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9:55

교세라

京セラ株式会社
Kyocera Corporation / 교세라 주식회사
파일:교세라 로고.svg
정식 명칭 교세라 주식회사
종류 주식회사
시장 정보 도쿄증권거래소 JPX: 6971
시가총액 24조 3,471억원[1]
본사 소재지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타케다 토바도노초 6
(京都府京都市伏見区竹田鳥羽殿町6)
창립년일 1959년 4월 1일
업종 세라믹 제품, 정보 · 통신 기기, 반도체 및 환경 제품, 사무기기 등
법인번호 4130001000049
사업영역 다이오드, 트랜지스터 및 유사 반도체소자 제조업
창업주 파일:일본 국기.svg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2]
대표 파일:일본 국기.svg 야마구치 고토(山口悟郎)
자본금 1,157억 엔 (2019년 3월 기준)
주식 총수 33억 3,799만 7,492주
매출 연결: 1조 5,990억 5,300만 엔
(2020년 3월 기준)
영업이익 연결: 1,001억 5,300만 엔
(2020년 3월 기준)
경상이익 연결: 1,488억 2,600만 엔
단독: 983억 5,600만 엔
(2020년 3월 기준)
순이익 연결: 1,077억 2,100만 엔
단독: 884억 6,600만 엔
(2020년 3월 기준)
순자산 연결: 2조 4,542억 4,200만 엔
단독: 1조 8,055억 6,800만 엔
(2020년 3월 기준)
총자산 연결: 3조 2,501억 7,500만 엔
단독: 2조 5,200억 9,600만 엔
(2020년 3월 기준)
종업원 수 연결: 76,411명
(2020년 3월 기준)
결산기 3월 31일
회계 감사인 PwC교토 유한책임 감사법인
외부 링크 한국 공식 사이트
일본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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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교세라본사.jpg

1. 개요2. 역사3. 한국 진출
3.1. 교세라 도큐먼트 솔루션스 코리아
4. 제품5.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 교토, 그리고 간사이를 대표하는 전자기기 제조 기업. 본사는 일본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에 위치해 있다.[3]

창사 이래로 단 한번도 적자를 낸적이 없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
한경 글로벌마켓 - 다니모토 히데오 교세라 사장과의 인터뷰

2. 역사

1959년 4월 1일 이나모리 가즈오가 청년 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 100만 엔과 은행에서 빌린 200만 엔을 합친 300만 엔으로 창업했다. 당시 이름은 " 교토 세라믹".

IT 하드웨어에 사용되는 부품 납품을 수주하여 생산, 납품하는 B2B 기업이다.
하드디스크 모터 점유율 세계 1위, 세라믹 패키지 점유율 세계 1위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자기부터 사장이라고 우쭐대지 않고 직원들과 동고동락 하면서 월급도 중간관리직과 비슷한 수준으로 받았다. 마쓰시타 전기에서 생산하는 각종 부품들을 수주했는데, 마쓰시타에서 계속 단가를 후려쳐서 마쓰시타의 각종 하청업체들이 떨어져나갈 때에도 이나모리 가즈오는 자신의 월급을 더 깎아서라도 단가와 기한을 맞춰서 납품했다. 교세라 내부에서도 마쓰시타에서 계속 단가를 후려쳐대다 보니 매출이 줄어서 노사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나모리 가즈오는 자신의 월급까지 깎으며 버틴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IBM 1969년 교토 세라믹을 찾아와서 부품( 콘덴서 회로)을 20만 개 요구했는데, 납기일을 3일 앞두고 설계를 완성해서 시제품을 보내자 IBM이 검수하더니 그 자리에서 2,000만 개를 주문해서 급격하게 사세가 커졌다.

이렇게 교세라의 사세가 커진 것에 대해 이나모리 가즈오는 자신의 책 여러편에서 "마쓰시타 전기야말로 우리 회사를 성장시켜준 고마운 회사라고 생각한다"고 서술했다.

