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5:41:20

김정일/성격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김정일
1. 개요2. 전반적인 성격3. 말버릇4. 기타

1. 개요

김정일 성격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문서이다.

2. 전반적인 성격

"제가 무슨 큰 존재라고, 아마 적들은 외신들, 그 다음에 저 구라파 사람들이 자꾸 뭐라고 말하냐면, "왜 은둔 생활을 하나? 은둔 생활하는 사람이 처음 나타났다." 난, 세상에 뭐 과거에 중국도 갔댔고 인도네시아도 갔댔고 외국에도 비공개로 갔댔고 헌데 나보고 은둔 생활을 한데? 그래서 김대통령이 오셔서 내가 이제 은둔에서 해방됐다. 하도 모르게 했으니까요."
- 김정일, 2000 남북정상회담 평양 회담에서 -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 앞에 드러내기를 즐긴 김일성과는 달리,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은 철저히 비밀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했다. 어릴 적 소련에서 지낼 때부터 심약하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는 증언이 있기도 한 걸 보면 천성적인 성격 문제일 수도 있는데, 홍사중 조선일보 논설고문도 후술할 1994년 8월 30일자 칼럼에서 로마 네로 황제와 비슷한 증세라고도 밝혔으며, 심약한 사람일수록 절대 권력을 지니면 흉포해질 수 있다고도 전했다.

김일성의 과보호를 받으면서 자란 탓에 내성적인 성격이면서도 신경질적이고 잔인하다는 증언도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중 한 명의 증언에 따르면 '잔인한 천재'였으며, 후지모토 겐지라는 요리사의 요리를 좋아해 고용했는데, 막판에는 반 감금까지 했다는 걸 보면 아주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 싶다.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탈북한 지인들은 우월감이 강하고 즉흥적인 면이 강하다고 여러차례 말했고 이는 남북정상회담 중에서도 드러나기도 했다. 또 미국 CIA 출신 정치심리학자 제럴드 포스트 박사는 2006년 영국 <텔레그래프>에서 그의 심리상태 분석 결과 자아도취, 과대망상, 편집증 기질이 있다고 밝혔다.

김정일 주변 사람들이 증언하는 김정일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매우 급하고 변덕이 심하다고 한다. 김정일의 처형이자 아들 정남의 큰이모였던 성혜랑“김정일은 기분이 좋을 때는 아주 잘해주지만, 화가 나면 창문이 들썩거릴 정도로 광란을 한다”고 말했으며,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평소에는 다정다감하게 간부를 대하다가도 화가 나면 간부들을 세워 놓고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도 있는데 1996년에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근무하던 장해성 기자가 탈북하자 김기룡 당시 조선중앙방송 위원장이 자신의 처지를 크게 걱정하면서 김정일에게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일이 그 날은 기분이 매우 좋은 날이었는지 "그게 어떻게 위원장 혼자 잘못이야? 내가 그 아이들을 잘 하지 못해서 그랬는데."라면서 처벌하기는 커녕 조총련에서 받아온 일제 텔레비전 300대를 김기룡과 조선중앙방송 성원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11분 38초 부터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던 탈북민 리영국은 “젊은 시절에 그는 성격이 급한 데다가 가정적 고심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셨다. 그래서 모든 일을 즉흥적이고 과격하게 처리하는 버릇이 있다”고 증언했다. 황장엽은 “ 김일성은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독재를 한다는 인상을 주지만 김정일은 독재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고 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권력이 쎈 사람일수록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황장엽은 1979년에 다시 북한 당중앙 비서로 복귀할 때 이전에 가지고 있던 북한 최고 수뇌부에서 일한다는 기쁨과 보람은 없고 '독재의 고압선' 바로 옆에서 다칠세라 걱정하면서 잠시도 긴장감을 풀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생활이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리영국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자신이 기분이 나쁠 때면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으며, 오랫동안 자신에게 충성해 온 간부들을 자신이 쓰는 엘리베이터나 재떨이를 썼다는 등의 이유로 로동수용소로 보내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김정일이 차를 타고 오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60-70대의 간부들이 도망가서 풀숲에 숨고는 했다. 그들은 옷에 흙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김정일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고 말하며, "왜냐하면 간부들은 모두 김정일이 기분이 좋을 때라도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사형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고 증언했다.

이 경호원은 김정일의 경호원으로 10년을 일했다고 한다. 그는 경호원이 되기 전 혹독한 신체 훈련은 물론 철저한 사상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정일을 신이라고 믿어야 했다고 한다. 그는 김정일에 대해 한 마디로 "두 얼굴을 지닌 사람"이라고 회상했는데, 김정일은 기분이 좋으면 금덩이라 해도 내어주지만, 기분이 나쁘면 아무 이유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리는 사람이라고 한다.[1] # 심지어 1980년에는 유명 여배우 우인희를 처형하기도 했다.

