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15218><colcolor=#fff> 맥코이 타이너 McCoy Tyn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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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프레드 맥코이 타이너(출생, 활동명) Alfred McCoy Tyner 술레이만 사우드(개명) Suleiman Saud |
출생 | 1938년 12월 11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
사망 | 2020년 3월 6일 (향년 81세) |
미국 뉴저지 주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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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피아니스트, 작곡가 |
악기 | 피아노 |
장르 | 재즈, 하드밥, 포스트밥 |
활동 | 1960년대 ~ 2010년 |
레이블 | 임펄스! 레코드, 블루 노트 레코드, 마일스톤 레코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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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존 콜트레인 쿼텟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리고 이후에는 솔로 및 다양한 사이드맨 커리어를 통해 재즈계, 특히 60년 이후의 포스트밥 음악 및 현대 재즈 피아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2. 생애
2.1. 유년기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에서 세 아이 중 장남으로 태어나고 자란 맥코이 타이너는 미용실을 운영하던 어머니가 가게 안에 둔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계기로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물론 맥코이 본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 노력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최고의 모던 재즈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를 만든 것이겠지만 유년기의 그는 재즈 뮤지션으로 성공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2개의 큰 행운이 있었다.
첫번째로, 맥코이는 13살에 자신이 살던 펜실베니아에 있던 그래노프 음악 학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배웠는데, 이 학교는 무려 디지 길레스피와 존 콜트레인을 배출한 학교[1]였다! 좋은 교육 여건을 갖췄던 학교에서 음악 이론을 배우고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맥코이 타이너는 2년만에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두번째로, 그의 이전 세대 비밥 피아노의 레전드 버드 파웰과, 형만큼은 아니지만 소니 롤린스나 클리포드 브라운과 같은 레전드들과 함께 활동하던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버드 파웰의 동생 리치 파웰이 그의 이웃이었다! 약 등 어른의 사정으로 자산을 탕진해 집에 피아노조차 둘 수 없었던 버드 파웰과 리치 파웰은 피아노를 치러 종종 가장 피아노가 가까이 있던 곳으로 놀러갔는데, 그것이 맥코이 어머니의 가게(..)였다. #
맥코이는 당시에 그들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고 하고, 연주하는 것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를 좋아했고 그들의 연주를 들으며 많은것을 배웠다고 한다.
학교 졸업 후, 경제적으로 집에 보탬이 되고자 그는 필라델피아 내에서 프로 연주자가 되는데 트럼펫을 연주하는 캘빈 메시(Cal Massey)라는 사람의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이 밴드에는 이후 맥코이와 함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가 되는 콜트레인 쿼텟의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도 있었는데, 캘빈 메시의 소개로 17살에 존 콜트레인을 처음으로 만난다. 콜트레인은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를 잠시 떠난 상태였는데, 이때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필라델피아에 올때마다 콜트레인은 맥코이를 만나서 음악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한다. 이 즈음 맥코이는 아흐마디야가 되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을 술레이만 사우드로 개명할 정도로[2]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런 부분이 콜트레인과도 이미 잘 맞았던 것이다. 이 시기 그는 콜트레인에게 자신이 지은 The Believer라는 곡을 주기도 하는데, 콜트레인은 이 곡이 마음에 들었는지 1958년에 레드 갈랜드와 녹음하고 아예 앨범의 타이틀로 세웠다.
20살에는 베니 골슨이 필라델피아에 와서 함께 공연한 것을 계기로 그의 밴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를 통해 아트 파머, 커티스 풀러 등과 재즈텟을 만들어 활동하며 경험을 쌓는다. 다만, 6개월간 활동하며 많이 배운만큼 맥코이는 즉흥 연주가 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게 되었고, 이 때 같은 생각을 하던 존 콜트레인의 연락이 온다.
2.2. 존 콜트레인과의 활동과 60년대 중반까지
(Impressions를 연주하는 존 콜트레인 쿼텟. 존 콜트레인, 맥코이 타이너, 지미 개리슨, 엘빈 존스는 재즈 역사에 길이 남을 명 쿼텟이었다.)
