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솅커 Michael Schenk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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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
미하엘 솅커 Michael Schenker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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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5년 1월 10일 ([age(1955-01-10)]세) |
서독 니더작센 자르슈테트 | |
거주지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직업 |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
소속 |
스콜피온즈 (탈퇴) UFO (탈퇴) MSG 등 |
형제자매 | 형 루돌프 솅커 |
활동 기간 | 1969년 – 현재 |
사용 악기 | 기타 |
장르 | 하드 록, 헤비 메탈 |
레이블 | 누클리어 블래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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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출신의 기타리스트 겸 싱어 송라이터. 현재는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다.독일의 국민밴드 스콜피온즈의 창립멤버이자 초대 리드 기타리스트이며, 리더인 루돌프 솅커의 7살 터울의 친동생이다. 전설적인 하드록 밴드 Michael Schenker Group의 리더이기도 하며, 전성기 때에는 에어로스미스와 오지 오스본에서 리드 기타리스트가 될뻔했을 정도로[1] 매우 실력이 뛰어난 세계 최고의 하드 록 기타리스트중 한명이다.
2. 소개
북미와 유럽 및 일본 등지[2]에선 아직도 인기가 많은 인물. 평생 동안[3] 플라잉 V만 사용했기 때문에 자신의 형과 같이 플라잉 브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독일어 발음으로는 미하엘 솅커로 읽는다. 그런데 본인도 스스로 마이클, 마이클 솅커 그룹이라 발음한다. 독일 외 지역에서 더 많이 활동하니까.
3. 생애
3.1. 스콜피온즈와 UFO
스콜피온즈의 리더 루돌프 솅커의 친동생으로 스콜피온즈 창립멤버이자 초대 리드 기타리스트로도 유명하다. 어릴적부터 기타 연주에 천부적이 재능을 보였고 10살이라는 나이에 형 대신 밴드의 리드 기타를 담당했었다. [4]당시 영국에서 떠오르는 밴드였던 UFO의 독일 공연 당시 스콜피온즈는 오프닝 밴드를 담당했었다. 하지만 UFO의 기타리스트가 여권을 두고온 바람에 입국이 안 되어서[5] 투어 자체가 안될 마당에 급한 마음에 마이클 솅커를 잠시 빌리기로 한다.
마이클 솅커의 연주력과 외모[6]에 반한 멤버들은 그를 스카웃하기로 결심했고, 스콜피온즈에서 활동하던 마이클 솅커는 당시 락의 본고장이었던 영국에서 활동하고픈 욕심에 밴드와 고향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당시 독일에선 밴드 위주 음악보단 디스코가 인기였고,[7] 마이클 솅커처럼 기타를 들고 무대위에서 솔로 연주를 하면서 음악하는 것이 이해 받지 못할 시기였다. 반면에 영국에선 마이클이 하던 일이 전문가로 대우 받던 때라고 한다. 하지만 루돌프 솅커는 반대가 심했었는데, 마이클은 당시 17살에 불과한 철없는 10대였고[8],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당시 스콜피온즈의 밴드 사운드를 책임지던 사람은 리더이지만 리듬 기타 담당이던 루돌프가 아니라 리드 기타였던 동생 마이클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국으로 건너간 마이클 솅커는 UFO와 같이 1974년에 Phenomenon 앨범을 발표하면서 승승장구를 하게 된다. 이 앨범에 마이클 솅커의 인생곡인 Doctor Doctor와 Rock Bottom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이클은 방랑벽 때문에 몇 주, 몇 개월 동안 사라지기 일쑤였고, 밴드리더 였던 필 모그는 외국인인 마이클 솅커에서 인기가 집중되는 것이 불안해 하면서 둘간의 갈등은 심해진다.
1979년도에 UFO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고, 다시 형이 이끄는 스콜피온즈에 재가입(?) 하면서 "Lovedrive" 앨범에 참여한다.[9] 하지만 자기가 참여하지 않았던 스콜피온즈의 곡을 연주하는 데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다시 밴드를 나가 다른 밴드에 들어가기로 한다.[10]
에어로스미스의 기타리스트 조 페리의 후임으로 오디션을 봤었는데, 프로듀서였던 개리 라이온즈가 마이클이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관련 농담을 하자 빡쳐서 그냥 나와버렸다고 한다.[11][12] 그 후 오지 오스본이 기타리스트인 랜디 로즈 사망 후 후임 오디션을 이해 랜디 로즈와 비슷한 외모(마른 체격, 단신)에 같은 플라잉 브이를 사용하던 마이클을 영입하려 했지만 거절한다. 훗날 인터뷰에서 오지 오스본의 기행과 사생활 때문에 만약 오지 오스본 밴드에 들어가면 인생을 망쳤을꺼라 생각했다고 한다. 안그래도 나름 막장으로(알콜 중독, 폭력) 살던 본인 이었는데, 개막장인 오지와 같이 있으면 더 심해질꺼라 예상한 듯 하다.[13][14]
3.2. Michael Schenker Group 과 McAuley Schenker Group
마이클 솅커는 다른 밴드에 들어가기보단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어서 자신만의 음악을 하기로 한다.자신의 이름을 딴 밴드인 Michael Schenker Group (MSG)를 1982년도에 결성, 보컬로는 개리 바든을 영입 하였지만 음반 2장 만에 해고, 당시 레인보우의 보컬로 주목받았던 그레이엄 보넷을 영입하여 명앨범인 "Assult Attack"을 발매하지만, 그레이엄 보넷은 만취상태에서 무대에 올라 난동 부린탓에 영입 반년도 안돼서 밴드에서 해고되고 다시 개리 바든을 영입하며 투어를 끝냈지만, 개리 바든 역시 다시 밴드를 떠난다. 잇따른 멤버 교체로 인해 밴드의 결속력이 약해지자 결국 마이클 솅커는 MSG를 해산한다.
