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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1887)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용환
金龍煥 | Kim Yong-hwan
파일:external/senka36.iptime.org/kimyw01.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1887년 2월 27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부서면
(現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830-6)[1]
사망 1946년 7월 10일 (향년 59세)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본관 의성 김씨[2]
여현(汝見)
자녀 딸 김후웅 아들 김시인
친인척 조부 김흥락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도박활동과 진실2.2. 광복 이후2.3. 사후
3. 기타4. 사진에 대한 진실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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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 의병 활동가이자,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2. 생애

경상북도 안동 출생.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던 의성 김씨 학봉종가[3]의 종손으로,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며 역시 독립운동가로 의병활동을 창의했던 서산 김흥락의 손자이기도 했다. 김흥락은 영남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유림의 종장이었는데,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유림에 통문을 돌려 전국에서 처음으로 을미의병을 창의하였고, 창의대장에 추대되었으나 노령을 이유로 물러났다. 그러나 제자와 문중을 총동원해서 의병활동을 독려하였고 이는 훗날은 독립운동의 역사와 함께 계속되었다.

김흥락의 제자가 700여 명이었는데,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만 60명이 나왔고[4], 청계공 이후 안동에 세거해온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훈장 받은 사람이 총 106명인데, 이 중에서 학봉 직계에서만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김용환의 독립운동은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이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1896년 의병활동을 벌이던 의성 김씨 일족인 의병 포대장 김회락(할아버지 김흥락과는 사촌지간)이 패전하여 학봉종택에 은신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김회락을 잡아내고, 김흥락과 김흥락의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익모 등을 포박해서 마당에 꿇어 앉게 하고 집안을 약탈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김회락은 총살당했다.[5] 김용환은 어릴 적에 이 모습을 목격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이후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1908년 의병장 이강년 의진에 참가하였으며, 1911년에는 김상태 의병 부대에 참가하는 등 영남/충청 지역 의병 활동의 중심에 함께 했었다.[6] 3.1운동 이후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결국 안동으로 돌아왔으며, 1921년에는 만주 길림의 서로군정서[7]와 연결되어 독립운동단체 '의용단'에서 활약하였다. 적극적인 군자금 모금 및 친일 부호 및 매국노들에게 '사형선고장'을 발부/발송하고 자금 징발 활동을 벌였으나, 1922년, 결국 일본 제국 경찰에 세 번째로 체포됐다.

이후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줄 온갖 방법들이 틀어막힌 김용환은 결국 다 포기한듯이 재산을 도박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2.1. 도박활동과 진실

한번 도박에 빠지기 시작하자 벌이는 도박판이 어마어마해서, 그 많던 가산을 급격히 탕진하기 시작했다. 세간의 인식은 의성 김씨 집안의 도박꾼이자 파락호.[8] 경북 안동 출신의 저술가로 <양반동네 소동기>, <나의 양반문화 답사기> 등의 저자인 윤학준 교수는 '조선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 운동의 주역인 김남수와 함께 이 사람을 꼽았다.[9]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다고 하며,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베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만약 베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베팅에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는데,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 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자루에 쓸어담고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사방 십 리 이내로는 학봉종택의 땅이 아닌 곳이 없었다는 정도로 막대했던, 현재 시가로 200억 원 상당의 재산과 전답을 도박으로 말아먹은 것도 바로 이 시기에 벌어진 일.

그 꼬락서니를 보는 문중의 자손들[10]은 '집안 말아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집과 전답을 되사주곤 했다.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종가가 망하면 문중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동딸이 시집갔을 때 시가(媤家)[11]에서 장롱을 마련하라고 준 돈 역시 도박으로 탕진, 결국 외동딸은 친정 할머니[12]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게다가 시가의 가세가 기운 데다 시집온 지 3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자 시댁에서 그 헌 장롱이 귀신들린 장롱이라며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숴서는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고. 가정에 대한 무관심이 도를 넘어 딸의 농값을 가로채고선 딸이 시집을 가던 날에도 감감 무소식이었던데다, 명색이 학봉종택 종손의 여식이 이런 수모를 당할 정도니 문중 사람들이 김용환을 엄청 욕했지만 그는 "집안에 '학봉(가문의 조상 김성일)'과 '난봉'이라는 두 봉황이 나왔으면 된 거 아니냐?"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정에 무관심하여 도박에 탐닉하던 것으로 보이던 그의 행동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 그의 재산은 비밀리에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졌다. 도박판에서 돈을 날리는 모습은 사라진 재산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던 것. 그렇지만 일제의 감시망이 워낙 지독하다 보니 이럼에도 결국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올라갔다고 한다.

