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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196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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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기2. 학생운동3. 정계 입문4. 정치적 역풍과 첫 실패5. 김민석 그리고 노무현
5.1. 본인의 주장
6. 고난의 정치 여정7. 복귀8. 제22대 국회의원 선거9. 더불어민주당 수석최고위원

1. 성장기

1964년 5월 29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3형제 중 막내로[1]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유학 시절 결혼했다. 용산구에서 신광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중학교에 재학하다가 은평구로 이주하여 서대문중학교, 숭실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 학생운동

198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2]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전국대학 총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1980년대 초중반의 학생 운동을 주도하였다.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및 삼민투[3]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3년간 복역하였고, 1988년 사면으로 출소했다.

수감 중이던 1987년 작은형 김민화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김수환 추기경의 노력으로 귀휴 조치되었고 이때 조문객으로 찾아온 김대중을 만났다. 당시 김민석의 어머니 김춘옥 여사는 교통사고 사망 보상금으로 "민화의 집"을 설립하여 구속자 가족과 수배학생들을 돌보았고, 김대중과 김영삼 부부가 민화의 집 개소식에 함께 참석할 정도로 "김민석 어머니"에 대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어머니 김춘옥 여사는 김민석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설립하였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 초대 의장이 되었다.

감옥 출소 이후에는 원래 노동운동을 할 생각이었는데 감옥있을때 골병이 들어서 목이랑 허리가 안좋아서 공장취업은 포기했다고 한다. 실제로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여파로 목이랑 허리가 안좋다고.

3. 정계 입문




이후 노동운동은 포기하고 1990년 3당 합당 이후 이기택 등이 주도한 꼬마 민주당에 입당하면서[4]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후 이기택의 민주당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이 합당한 민주당에 참여했다. 당시에 재야세력에서 청년 중 한명은 출마를 해야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그 대상이 자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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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에 공천되어 출마하였는데,[5] 이 때의 나이가 만 27세로 제1 야당의 청년 정치인이라는 상품성에 주목한 김대중 총재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야심차게 선거 운동을 했지만 보수 성향이 강했던 여의도동에서 표차가 크게 벌어지는 바람에 민주자유당 나웅배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표차가 겨우 260표 차에 불과했던데다, 애초에 나웅배는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출신으로 상공부 장관과 경제부총리를 역임한 여당의 3선 국회의원 중진. 이런 거물을 상대로 피말리는 접전을 한 것 자체가 만 27세 청년 정치인의 화려한 데뷔라는 영광의 무대였다.[6]

1993년 KBS 아나운서 김자영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1994년 1월부터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과정을 한 학기 이수한 뒤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로 옮겨 행정학 석사[7] 학위를 취득하고 1995년 귀국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기획실장 및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 후 김대중의 정계 복귀로 인한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당시 김민석은 신당을 창당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의견에 대해 왜 당을 깨고 신당을 만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정치적 판단으로서 김대중을 따르겠다고 해서 새정치국민회의에 소장파로서 가장 먼저 합류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다시 서울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최영한( 최불암) 의원을[8] 꺾고 31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당시 김민석은 유세 중 "유권자 여러분께서 저 김민석을 선택해주신다면 1등 국회의원과 1등 연기자를 동시에 살릴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9] 제15대 국회의원 중에서 최연소 의원이었다.

이후 노무현 전 의원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국회에 입성해서는 원래 자기 전공과 관심사에 따라서 보건복지위를 가려고 했는데 당시만해도 보건복지위가 비인기상임위라서 젊은 초선인 자기가 간다고 하면 갈 수 있을거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이 초선시절 재정위원회를 맡았던 것이 경제를 이해하고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면서 초인기 상임위였던 재정위원회에 김민석을 꽂아넣었다. 보건복지위원회는 그로부터 24년이 지나서 21대 국회에서 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 돌아갔다.