밴드 해산 후, 마이클 솅커는 밴드원들을 새로 모집하였고, 드러머로 오디션을 봤던 로빈 맥올리를 보컬로 영입 McAuley Schenker Group(MSG)를 결성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개인 밴드가 아닌 같이 이끌어가자는 의도로 맥올리의 성을 따서 밴드명에 넣은 것이다. 맥올리 영입후 새 밴드가 잘 되나 싶더니 앨범 3장 발매한 것을 끝으로 신생 MSG는 끝나게 된다.
3.3. 위기
1993년 결국 마이클 솅커는 옛밴드 UFO에 재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하게된다. 중간에 MSG가 아닌 본인 솔로 앨범도 몇개 내고했지만 잉베이 맘스틴, 폴 길버트, 슬래쉬[15]같은 속주와 화려한 테크니션 위주의 기타리스트들과 스래쉬 메탈 및 멜로딕 메탈이 유행세를 타면서 예전같은 전통 하드록은 더이상 발 붙일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90년대 말은 미국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밴드 너바나 때문에 메탈과 전통 하드록 장르는 멸종할 정도로 인기를 끌지 못했고, 마이클 솅커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특정한 활동보단 UFO 스콜피온즈를 병행하면서 활동 하거나 세션으로 연주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살게되고, 심지어 이 시절 때의 연주는 정말 마이클 솅커의 연주가 맞냐 싶을 정도로 형편이 없었다. 이 당시 마이클의 모습을 보면 관리를 한다는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16][17] 2000년도는 마이클 솅커가 개인적으로도 가장 힘들었던 때라고하고 스스로도 밴드에 남아있는게 폐가된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결국 2003년도 앨범을 마지막으로 UFO를 다시 떠나게된다.2004년도엔 그의 한량같은 삶에 못견딘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고, 자전거 한대 그리고 옷 몇벌을 제외한 나머지 재산은 위자료로 물어주게 되고 빈털털이가 된다.
3.4. 부활
2004년 이혼 후 경제적 위기와 한참 정신적 압박 등 여러 복합적인 일이 겹쳤을 때, DEAN사에서 한물가버린 마이클 솅커가 눈에 띄면서 그의 시그니쳐 기타 제작 제안을 하면서 DEAN사와 계약을하면서 그의 시그니쳐 기타들이 제작 및 양산이된다. 이 때 금전적인 문제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2005년도는 MSG 25주년이 되던해라 옛멤버들을 대리고 투어를 했는데 투어는 성공적으로 끝났고,[18] MSG의 올드팬과 신생팬들의 엄청난 환호를 받은 마이클은 다시 MSG의 부활 가능성을 가늠해본다.
1대 보컬인 개리 바든과 스콜피온즈 및 MSG에서 활동햇던 옛 세션들과 같이 수년간 북미, 유럽 투어를 시작하여 MSG의 부활을 알린다. 이 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다시 불타올랐는지 전성기 때보다 훨신 더 깔끔하고 정확한 연주를 보여주고 무대매너도 친절해지는 등 암흑기 시절때와 완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콜피온즈에서 울리 존 로스와 같이 공연도하는 등 한물갔던 자신의 존재를 다시 락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2010년엔 Classic Rock Roll of Honour Awards에서 Marshall "11" award상을 받게된다. 이 상은 록큰롤 음악을 대변하는 인물들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운 상이다. 마이클의 그동안의 활동과 락계에 미친 영향이 드디어 인정 받는 때였다.
3.5. Micahel Schenker's Temple of Rock
2011년 투어 이후, 개리 바든과 다른 멤버들은 개인활동을 위해 밴드를 다시 나가면서, 레인보우 및 여러 밴드에서 활동했던 보컬리스트 두기 화이트를 영입하면서 Michael Schenker's Temple of Rock이란 밴드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때는 마이클의 팬이었던 다양한 밴드들과 같이 공연을하는 등 리즈 시절보다 더 활발한 활동을 한다.2012년도엔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록큰롤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여받았다.