우선은 스티브 데이비스가 베이스를 연주하는걸로 시작했던 존 콜트레인 쿼텟은 1961~1965년 동안 재즈계 최고 앨범으로도 거론되는 명작들을 남기면서 동시에 쉬지 않고 투어 공연을 했다. 이 때 나온 많은 음반들 중,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등재 앨범이나 그래미 명예의 전당 헌액작 또는 매체에서 몇대 앨범이라고 해서 최상위에 랭크하는 앨범들 등 후대에 아주 명반으로 거론되는 것만 해도 My Favorite Things, Crescent, Coltrane's Sound, Ballads, A Love Supreme을 포함해 수많으며, 장르도 하드밥, 발라드, 모달 재즈, 포스트밥 등 다양했다. 여기에는 물론 다재다능한 재즈 역사 최고의 아티스트 존 콜트레인의 역량이 크게 작용했지만 그와 함께한 사이드맨들 중 단 하나도 동시대의 다른 뮤지션으로 대체되어도 이같은 성과가 나올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와중에 맥코이는 자신을 리더로 한 음반들도 발매하는데, 콜트레인과 함께 임펄스!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였던 그는 1962년에 데뷔작 Inception을 시작으로 Reaching Fourth, Nights of Ballads & Blues, Today and Tomorrow 등 중요한 음반들을 이어 발표한다. 이 음반들에서 맥코이는 콜트레인 없이 리더로써도 훌륭한 작품을 낼 수 있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그 외에도, 60년대 재즈계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이자 연주자들의 최전성기 앨범들에도 참여하는데, 웨인 쇼터의 Night Dreamer(1964년)와 Juju(1965년), 조 헨더슨의 Page One(1963년), In 'N Out(1965년), Inner Urge(1966년)에 참여하여 이 음반들이 오늘날까지 걸작들로 기억되는데 한 축을 담당했다. 다만, 모두 블루 노트 레코드 앨범이었던 위 앨범들에 당시 임펄스! 소속이었던 맥코이 타이너의 이름을 앨범 자켓에 적을 수 없어 그의 이름은 Etc라고 적혀있다(..) 그 외에도 밀트 잭슨, 행크 모블리, 리 모건, 그랜트 그린, 프레디 허바드의 음반에도 참여한다. 이 음반들은 60년대 극초반이나 60년대 후반 이후에 발매된 것들도 있어 맥코이 타이너의 이름이 정상적으로 들어가 있다.
(Etc라고 이름이 나온 맥코이 타이너)
콜트레인 쿼텟은 아주 인기가 많고 평론가들의 평도 좋았으나, 점점 무조 음악, 프리 재즈로 가는 콜트레인의 음악은 맥코이 타이너가 지향하는 음악이 아니었다. 또, 콜트레인이 프리 재즈를 하기 위해 어디선가 데리고 오던 퍼커셔니스트
2.3. 콜트레인 쿼텟 이후, 그리고 홀로 서기(60년대 후반 ~ 70년대)
(Passion Dance는 당시 연구되고 있던 sus코드, 4도 음정을 활용한 보이싱, 펜타토닉 스케일을 활용한 아웃 솔로 등을 완성한 작품으로 동시대 칙 코리아의 음악과 함께 후대 모던 재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콜트레인을 떠난 맥코이에게 임펄스 레코드는 급격히 관심을 잃었고, 맥코이는 슬럼프를 겪는다. 음악을 계속해야할지 의문을 갖기도 했으며, 택시 기사가 되려고 하기도 했다. 존 콜트레인 쿼텟일때 그들을 공항으로 데려다주던 기사를 찾아가 택시 기사를 하려고 한다고 하니 그는 처음엔 믿지 못하다가 연락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
그러나 곧 1966년부터 밴드 리더로 홀로 서기로 결심한 맥코이는 그간 Etc로 자신을 외면하던(..) 블루 노트 레코드로 가 음반을 내는데, The Real McCoy(1970년), Tender Moments(1967년), Time for Tyner(1968년), Expansions(1968년), Extensions(1970년)등이 그 음반들이다. 이 음반들은 콜트레인의 피아니스트 였기에 가능한, 콜트레인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음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맥코이만의 개성과 혁신성들을 볼 수 있는 음반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등 다양한 곳에서 영향을 받은 선법과 리듬, 악기 구성으로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 연주자로써 뿐 아니라 작곡가로써의 맥코이 타이너의 역량은 이 시기 음반들에서 본격적으로 꽃피웠다.