1997년 한보그룹 청문회 때는 돋보이는 논리와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가 됐다. 제15대 대선 때는 단독으로 김대중 후보의 선거 광고를 찍을 정도였다.[10]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이후로는 여야를 막론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김대중의 정치적 아들'로서 압도적 포텐셜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

1999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 대변인으로서 창당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에 외곽 지원조직인 '젊은 한국'을 결성, 차세대를 의식한 행보를 계속해 나갔다. 이때 자신이 직접 여론조사를 돌려서 기존의 민주당에 없었던 재계인사나 보수인사들을 영입해서 외연확장 작업을 했고 새천년민주당이라는 당명까지 만들어갔는데 대통령께서 매우 흡족해하셨다고 회고했다. 특히, 이인영, 임종석, 오영식, 우상호 등 훗날 민주당의 주축이 되는 386세대를 영입한 것은 덤. 김민석 의원에 따르면 이때 영입 직전까지 갔는데 막판에 한나라당에 간 사람도 있었다고 밝혔다.

1999년 10월에는 영문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에 의해 아시아의 새천년 젊은 지도자 2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득표율 60%를 돌파하는 압승으로 재선에 성공하며 386세대의 대표주자 위상을 확보했다. 당시 압도적 보수 우세였던 여의도동에서도 근소하게 패했다. 16대 총선에서 김민석 후보의 득표율은 현재까지 영등포을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의 역대 최고 득표율이다. 2000년에는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미래를 이끌어갈 세계 지도자 100인에 선정돼 주목을 받았다. 이 때만 해도 김민석의 정치 인생은 순풍에 돛을 달고 무난하게 순항할 것만 같았다.

4. 정치적 역풍과 첫 실패

386세대의 대표 주자로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지만, 2000년 5·18 기념식 전날 벌어진 이른바 새천년 NHK 사건으로 도덕성에 흠집이 생겼다. 이 사건은 김민석을 포함한 386세대 정치인 전부에게 상당한 이미지 훼손을 가져왔다.

2000년 12월 ` 권노갑 2선 후퇴' 요구를 계기로 민주당이 쇄신 파문에 휩쓸렸을 때, 정풍운동을 주도하던 천신정에 맞서 "질서 있는 쇄신"을 주장함에 따라 동교동계에 편승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1년 당내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11]에까지 오르며 유력 정치인으로 각광받았다. 그 결과,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이상수를 경선에서 누르고 새천년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될 수 있었다.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인데 왜 대선 대신 서울시장에 나섰냐면, 2002년 기준 만 38세라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헌법에서 대통령 출마의 자격은 만 40세 이상에게만 주어진다.[12]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13]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초반 우세를 보였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 측근 비리 문제로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분위기는 박빙으로 흘렀고, 결국 개표 결과 이명박 후보에게 10%가 넘는 큰 차이로 패배해버리고 말았다. 그 후 이명박은 승승장구하며 대통령까지 되었음에 반해, 김민석은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5. 김민석 그리고 노무현

지방선거 패배 이후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14] 지지율이 떨어지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2002년 10월 17일 갑자기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캠프로 이적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철새 정치인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났다. 김민새라는 별명까지 생겨났을 정도. 아무튼 이때까지만 해도 김민석 본인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유있게 "새들도 저 때문에 피해를 많이 봤다."라고 말하는 상황이였다.

당시 대선후보 지지율은 노무현이 17%, 정몽준, 이회창이 각각 30%를 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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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민석의 탈당은 의외의 후폭풍을 몰고 오는데, 지방선거 참패와 후단협의 흔들기, 월드컵 이후 정몽준의 급부상 등으로 계속 폭락하던 노무현 지지율이 반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관망하던 개혁성향 유권자들이 노무현에 대한 동정심리 등을 이유로 재결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면초가에 놓여있던 노무현 캠프는 다시금 활기를 찾았고, 이후 정몽준과 후보단일화하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다. 지지율이 상승세로 반등했으니 여론조사로 붙어도 정몽준을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5.1. 본인의 주장

2016년 10월 7일 방송분

김민석은 더불어민주당에 복귀한 뒤 2016년 김어준의 파파이스 115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에 대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후보 단일화가 필요했다. 노무현 후보가 단일화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 단일화를 만들어내고 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고 성명을 내고 정몽준 캠프에 합류했고 실제 정 후보를 설득해 여론조사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당내 대부분이 단일화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실제로 이를 위해 움직인 사람이 본인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단일화를 통해 이회창 후보에 대해 승세를 굳혔으나 유세 마지막 날 정몽준의 지지 철회 파동 때문에 대선 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해명했다.

