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시티 FC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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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85e><colcolor=#ffffff> 산하 구단 | 맨체스터 시티 FC · 맨체스터 시티 WFC · 맨체스터 시티 FC EDS |
역사 | 역사 · 유니폼 · 응원가 · 유럽대항전 상대전적 · 클럽 기록 · 레전드 | |
역대 시즌 | 2008-09 · 2009-10 · 2010-11 · 2011-12 · 2012-13 · 2013-14 · 2014-15 · 2015-16 · 2016-17 /리그 · 2017-18 /리그 · 2018-19 /리그 · 2019-20 /리그 · 2020-21 /리그 · 2021-22 /리그 · 2022-23 /리그 · 2023-24 /리그 | |
더비 매치 | 맨체스터 더비 | |
구단 시설 | 에티하드 캠퍼스 · 에티하드 스타디움 | 이전 메인 로드 | 이전 하이드 로드 | |
관련 인물 | 역대 주장 · 역대 감독 · 역대 올해의 선수 | |
기타 | 에티하드 항공메인 스폰서 · 푸마킷 스폰서 · 시티 풋볼 그룹 간략 · 맨체스터 시티 마이너 갤러리 · 논란 및 사건 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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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체스터 시티의 위대한 인물들
2018년에 구단에서 제작한 레전드 드레싱 룸 그림. 좌측부터 케빈 더 브라위너, 스테프 하우튼, 숀 라이트필립스, 세르히오 아구에로, 우베 뢰슬러, 야야 투레, 리차드 던, 게오르기 킨클라제, 숀 고터, 파블로 사발레타, 다비드 실바, 뱅상 콤파니, 마이크 서머비, 에릭 브룩, 콜린 벨, 프랜시스 리, 빌리 메레디스, 폴 디코프, 말콤 앨리슨, 토니 북, 펩 과르디올라, 앨런 오크스, 로베르토 만치니, 닐 영, 조 머서, 마이크 도일, 조 하트, 프랭크 스위프트, 베르트 트라우트만, 조 코리건, 마이카 리차즈 |
1.1. 19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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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메레디스
웨일스의 마법사
1.2. 1930년대
당대 최고의 윙포워드였으며 영국 축구의 간판 스타였던 에릭 브룩은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웨이트 프로그램을 축구계에 접목하여 몸이 단단하였고 강력한 몸싸움을 바탕으로 돌파와 슈팅을 즐겨했으며 맨시티에서 11년간 499경기 177골을 기록하였다. 그 유명한 하이버리의 전투에서 2골을 득점하며 잉글랜드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브룩은 자동차 사고로 두개골 부상을 당하며 은퇴하였고 1965년 향년 5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프랭크 스위프트
Frying Pan Hands
1.3. 1950년대
트라우트만은 2차 세계 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었던 병사였는데, 전쟁 중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영국으로 끌려갔다. 영국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중 종전이 되고 독일 송환을 거부하고 세인트 헬렌스라는 클럽에서 아마추어 골키퍼로 입단하게 되어 좋은 활약을 보이다 맨시티로 이적하게 된다. 독일군 포로였던 트라우트만을 영국의 팬들은 좋게 보지 않았으며 나치의 앞잡이라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트라우트만은 실력으로 영국팬들의 비난을 잠재웠으며 맨체스터 시티에서 545경기를 출전하며 당대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았다. 특히 1955-56 시즌 FA컵 버밍엄과의 결승전에서 트라우트만은 75분 피터 머피의 슛을 막다가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끝까지 경기를 뛰었으며 팀은 3-1로 승리하며 FA컵을 우승했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에 독일은 국외리그에서 뛰는 독일 선수들을 홀대하였기에 국가대표팀으로는 발탁되지 못하였다. 그는 2013년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1.4.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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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머서
맨시티의 첫 황금기를 이끌었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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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앨리슨
Big 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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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벨
King of the Kipp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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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서머비
Buzz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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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영
Nel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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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도일
