은행을 설립하고 최초의 근대 우편 제도를 도입했으며 프랑스의 후원을 받으며 아디스아바바-지부티 철도를 건설하고 전화, 전신, 자동차, 현대 배관, 전기 등을 도입했다. 또한 그는 마리아 테레사 탈러를 대체할 동전을 도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1902년, 메넬리크는 철도 공사를 4년간 확장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후 1906년, 그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합작 벤처기업에게 철도 운영권을 양도하면서 3국으로부터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주권을 다시 인정받았다. 메넬리크는 에티오피아의 언어인 암하라어, 오로모어, 아프카르어, 티그리냐어 외에도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여러 언어들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는 많은 책을 읽고 금융 교육을 받았으며 미국 철도 시스템, 미국 증권, 프랑스와 벨기에의 광산 투자 등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 강대국으로부터 국가의 이권을 양도하는 대가로 선진 기술을 습득했다. 그러면서도 특정 국가에게 특혜를 주지 않고 여러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게 함으로써 서구 열강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에티오피아에 내정 간섭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2.7. 사망

파일:Menelik_II_Mausoleum.jpg

메넬리크 2세의 석관.

1909년 10월 27일, 메넬리크는 뇌졸중에 걸려 쓰러졌다. 이후 그는 더이상 통치할 수 없었고 황후 테이투 베투가 그를 대신해 제국을 통치했다. 이후 1910년 3월, 황후가 배제된 섭정 위원회가 결성되어 황제 대신 제국을 통치했다. 1913년 12월 12일 이른 아침, 메넬리크는 사망했다. 그는 황궁에 있는 세일 벳키단 미어레트 교회에 아무런 예고 없이 은밀히 안장되었다. 그러다가 1916년 메넬리크는 바에타 르 마리암 수도원에서 특별히 지어진 교회에 재안장되었다. 메넬리크 2세의 죽음 후 섭정위원회는 에티오피아를 계속 통치했다가 1916년 9월 27일 메넬리크의 황녀 자우디투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

3. 가족 관계

3.1. 아내

메넬리크는 세번 결혼했지만 아내인 황후들로부터 단 한명의 아이도 낳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에 의해 몇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3명을 자신의 자손으로 인정했다. 1864년, 메넬리크는 에티오피아 황제 투아드로스 2세의 권유를 받아들여 황제의 딸 알타쉬와 결혼했다. 그러나 메넬리크는 1년만에 아내를 버리고 쇼아로 도주했다. 이후 알타쉬는 아드와의 족장 Dejazmatch Bariaw Paulos와 재혼했다.

1865년, 메넬리크는 우제로 베파나 가체프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7년 동안 결혼 생활을 이어갔고, 메넬리크는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메넬리크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고, 메넬리크와의 결혼 이전 낳았던 아이들의 앞날을 확보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이후 베파나는 남편이 옹립한 황제 요하네스 4세와 은밀히 접촉하여 메넬리크를 타도하고 자신의 아들을 쇼아의 왕으로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1882년, 음모는 발각되었고 베파나는 메넬리크와 이혼한 뒤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메넬리크는 여전히 그녀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혼 후 그녀와 화해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친척들과 신하들이 새 황후를 들이라고 요청하자, 그는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들은 짐에게 한때 베파나를 응시했던 바로 그 눈으로 다른 여성들을 보라고 하는가?"
그래서 1883년, 메넬리크는 테이투 베투와 결혼했다. 테이투 베투는 이전에 네번 결혼했기 때문에, 메넬리크는 그녀의 다섯번째 남편이었다. 테이투 베투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지만 남편이 죽을 때까지 보좌했다. 그녀는 황실과 가까운 귀족으로 울로 지역의 베지마 일대의 주요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녀의 삼촌 라스우브는 아폴로 가문의 오로모계 통치자인 라스 구가사 무르사의 후손들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문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5천 명의 병사들을 모아 아도와 전투에 참전해 메넬리크의 승리에 일조했다.

1909년 메넬리크가 뇌졸중에 걸려 업무를 보지 못하게 되자, 황후인 테이투 베투가 그를 대신해 제국을 통치했다. 테이투는 여러 부족들의 자제들과 메넬리크의 큰 딸 자우디투 등 주요 왕실 자녀들 간의 정치적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1910년 울로의 귀족 리지 이야수는 쇼아와 티그레이의 귀족들과 함께 음모를 꾸며 테이투 베투를 권좌에서 강제로 축출하고 섭정 위원회를 구성해 아무것도 못하는 메넬리크 대신 자신들이 제국을 통치했다. 테이투는 그저 뇌졸중으로 고통받는 남편을 간호하는 역할만 담당했고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1913년 12월 12일 메넬리크가 사망한 후, 테이투 베투는 남편이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황궁 내 교회에 급히 매장되는 것을 지켜본 후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후 1916년, 그녀의 의붓딸 자우디투가 이야수 5세와 섭정 위원회를 축출하고 여제에 등극한 후 그녀를 수도원에서 꺼냈다. 자우디투는 테이투 베투를 어머니로 모셨고 그녀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 테이투 베투는 1918년 2월 11일 사망했고 남편 메넬리크의 곁에 묻혔다.