덤으로 지금 이미지인 염소 수염과 모자 혹은 비니 패션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모자혹은 비니를 쓴 이유는 탈모 때문이다.
3.6. Michael Schenker Fest
2016-2017년도 사이에 마이클 솅커는 Michael Schenker Fest 새로운 밴드를 기획한다. 리즈 시절때 같이 활동했던 세션 멤버들과 더불어 활동이 가능한 보컬들을 죄다 영입을 한 것이다. 초대 보컬 개리 바든, 로빈 맥올리, 그레이엄 보넷[19], 그리고 두기 화이트을 보컬로 내새웠다.[20]일본 유럽 북미 등 투어는 성공적이었고 최연소인 두기 화이트를 제외하면 전 멤버들이 60-70대 노인들이고 노익장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밴드가 되었다.
3.7. 다시 MSG 이름으로
코로나-19로 인해 활동에 제약이 생겼고 보컬 중 한명인 로빈 맥올리가 패혈증 증세로 활동이 어려워졌고, 개리 바든은 태국의 방콕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서부권에서의 활동이 힘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밴드는 활동 중지가 되었다.그러던 중, MSG 로고를 그대로 사용하며 그룹을 부활시켜 2020년 Immortal 앨범을 냈고, 2020-22년에 데뷔 50주년 기념 월드 투어(...라고 하지만 유라시아 지역에서만 한다.)를 하고 있다. 50주년 기념이란 이름이 붙은 20년 투어 이름은 임모털, 22년은 유니버설 투어이다.
다른 올드 밴드처럼 본인 포함 주전 멤버가 노환으로 쓰러지는 일이 없는 한 쭉 가게 될 듯. [21] 다만 MSG 원년 멤버이자 베이시스트엿던 크리스 글렌은 참여하지 않는다.
https://michaelschenkerhimself.com/news/michael-schenkers-50th-anniversary-universal-world-tour/
메인 보컬은 리치 블랙모어의 Rainbow의 새 보컬인 Ronnie Romero.[22] 패혈증 증세를 보였던 로빈 맥올리 역시 게스트 보컬로 나오는 중.
4. 평가
메탈리카의 커크 해밋, 제임스 헷필드, 메가데스의 데이브 머스테인, 판테라의 다임벡 대럴, 슬레이어의 개리 홀트, 아이언 메이든의 아드리안 스미스, 크리스 임펠리테리, 슬래쉬, 폴 길버트, 랜디 로즈, 존 페트루치 등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마이클 솅커에게 영향을 받았고, 커크 해밋은 방송에 같이 나와 재밍도 하고, 마이클 솅커 공연에 게스트로 나오고 메탈리카 공연에서 대표곡인 Rock Bottom을 커버하기도 했다. 아이언 메이든 역시 Doctor Doctor를 공연서 연주하기도 한다.라이브에서 실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완벽함을 보여준다. MSG 해산 이후 UFO에서 재활동하던 시절을 제외하면 무대 위에서 대충 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5. 스타일
테크닉, 사운드, 작곡의 3박자를 모두 갖춘 만큼, 그는 대단히 유니크한 스타일을 들려준다.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들었을 때도 그의 연주임을 알 수 있을 정도.또한 랜디 로즈, 데이브 머스테인, 크리스 임펠리테리, 슬래쉬, 폴 길버트, 다임백 대럴, 존 페트루치, 커크 해밋, 제임스 헷필드 등 수많은 명 기타리스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음을 이야기한다.
특히, 그의 연주는 단순히 뛰어난 테크닉과 사운드 및 작곡이 별개의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요소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연주할 때 기타를 오른쪽 허벅지에 고정하고 허리를 숙이는 특유의 포즈가 트레이드 마크다. 이 포즈는 무거운 레스폴을 사용하다가 무게가 가벼운 플라잉 브이를 사용하면서 생긴 원인이라고 한다. 마이클 솅커의 연주 특징이 비브라토를 강하게 넣는 편인데, 그럴려면 기타가 고정이 잘 되어야 하지만 플라잉 브이의 무게가 가벼워서 레스폴과 달리, 비브라토를 넣을 때 너무 심하게 흔들려서 기타를 고정시키기 위해 허벅지에 고정을 시키게 되었는데, 이게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
5.1. 테크닉
마이클 솅커는 이미 10대 시절부터 완성된 기타리스트였고, 풀피킹 속주나 스윕 피킹 같이 빠른 속도의 테크닉보다는, 다양한 벤딩과 비브라토 테크닉을 위주로 연주한다. 이 때문에 스콜피온즈의 합동공연에서 Rock You Like A Hurricane 같은 속주 리드 기타가 필요한 곡들이나 울리 존 로스 재직 시절 때의 곡들은 리드 기타가 아닌 리듬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예를 들어서, 마이클 솅커가 즐겨 쓰는 테크닉 중 하나는 프리벤드 - 릴리즈로, 일반적인 벤딩을 반대로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비브라토의 경우도 특정한 위치까지 벤딩을 한 후에 그 위에서 비브라토를 구사하거나, 마치 왜미 바를 쓰는 듯한 크고 느린 비브라토에도 능하다. 이러한 연주를 아래에서 설명할 유니크한 와 페달 사용 방법과 함께 구사하는 것이 그의 특징.