또한 김정일은 사람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주민들에게 상호간에 감시를 하고 비판을 하게 만들었으며, 상호 비판에서는 김정일의 사상과 지시에 충실하였는가, 충실하지 못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상호비판이 강화되고 당원들이 격렬하게 싸울수록 김정일의 권위는 높아졌다고 하는데, 그는 당원들의 생활을 잔잔한 상태에 두는 것을 반대하고 늘 풍파를 일으키고 들볶는 것을 좋아한다고 여러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보안에 굉장히 민감하기도 했는데, 미국이 자신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가족을 제외한 그 어떤 이도 김정일의 모든 스케줄을 파악할 수 없었다. 내각의 상들이나 로동당 부장들도 김정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하며 김정일이 일하는 서기실의 조직도조차 알지 못했다. 어떤 관료가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쑥 찾아오면 보안이 엉망이라며 서기실이나 호위사령부에 난리를 치는 일도 수 차례 있었다고. 때문에 짬이 있는 관료들은 어느 날 갑자기 결재가 안 내려와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또 어디 외국에 갔나보구나, 지방에 갔나보구나 등등 지레짐작하며 기다릴 뿐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사는 관저의 보안도 매우 엄격했는데, 관저에서 일하는 이들은 본인의 비준(결재)을 받아야만 결혼할 수 있었으며 대개 같은 관저 직원끼리 결혼을 시켰다. 당연히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검열당했으며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외부(가족 포함)에 발설 시 수용소로 끌려갔다.

의외이지만 워커홀릭이기도 했다.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휴양지에서 쉬는 와중에도 아래에서 올라온 수 백장 이상의 보고서들을 전부 본인이 직접 읽어보고 하나하나씩 결재했다고 한다.[2] 파티할 때도 다른 간부들은 유희와 향락에 빠지게 한 채로 자신은 별도로 마련된 밀실로 들어가 뒤에서 밀린 업무를 봤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도 김정일은 당 간부들의 인사권과 검열권을 담당하는 조직지도부장 보위부장을 본인이 직접 겸직해[3] 막대한 분량의 인사, 검열, 감찰 업무를 본인이 손수 처리했다. 그리고 김정일은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오늘내일하던 와중에도 사망하기 전 까지 많은 장소들을 현지지도하러 다녔다.[4] 즉, 김정일이 고된 일을 하느라 고생을 한다는 북한 당국의 선전은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던 것. 다만 그 일이 북한 인민들을 위한 일이 아닌 전부 본인의 독재를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는 점이 문제점이다.

사실 김정일은 완전히 무능력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젊은 시절만 해도 권력 승계 서열에서 후순위에 있었던 인간이었고 이를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극복해 북한의 2대 최고 지도자까지 등극한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다가 끝내 김정은에게까지 권력을 승계하는 3대 세습 기반까지 다졌는데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단지 그 능력을 인민들의 생활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과 쾌락을 위해서만 사용했다는 점이 비판받아야 할 부분인 것이다.

3. 말버릇

굉장히 말이 많은데 흥분해서 정신없이 말을 쏟아 내는 성격으로 보인다.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하 김대중)과 회담했을 때 첫날의 백화원초대소에서 김대중이 1마디를 하면 자기는 10마디, 20마디를 떠들어댔다. 예컨대 김정일이 "신문을 보니 아침을 적게 드시고 왔다고 하셨던데 어째서 적게 드셨나요?"라고 묻자 김대중 대통령은 " 평양에 가면 잘 얻어먹을 줄 알고 조금 먹고 왔다."고 대답했다. 이에 김정일의 대답이 참으로 길기도 하다.
자랑을 앞세우지 않고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외국 수반도 환영하는데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도덕을 갖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의 방북 길을 환영 안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예절을 지킵니다.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고파서 인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김 대통령의 용감한 방북에 인민들이 용감하게 뛰쳐나왔습니다. 신문과 라디오에는 경호 때문에 선전하지 못했습니다. 남쪽에선 광고를 하면 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실리만 추구하면 됩니다. 왜 이북에선 TV와 방송에 많이 안 나오고 잠잠하느냐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와서 보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방북을 지지하고 환영하는지 똑똑히 보여 드리겠습니다. 장관들도 김 대통령과 동참해 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고 우리는 같은 조선민족입니다.