푸른 피의 소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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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오크스
맨체스터 시티 올타임 최다 출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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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북
60년대 황금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주장
맨체스터 시티 올해의 선수 최초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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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리
Lee won 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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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코리건
Big Joe
1.5. 1990년대
1996년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겪던 맨시티에 입단하며 우베 뢰슬러와 공격 듀오로 활약했으나 팀의 승격을 이끌지는 못하였고 1998년 팀 역사상 최초로 3부 리그로 팀이 강등당하며 우베 뢰슬러는 팀을 떠났으며, 새로운 파트너 숀 고터와 함께 활약했다. 그리고 1998-99 시즌 리그 정규시즌이 끝나고 승격팀을 결정짓는 플레이오프 결승전 질링엄과의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였으나 95분 추가시간 코너킥에서 동점골을 기록하며 연장전으로 승부를 끌고갔고 결국 맨체스터 시티는 질링엄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2부 리그로 승격한다. 디코프의 이 동점골은 아구에로의 그 골이 나오기 전까지 2005년 맨체스터 시티 구단 역대 최고의 골로 선정되기도 했다.-
숀 고터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들어올린 구세주
조지아가 배출한 90년대 플레이메이커였던 킨클라제는 1995년 강등권 탈출에 힘을 쏟던 맨시티로 이적한다. 당시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에 빠져있던 맨시티에서 언터쳐블한 활약을 보여주며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킨클라제는 맨시티가 힘들어하던 암흑기에 그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첫 시즌 맨시티의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팀이 강등당하자 수많은 클럽들이 킨클라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뛰어들었고, 맨시티 팬들은 그를 뺏길까 두려워 사비를 투자해서라도 그를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였다. 하지만 킨클라제는 맨시티를 다시 승격시키겠다며 구애를 뿌리치고 팀에 잔류하였다. 하지만 팀은 3부 리그로 떨어져 버리며 새로 부임한 조 로일 감독은 팀을 개편하기를 원했고 아약스에서 제의가 오자 킨클라제는 결국 맨시티를 떠나게 되었다.
동독 태생의 공격수였던 뢰슬러는 맨시티에서 152경기에 출전하여 50골을 기록하며 제공권과 터프한 몸싸움의 타겟맨이었다. 그의 전성기를 맨시티에서 보냈으며 PL 출범 후 맨시티가 강등 당하기 전까지 맨시티를 대표하는 공격수였다. 2부 리그 강등 후에도 팀에 남아서 활약했지만 팀의 3부 리그 강등을 막을수는 없었고 뢰슬러는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
1.6.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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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라이트필립스
총알 탄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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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던
맨시티 구단 역사상 유일한 올해의 선수 4연속 수상자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 출신인 리차즈는 2005년 16살이라는 당시 굉장히 이례적인 나이에 맨시티에서 데뷔하였다. 그는 센터백과 풀백을 오가며 활약했고 괴물같은 몸싸움과 속도로 우직하게 밀고들어가는 그의 오버래핑은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까다로운 플레이였다. 그의 이런 활약에 잉글랜드는 게리 네빌의 후계자라 평했으며 향후 오른쪽 풀백의 자리는 걱정이 없을거라 생각했다. 같은 시기 스페인의 신성으로 떠오르던 세르히오 라모스에 대한 잉글랜드의 대답이라고 까지 평가될 정도였으면 당시 그의 잠재력과 기대가 어마무시했음을 알 수 있다.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 부임 이후 오른쪽 풀백으로 정착하였고, 특히 2011-12 시즌에는 드디어 기량을 만개하며 폭발적인 활약을 보여주며 월드클래스 반열에 올라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리차즈의 커리어가 크게 꺾이게 되는 2012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여 큰 부상을 당하며 장기 부상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10월 선덜랜드전에서 복귀하며 출전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안가 또 스완지 시티와의 경기에서 또 다시 장기부상을 당하며 그때부터 계속해서 장기부상을 끊으며 커리어가 망가지게 되며 파블로 사발레타에게 주전 경쟁을 밀리고 2015년 맨시티와 작별하게 된다. 현재 리차즈는 은퇴 후 맨시티 앰버서더 BBC 패널로서 활약하고 있다.