이는 기타리스트 본인만의 음색위주인 솔로잉 연주보다[23][24] 곡의 멜로디를 가장 우선으로 하는 마이클 솅커의 음악관 때문으로, 테크닉을 정면에 내세우기보다는 멜로디에 녹여내는 데 능한 기타리스트라고 보면 되겠다.[25] 실제로 마이클 솅커의 연주를 들어보거나 따라서 쳐 보면, 음의 낭비가 적고 멜로디를 명확하게 살려주는 느낌임을 알 수 있다.
5.2. 사운드
이 정도 클래스의 기타리스트 중 가장 간소한 세팅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은데, 플라잉 V 기타 외에 사용하는 장비들은 아래의 것들 뿐이라고 한다.- 마샬 앰프
- 보스 리버브
- 보스 코러스
- 보스 딜레이
- 와(Wah) 페달 (모델은 몇 가지가 바뀌는 것 같은데 보통 던롭)
앰프의 드라이브를 최대한 그대로 살려낼 수 있는 세팅인 만큼, 전체적인 사운드는 군더더기 없이 스트레이트하다.
이는 그만큼 자신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멜로디에 자신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장비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그 자신의 스타일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솔로톤의 경우는 와 페달을 이용해서 아주 유니크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다른 이펙터들은 센드-리턴으로 쓰면서도 와 페달만은 기타-앰프에 직결해서 사용하고 있다.[26] 이는 와 페달을 솔로 시의 기믹이 아닌 톤 메이킹의 일부로 사용하는 그의 솔로톤이 가지는 특성 때문으로, 실제로 웬만한 솔로를 들어보면 와 페달을 절반정도만 열어놓고, 벤딩으로 소리를 조절해가면서 진폭이 큰 소리를 만들어 내는 데 능하다.
MSG(밴드)의 1집에 수록된 연주곡인 Into the Arena #의 솔로 연주를 들어보면 이러한 사운드적 특성을 잘 알 수 있다.
5.3. 작곡
보통 기타리스트가 밴드를 만들면 기타 위주에 본인의 실력을 뽐내는 식으로 많이 작곡을 하는데, 마이클 솅커는 리듬/리드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등 파트가 너무 튀지 않으며 서로가 밸런스를 맞추는 쪽으로 작곡을 하는 것이 특징. 잉베이 맘스틴이라던지 리치 블랙모어의 밴드과 비교하면 꽤나 이례적인 사례다.그의 작곡 능력에 대해서는 해외 기타 포럼에서의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10대 시절의 마이클 솅커를 파티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TV를 틀어놓고 TV에 나오는 광고 음악들의 멜로디를 따라서 치고 있더라. 멜로디가 하나 나오면 그걸 따라치고, 또 다른 보이싱으로 쳐 보고 하는 식으로 놀고 있는 게 인상 깊었다"
마이클 솅커는 뛰어난 멜로디를 만드는 데 능한 기타리스트이며, 그 자신도 기타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 것이 멜로디이다. 이는 단순한 솔로 멜로디 뿐 아닌 리프에서조차도 잘 드러날 정도. 락 역사 상 가장 인상 깊은 싱글노트 리프 중 하나인 Rock Bottom을 비롯, Lights Out이나 Doctor Doctor, Armed and Ready, Into the Arena 같은 곡들은 리프의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 특히 Lights Out의 솔로와 솔로 이후 후반부에서 아예 보컬을 대체하고 들어가는 솔로 라인은 기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들어봐야 할 명연.
이러한 마이클 솅커의 스타일을 잘 알 수 있는 연주가, 라이브에서의 Rock Bottom 연주이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라이브에서 솔로를 길게 연주하는 경우에는 중간 중간에 테크닉만을 집중적으로 들려주는 부분들이 있게 마련인데, 이러한 연주에서도 계속해서 멜로디를 뽑아내는 데에 치중한다. 이 정도 되면 선천적인 재능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멜로디 위주로 연주하는 그의 스타일은 유니크한 사운드, 그리고 이를 컨트롤 할 수 있는 테크닉과 삼위일체가 되면서 가히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한다.