그러니까 " 평양에 오면 식사 잘 할 줄 알고 그랬습니다."란 대답 한 마디에 저렇게 길게 대답한건데, 그나마 내용도 좀 엉뚱하고 횡설수설한다.

초대소의 회담에서 발언의 90% 수준을 김정일이 독점하는가 하면, 두 나라의 정상이 만나서 하는 대화 치고는 상당히 무례한 어감으로 하는 표현도 많았다. 사실 이건 진작부터 점쳐지던 일인데 1994년 김일성 사망 특집 뉴스데스크는 김정일이 남의 대답은 신경쓰지 않고 혼자서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떠드는 버릇이 있다고 보도한 바가 있다.

그 이후의 회담 내용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게 제한적인데, 민족 21지에서 밝힌 비화에 따르면 김정일이 김대중에게도 발언기회를 어느 정도 더 주긴 하지만 심기에 거슬리는 발언이 나오면 짜증내며 일방적으로 회담을 중지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남북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김정일이 계속 연방제 운운하자 김대중은 국가 연합 방식을 고수한다고 했고, 이에 김정일은 에라 때려쳐라!는 식으로 뒤엎었다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을 들고 나오면서 약간 후퇴한 채로 재개했으며, 김대중이 이산가족 문제를 꺼내자 "이럴 거면 돌아가시라."라고 위협적인 망언까지 나왔다고 한다.

비록 김대중 시대에 남북관계가 좋았다는 인식이 있지만, 세간의 인식처럼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일례로 미국, 일본과 공조하라는 김대중의 권유에 "미국, 일본과 연합해 우리(북한)를 압살하려 하는 거 아니냐?"라고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회담 말미에는 김대중이 서울로 답방할 것을 권유하자 주저 없이 "국가원수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가는 거지, 저는 못갑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해버렸으며 이에 김대중"칠순[5]인 내가 노구를 이끌고 평양까지 왔는데 못 온다니, 그건 웃어른에 대한 도리가 아니죠."라고 말했는데 결국 말문이 막힌 김정일은 자신의 답방이 명시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면서 "대통령께서는 전라도 사람이라 고집이 세신 모양입니다."라고 지역드립을 쳤고, 이에 김대중은 "그렇게 따지면 위원장님이야말로 전주 김씨니까 전라도 사람 아닙니까?"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외에 같이 방북한 대한민국의 장관들한테는 "장관 나리"라는 표현을 쓰며 상당히 명령조로 "오늘 저녁까지 이 그림의 해가 뜨는 해인지 지는 해인지 맞춰봐라."라고 하기도 했고[6] 마약범죄 얘기를 하다가 "만일 (남한에서) 조선인 마약 사용자가 적발되면 내가 허락할테니 총살하세요!"라고 하는 등 자신이 윗사람인 양 굴었다. 그러다 실수를 깨달은 듯이 "내가 경거망동한 것이냐?"라고 되물으며 겸연쩍어 했다고 한다.[7]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자신보다 5살 아래인 노무현 대통령과 대면했는데, 이때도 별의별 돌출 발언을 하면서 분위기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말을 길게 하지 않으며 주로 우회적인 화법을 쓰는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매우 직설적이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서, 오히려 김정일이 회담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방북 이틀째였던 10월 3일에는 뜬금없이 하루만 더 머물러 달라는 요청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만 이는 노무현이 거부했고 김정일 본인도 나중에 연장 안해도 되겠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 외에도 NLL 대화록을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나 노무현의 발언 중에는 김정일의 심기를 상당히 불편하게 할 만한 내용도 여럿 담겨 있었다.

그나마 공식 석상에서는 이 정도이지 북한 간부들하고만 같이 있는 사석에서는 온갖 저속한 표현과 욕설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탈북 기자 출신 김길선 증언에 의하면 오진우같은 늙은 간부들에겐 영감이니 노친네이니 대놓고 비하적인 표현을 쏟아내는 건 기본이고 나이 어린 간부들에겐 이 새끼, 저 새끼 등의 욕을 항상 달고 다녔다고 한다. 한 번은 나이 어린 청소부가 김일성에게만 인사했다고 김정일이 다른 간부들 다 보는 앞에서 “야이 새끼야, 너눈에는 수령님만 보이더냐?”라면서 발길질을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북한 방송국들은 김정일의 목소리를 공개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김일성이 생전에 줄곧 했던 육성 신년사도 1995년 새해부터 '신년공동사설'로 대체하여 김정일 사후인 2012년 새해까지 진행되었고, 남북정상회담 때도 남한의 국민들은 김정일과 남한 대통령들 사이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북한 주민들은 단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북한 언론이 인민에게 공개한 김정일의 육성은 1992년 4월 25일 북한군 창건 60주년 기념식에서 외친 "영웅적 조선 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라는 1마디와 70년대 말 당대회에서 연설하는 육성 단 두 개 밖에 없고, 외국 여행도 2000년 방중 이전까지 1983년 비공식 방중이 유일했다. 그 외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 최은희가 목숨걸고 카세트 테이프에 몰래 녹음한 육성이 있다. 다만 북한 곳곳에 현지지도는 잘 다녔다.