1.7. 2010년대
만치니는 2009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한 마크 휴즈를 대신해 감독으로 부임했다. 빠르게 팀을 재정비하여 챔스권 경쟁을 했으나 5위로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만치니는 2010-11 시즌 정리해야할 선수들은 정리하고 앞으로 맨시티의 중심이 될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며 불균형적이였던 스쿼드를 빠르게 정리한다. 그리고 43년만에 FA컵 우승을 안기고 그 다음 시즌 구단 최고의 선수가 될 세르히오 아구에로를 영입하며 팀에 44년만의 리그 우승을 안긴다. 2012-13 시즌에 리그는 2위로 끝냈으나 1위와의 승점차가 큰 2위였고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3무 3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안겼기에 결국 만치니는 경질당한다. 만치니는 위태위태하던 팀의 수비력을 올리는데 크게 기여했고 뱅상 콤파니를 수비수로 포지션을 정착시키면서 콤파니를 세계적인 선수로 끌어올렸다. 물론 공격적인 전술면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세부적인 공격은 선수들에게 맡기는 성향이 강했으며 중앙 지향적인 공격을 너무 즐겨했다. 하지만 펠레그리니, 펩까지 이어지는 팀의 레전드가 될 선수들이 대부분 만치니의 영입생들이며 만수르의 부임으로 시작되는 맨시티 전성기의 초석을 다진 감독이다.-
뱅상 콤파니
맨시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장이자 정신적 지주
-
다비드 실바
El Mago, Merlin
맨시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플레이 메이커
-
세르히오 아구에로
Kun
맨시티 올타임 최다 득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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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투레
2010년대 초 PL을 호령했던 미드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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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사발레타
Zaba
사발레타는 매우 프로페셔널한 선수이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발레타는 태클, 뛰는 타이밍, 경기를 읽는 능력이 흠잡을데 없었다.
나는 후에 그가 상처와 타박상으로 항상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뱅상 콤파니
사발레타는 태클, 뛰는 타이밍, 경기를 읽는 능력이 흠잡을데 없었다.
나는 후에 그가 상처와 타박상으로 항상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뱅상 콤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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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하트
맨시티의 심장
PL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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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지뉴
Unsung Hero
1.8.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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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카이 귄도안
최초의 트레블을 이끈 주장
1.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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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 과르디올라
새 시대의 맨시티 왕조를 건설한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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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더 브라위너
King K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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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 워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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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두 실바
펩이 반한 다재재능의 소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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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
앵커맨(Ancho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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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벵 디아스
혜성처럼 등장해 맨시티의 수비진을 안정시킨 콤파니의 후계자
2. 그 밖의 맨체스터 시티의 상징적인 인물들
맨체스터 시티 소속으로 공식 경기 200경기 이상 출전, 혹은 단기간이더라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들만 기재할 것.2.1. 19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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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윌리엄스
축구 역사상 최초로 골을 넣은 골키퍼
- 로트 존스
2.2. 1910년대
- 호레이스 반스
- 토미 브로웰
2.3. 1920년대
-
프랭크 로버츠
맨체스터 시티 최초의 득점왕
- 토미 존슨
2.4. 1930년대
- 샘 코완
- 프레드 틸손
- 재키 브레이
맨체스터 시티의 유스 출신이였던 버스비는 공격수로 데뷔했으나 그렇게 출중하지는 않았고 하프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기량이 만개하며 30년대 맨시티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버스비는 윌프 와일드 감독의 총애를 받는 선수였고 맨시티의 FA컵 우승에 공헌하는 핵심 멤버중 한명이였다. 1936년 리버풀로 이적하며 맨시티와 작별한다. 맨시티에서 7시즌간 주전을 차지하며 통산 229경기에 출장하며 14골을 기록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거론되지만, 선수 시절 최고의 전성기는 맨시티에서 보냈다. 버스비는 1994년 향년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피터 도허티
2.5. 1950년대
-
돈 레비
레비 플랜
- 조 헤이스
- 바비 존스톤
2.6. 1960년대
-
글린 파도[7]
Warm and Gentle
그는 훌륭한 수비수 였다. 1970년에 다리가 부러지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국가대표로 뛰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콜린 벨
콜린 벨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내 생각엔 그는 국가대표로 많은승리를 누렸을것이다.
하지만 그 부상으로 인해 다시 경기를 뛰기위해 길게 고생해야 했다.
마이크 서머비
하지만 그 부상으로 인해 다시 경기를 뛰기위해 길게 고생해야 했다.