(Sahara. 참고로 퍼커션, 플룻 중 일부, 코토도 맥코이 본인이 직접 연주한 것이다.)
이러한 맥코이의 개성은 1970년 이후 마일스톤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낸 음반들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펼쳐지는데, 맥코이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Sahara(1972년)나 Echoes of a Friend(1972년), Song for My Lady(1973년), Enlightenment(1973년), Sama Layuca(1974년), Fly with the Wind(1976년), Focal Point(1976년) 등이 그 음반들이다. 맥코이는 다양한 선법, 악기 구성, 리듬 등을 차용하며 포스트밥의 영역을 넓히고 다져 모던 재즈 피아노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다. 1970년대는 프리 재즈와 퓨전 재즈가 대세였던 때였는데(당장 60년대에 함께 활동했거나 경쟁 관계였던 허비 행콕, 웨인 쇼터, 존 콜트레인, 칙 코리아등을 생각해보라) 맥코이는 자신만의 동양적이고 어쿠스틱한 포스트밥 음악을 꾸준히 탐구했다.
콜트레인 뿐 아니라 다른 재즈 피아니스트들과 구분되는 맥코이만의 이러한 개성에는 아무래도 맥코이가 무슬림이어서 흑인 가스펠 음악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았다는 점, 이전 시대의 피아니스트들보단 비밥에 덜 영향을 받고 모달 재즈의 영향을 더 받았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그렇다고 맥코이가 비밥에 약했다거나 콜트레인의 영향을 부정하려고 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당장 앞서 언급한 1972년 음반 Echoes of a Friend만 해도 콜트레인의 곡들에 대한 맥코이의 독주 트리뷰트 앨범이며(여기에 마지막 트랙 Folks는 필라델피아 생활 당시 콜트레인을 만나게 해준 친구 캘빈 메시를 위한 곡이다), Song of the New World나 Song for My Lady는 각각 Afro Blue,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라는 콜트레인과 함께할 때의 추억을 상기시키게 어레인지가 된 곡들이다.
(맥코이 타이너가 1972년에 콜트레인을 기리며 연주한 Naima 독주 연주. 곡 자체가 모달 재즈라 그런것도 있지만, 당시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든 맥코이의 연주 스타일이 더욱 명상적이고 동양적이게 느껴지는 연주이다.)
2.4. 1980년대와 이후
(Love Surrounds us Everywhere, 1982년)
1980년대에 들어선 맥코이도 퓨전의 물결을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게 된다. 1981년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해 음반을 내기 시작한 맥코이 타이너는 이듬해 Looking Out(1982년)을 발매하는데, 이 음반은 무려 카를로스 산타나를 불러와 일렉 기타를 치게 하고 보컬리스트를 포함해 함께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녹음한 작품으로, 캐치한 R&B/퓨전 곡을 맥코이가 직접 작곡하고 가사까지 썼다!(위 영상)
물론 이런 스타일로 완전히 돌아선것은 아니어서, 같은 해 엘빈 존스와 오랜만에 앨범을 내고 바비 허처슨과 Manhattan Moods(1994년), 마이클 브레커와 Infinity(1995년)등을 내고 하드밥의 열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라이브 공연들을 하면서 건재함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80년대 들어선 재키 맥린, 론 카터, 마커스 밀러와 블루 노트 레코드에서 펑크 성향의 It's About Time(1985)을 내는 등 그간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맥코이의 퓨전 연주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987년에 낸 Blues for Coltrane: A Tribute to John Coltrane(1987년)을 포함해 1990년대의 The Turning Point(1992년), Journey(1993년), Infinity(1995년), 그리고 이후의 Illuminations(2004년) 총 5개 음반은 그래미 상을 수상한다.