일제가 만주 독립군 군자금을 추적하며 희미하게나마 그 일부가 '안동의 김용환에게서 나왔다'라는 증언을 받아낸 것에 기인한 것. # 딸이 시집간 날에 행방이 감감 무소식이었던 것도, 도박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라 군자금 관련 혐의로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어서라고.

윤학준은 <양반 동네 소동기>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 그 전년 여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친한 친구인 K로부터 김용환 씨를 '독립 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해 지금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리 참봉 할배(김용환 씨를 말함)가 주색잡기에 빠졌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을 리가 없어. 참봉 할배의 기행, 난행은 특고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고, 사실은 독립 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보내고 있었음에 틀림없어."
확증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그럴 듯한 흔적은 몇 개 있다고 했다.

사실 저렇게 "이기면 내 것 져도 내 것" 식으로 도박을 했는데 재산이 늘어나긴커녕 오히려 줄었다면 이상하긴 할 것이다.

자료를 모으고 있지만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저 이야기의 시점이 아무리 짧게 잡아도 1990~1991년 정도이다. <양반 동네 소동기>의 원전인 <나의 양반 문화 탐방기>의 출간이 1995년 3월인데, 이 책은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간된 <온돌야화>와, <역사에 얼룩진 한국-한국양반기행>을 하나로 합쳐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것으로 두 책의 출간은 1983년과 1993년이다. 집필 기간까지 고려하면 아무리 늦어도 1992년에 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인데, '그 그 전년 여름'이라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1~2년 전인 1990~1991년 사이로 추정된다. 독립 유공자 추서는 1995년으로, 아무리 시간대를 좁혀 잡아도 4~5년의 시간차가 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추가적인 자료를 모아서 제출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낡은 정보가 개정증보판을 내면서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혼란을 주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2.2. 광복 이후

1946년, 임종을 할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 하중환(河中煥)이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라고 하자 " 선비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할 필요 없네."라는 말을 남기고 향년 59세로 눈을 감았다고 한다.

2.3. 사후

막대한 재산도, 명문가 장손이라는 명예도 버렸고, 일가 친척들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서는 파락호라는 경멸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외동딸이 시댁으로부터 원망과 미움을 받았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 이후 그의 헌신은 3년상이 끝난 1948년, 하중환의 제문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이러한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아들 김시인은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딸 김후웅 여사는 아버지가 대한민국 훈장을 추서 받는 그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배[13] 참봉 나으리'라는 글로 발표하였으며, 6년 뒤인 2001년에 향년 84세로 사망했다.

글의 전문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 그리고 이 내용은 비상교육 중학교 3학년 영어 지문으로 실렸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16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가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어매[14]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가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3. 기타

그의 장인인 이중업은 1914년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렸고, 1919년 베르사유 회담에 보낼 청원서에 넣을 강원도, 경상북도 지역의 유지들의 서명을 받고 중국으로 가던 도중은 사망했다. 그의 장모인 김락은 예안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제국 경찰에 붙잡혀 56세의 나이에 고문을 당하다 실명했다. 처남을 비롯한 그의 처가 역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15]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2년 5월 6일자 방송분에서 이 내용을 다룬 바가 있다. EBS 역사채널 e에서도 다룬 바 있다. # 방송 프로 천일야사에서도 다룬 바 있으며, 비교적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는 독립운동가이다.

참고로 동명이인의 독립운동가도 있다. 1933년에 옥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람이다. 그나마 다행히 이 사람이 네이버 김용환 검색어 지식백과에 수록은 되어 있다.

2015년 6월 21일자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서 145회로 파락호 김용환 특집을 다루었다. 김용환의 행적과 파락호로의 위장과정, 그리고 김용환의 처가 이야기가 같이 다루어졌다. 2017년 8월 15일 제72주년 광복절 기념식 행사중 그날이 오면 1부 주제로 김용환이 나오면서 11시 20분 기준 포털사이트 다음 검색어 기준 '파락호 김용환' 으로 실검 5위를 차지했다. 2019년 2월 24일 SBS 런닝맨 삼일절 100주년 특집에서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6264'과 함께 언급되었다. 2019년 3월 10일 KBS1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3.1운동 100주년 기획 편으로 학봉종택 손님상을 소개하면서 파락호 김용환의 일대기와 위의 김후웅 여사의 시까지 같이 소개하였다.