마이크 서머비
2.7. 1970년대
- 데니스 튜어트
- 폴 파워
2.8. 1980년대
- 폴 레이크
- 데이비드 화이트
2.9. 1990년대
1990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해 데뷔 시즌 21골을 기록하며 구단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다. 거구의 피지컬을 활용한 플레이로 우베 뢰슬러와 좋은 모습을 보이며 6시즌간 활약하며 240경기 76골을 기록한다. 나이얼 퀸은 당시 주전 골키퍼 대니 코튼의 퇴장으로 골키퍼를 대신해 PK를 막은 경험도 있으며 이후 1996년 선더랜드로 이적한다.2.10. 2000년대
- 대니 티아토
디스탱은 당시 구단 수비수 클럽 레코드로 2002년 맨시티로 합류하였다. 193cm의 큰 키와 강력한 피지컬을 동반한 저돌적인 수비로 디스탱은 첫 시즌부터 좋은 활약을 펼치며 02-03 시즌 구단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다. 이후 그 활약을 인정받아 2003년 맨시티에 주장으로 임명되며 2006년까지 3년간 주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05-06 시즌 후 디스탱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 하며 태업을 했기에 주장직을 박탈당하며 리차드 던에게 주장직이 넘어간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06-07 시즌 맨시티에서 활약했으나 더 이상 재계약은 하지 않았고 디스탱은 구단과 작별한다.
2001-02 시즌 겨울 이적시장부터 맨시티로 합류한 쑨지하이는 팀의 승격과 함께 04-05 시즌까지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팀의 주전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04-05 시즌 6라운드 첼시와의 경기에서 구드욘센에게 거친 태클을 당하며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였고 시즌 아웃을 당한다. 이후 05-06 시즌 열심히 재활을 하며 복귀하였으나 이전의 폼이 아니였고 폼이 떨어지며 2008년 셰필드로 이적한다. 그래도 준주전급의 활약으로 당시 팀에게 도움을 주었고 정말 몇 안되는 순수하게 실력으로 나름의 성공을 거둔 중국 출신 프리미어 리그 선수였다. 꽤 꾸준하게 활약해서 맨시티에서 6년간 130경기에 출전했다. 십자인대 부상만 아니였다면 맨시티에서 더 좋은 활약을 펼쳤을 수도 있기에 아쉬운 부분이다.
맨시티 유스 출신의 미드필더였던 아일랜드는 05-06 시즌 맨시티에 18세의 나이로 데뷔하며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한다. 그의 재능과 창의성은 당시 맨시티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만수르 인수 후 첫 시즌인 08-09 시즌 50경기 13골 13도움으로 맹활약하며 이후에도 맨시티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구단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다. 하지만 09-10 시즌 살짝 기복있는 활약을 보였고 10-11 시즌 다비드 실바의 영입으로 인하여 입지가 줄어들었고, 현금+아일랜드로 제임스 밀너와 트레이드된다.
2007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한 엘라누는 브라질 출신의 선수 답지 않게 강력한 킥력을 바탕으로 정확한 롱패스를 즐겨하는 미드필더였다. 첫 시즌부터 38경기 10골 9도움을 기록하며 맨시티의 세트피스를 전담했던 엘라누는 맨체스터 시티의 매력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08-09 시즌 호비뉴가 맨시티로 합류하며 포지션이 겹쳐 그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준주전으로서 활약한다. 특히 UEFA컵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오모니아 전에서의 중거리 골은 엘라누의 최고의 골 중 하나였다. 2009년 갈라타사라이로 이적하며 짧은 맨시티에서의 커리어 였지만 단기간동안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2007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하며 적응기간도 필요없이 좋은 활약을 펼치며 에릭손 체제하에 엘라누와 함께 팀의 2선을 책임지며 맨시티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첫 시즌 37경기 5골 8도움을 기록하며 괜찮은 활약을 보였지만 2008년 만수르 체제로 팀이 변하며 선수단 개혁이 일어난다. 페트로프는 증명해야할 시기에 시즌 초 부터 부상을 당하며 시즌절반을 날려버린다. 그렇게 시즌이 끝나고 09-10 시즌 선수들이 대거 영입되며 페트로프는 로테이션 자원으로 기용되며 쏠쏠한 활약을 보였으나 계속해서 부상이 발목을 잡았고, 주전으로 뛰고 싶었던 페트로프는 결국 시즌 종료후 볼턴으로 이적한다.