파파이스에서 "왜 정몽준에게 갔느냐"는 질문에 "정몽준에게 가서 단일화를 시켜도 대선에 이기면 이후에 결과로 평가될 거라 생각했고 워낙 대선승리가 절박했다", "누가 봐도 단일화가 없으면 지는 상황이었다"며 이회창이 되면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거나 단절된다는 정치적 공포가 있었고 서울시장 낙선 이후 북한에 유학생을 보내는 사업을 하고 대선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는데 대선판세가 급격히 안 좋아져 고심 끝에 행동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김민석의 행동은 충격이었고, 단일화를 위한 합리적 충정이었을 수 있으나 본인은 아주 어렵게 되었다."는 취지로 기록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도 말했다.

"단일화 이후에는 왜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당시 단일화 이후에는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대선이 다 끝나고 돌아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선이 끝나면 어차피 정치적 상처가 생겼으니 잠시 정치를 떠나 유학할 의사를 주변에 피력했다고 한다.

6. 고난의 정치 여정

결국 "가출했던 아들이 집에 돌아온 심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국민통합21을 탈당한 뒤 2003년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했지만, 이후 출마하는 선거마다 고배를 마셨다. 당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등포구 갑으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고진화 후보에게 패배했고, 심지어 열린우리당 김명섭 후보에게도 밀리면서 3위로 낙선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가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한 시점은 2003년 11월 4일로 열린우리당 창당 일주일 전이었는데[15] 차라리 새천년민주당 복당 대신 열린우리당 입당을 선택했다면 당장 17대 총선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 노무현과 척을 졌던 송석찬, 김명섭, 송영진 등도 열린우리당에 합류했던 만큼 김민석이라고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우상호, 임종석, 송영길 등 김민석을 제외한 386 정치인들 대다수는 열린우리당으로 가서, 그 후 우상호는 4선 의원에 20대 국회 전반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임종석은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 송영길은 인천광역시장을 거쳐 더불어민주당 제5대 대표를 역임했다.

이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예비후보로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이인제 후보에 밀려 2위로 탈락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시장 선거 당시 회계 문제로 컷오프를 당했지만 승복하고 불출마한 뒤 오리알 유세단을 이끌었고, 그 후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에 2위로 당선되며 부활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불법 정치자금 수사가 발목을 잡았고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비난하며 당사에서 한 달간 농성을 벌였지만 끝내 구속되고 말았다.

후술할 불법 정치자금 수수 논란으로 2015년까지 피선거권 상실과 벌금형이 확정되었다.

대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던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선언했지만, 경선에서 김정길 대한체육회장에게 밀렸다. 다만 이 당시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하고 부산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면서 관심을 보인 탓인지 이후 2024년 전당대회 부울경 경선에서 1위를 하였다.

공백기 중에 2010년 칭화대학 중국법 석사, 2011년 럿거스 대학교 로스쿨 J.D. 과정을 마쳤다.

안철수,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출범으로 민주당 당명이 사라지자 민주당의 이름과 전통을 지킨다며 2014년 원외 민주당[16]을 창당하고 당대표로 취임했다.

이후 원외 민주당 간판으로 20대 총선에 비례대표로 출마했지만, 2위로 낙선하면서 국회 복귀에 또 실패하였다.

7. 복귀

2016년 10월 원외 민주당이 더불어민주당에 흡수통합되면서 더불어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그 후 문재인 대통령 후보 종합상황본부장, 민주연구원장을 거쳐,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옛 지역구이자 정치적 고향인 서울 영등포구 을에 출마를 선언했다.

해당 지역구 재선 현역인 신경민 의원과 겨룬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2000년 16대 총선 이후 20년 만에 민주당 후보로 총선에 도전하게 됐다. 지상파 출구조사에서는 미래통합당 박용찬 후보에 1.4% 차(김민석 46.9% vs 박용찬 48.3%)로 밀리는 것으로 나왔으나, 실제 개표에서는 50.3%의 득표율로 낙승하면서 국회 복귀에 성공했다. 2002년 서울시장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한 뒤 정확히 18년 만의 원내 복귀이다.[17]