4. 기타

파일:external/static2.kleinezeitung.at/2252227_BLD_Online.jpg 파일:김정일 웃음.jpg
김정일이 미소짓는 모습[8]

참고로 혈액형 A형이다. 혈액형과 성격은 무관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2002년 방북해 평양 공연을 마친 대한민국의 가수 김연자가 김정일의 초대로 백화원초대소 만찬 자리에 갔는데, 이 자리에서 김정일에게 "혈액형이 뭔가요?" 라고 묻자 주변의 간부들이 매우 당황해하면서 그건 기밀 사항이라고 넘기려고 했으나,[9] 의외로 김정일은 " 그런 질문은 처음이다."면서 흔쾌히 A형이라고 알려줬다고. #

' 미국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 는 망상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렸으며 중국, 러시아 등을 방문할 때는 전용 기차인 1호 열차를 주로 이용했다. 혹은 미국 시사주간지 <포린폴리시>의 보도에 따르면 젊은 시절 헬리콥터 추락 사고를 겪어서 스탈린처럼 고소공포증 때문에 기차를 이용한다고 한다.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 당시 자신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로 규정하여 기폭장치로 의심된 핸드폰 사용을 몇 년간 막은 걸로도 유명하다.

강명도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이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하여 < 나의 투쟁>을 베고 잔다고 말했는데, 진짜 베고 잤는지는 모르지만 히틀러에 대해 우호적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북한에서는 겉으로는 히틀러를 매우 싫어하고 있지만, 어쩌면 김정일은 내심으론 정말 히틀러를 존경했을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마이어스의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에서 북한은 극좌 스탈린주의 국가라기보다는 순혈주의· 인종주의적 국가이고 소련보다는 나치 독일에 가까운 나라로 묘사되기도 했다.


[1] 이 경호원은 1994년에 북한을 탈출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수용소에서 끔찍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사면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후 어찌저찌 재차 탈북에 성공하여 남한에 살고 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은 남한에 온 다음에야 김 부자가 독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2] 참고로 이 수백장의 보고서도 서기실에서 추리고 추린 핵심 보고서들이다. 횡적체계는 없고 오로지 수령에게 직보하는 수직체계만 있는 북에서는 온갖 사소한 보고도 다 수령에게 올라가는데 북한 선전자료들을 보면 무슨 학생 교복 디자인부터 강원도 어디 산골에서 일하던 학생들이 다쳤는데 어떻게 수술해야하는가 따위의, 일반적인 국가원수라면 볼일이 없는 온갖 자료까지 다 수령이 직접 다 챙겨야 한다. 이 때문에 보고서도 전문이 있는 핵심, 내용을 추린 2선급 보고, 아예 제목만 올리는 사소한 보고로 세분화되어 상당수 보고들은 김정일, 김정은은 읽지도 못했다. [3] 권력을 분산시키면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업무부담을 감수해서라도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고 한다. [4] 심지어 사망하기 직전인 2011년에도 중국과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왕성한 외교활동을 보였다. [5] 당시 김대중은 76세로 칠순보다는 팔순이 더 가까웠다. 당시 59세였던 김정일하고도 17살이나 차이가 났다. 둘이 태어난 시기를 감안하면 부자지간에 가까운 나이차이다. [6] 저녁이 되어 대답을 재촉하자 정동영 문화부장관이 "민족의 뜨는 기상을 표현한 뜨는 해 아니냐??" 라고 묻자 "아침에 보면 뜨는 해, 저녁에 보면 지는 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7]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푸틴을 만나서도 비슷한 발언을 했었다. [8] 오른쪽 사진은 2007년 6월 8일 룡천군 신암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할 때 모습인데, 워낙 절묘한(?) 표정 때문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잘 알려진 사진이다. 사족으로 원본 사진에는 김정일 옆에 김평해 조선로동당 수석비서가 있다. [9] 사실 당연한 일이다. 건강 문제이니까, 혈액형별로 수혈받을 수 있는 피가 달라지는 만큼 극단적으로는 암살 시도로 써먹을 수 있다. 특히나 아래에 나왔듯 미국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망상을 감안하면 드러내는걸 꺼려야 맞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880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880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