호비뉴는 2008년 첼시로의 이적이 기정 사실화 되어 있었는데 세계를 깜짝 놀래키며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다. 첫 시즌 호비뉴 포지션의 경쟁자였던 엘라누를 후보로 내리며 세계적인 스타라는것을 증명하듯이 엄청난 플레이를 보여주며 활약하였으나, 그것은 단 한시즌일 뿐이였고, 이후 잉글랜드 생활 적응, 만치니 체제로 변하면서 포지션 갈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터지며 09-10 시즌 겨울 산투스로 임대를 떠나며 맨시티와 사실상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10-11 시즌 밀란으로 이적한다. 호비뉴의 활약은 08-09 시즌 단 한시즌이지만 맨시티의 상징적인 영입이라고 볼 수 있다.
2.11. 2010년대
2013년 5월, 로베르토 만치니를 경질한 맨시티의 보드진은 사실 후임으로 계속해서 펩 과르디올라를 원하고 선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펩이 바이에른 뮌헨에 부임하자 대신해서 05-06시즌 비야레알을 챔스 4강으로 이끌고, 당시 말락티코로 불리던 말라가를 12-13 시즌 챔스 8강으로 이끄는 등 좋은 지도력을 선보이던 마누엘 펠레그리니를 선임했다. 펠레그리니는 부임 첫 시즌부터 리그에서 야야 투레의 리그 20골이라는 말 그대로 미친 활약과 리그 102골이라는 화끈한 화력으로 우승, 리그컵에서는 결승에서 선덜랜드를 상대로 3-1로 승리해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고, 15-16 시즌에는 구단 최초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과 리그컵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시한부 감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트로피 3개를 들어올리고 마지막 시즌인 15-16 시즌에는 이미 펩 과르디올라 부임이 확정된 상태에서 챔스권을 수성하고 구단 최초 챔스 4강 진출 등 좋은 성과를 내긴 했으나, 3년 동안 쭉 이어졌던 경기력의 저하, 양아들들의 영입과 기용, 그리고 극심해진 스쿼드 노쇠화 등으로 절정의 성과를 내야 할 펩 임기 3년 중 최소 1년은 스쿼드, 특히 수비수쪽을 갈아엎고 대거 리빌딩을 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점 등에서 여러모로 명암이 극명하게 갈리는 감독으로 평가 받고 있다.2008-09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 맨시티로 합류한 데 용은 하드워커 기질이 강한 파이팅 넘치는 수비형 미드필더였으며 상당히 거친 스타일로 유명했다. 08-09, 09-10 시즌은 맨시티 중원에 힘을 불어 넣으며 주전을 차지하였고, 10-11 시즌 야야 투레의 합류로 맨시티의 중원은 투레, 가레스 배리, 데 용으로 상당히 피지컬적으로 강력한 조합이였으며 이 조합은 FA컵 우승과 리그 최소실점에 기여한다. 11-12 시즌 아게로, 나스리의 합류로 투레가 뒤로 내려오면서 투레, 배리 조합이 베스트로 잡으며 데 용은 로테이션으로 밀렸으나, 이후에도 소소하게 활약하며 리그 우승에 기여하며 12-13 시즌 주전 자리를 위해 떠난다. 아구에로의 고별식 영상에 깜짝 출현했다.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는 PL 레전드이다. 2009년 그는 리버풀의 구애를 뿌리치고 맨시티의 비전을 보고 합류한다. 맨시티 합류 후에도 아스톤 빌라 시절 못지않은 활약을 보이며 FA컵과 리그 우승을 해낸다. 파트너 투레가 조금 더 공격적이라면 배리는 조금 더 수비적인 역할을 부여받으며 페르난지뉴 이전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선수였다. 2014년 공식적으로 맨시티와 작별하며 에버튼으로 팀을 옮긴다.
200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갈등 끝에 맨체스터 시티에 둥지를 튼 테베즈는 당시 수많은 영입으로 공격 자원들이 상당히 많은 상태였던 맨시티에서 쟁쟁한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팀내 공격자원 중 으뜸의 활약을 보이며 주전을 차지한다. 10-11 시즌에는 주장직을 받으며 리그 득점왕에 등극한다. 하지만 11-12 시즌 교체 출전을 거부하거나, 무단으로 팀을 떠나고, 이적 요청을 하는 등 많은 구설수를 일으켰다. 팀을 떠날 것으로 보였지만 괜찮은 조건을 제시하는 팀이 없었고 결국 테베즈는 마음을 고쳐먹고 구단에게 사과하며 후반기에 다시 출전하며 팀의 우승에 조그맣게라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12-13 시즌 팀 내 공격수 중에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활약을 했으나 팀은 무관으로 시즌을 마무리 하였고 테베즈는 유벤투스로 팀을 떠나게 된다.