그가 낙선한 17대 총선부터 재기에 성공한 21대 총선까지 연달아 당선된 사람들이 현재 무려 5선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김진표, 변재일, 조정식, 안민석, 이상민[18] 등이, 국민의힘에서는 주호영[19], 조경태[20] 등이 있다. 그리고 김민석 의원이 재선 의원일 때 초선 의원으로 16대 국회에 들어온 박병석은 그 이후로 다섯 차례 내리 당선되어 제21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이었다. 즉, 의장보다도 정치 경력은 선배라는 얘기. 만일 계속 영등포에 있었으면 55세에 7선 국회의원이었을 수도 있다. 참고로 14대 총선에서도 낙선했는데, 만일 이 때도 당선됐으면 8선 국회의원[21] 즉,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박준규 전 국회의장 다음으로 높았을 것이다[22] 만일 그랬다면 21대 국회 최다선 의원이 되어 전반기 의장은 박병석이 아닌 김민석이 되었을지도 것이다. 더불어서 권영세의 국회 입성이 좀 더 늦어지거나, 아예 국회에 들어올 일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23]

2021년 3월 50인을 모아서 간호법 수정안을 대표발의했다.

2021년 3월 23일, 영등포아트홀에서 열린 'GTX-B 노선에 대한 전략환경영향평가 주민설명회'에서 본인이 총선 당이 걸었던 'GTX 노선의 안전보장 공약'의 구체적인 협의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이후 국토부와 협의를 통해 영등포에서 KBS를 거쳐 지하철 9호선 라인을 따라 샛강역으로 빠지는 새로운 GTX-B 노선안을 도출하였다. #

2021년 6월 16일,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정세균 전 총리를 공개 지지선언했다. #

2021년 6월 28일부터 7월 1일까지 '동물보호 및 학대 예방 연속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토론회에서는 학대 문제에 초점을 두었던 지난 토론회를 토대로 반려동물의 생애주기별 행복권을 검토하였다. 3일간의 토론회를 마치고 7월 1일에는 고양시에 위치한 덕수공원 반려견 놀이터 현장을 시찰하였다. #

2021년 9월 29일, 기자회견을 통해 '여의도 글로벌 뉴타운 10대 비전'을 제시하여 여의도 재건축을 촉구하였다. 내용으로는 국회의 존재로 인한 54m 고도 제한 완화, 여의도국회의 전면 이전, 여의도 글로벌 시민대학 등의 내용이 담겼다. #

2021년 12월 1일, 국회 정론관에서 채현일 영등포구청장과 함께 '뉴신길 뉴대림 비전'을 발표하였다. 신길과 대림 지역의 대전환을 천명하면서, 이를 위해 복개된 대방천 2.7km를 생태친화 하천으로 복원하고 서울지방병무청 부지 약 25,000㎡를 메낙골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담았다. #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며, 이후 더불어민주당 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 당대표 후보로 출마하여 호남 지역을 대상으로 한 일부 여론조사에서 호남 출신 박용진 후보를 제치고 2위를 기록하는 등의 저력을 보였으나 비이재명 후보들이 난립하면서 결국 컷오프되었다.

2023년 3월 27일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

2023년 9월 26일 더불어민주당 새 원내대표를 뽑는 3인 선거에서 결선투표에도 들지 못하며 패배하였다.[24]

2023년 12월 26일,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63빌딩과 성모병원 사이에 있는 약 2,500평 규모의 부지에 '4대 글로벌 전략 자산'을 유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최근 LH에서 해당 지역을 민간에 내놨다가 유찰되자, 역으로 국가주도 하에 산업 기반 시설을 세우자는 논의를 내놓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서울대 글로벌캠퍼스와 초·중·고 국제학교, 글로벌 최첨단병원, AI 표준 국제기구 등의 글로벌 전략 시설들을 해당 부지에 유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김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이를 통해 여의도 국제금융특구 비전에 대해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실행할 수 있음을 기대하였다. #

8.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총괄상황실장을 맡았다. 공천 문제로 반발하는 박용진 의원 문제를 두고 "시스템 공천"이라 주장하며 이를 비판하는 한동훈 비대위원장과 설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이낙연 대표가 탈당하자 "사쿠라"라며 직접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21대 국회 초반에서는 당시 당을 장악한 친노, 친문 그룹의 비토때문에 몸을 낮추고 있었으나, 이재명이 당을 장악하는 21대 국회 후반부터는 당의 지도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2대 총선 당시에도 중책인 총괄상황실장을 맡았다.