6. 플라잉 브이
마이클 솅커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플라잉 브이 기타다. 형 루돌프와 같이 플라잉 V를 대표하는 인물로, 스콜피온즈 초창기 때 깁슨 레스폴 모델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평생 플라잉 브이 이외의 기타를 써본 적이 없다고 한다.2005년도 이전까진 깁슨사의 플라잉 브이를 사용했었고 그 이후엔 DEAN사의 플라잉 브이 모델을 사용하고 있다. 특이하게 어쿠스틱 기타는 V 문양이 들어간 싱글컷 통기타이고, 통기타 까지 플라잉 브이를 쓰는 건 형 루돌프 솅커.[27]
원래는 레스폴을 사용하였는데,[28] 공연 도중 기타가 박살나서 형이 소장 중인 흰색 플라잉 브이를 빌려서 사용하였고, 플라잉 브이 특유의 음색과 지판 감촉에 반해서 그 후로 플라잉 브이만 사용한다고 한다.
그의 시그니처 기타의 색은 절반이 하얀색이고 절반이 검은색인 것이 대표적인데 그 이유는 본인이 두 색이 다 마음에 들어 결정을 못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미난 건 형제가 맨날 싸우고 뒤에서 까면서도 두 사람 다 근 50년을 기타는 죽어라 플라잉 브이만 쓰고, 색깔마저 (깁슨이든 딘이든) 흑백 똑같은 걸 쓴다는 사실. 한 때 형제가 딘의 엔도서로서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Dean의 플라잉 브이가 2022년 깁슨이 건 디자인 표절 소송에서 지는 바람에 발매 중단되고 재고 제외하고 시중에서 사라졌는데, 마이클이 사용하는 기타는 쓰던 딘 플라잉 브이 그대로이다.
소유중인 기타는 플라잉 브이 4대 뿐이고, 별 다른 개조는 없는 순정 상태이다. 그 이유는 기타의 본디 기본적인 원형으로만 사용하고 거기에 적응하면 조건이 까다로워지지 않아서, 기타가 분실되었거나 파손되어서 급하게 기타가 필요할 때에도 가게에서 바로 구입하거나 다른 기타를 바로 빌려서 순정 상태 그대로도 바로 사용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오로지 기초에 무척이나 충실한, 정통파인 것. 아마 이런 성향 때문에, 장비 사용 범위가 그렇게 넓지 않은 것 같다. 인터뷰에서도 가진 건 V 4-5대 뿐이고, 공연 무대에는 똑같은 걸로 메인 1대, 예비용 1대를 가져간다고. 스티커가 잔뜩 붙은 본인의 시그니쳐 모델 흑백 Dean Flying V가 주 사용기이고, 같은 순정 상태의 딘 브이 민짜가 예비용으로 보인다.
메가데스의 데이브 머스테인이나 감마레이의 카이 한센 처럼 플라잉 V를 주력기타로 쓰는 메탈 기타리스트들 대부분이 마이클 쉥커의 영향으로 플라잉 브이를 사용한다고 한다. 헬로윈의 리듬 기타리스트인 자샤 거슈트너는 공연 때 마이클 솅커 시그니쳐 기타를 들고 나올 때도있다.
7. 기타
- 2016년 인터뷰에서 형 루돌프 솅커와 스콜피온즈를 강하게 비난하였다. Lovedrive 재판 버전에서 왜곡된 자신의 이야기와 번복된 은퇴와 상업성에 찌든 활동 때문에 질린 듯. # 그 동안 같은 Dean 기타 회사의 홍보대사로 활약하기도 하고, 서로 같이 공연도 한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그동안 거론하지 않았던 형 루돌프의 기타 실력까지 비난했다.[29]
- 2018년 인터뷰에서 더 자세하게 언급을 하였다. 스콜피온즈 초창기 시절과 잠시 돌아가 참여한 Lovedrive 당시, 작곡에 엄청 많이 참여했는데도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었고, 원래 갈색 머리였던 루돌프가 자신의 시그니처 모델을 빌려 가더니 금발로 염색 후 무대위에서 자신의 흉내를 내는 등(?) 여러모로 성질을 긁은 듯하다. 이 인터뷰에서도 루돌프는 기타를 제대로 연주할 줄 모른다면서 비판하였다. # 러브드라이브 앨범에서 마이클은 연주곡인 Coast to coast를 포함 적어도 세 곡에서 리드 기타를 연주했고, 그의 주장대로라면 앨범 전반에 작곡도 같이 했는데 크레딧에 멤버로 올리기는 커녕 밴드 리더인 형 루돌프는 그저 "마이클에게 감사한다." 라고만 후기에만 써 놨다. 그 앨범이 세계적으로 히트했고 이후 수십 년 간 저작권 수입도 적지 않았을 건데 세 곡을 제외하고는[30] 빼 버렸으니 그의 주장이 맞다면 억울한 셈. 21년 인터뷰에서는 "형이 러브드라이브 때 전화로 울면서 밴드에 남아달라고 사정했었지만, 난 내가 개척할 세계가 있기에 거절했다"며 더 심하게 깠다. 러브드라이브 앨범 중에서 연주곡인 Coast to Coast는 누가 들어 봐도 마이클의 곡이다.