2009년 맨시티로 합류한 레스콧은 첫 시즌에는 뱅상 콤파니, 콜로 투레 조합에 밀려서 3옵션 센터백이였지만, 투레의 도핑 사건으로 10-11 시즌부터는 주전으로 도약한다. 콤파니와 좋은 호흡을 보이며 11-12 시즌까지 좋은 활약을 보이며 리그 최소 실점에 기여한다. 레스콧은 강력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제공권, 힘 싸움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지만 집중력, 위치선정, 판단력같은 부분이 많이 부족했고 그 단점을 바탕으로 11-12 시즌 QPR과의 최종라운드에서 1-0으로 앞서고 있었으나 시세에게 헤딩 백패스를 하면서 참사를 만들뻔 했으나 나머지 팀원의 고군분투로 승리하며 우승을 해낸다. 결국 이러한 단점들이 점점 부각되며 12-13 시즌에는 나스타시치에게 주전을 빼앗기며 로테이션 자원이 된다. 그래도 콤파니 옆에서 맨시티의 리그 우승을 이끈 주전 수비수였고 맨시티에서 5년간 158경기에 출전하여 9골 4도움을 기록하였다. 팀을 떠난 후에도 맨시티에 애정을 보이고 있기에 시티 팬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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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다르 콜라로프
세르비아 각도기
-
마리오 발로텔리
악동
Why Always 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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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딘 제코
보스니아 폭격기
아스날만큼의 임팩트와 활약은 보여주진 않았지만 무난하게 활약해주었고 2011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하며 2017년까지 203경기 3골 12도움을 기록하였다. 합류한 첫시즌 안정적인 활약을 바탕으로 콜라로프를 밀어내고 12-13 시즌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무난하게 시티의 레프트백 주전을 차지하는듯 했으나 13-14 시즌 콜라로프의 공격력이 폭발하고, 덩달아 클리쉬는 폼이 떨어지며 시즌, 반시즌 별로 왔다갔다 하며 서로 주전을 차지했다. 맨시티에서의 활약은 평범에 가까웠으나 무난하게 6시즌간 활약해주었다.
2011년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한 나스리는 실바와 찰떡같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기복이 심하긴 했으나 펩체제 이전 맨시티의 리그 우승시즌이였던 11-12시즌, 13-14시즌에는 항상 나스리의 좋은 활약이 있었다. 맨시티에서 176경기 27골 40도움을 기록하였다. 펩 체제에서도 쏠쏠하게 활약을 해줄줄 알았지만 잔류를 원했던 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비야로 임대를 떠나며 맨시티 생활을 끝냈다.
2013년 맨시티로 합류하며 빠른 스피드와 체력을 바탕으로 한 클래식 윙어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2016년까지 준주전과 주전으로 활약하며 맨시티의 또 다른 옵션이자 윙어로 쏠쏠한 활약을 해주었다. 16-17 시즌에는 후보의 입장에서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시즌 종료 후 친정팀 세비야에서 나바스에게 제의가 들어왔고 세비야로 이적한다. 나바스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183경기 8골 39도움을 기록하였다.
2015년 맨시티로 합류한 스털링에게 팬들은 크랙의 활약을 보여줄 것이라 많은 기대를 했고, 개막 후 리그 5R까지의 스털링이 안쪽으로 들어오며 콜라로프의 오버래핑을 통한 공격은 굉장히 위협적이였으나 딱 거기까지였고 중반기부터는 본인의 폼 저하로 인해 재앙에 가까운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16-17 펩의 합류로 전반기 굉장히 좋은 활약을 보이며 시즌을 시작했으나 후반기에는 살짝 아쉬웠다. 스털링의 최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시즌은 17-18, 18-19, 19-20 전반기인데 이 시기의 스털링은 드리블, 클러치 능력[8]까지 엄청나게 상승되어 좌측 우측 가리지 않고 명실상부 월드클래스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의 활약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19-20 후반기, 특히 챔피언스리그 8강 올림피크 리옹전을 기점으로 결정력, 드리블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면서 자신감이 크게 떨어지고 그로 인해 앞에 언급했던 능력이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팀이 그를 필요로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크게 임팩트있게 날려먹는 장면들이 늘어나면서 후보로 밀리게 되었으나, 스털링은 계속해서 더 높은 주급과 주전 보장을 요구했고 결국 21-22 시즌 종료 후 첼시로 이적하게 되었다. 스털링은 2015년부터 2022년까지 339경기 131골 75도움을 기록했으나 좋은 스탯만으로 팀의 레전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첼시 이적 후 제주스와는 반대로 맨시티에 대해 안 좋은 인터뷰를 하면서 더욱더 지지를 잃고있다.