2000년대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던 맥코이는 건강 문제로 2010년부터는 활동을 줄였으며, 2020년에 뉴저지의 본인 자택에서 81세로 눈을 감았다. 특별한 사인이 있다기보단 노환으로 인한 죽음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3. 연주 스타일과 영향
맥코이 타이너는 모던 재즈 피아노에서 가장 중요한 피아니스트 중 하나로 다뤄지며, 특히 60년대 및 이후 포스트밥과 퓨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펜타토닉 스케일 관련 어법들을 개척하고 깊게 탐구하여 수많은 귀감이 되는 연주들을 남겼다. 맥코이 이후의 재즈 피아니스트들은 종종 연주하던 키의 반키 위 또는 아래 등의 펜타토닉 스케일을 연주하여(side slipping 기법) 강한 텐션을 일으키고 다시 돌아오는 등의 방식으로 극적인 효과를 주는데, 맥코이는 이 혁신적인 기법의 창시자였던 것. 이를 칙 코리아등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60년대 후반 ~ 70년대에 대유행시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주자들의 사랑을 받는다.또, 왼손잡이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건지 왼손의 힘이 강해 저음역대에 완전 5도(파워 코드)를 내리치고 완전 4도를 이어 쌓은 4th voicing을 리드미컬하게 연주하여 콜트레인이나 본인이 모달한 곡을 연주할때 잘 어울리는 컴핑 방식을 개발했는데, 이 또한 현대에 재즈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연습하는 기법이 되었다.
이 외에도 맥코이는 60년대 콜트레인, 웨인 쇼터, 조 헨더슨, 프레디 허바드 등 소위 '앞서 가는' 작곡가들의 곡을 최고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피아노 연주자들 중 하나였던지라(사실상 허비 행콕과 맥코이 단 둘 뿐이었고, 60년대 후반에서야 등장한 칙 코리아는 늦게 태어난지라 2년 정도 늦었다) 오늘날 재즈 음악의 바이블이 된 60년대 임펄스!와 블루 노트 레코드의 피아노를 담당하며 좋든 싫든 후배 피아니스트들이 모두 그의 음악을 끝없이 들으며 멜로디, 리듬, 화성 등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4. 맥코이 타이너와 관련된 말, 말, 말
It is a private language of sound; it is bells and drums in a pre-colonial village; it is banging stones together at the first communal fire.
(맥코이의 연주는) 소리가 쓰는 개인적인 언어이다. 문명화되기 이전의 마을에서 들렸던 종소리와 북소리고, 마을의 첫 공용 불을 피우기 위해 꽝하고 부딪히는 부싯돌이다.
배드 플러스(Bad Plus)의 피아니스트 이썬 아이버슨(Ethan Iverson) #
(맥코이의 연주는) 소리가 쓰는 개인적인 언어이다. 문명화되기 이전의 마을에서 들렸던 종소리와 북소리고, 마을의 첫 공용 불을 피우기 위해 꽝하고 부딪히는 부싯돌이다.
배드 플러스(Bad Plus)의 피아니스트 이썬 아이버슨(Ethan Iverson) #
I was a big Led Zeppelin fan as a kid and was playing in a rock band when I first heard McCoy on a Coltrane record,” he says. “What McCoy was doing on the piano — with those stacked intervals of a fourth — sounded to me like the power chords that were so thrilling with Zeppelin. He and the Coltrane band were instrumentally burning — they seemed like kindred spirits to the rock I loved. Honestly, if it weren’t for McCoy, I probably wouldn’t be playing jazz today.