4. 사진에 대한 진실

파일:external/korea100.kr/img_120717(2).jpg
방송·언론에서 파락호 김용환(金龍煥)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사실 이 사진은 만주 방면에서 대동단 활동을 했던 동명이인 독립운동가 김용환(金用煥)의 사진이다. 또한 두 사람 다 1995년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용환(金用煥)의 유해는 2004년에 봉환되었다.

파일:김.jpg
현재는 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파일:김용환.jpg
그리고 또 오해를 많이 사는 사람이 아이치현을 근거로 재일 거류민단 활동을 하다 1968년에 살해된 김용환인데, 남산공원에 동상이 서 있으나 이 또한 파락호 김용환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사람은 1917년생이나 독립운동과는 관련이 없고, 1960년대 거류민단에서 반공 투사로서 활동한 경력이 유명하다.

5. 여담


[1] 지번주소: 금계리 855 [2] 33세손 ○환(煥) ○현(炫) ○형(衡) ○熙(희) ○섭(燮) ○창(昌) ○노(魯) 항렬 [3] 학봉(鶴峯) 김성일의 종가. 학봉종택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으며, 이 마을에는 현재도 의성 김씨 집성촌이 있다. 반독재/민주화 운동가이자 문체부 차관 및 서울 강서구청장을 역임한 김도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 [4]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이고, 역시 임시정부의 김창숙,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 만주 독립군 활동을 한 이승희, 김대락, 김원식 등이 뒤를 잇는다. [5] 이 때 김회락은 유언으로 '내 자손들에게 보수(報讐, 원수를 갚음)를 가르쳐라!'를 남겼다고 한다. [6] 이때 같이 활동한 인물이 역시 이쪽 집안인 김현동(1876. 12. 24.~1927. 7. 10.)이다. 김현동 역시 대통령 표창(1983년),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을 받았다.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7] 안동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서로군정서와 연결된 인물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원식과 김찬규. [8] 양반 가문을 직접적으로 몰락시킨, 또는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을 경멸조로 부르는 말. [9] 정작 이 세 사람 모두 난봉꾼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일을 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다만 큰일을 하다보니 가세가 기운 탓은 있지만. [10] 문중의 큰 어른들 중에는 아는 사람도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다만 위장을 돕기 위해 모르는 척 한 것이라고. [11] 조선 말 의병이자 유생이었던 석간 서효원의 집안으로, 청송 마평 서씨 석간종택이다. 참고로 청송 서씨 후손들이 운영하는 항일의병기념관 가이드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집안도 일제시기 집안 재산을 털어 의병활동을 했던 집안이기에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12] 친정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오신 오동나무 장롱이다. 아래 김용환의 딸이 쓴 시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를 보면 큰 어매가 쓰던 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안동 지방에서 큰 어매는 친 할머니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안동 출신의 이동형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이이제이에서는 큰어머니(?)가 쓰던 장롱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용환이 종손(종갓집의 큰아들)이기 때문에 큰어머니가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오류로 보인다. 그 외 친정어머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정확히는 친할머니가 큰어매다. 안동지방의 나이 지긋한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다 안다. [13] 아버지의 경북 북부지방 방언 [14] 할머니를 뜻함. [15] 안동 인근은 퇴계의 학맥이 통혼 등을 통해서 엮여 있었는데, 김용환의 장인이 예안의 의병장인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이고 이중업의 동서가 고성 이씨 이상룡이다. 김용환의 딸 김후웅 역시 청송 의병의 주역인 마평 서씨 서효원의 손자 며느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규모 종가들이 친일로 기운 사례가 많은 데 비해서 안동 인근은 신통할 정도로 인맥이 독립운동으로 기울었다. 김흥락의 제자 중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이가 60명이라는데, 안동과 주변 시군에서 독립운동으로 포창 및 훈장을 받은 이들을 통틀면 약 7,800여 명이 나온다. 아직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까지 합친다면 만 명 단위가 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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