인텔로 시작하여 각종 미국 기업들의 하청도 따내게 되자, 교토세라믹은 1982년 사명을 현재의 교세라로 바꾸게 되었다. 그 이후 KDDI[4]를 통해 NTT의 민영화 이후 독점체제가 깨진 통신 사업에도 진출했다. KDDI를 세울 때 NTT와 상대도 되지 않고 교세라는 당시 중견기업 정도였던 터라 허가를 받는 것도 난관이고, 사내에서도 인프라 구축 비용때문에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이나모리 가즈오는 이런 사내외의 반발을 무마하고 기어이 KDDI를 성공시킨다. KDDI가 성공하면서 교세라는 대기업 반열에 들었다.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가 터졌을 때 교세라는 그래도 견실한 재무구조를 통해 선방했다. 그러다 대침체 이후로는 교세라도 성장세가 주춤하고 있다. 휴대전화, 태양전지 등의 완제품은 일본 산업계 전체적으로 경쟁력을 잃었으며, 부품 사업은 중국이나 대만의 각종 하청기업들이 성장하면서 교세라에 주던 물량들이 많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이 때 교세라를 구제한 것이 사업 다각화인데 전자· 자동차· 반도체 부품, 전자 디바이스, 도큐먼트 솔루션에서 골고루 높은 이익률을 보이며 회사를 지탱했기 때문이다. #

2000년에는 미타 공업[5]을 인수하여 자회사로 삼으며 교세라미타 주식회사를 발족시켰으며, 사명변경으로 현재는 교세라 도큐먼트 솔루션스가 되었다.

간사이 기업답게 구 산와은행(현 미쓰비시 UFJ 은행의 전신 중 하나)가 주거래 은행으로, 산와은행/ 미쓰비시 UFJ 주축의 기업그룹 '미도리회'에 가입되어 있다. 일본의 '기업그룹'은 통상 대형 은행을 주축으로 하는 기업들의 비공식 회합을 가리키는 것으로, 내부에서 정보 공유나 사업 조정은 벌어지지만 서로 지분관계는 그다지 없으며 당연히 그 사이에서 지배 관계가 성립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3. 한국 진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에 처음 진출할 때 교세라가 많이 도와줬다. 그래서 삼성그룹 반도체 성장에 교세라도 한 자리 끼게 됐다. 그러다가 한국 프린터와 같은 컴퓨터 주변기기들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2006년 한국에 직접 진출하였고 교세라 그룹 한국법인이 설립된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삼성전자의 각종 컴퓨터 주변기기를 교세라가 OEM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한국 직접 진출 이후로는 OEM 관계를 청산하고 직접 교세라 브랜드로 판매하고 있다.

SKY SK텔레텍 시절이었을 때 초기 모델은 교세라와 기술 제휴가 있었다. 한참 후 교세라 토크라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SK텔레콤을 통해서 출시하였다.

업무 환경에서 최상의 프린팅 솔루션을 제공하는 교세라 도큐먼트 솔루션스 코리아가 2009년 청호컴넷(청호오에이시스)를 인수합병하여 진출했고 현재는 교세라 도큐먼트 솔루션스 코리아란 법인명으로 자리를 잡은 상태다. 국내 9개의 지점을 통해 서비스 및 솔루션을 제공 받을 수 있다.

3.1. 교세라 도큐먼트 솔루션스 코리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교세라 도큐먼트 솔루션스 코리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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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품

IT 기술에 해당하는 다양한 제품군을 취급한다. B2C 물건으로는 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일본 내수용이나 일부 시장이지만 만들고 있다. 교세라의 휴대폰 제조 사업은 1999년 말에 퀄컴 휴대폰 제조 사업 부문을 인수한 것을 계기로 폭풍 성장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B2B가 강세로, 정말 오만가지 IT 부품을 수주해와서 만들어내곤 한다. 카메라 사업에도 진출하여 야시카 같은 회사를 인수하거나, 야시카와 이미 제휴하고 있었던 자이스와 렌즈와 브랜드등을 제휴하여 필름 카메라 시절 특이한 제품들을 발매하였다. 당시 발매한 제품들은 지금까지도 클래식 카메라 중고 시장에서 높은 평가와 가격을 받는다. Contax N Digital 등 디지털 카메라도 발매하였으나 사업부진으로 접었다