- 그렇다고 스콜피온즈 시절을 부정하거나 싫어하는 건 아니다. 입고 다니는 민소매 조끼에 MSG, UFO 와 함께 SCORPIONS의 로고타입을 그대로 넣은 와펜을 붙이고 다니며, 사용하는 Dean의 플라잉 브이에도 유에프오, 엠에스지와 스콜피온즈 로고 스티커가 붙어 있다. 마이클은 스콜피온즈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고, 자기가 초창기 스콜피온즈의 음악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듯. (음악 성향도 좀 다르고 자기를 까는 형 때문에 돌아가진 않지만) 마이클이 스콜피온즈 초창기를 책임졌다는 건 중심이 되는 리드 기타리스트의 작곡과 연주 성향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록 음악의 특성이므로 상당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기교나 화려한 리프보다 모든 파트와 조화되고 멜로디를 벗어나지 않는데도 힘을 잃지 않는 리드기타라는 작곡, 연주 특성은 그가 나가고 난 이후에도 루돌프가 따라서 작곡하고 있고 리드 기타인 마티아스가 그대로 이어서 하여 스콜피온즈 음악의 특성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 레미 킬미스터와 마찬가지로 데뷔 때부터 남자스러운 마초적인 모습 패션으로 무대에 오르곤 하였다. UFO시절 땐 금발 장발+ 늘씬한 맨몸+청바지 패션으로 남성미를 뿜어냈다면, MSG시절 땐 적당한 장발+가죽자켓+글램록 패션 등으로 락 기타리스트의 로망을 잘 보여줬다. 이 패션은 MSG 30주년 공연때를 마지막으로 그만두었고 현재는 비니+민소매 자켓 패션이다. MSG 30주년 공연 이후 다이어트를 심하게 하였는지 전체적인 체형이 너무 왜소해진 탓도 있다. 젊었을 땐 왜소하였지만(스펙상 180cm이니 전혀 작은 키는 아닌데, 심하게 말랐었다.) 80년대 중후반부터 어깨 근육을 키우며 민소매 옷을 즐겨 입더니 이후 쭉 유지해 고령임에도 꽤나 우락부락해진 형 루돌프와는 정반대가 된 케이스. 오히려 형쪽이 나이 들면서 더 스타일리시해졌다.
- 그의 키에 대해선 나와 있는 데가 거의 없는데, 단신에 속한다. 169cm로 나온 사이트가 있지만 젊을 때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형과 같이 찍은 사진으로 보아 170cm 초반으로 보인다. 앉은 키는 170cm대 후반인 형과 큰 차이가 없는데, 마이클이 다리가 상당히 짧다. 사진을 보면 앉아 있거나 그 특유의 허벅지에 플라잉 브이를 걸친 구부정한 자세이다. 다리가 나와도 발목 위에서 잘랐고, 서서 찍은 전신 사진이 거의 없다.
- 아들로 Tyson Schenker(타이슨 솅커)가 있다. 아들도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이며, 아버지와는 좀 다르게 속주 타입의 기타리스트. 가끔 아버지와 공연도 한다. 아버지 영향을 받았는지 본인도 플라잉 브이 기타를 사용하고, 아버지와 같은 모델을 사용하지만 본인은 핑크/검정 조합의 색을 사용.
- 2019년 스콜피온즈 2대 리드 기타리스트였던 울리 존 로스는 Rock History Music이란 유튜브 채널에서 마이클과 루돌프 형제의 불화를 어찌할 바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 울리는 원래부터 형 루돌프의 친구이고, 음악적 차이로 스콜피온즈를 떠난 후에도 스콜피온즈 멤버들, 친구 동생인 마이클과 사이가 좋은 것 같다. 울리는 2024년 현재도 스콜피온즈 멤버 전원과 함께 독일제 도멘제트 기타의 엔도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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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와 노년인 지금의 영어로 말하는 스타일이 상당히 다르다. 젊었을 적엔 천천히 말하더라도 차분하게, 그것도 독일 억양이 묻어나지 않은 말투였지만, 노년인 지금은 영어 중초급자들 특유의 말 더듬과 독일 억양이 강하게 묻어 있다. 당시엔 나이도 어린 데다 외국 출신으로 영국 무대에 들어 온 신세였고, 지금은
짬이 차서자기 입지가 확고하니까 편한 독일 억양 그냥 쓰는 거다.