본선에서는 서울 영등포 을에서 국민의힘 박용찬 후보를 1,000여표 차이로 꺾고, 4선 고지에 올랐다. 정말 천운인 것이, 이재명 대표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느라 실제로 지역구에 전보다 신경을 많이 쓸 수도 없었고, 21대 총선 당선이후 코로나로 현역의원들이 지역 조직을 제대로 단합시킬 수 없었던 시기가 조금 길었던 점, 그 사이에 민주당의 지방의원 조직이 갈려나갔다는 점을 감안했을때 천운이 따랐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정권심판론만 아니었음 낙선했을 수도 있었다는 분석이 있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성을 했으니 정말 값진 승리였던 셈이다.

9. 더불어민주당 수석최고위원

전당대회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이재명 당대표 후보 캠프 총괄본부장을 맡았고 최고위원에도 출마했다.

2024년 7월, 정보사령부 군무원 군사기밀 유출 사건을 제보받았다.
김대중과 이재명을 잇는 다리가 되겠습니다.[25]
2024년 8월 18일, 더불어민주당 제1차 정기전국당원대회에서 수석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다. 후단협 사태 이후 꼬여버린 정치 커리어를 청산하고 정치적으로 완전한 부활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2024년 전당대회 이래 2030 청년 당원들을 포함한 신규 민주당 지지층에게도 민주당의 브레인, 전략가 컨셉을 강조하며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많은 당원들의 신임을 얻고 있다.

2024년 9월 곡성과 금정구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 문제로 조국혁신당과 민주당이 갈등을 빚자, 조국과 비명계를 강하게 규탄하면서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당원들에게는 일명 “사이다“라며 큰 호평을 받았다.

9월에 계엄을 예언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진짜 12월 3일에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이 터져버리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유명세를 얻게되었다. 실제로 박선원 의원에 따르면 이미 7월부터 계엄관련된 제보를 받아서 박선원 의원과 둘이서 계엄대응을 논의했다고 한다.