피처폰 시절에는 귀엽고 예쁜 디자인의 핸드폰을 잘 만들어내어 10~20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2010년 전후에 만들어진 피처폰들을 지금도 중고로 구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 그러나 스마트폰이 대중화를 넘어 필수화한 이후로, 일반적인 휴대전화 시장에서는 점유율이나 인지도가 많이 떨어졌다. 일반 사용자 타겟으로는 안드로이드를 임베디드화 한 폴더형 휴대전화나, 시니어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조작이 간단한 스마트폰을 주로 출시하고 있으나, 말이 좋아 시니어폰이지, 실상은 저성능에 디자인도 투박하고 최적화도 덜 된 제품을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을 뿐이라서, 일본인들 사이에서 교세라의 스마트폰=일본제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주범으로 자리잡았을 정도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성능은 다 갖추고 어느 정도 내구성도 있으면서 저렴한 가격으로 출시된다는 장점을 바탕으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업무용 휴대전화의 대량 납품 등에서는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출하량 기준으로는 삼성 갤럭시와 동급이거나 조금 더 많은 정도.
하지만 2023년 스마트폰 시장 철수를 결정했다. 일반 B2C 스마트폰 시장 대신 B2B 스마트폰 사업에 집중할 것이라고. #

2021년 북유럽 스타일의 디자인으로 유명한 가전업체 발뮤다 일본 국내시장을 노리고, 스마트폰을 전격 발표했는데 실제로는 교세라가 OEM으로 공급한 것이다.

교토" 세라믹"이라는 예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여러가지 세라믹 제품도 만들고 있는데, 세라믹 재질의 부엌칼을 대중화시킨 회사이기도 하며, 시중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쓸만한 세라믹 칼은 대부분 교세라 제품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교세라 복사기, 복합기, 프린터 장비들이 다수 진출한 상태로 주로 일반인 보다는 공공기관, 관공서, 대학교 등지에서 자주 만나 볼 수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타사 제품과 달리 유지보수 비용과 잔고장이 거의 없고 디자인이 간결하고 깔끔해 일반 사용자[6]가 구매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5. 여담

  • 한때 게임 회사 타이토를 소유한 적이 있었다. 교세라 휘하 시절의 타이토는 1980년대 초 이전 부흥기에 못지 않은 명작들도 출시했지만, 사내 복지는 좋지 않았고 괴작들도 제법 나오는 등 기복이 심했었다. 결국 스퀘어 에닉스에 매각되었다. 블랙기업의 전형적인 갑질로 시작해 갑질로 끝낸 교세라의 흑역사.
  • 2021년 4월에는 교세라와 도요보가 수지 제품에 ISO 미국 UL 인증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가짜 샘플 등의 부정이 드러나 UL 인증이 전면 취소되었다.
  • 묘하게 한국과 자주 엮이는 기업인데 삼성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계기가 되었던 '후쿠다 보고서'를 작성한 일본인 고문 후쿠다 다미오(福田民郞)가 교세라 출신의 디자이너였으며, 교세라의 창업주인 이나모리 가즈오 또한 수원동부가 삼성 거점임과 반대로 수원 서부 여기산에 안장된 우장춘 박사의 사위였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으로 진출하는 것을 도왔던 것도 교세라이다. 운용하는 축구팀도 공겨롭게도 수원 삼성에 들어가려다 몇년 뒤 현 교토 FC로 입단하게 된 사실상 수원 출신으로 인식되는 박지성과 관계가 깊다.
  • 2022년, Clarivate Analytics(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 구 톰슨 로이터 IP&S)가 선정한 탑 100 글로벌 혁신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
  • 교세라 필로소피로 대표되는 사풍이 매우 유명하다. 교세라를 평가하는데 있어 전자부품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이 교세라 필로소피인데 여기에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회사의 평이 극단적으로 나뉜다. 때문에 혹자는 교세라를 기업보다는 종교집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 2024년 5월 [2] 우범선의 손녀 사위이자 우장춘 박사의 사위이다. 일본항공 파산 이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부탁을 받고 구조조정을 통해 살려냈다. [3] 원래 나카교구에서 창업했지만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4] 설립 당시 사명은 제2전전(DDI)이고, 2000년에 구 국유계통 통신사와 합병하여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5] 1982년부터 10년 동안 잉글랜드 프로 축구 아스톤 빌라 FC의 메인 스폰서도 맡았다. [6] 복합기, 프린터 위주 [7] 사츠마센다이시, 키리시마시에 연구소와 공장을 두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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