8. 관련문서
[1]
두번 다 스스로 거절했다. 에어로스미스는 나치 농담으로 빡쳐서, 오지 오스본은 사생활이 막장이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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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커리어에 비해 정말 인기가 많은 기타리스트다. 일본이 원래 독빠 기질이 있는 데다가 젊을 때 상당히 멋지게 생겼고 터프하게 옷을 입었던 것이 한몫 했을 것이다.
[3]
첫 기타는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였다.
[4]
마이클이 스콜피온즈의 정식 멤버로 이름을 올리고 낸 앨범은 1집 Lonsome Crow 하나 뿐이다.
[5]
그 당시엔 여권 미소지라도 탑승 자체는 되는 등, 외국 여행에 대해 공항의 검색이나 운영이 매우 유연했었다. 심지어 칼이나 권총을 숨겨 갖고 기내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6]
주름진 얼굴에 염소 수염을 기른 2010년 이후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어릴 때는 형 안 닮고 미소년이었고 젊을 때는 무슨
레골라스였다. 그런데 늙어갈수록 점점 더 형 루돌프와 판박이로 닮아가고 있다.
[7]
유럽 지역의 댄스 뮤직 우세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당시에는 디스코 열풍이 거세어 유럽에서 밴드 음악의 인기는 디스코에 전혀 상대 안 되었다. 그나마 영국은 유럽과 달리 록 밴드 음악이 강세였으니, 젊은 마이클이 유에프오로 간 건 거의 당연한 선택이었다.
[8]
11살때부터 맥주 마시면서 사고 치던 아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기와 가족들 감시 아래에 놓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독일에서 맥주는 물 대신이라, 어린이들도 마실 수 있다. 미성년자가 가게에서 술을 살 수는 없지만 70년대 당시에는 느슨했고, 집에서 식사 때 마시는 건 괜찮다. 마이클은 그걸 너무 많이 퍼 마셔서 문제를 일으킨 것.
[9]
한참 후에 형 루돌프가 "당시에 마이클이 돌아오겠다고 사정했는데 거절했다."고 얘기하여 마이클을 빡치게 만들긴 하였다. 당시 루돌프가 쓴 러브드라이브 앨범을 보면 마이클은 정식 재가입 한 것이 아니다. 멤버 이름에도 안 들어가 있고, 같이 연주 여행을 다니지도 않았다. 앨범 작업에 여러 곡에서 작곡하고 리드 기타로서 제대로 참여했는데도 불구하고 멤버 이름은 커녕 세션 리스트도 넣지 않고 그저 후기에 "연주해 준 마이클과 그걸 지켜 봐 주신 어머니에게 감사한다" 라고만 하고 정식 멤버로서의 이름을 뺀 것은 형 잘못이 맞다.
[10]
당시 상황에 대해서 루돌프와 마이클의 말이 엇갈리고 있는데, 40년 전 일을 가지고 뒤늦게 형제들끼리 까고 있는 걸 보면 당시 둘 사이에 뭔 일이 있는 것 같긴 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11]
독일에서는 나치 관련 찬양이나 빗대서 욕을 하면 불법이라 경찰에 잡혀간다. 전쟁 끝난지 한참 된 2020년대에도 독일사람에게 나치 어쩌고 하면 그걸로 관계는 끝장이다. 빡칠 만도 하다.
[12]
독일인들이 나치 어쩌고 하면 화를 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히틀러는 쿠데타나 불법적으로 집권하고 독재로 국민들을 전쟁으로 몰아 넣은 것이 아니다. 민주적 선거에 의해 평화적으로 집권, 정치하였으며 베를린 올림픽으로 그의 인기는 정점에 이르렀고 2차 대전 당시에 독일 및 (평화롭게 병합된) 오스트리아 국민 대부분은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었다. 히틀러에 대한 지지가 약해진 것은 너무 많은 사람이 전쟁터에 나가 죽고, 삶이 궁핍해지고 패배가 확실하게 된 전쟁 말에 되어서였다. 유대인 말살 정책도 잘 몰랐다. 하여간 독일인들은 과거가 창피한 것이다.
[13]
오지는 괴상한 분장, 피를 튀기는 무대 매너와 곡 내용만 그렇지, 인간 자체는 성실하고 문제 없는 위인이었다. 다만 저 당시대는 음반사 이사진들과의 회의 중 만취 상태에서 살아있는 비둘기 목을 물어 뜯는다든가,(물론 이것도 미친 듯이 긴장한 탓에 저지른 기행이라고는 하지만) 각종 마약과 알콜 문제가 심했던 때이기는 하다. 상 개막장으로 악명을 떨치던
머틀리 크루마저 오지의 기행에 겁먹었던 일화도 유명하다. 외국인인 데다가 젊은 마이클이 겁먹을 만도 하다.