나는 출전 기회 부족에 불평하지 않았고[9], 최선을 다해 경쟁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줘도 나의 자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10]
축구가 행복하지 않았고 행복을 되찾기 위해 첼시로의 이적은 적절한 시기였고, 행복하다.
라힘 스털링
2015년 맨시티로 합류한 오타멘디는 첫 시즌부터 콤파니의 계속된 부상, 심각하게 못했던 데미첼리스, 하드웨어만 훌륭한 망갈라였던 수비진 중 철강왕의 모습과 좋은 활약을 보여준 유일한 믿을맨이었다. 16-17 시즌 볼 플레잉 센터백을 선호했던 펩의 구상에 오타멘디는 없었으나, 오타멘디는 한단계 스텝업하며 발군의 패스 능력도 보여주며 주전 자리를 지켜냈다. 17-18 시즌에는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며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나 시즌 말미부터 실책성 플레이, 무리한 패스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결국 18-19 시즌에는 주전에서 밀렸으나 4옵션 센터백으로는 좋은 선수였다. 19-20 시즌 주전 센터백들의 줄 부상으로 선발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센터백이 없어 센터백을 대신 서던 페르난지뉴보다 못했고 결국 수비진이 붕괴되며 맨시티는 리버풀과 큰 승점차로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친다. 이후 20-21 시즌
후벵 디아스를 영입하기 위해 오타멘디+현금으로 벤피카로 이적한다. 부상을 항상 가지고 있던 콤파니와 스톤스, 19-20 시즌 장기 부상을 끊으며 시달리던 라포르테와 다르게 오타멘디는 철강왕으로 5시즌간 210경기 11골 4도움을 기록했으며 세계 최고의 센터백인 디아스의 영입에 도움을 주었기에 시티 팬들은 그래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내가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줘도 나의 자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10]
축구가 행복하지 않았고 행복을 되찾기 위해 첼시로의 이적은 적절한 시기였고, 행복하다.
라힘 스털링
2016년 샬케에서 맨시티로 합류한 사네는 전반기에는 놀리토에게 밀려 주전은 아니였다. 이후 놀리토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는 순간에 기회를 잡으며 맹활약을 했고 중원의 다비드 실바와 함께 좌측면에서 강력한 킥력, 엄청난 스피드와 드리블로 휘젓는 소위 크랙 플레이를 보였던 사네의 활약은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17-18, 18-19 시즌 연속으로 리그 10-10을 기록하며 훌륭한 활약을 펼쳤으나 사네를 원했던 뮌헨의 1년간의 끈질긴 구애로 19-20 시즌 뮌헨으로 이적이 기정사실이었으나 커뮤니티 쉴드에서 장기 부상을 끊으며 2020년 이적한다.
2016-17 시즌 겨울 맨시티로 합류하면서 초반 정말 놀라운 활약을 보였던 제주스는 나오는 경기마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전설적인 공격수 아구에로를 잠시동안이나마 후보로 밀어냈으나 부상과 함께 그 활약이 끊기게 된다. 17-18 시즌부터 결정력 문제가 드러났으나, 이타적인 플레이, 넓은 활동량을 장점으로 맨시티에서 계속해서 활약하였다. 비록 스털링과 함께 일명 제주스털링으로 엮이며 심각한 빅찬스미스들을 계속해서 보여주었으나 스트라이커, 좌측, 우측 윙 가리지 않고 플레이가 가능한 범용성 있는 선수였다. 이후 21-22 시즌 펩에게 요청하여 우측 윙으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우측 윙에서 좋은 퍼포먼스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제주스로는 세르히오 아구에로의 공백을 채우지 못해 정통 9번 스트라이커의 필요성을 느낀 맨시티는 엘링 홀란드를 영입했고, 주전을 원했던 제주스와 스트라이커가 필요했던 아스날과 맞아 떨어져 제주스는 아스날로 이적한다. 제주스는 맨시티에서 6시즌간 236경기 95골 40도움을 기록했다.
