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11 18:14:28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

파일: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jpg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
라틴어: Lucius Statius Murcus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40년 또는 기원전 39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사망지 로마 공화국 시라쿠사
지위 에퀴테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루키우스 트레벨리우스(아버지)
참전 무티나 내전
직업 호민관, 조영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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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2. 생애

율리우스 카이사르 내전기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의 <로마 역사>는 그를 '스타티우스(Statius) 무르쿠스'라고 지칭했다. 반면에 디오 카시우스 아피아노스는 그를 스타리우스(Staius) 무르쿠스라고 지칭했다. 이탈리아 중부 도시 술모나(Sulmona)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L(ucius) Staio(s) Sex(ti) f(ilius) / Murco"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비문의 주인공이 그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48년 초 에페이로스 지방의 항구 도시 오리쿰에서 카이사르가 오리쿰 수비대장으로 임명한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카니누스와 함께 에페이로스 해안을 지켰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측 함대가 오리쿰 항구를 봉쇄하면서 전황이 역전되었다. 아킬리우스와 무르쿠스는 항구 입구에 돌을 실은 배를 침몰시키고 그 위에 다른 배를 정박시켜서 적이 항구로 들어오는 걸 막았다. 그러나 해상 봉쇄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져 기아의 기미가 감돌았다.

이후 디라키움 공방전을 수행하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이탈리아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기 위해 장남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에게 오리쿰을 공략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항구로 진격해 닻을 내린 배들을 나포했고, 잠수부들을 보내 침몰한 배의 돌을 제거하여 항구에서 끌어내리게 했다. 또한 항구에 남아있던 배들을 공격하여 4척의 작은 갤리선을 노획하고 나머지는 불태웠다. 뒤이어 배에 탑재된 탑들을 통해 성벽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고, 부대를 끊임없이 교체해 도시를 맹공격했다. 결국 오리쿰 수비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아킬리우스와 무르쿠스는 오리쿰에서 탈출한 뒤 잔여 병력을 수습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에 계속 대항했다.

기원전 46년 아프리카 원정을 떠난 카이사르와 함께 출진했다. 그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폭풍에 휘말려 죽었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졌지만, 얼마 후 그가 무사히 로마에 도착하면서 헛소문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기원전 45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그해 겨울에 카이사르의 지시를 받들어 칼리키아와 시리아 등지에서 카이사르에 대적하고 있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 토벌에 착수했다.

그는 3개 군단을 이끌고 바수스가 숨은 아파메아를 포위 공격했으나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비티니아 총독 마르키우스 크리스푸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크리스푸스는 3개 군단을 더 데려왔고, 로마군은 총 6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이아를 포위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무르쿠스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 '해방자'편에 섰지만, 카이사르가 생전에 내린 명령에 따라 포위를 이어갔다.

기원전 43년 봄, 모든 동부 속주에 대한 총독을 맡게 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시리아에 도착하자, 무르쿠스와 크리스푸스는 카시우스에게 군대를 넘기고 카시우스의 부관이 되었다. 카시우스는 기원전 43년 3월 7일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르쿠스와 크리스푸스를 임페라토르라고 칭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어떤 공적을 세웠기에 그런 호칭으로 불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동방의 카이사르파 지도자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농성 중이던 라오디케아 항구로 쳐들어가서 돌라벨라 소속 함대를 괴멸시키고 항구를 봉쇄했다. 이로 인해 도시가 함락될 지경에 놓이자, 돌라벨라는 기원전 43년 7월에 자살했다.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자신을 임페라토르라고 칭하는 데나리온을 주조했다. 동전 앞면에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의 두상과 삼지창이 그려졌으며, 뒷면에는 트로피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성과 악수하는 군인이 새겨졌다.

이후 카시우스를 따르지 않으려는 로도스 해군을 격파해 그들을 복종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기원전 42년 클레오파트라 7세가 삼두파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이집트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60척의 함선을 이끌고 이동하다가 여왕의 함대가 폭풍으로 심하게 손상되어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브룬디시움으로 항해하여 발칸 반도로 건너간 적군이 본토로부터 식량 공급을 받지 못하게 하기로 했다. 중간에 여러 함선을 징발하고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50척과 합세해 총 130척의 함대를 이끌고 해상을 봉쇄했다. 기원전 42년 10월 3일 필리피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이오니아 해에서 2개 군단과 보조군을 발칸 반도로 수송하려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함대를 요격해 궤멸시켰다.

이후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패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헤노바르부스는 70척의 함대와 2개 군단을 이끌고 이오니아 해 연안을 약탈하기로 했고, 무르쿠스는 80척의 배와 2개 군단, 500명의 궁수, 상당한 군자금을 가지고 시칠리아로 가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합세하기로 했다. 폼페이우스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고 해군 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또다른 함대 사령관이자 폼페이우스의 해방노예인 메네크라투스와 메노도루스를 업신여겨 그들과 심한 갈등을 벌였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두 사람의 참언을 듣고 무르쿠스가 조만간 자신을 배신하고 삼두파에 넘기려 들 거라고 확신했다. 기원전 40년 말 또는 기원전 39년 초, 폼페이우스는 무르쿠스를 따르던 대대장과 백인대장들을 매수해 시라쿠사에서 무르쿠스를 암살하게 했다. 이후 무르쿠스의 노예들은 주인을 죽였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