[14]
설사 오지 밴드에 들어갔다하더라도, 스타일 자체가 다른것도 있고, 잭 와일드 이전까지 재적했던 랜디 로즈의 후임 기타리스트들이 받은 대우를 본다면 금방 나갔을 수 있다.
[15]
우리는 과연 슬래쉬가 화려한 테크닉 기타리스트인지 적적히 테크닉이 섞인 블루스 기타리스트인지 생각해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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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로 망가졌냐면, 몸은 엄청 살쪄서 공연에 그냥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올 정도였고, 연주자체도 대충한다는 느낌이고 MSG 시절처럼 무대 매너조차 없어졌다. 스콜피온즈 2대 리드 기타인 울리 존 로스와 UFO 합동 공연을 한적이 있었는데 마지막 곡인 Doctor Doctor 이후 마이클 솅커가 연주 끝나자마자 바로 무대를 퇴장해버리면서 다른 멤버들도 덩달아 붙잡을라고 무대를 떠나자 울리 존 로스가 홀로 남아서 뒷마무리를 한적이 있었다.
[17]
이때 잠시 흑발로 염색을 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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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에 뭔가 느꼈는지 다시 몸관리에 들어가서 젊을 시절의 슬림한 몸으로 돌아갓지만, 탈모는 어찌하지 못했다.
[19]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에서 활동했었다.
[20]
그레이엄 보넷은 수십년만에 Assult Attack을 무대에서 부르게 된다.
[21]
형제 그룹인 Scorpoins도 건재하고, 동 시대 그룹인 Deep Purple도 두 번째로 재결성해 활동 중. 기존의 이름을 좋아하는 올드 팬이 있고 그룹 이름에 대한 권리도 있으며, 주 수입원인 공연을 할 때 이득인데 굳이 새 이름을 쓸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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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퀸 등 클래식 락 커버 영상에서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었고 리치 블랙모어와 레인보우를 하면서 본인의 실력을 당당히 인정을 받았다. 교체된 보컬의 스타일에 맞춰서 작곡이 된 MSG의 곡들을 상당히 잘 소화하고있고 나이가 아직 젊어서 무대위에서 상당한 파워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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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마이클 솅커의 곡을 많이 들어봤어도 "앗 이건 마이클의 스타일이다"라고 꼭 집어낼 부분을 보기 힘들다. 반면 리치 블랙모어, 토니 아이오미, 브라이언 메이, 잉베이 맘스틴, 반 헤일런 등 이런 스타 기타리스트들은 유튜브 같은데서 팬들이 "이곡을 누구누구의 스타일로 연주해보았다"라는 영상을 올릴 정도로 그 사람의 스타일이 뭔지 강하게 보여준다.
[24]
후발주자 기타리스트들이야 선배들이 일궈 놓은 음악들을 참고로해서 새로운 스타일의 기타 연주를 선보였지만, 마이클 솅커처럼 초창기 락/메탈 뮤지션들은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야할 시절이었다. 그렇다보니 요즘처럼 무대위의 포퍼먼스 같은 것 보단, 보다 더 세련된 곡을 만드는데 집중을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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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마티아스 얍스가 들어온 이후 현재까지 스콜피온즈의 음악 전반에도 계속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이다. 마이네와 함께 작곡 대부분을 맡고 있는 루돌프 또한 테크닉이 들어가거나 강력한 리프가 들어가더라도 멜로디에서 벗어나지 않는 음악을 구사한다.
[26]
보통 와 페달은 드라이브의 앞 단에 위치시켜서 기타 본연의 소리를 왜곡시키는 것이 좋다. 드라이브의 뒷 단에 연결하면 드라이브까지 걸린 소리를 왜곡 시키기 때문에 효과가 좋지 않다. 때문에 앰프 드라이브를 쓰는 셋팅에서는 당연히 앰프의 앞 단에 위치시켜야 한다.
[27]
루돌프의 어쿠스틱 플라잉 브이는 독일의 도멘겟제 수제 루돌프 전용 기타이다.
[28]
스콜피온즈의 1972년 뮤직비디오에서 레스폴을 든 모습을 볼 수 있다.
[29]
마이클이 실력이 더 나은 것은 사실이지만, 루돌프가 욕을 먹을 정도로 못치는 것은 아니고 리듬 기타 포지션으로서 제 역할은 제대로 하는 실력이다. 루돌프는 흔히 생각하는 그런 화려한 솔로 연주보단 뮤지션으로서 리프나 곡을 잘 만드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다만 본인이 그 리프를 좀 더 화려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솔로잉이 잘 안됐던 것이다. 그런 건 리드기타 마티아스 얍스가 하고 있으니 루돌프는 죄 없다.
[30]
현재는 Holiday, Always somewhere, Coast to coast 세 곡에 마이클이 공동 작곡자로 되어 있다. 그런데 79년 당시 국내 출반 앨범에는 작곡 여부는 표시되지 않고 연주한 것만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