3.2. 자식

메넬리크는 테이투 베투와의 결혼 전에 몇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그는 그 중 세 명의 아이들[8]을 자신의 자손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세 아이들의 신상 명세는 다음과 같다.
  • 웨슨 세지드(딸): 1867년 출생. 두번 결혼해서 자식 3명을 낳았으나 딸 하나는 13살에 사망했고 아들 하나는 왜소증에 걸려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그리고 남은 아들 이야수 5세는 1910년 정변을 일으켜 테이투 베투를 축출하고 섭정위원회를 결성해 제국을 통치했고 1913년 메넬리크가 사망하자 황제가 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섭정위원회를 지속시키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1916년 귀족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 자우디투(딸): 1876년 출생. 그녀는 네 번 결혼하고 몇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자식 모두가 요절하는 비극을 맛보았다. 그녀는 1916년 귀족들의 추대로 황제에 선출되었지만 실권은 그녀를 옹립한 귀족들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1930년에 사망했고 섭정이자 황태자로서 군림하고 있던 '라스' 테페리가 하일레 셀라시에로 이름을 바꾸고 황제에 즉위했다.
  • 쇼아 레가드(아들): 1873년 출생. 15살 때 사망했고 자식은 없었다.

4. 여담

이름의 유래는 솔로몬 시바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메넬리크 1세로 솔로몬의 정통 후계자가 될뻔했으나 어머니인 시바의 여왕이 있는 악숨, 지금의 에티오피아로 가길 원하여 왕위를 계승받아 에티오피아의 초대 느구서 너거스트가 된 전설 속의 황제이다. 아프리카에서 이어지는 솔로몬의 왕국이라는 정통성 차원에서 그의 이름을 계승한 듯 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단군 할아버지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에티오피아 황족들은 자신들이 성경속 인물인 솔로몬 시바의 여왕의 후예임을 매우 굳게 자부해왔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적인 물증이 없는 신화의 영역이다.

프랑스의 대시인인 아르튀르 랭보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가 동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를 오가면서 무기 밀수업을 하던 시기에 만났는데 이 시기의 메넬리크 2세는 아직 쇼아의 왕위 요구자였던 시절이었다. 메넬리크 2세는 랭보가 운영하던 군수업체로부터 지속적으로 무기를 납품받았다. 그런데 서로에게 별로 좋은 인상으로 남지는 않았는데, 메넬리크 2세는 쇼아 왕위와 에티오피아 황위를 차지하는데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하자 철면피를 쓰고 랭보의 회사에 지불할 대금을 어음으로 지급하는 등으로 갑질을 일삼아서 그에게 막심한 손해를 안겼다. 반대로 랭보는 그 특유의 모난 성격때문에 메넬리크 2세에게 고약한 놈이라고 불렸다.

문명 5 시나리오 아프리카 쟁탈전에서 에피오피아 문명 지도자로 설정되어 있으나, 일러스트와 모델링은 손자 하일레 셀라시에의 것을 사용한다.

문명 6에서는 에티오피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메넬리크 2세가 영국을 방문하자 사람들이 붕가붕가를 외쳤다고 한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메넬리크 2세에게 보낸 육성 녹음에, 메넬리크 2세가 답변한 녹음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원문과 번역문, 녹음

침략자이자 경쟁자인 움베르토 1세와 1844년생 동갑이다.
[1] 솔로몬 시바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솔로몬 왕조의 시조 메넬리크 1세의 넘버링을 계승. [2] 셰와 분가. [3] 출처 키가 six feet(6피트)라고 나오는데 이걸 센티미터로 계산하면 183cm가 나온다 [4] 장남은 아버지 사망 1년 전에 먼저 죽어서 원래는 조카였던 멩게사 요한네스를 아들로 입적해 후계자로 지명했다. [5] 사실 자그웨 왕조로 요한네스 4세 이전에 황제가 되었던 테클레 기요르기스처럼 당대의 실력있는 귀족들은 웬만하면 모계로 솔로몬 왕조의 피가 흘렀다. 그러나 부계로도 솔로몬 왕조의 피가 흐른 것은 테워드로스 2세가 서자 아들만을 남기고 죽는 바람에 메넬리크 계통이 유일하게 되었다. [6] 후임 황제 이야수 5세의 아버지. 오로모인으로, 선대 황제 요한네스 4세 대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오로모인들이 살던 월로 지역의 라스(공작)이었으며, 아드와 전투에도 참가해 공을 세웠다. [7] 이 전염성 바이러스는 우역이었는데 이렇게 극심한 피해가 난 것은 유라시아 쪽 소들은 우역에 자주 노출된 탓에 어느 정도 면역 능력이 있어서 우역이 발병해서 유행해도 그 피해가 파멸적인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아프리카 쪽 소들은 우역에 전혀 감염된 적이 없었던 탓에 우역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 능력이 전혀 없었던 탓이다. 유럽인이 처음 미주 대륙에 도착하여 유럽인이 가져온 천연두 바이러스에 처음 노출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치사율이 8~90%에 달했던 것과 비슷한 사례라고 할수 있다. [8] 두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