이때 유튜브에 나와서 대통령비서실 이전 문제가 김건희 여사의 직접 집권 플랜 , 일명 " 에바 페론 프로젝트 "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 탄핵이 없으면 언제든 2차 계엄령이 내릴 수 있고 국정의 어느 부분도 정상화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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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큰형은 잡지 ''의 기자를 지냈고 2010년대 후반부터는 판도라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조국백서 주도세력으로 유명해진 김민웅 경희대학교 교수, 서울겨레하나 대표이다. 작은형 김민화는 1987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성남시장과 같은 과, 같은 학번의 동기다. [3]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위원회. [4] 당시 이 당에는 노무현, 이철 등도 있었고 후일 유명해진 안희정, 이광재 등 여러 인물들도 있었다. 야구선수 최동원 1991년 지방선거 당시 이 당에 입당해서 시의원 선거에 나갔다. [5] 여담으로 92년 1월자 KBS 9시 뉴스 보도에 따르면 영등포구 을 지역이 아닌 경기 과천시·의왕시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군으로 물망에 올랐었다. # [6] 당시를 김민석 의원이 회고하길, 당시만 해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세를 하면 표가 엄청나게 움직이던 시기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역구 후보들이 자기 유세장에서 최대한 머물게 하려고 하다보니 시간이 밀렸고, 그래서 김민석의 지역구였던 영등포 을에는 늦게 와서 김민석 당시 후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생하는 것같아 미안해서 차에서 손흔드는걸로 유세는 생략하고 가시게 했다고 밝혔다. 근데 이걸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이 10여년이 지나고 그때 내려서 유세를 해줬으면 자네가 그때 당선되었을텐데 라고 말하면서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7] 1년 기간의 MC/MPA, 정규 2년 정책학 석사(MPP)학위와는 다른 전문가 과정 [8]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정주영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이 낙선하면서 사실상 국민당이 해체되자 민주자유당으로 이적했던 것이었다. 이때는 전국구 의원이 탈당해도 국회의원직 유지가 가능했다. [9] 상대였던 최불암 마저도 후일 김민석의 선거 전략을 호평하였다. # [10] 링크된 비슷한 광고 버전으로 당시 노무현 부총재 추미애 의원도 광고에 나왔었다. [11] 1위 이인제, 3위 한화갑, 4위 노무현 [12] 2021년 12월 말 지방선거와 총선의 출마 나이대가 25>18세로 조정되는 국회안이 통과되었으나, 대통령 선거의 피선거권은 헌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는 한 먼 일이다. [13] 지방선거 이후에 치러진 영등포 을 보궐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권영세 후보가 당선된다. [14] 여담이지만 노무현은 김민석의 전 부인(당시에는 혼인관계였다)인 아나운서 김자영과 SBS에서 '뉴스대행진' 라디오 DJ를 함께 맡기도 했었다. [15] 다만 실제로는 1개월 반쯤 전인 9월 20일에 새천년민주당 의원 37명과 한나라당 의원 5명이 각각 탈당 후 국민참여통합신당이라는 교섭단체를 만든 시점으로, 정식 창당만 안된 상태였다. [16] 다만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신기남 의원이 합류해서 잠시 원내정당이 되긴 했다. [17] 다만 국회 복귀가 워낙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일부 사람들 중에서는 초선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근데 워낙 그럴 만도 한 게, 국회에 복귀하기까지 기간이 상당히 길었고, 정치 활동도 워낙 장기간 동안 안 해서 대중들로부터도 자연히 잊혀진 사람 신세가 되었다. 근데 따지고 보면 김민석 본인과 박주선, 안철수 정도를 제외하면 서울특별시장 낙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18] 18대 총선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자유선진당 당적으로 당선. 이후 19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계 정당 민주통합당으로 돌아온다. [19] 20대 총선 때 공천 불복으로 탈당해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21대 총선 때는 미래통합당 지도부에 의해 원래 지역구를 떠나 수성구 갑에 공천되어 김부겸 국무총리를 격파하고 당선. [20] 잘 알려져있다시피 민주당계 정당에 있으면서 3선을 달성한 뒤, 20대 총선 직전에 새누리당으로 이적. [21] 이만섭 전 국회의장, 정일형 전 의원, 김재광 전 국회부의장, 서청원 전 의원과 같은 선수이다. 즉, 낙선만 없이 14대부터 계속 당선됐으면 서청원 전 의원에 뒤를 이은 5번째 8선 의원이었을 것이다. [22]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려 정치적 재기에 성공하는 경우는 가끔씩 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가 15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 12년 만에 여의도 복귀에 성공했던 박지원 전 의원(단, 박지원 전 의원의 경우는 중간에 국민의 정부 시기에 문화관광부장관, 공보수석과 비서실장 등 정부와 청와대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고, 참여정부 시기에는 대북송금 특검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기에 원내 복귀가 늦었다.)이나 10월 유신으로 8대 국회가 해산된 뒤, 1988년 13대 총선을 통해 17년 만에 원내 복귀한 조윤형 전 의원, 1992년 14대 총선을 통해 21년 만에 국회에 복귀한 김상현 전 의원,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이후 총선과 지선에서 5연속 낙선만 하다가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하여 칠순이 넘은 이후 장장 16년 만에 전국 최고령 당선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국회에 복귀한 이용희, 2015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15년 만에 원내 복귀한 안상수 인천광역시장, 2020년 21대 총선을 통해 10년 만에 원내 복귀에 성공한 이광재 강원도지사, 11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18대 총선으로 23년 만에 원내 복귀에 성공한 김노식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이들은 유신으로 인한 물리적인 공백기나 여타 임명직, 선출직 수행으로 인한 공백기로 인해서 오랫동안 국회를 떠나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잊혀졌다가 18년만에 돌아온 김민석은 그 중에서도 특이한 케이스가 맞다. [23] 권영세는 김민석의 사퇴로 촉발된 2002년 재보궐선거( 영등포구 을)에서 처음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웃긴 건 김민석의 후임자인 권영세는 5선으로, 전임자인 김민석보다 선수가 높다는 것이다. [24] 남인순, 홍익표 후보가 원내대표 결선투표에 진출하였고 홍익표 후보가 최종적으로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25] 2024년 더불어민주당 제1차 정기전국당원대회 서울에서 틀었던 인트로 영상의 마무리 멘트. 그 순간 현장에서 큰 환호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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