2.12. 2020년대
2017-18 시즌 겨울 이적시장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맨시티로 합류한 라포르트는 맨시티에 합류하자마자 정평이 나있던 왼발 빌드업과 롱패스, 그리고 적응도 필요없을 정도로 팀에 녹아들어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였다. 그리고 2018-19 시즌 맨시티의 센터백들 중에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하며 맨시티가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11] 좋은 길만 걸을거라 생각했던 라포르트가 2019-20 시즌 멘디, 진첸코등 수비적으로 불안했던 좌측 공간을 커버하다가 반월판 부상을 당하면서 꺾이게 된다. 그렇게 주전에서 밀렸으나 2021-22 시즌 다시 주전자리를 꿰찼고 시즌 말미에 나머지 중앙 수비수들이 부상으로 신음하는 와중에 라포르트는 진통제를 맞아가면서 시즌 마지막까지 경기를 소화해내는 투지를 보여주었다. 비록 라포르트의 마지막 시즌인 2022-23 시즌 트레블의 주역으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라포르트가 활약했던 2018-19, 2021-22 시즌은 펩 체제에서의 리그 시즌 중 가장 실점이 적은 시즌들이고 이 시즌에서는 라포르트의 활약이 없었다면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을 시즌이다. 하지만 리그에서의 활약은 인정하지만 한번의 실수가 크게 작용하는 챔스 토너먼트에서의 약한 모습 때문에 라포르트는 팬들에게 아쉬움이 남는 선수이다. 라포르트는 6시즌 동안 맨시티에서 180경기 12골 3도움을 기록했다.-
리야드 마레즈
장갑 낀 마레즈(Gloves Mahrez)
2.13. 현재
아래는 아직은 여기에 기재되지만 추후 활약을 통해 레전드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이다.반즐리 베켄바워
세계에서 발을 가장 잘 쓰는 골키퍼, 조 하트의 후계자
맨시티 로컬 보이
트레블을 이끈 괴물 스트라이커
[1]
골키퍼의 올타임 레전드이자, 골키퍼로는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받았다.
[2]
둘 다 유망주일 당시에 이렇게 평했으나 지금은 비교도 안될정도로 위상과 실력이 벌어졌다.
[3]
'생일을 챙겨주지 않아서 이적할 것이다'라는 황당한 발언부터 '펩은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지 못 한다면 투레에게 사과해야 한다', '펩이 과연 투레 없이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할 수 있을까?' 등의 발언을 에이전트를 통해 수도 없이 많이 저질렀다.
[4]
이것도 말이 안 되는게, 정말 투레의 말대로 펩이 흑인 선수들에게 차별대우를 했다면 바르셀로나 때 중용했던
에릭 아비달이나
세이두 케이타, 바이에른 뮌헨 때 중용했던
데이비드 알라바같은 케이스를 설명할 수가 없다.
[5]
투레는 은퇴 이후 구단과 펩 감독에게 사과를 시도했으나 한두번 트러블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결국 무시당했다.
[6]
사실 하트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하트가 힘, 스피드에 의존하던 골키퍼인 것도 한 몫했다.
[7]
토미 도일의 외할아버지다.
[8]
17-18 시즌 14라운드 사우스햄튼과의 홈 경기에서 96분에 터뜨린 중거리 감아차기가 대표적이다.
[9]
이것도 거짓말인게 전술했다시피 스털링은 재계약 협상 당시 주전 자리 보장 조항을 넣었다. 즉, 출전 시간에 불만이 있었다는 것.
[10]
사실 펩은 스털링이 한참 부진했던 20-21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도 스털링을 믿고 선발출전 시켰을 정도로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아니라 필 포든과 리야드 마레즈에게 실력으로 자연스럽게 밀린것.
[11]
시즌 내내 좋은 모습을 보이던 라포르트가 하필 챔스 8강 2차전 토트넘과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실수로 2개의 골을 실점하게 되어 챔스 탈락의 원흉이 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