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29 14:35:14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
라틴어: Quintus Caecilius Bassus
생몰년도 미상 ~ 미상
출생지 미상
사망지 미상
지위 미상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미상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로마 공화국 시리아 총독(자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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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옵티마테스 파 장성으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촌이자 시리아 총독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고 시리아 총독을 자칭했다. 이후 카이사르가 파견한 장군들을 상대로 아파메이아 공방전에서 승리하여 세력을 유지했지만, 기원전 43년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군대를 넘긴 후 종적을 감췄다.

2. 생애

그의 출신 성분과 가족, 반란을 일으키기 전의 전반적인 행적 등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피아노스는 그에 대해 2가지 기록을 남겼는데, 신뢰성이 떨어지는 첫번째 기록에 따르면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군사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섹스투스는 지휘관으로서 파렴치하고 극도로 보기 흉하게 행동했다. 바수스가 이에 대해 비판하자, 섹스투스는 그를 끌고 다니며 모욕을 줬다. 이걸 본 군인들이 분노하여 섹스투스를 살해했고, 사촌을 죽인 것에 분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보복을 두려워해 그를 강제로 지휘관에 추대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의 두 번째 기록은 디오 카시우스 등 후대 기록과 교차검증 되며, 현대 학자들에게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 따르면, 그는 폼페이우스 휘하 장교였는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티로스로 도피한 뒤 평범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47년 섹스투스가 시리아 총독에 부임한 이듬해인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프리카 원정을 떠나서 고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비밀리에 동지들과 연락을 취했고, 수비대 병사들을 설득하려 했다. 군대 징집에 의심을 품은 섹스투스가 연유를 묻자, 그는 보스포로스 왕국에 대항한 페르가몬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왕의 원정을 지원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라고 밝혀 의심을 피했다. 이후 충분한 병력이 모였다고 여기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섹스투스에게 격퇴되자, 카이사르가 아프리카 원정에서 전사했다는 위조된 편지를 병사들에게 뿌려 반란에 동참하게 한 뒤 섹스투스를 기어이 죽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섹스투스를 처단한 후, 그는 시리아 총독을 자칭하고 섹스투스 휘하 군대 대부분을 인수했지만 아파메이아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간 장병들만은 가담하지 않았다. 바수스는 이들을 추격했지만, 그들은 킬리키아로 도주했다. 시리아로 돌아온 그는 아파메이아에 자리를 잡고 그 도시를 요새화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는 처음엔 2개 코호트만 이끌었지만 병력을 징발하고 노예도 모집해 총 2개 군단을 확보했다고 한다. 얼마 후 섹스투스의 부관 또는 새로 임명된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가 쳐들어와 아파메이아를 공략하려 했고, 섹스투스에 의해 유대 왕국의 실권을 쥘 수 있었던 안티파트로스가 협조했다. 그러나 아랍 왕자 알칸도니오스와 파르티아 왕자 파코로스 1세가 그를 도우려 왔고, 베투스는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베투스는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은 킬리키아 총독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를 비난했다.

기원전 45~44년 겨울, 파르티아군이 시리아로 철수했다. 얼마 후 카이사르가 급파한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가 3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아 포위 공격을 시작했지만, 방비가 워낙 강력해서 공략에 실패했다. 이에 비티니아와 폰토스 총독 퀸투스 마르키우스 크리스푸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크리스푸스는 3개 군단을 더 데려왔고, 로마군은 총 6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이아를 포위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무르쿠스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 '해방자'편에 섰지만, 카이사르가 생전에 내린 명령에 따라 포위를 이어갔다.

기원전 43년 봄, 모든 동부 속주에 대한 총독을 맡게 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시리아에 도착하자, 무르쿠스와 크리스푸스는 카시우스에게 군대를 넘겼다. 바수스의 2개 군단 중 하나도 카시우스 편으로 넘어갔지만, 바수스 본인은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고 1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이아에서 계속 성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2번째 군단 마저 카시우스에게 가담했고, 그는 종적을 감췄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