콜트레인 음반의 맥코이를 처음 들었던 어릴때, 난 레드 제플린의 팬이었고 락밴드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맥코이가 피아노로 하고 있던 4도를 쌓은 소리는 레드 제플린의 강렬한 파워코드처럼 들렸다. 맥코이와 콜트레인은 음악적으로 완전 불타고 있었고, 내가 당시 사랑하던 락 음악과 비슷한 스피릿이 느껴졌다. 솔직히, 맥코이가 없었더라면 난 아마 오늘날 재즈를 연주하고 있지 않았을 것 같다.
브랜포드 마살리스, 마이클 브레커 등과 함께한 재즈 피아니스트 조이 칼데라조(Joey Calderazzo) #
콜트레인 음반의 맥코이를 처음 들었던 어릴때, 난 레드 제플린의 팬이었고 락밴드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맥코이가 피아노로 하고 있던 4도를 쌓은 소리는 레드 제플린의 강렬한 파워코드처럼 들렸다. 맥코이와 콜트레인은 음악적으로 완전 불타고 있었고, 내가 당시 사랑하던 락 음악과 비슷한 스피릿이 느껴졌다. 솔직히, 맥코이가 없었더라면 난 아마 오늘날 재즈를 연주하고 있지 않았을 것 같다.
브랜포드 마살리스, 마이클 브레커 등과 함께한 재즈 피아니스트 조이 칼데라조(Joey Calderazzo) #
매코이 타이너가 마음 속에 품게 된 것은 음악이 주는 감동의 극점이다. 그러니까 종종 2-3류 연주자들을 통해 술집에서 그저 그렇게 일상적으로 소비되던 재즈가 아니라 매코이 타이너가 기준으로 삼게 된 재즈는 인간이 음악을 통해 얻게 되는 가장 경이로운 경험,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콜트레인을 통해 얻었으며 그것이 진정한 자신의 것, 자신의 표현이 되기 위해 평생을 진지하게 음악에 헌신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음악이 주류인지, 비주류인지 혹은 평론가들과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는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고는 앙코르를 연주할 에너지마저도 결코 남기지 않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다. 지난 2000년 6월 LG 아트센터에서 그의 연주회를 본 재즈 팬이라면 그의 이러한 태도를 실감했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황덕호 #
황덕호 #
5. 여담
- 까마득한 후배이지만 같은 필라델피아 출신인 베이시스트 크리스찬 맥브라이드는 맥코이 타이너를 굉장히 존경해서 같이 연주를 하게 되었을때 엄청나게 긴장했다는데, 당시 콜트레인의 Dear Lord를 연주하려고 했는데 맥코이가 곡을 잊어서 그도 사람이라는걸 깨닫고 약간 안심했다고 한다(..) 물론 본인 스스로가 녹음했던 곡이라 그런지 주변 사람 중 하나가 음반을 건네주자 잠깐 듣고 바로 다시 기억해냈다. 같은 고향 출신이었던 크리스찬 맥브라이드에게 친근하게 애향심을 담아 'Homes'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
- 크리스찬 맥브라이드에 따르면, 허비 행콕과 얘기하던 도중 콜트레인과 허비가 같이 한적은 없는지가 궁금해져 물어보니, 60년대 중반에 허비 행콕이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연주하고 있을때 마일스가 어느날 빌리지 뱅가드 공연에 존 콜트레인이 밴드에 참석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허비 행콕, 론 카터, 토니 윌리엄스는 당시 살아있는 전설 콜트레인이 온다길래 너무 좋아했고 허비 행콕은 집에 가서 맥코이 타이너를 열심히 들으며 그를 따라하려고 그의 어법(McCoy Stuff)을 공부하고 연습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물론 (이미 당시 맥코이와 사실상 재즈 피아노계 투톱이었던) 허비 행콕의 엄청난 프로페셔널리즘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지만, 그 천재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마저도 본받으려고 하고 공부하게 만든 맥코이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참고로, 콜트레인은 결국 연주때 안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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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인 사람이었으며 독실한 종교인이었는데, 인터뷰에선 '신(God)'이란 말보단 '창조주(Creator)'라는 말을 쓰곤 했다. 그 이유로 그는 '인간은 사랑에서 나왔고 창조주라는 말이 그가 창조한 대상인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함한다고 생각해서'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