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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왕국 7대 군주 Thrasamund | 트라사문드 |
||
제호 | 한국어 | 트라사문드 |
라틴어 | Thrasamund | |
생몰 년도 | 미상 ~ 523년 | |
재위 기간 | 496년 ~ 5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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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달 왕국 7대 군주. 28년간 재위했지만 왕국의 쇠락을 초래했다.2. 행적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 정착하는 걸 이끌어낸 가이세리크의 넷째 아들 겐토의 아들이다. 아버지 겐토는 용맹한 전사로서 가이세리크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특히 468년 본 곶 해전에서 서로마-동로마 연합 함대 궤멸에 한 몫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가이세리크보다 일찍 죽었고, 그는 가이세리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네리크가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들을 숙청할 때 형 군타문드와 함께 은거했다. 484년 후네리크가 사망한 뒤 형 군타문드가 새 왕에 올랐고, 496년 형이 사망한 후 그가 새 군주로 선임되었다.그는 형의 정교에 대한 온건 정책을 지속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그는 정교 신자들을 모른척 했다. 신자 하나가 우발적으로 또는 고의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자, 그는 아리우스파로 개종한다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치세에 정교 신자들을 박해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레고리우스가 가이세리크 치세에 벌어진 일과 혼동한 것으로 추정한다.
첫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사망한 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사절을 보내 테오도리크의 여동생이며 남편이 최근에 사망한 아말라플리다와 결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테오도리크는 이를 수락하고 500년경 그의 누이를 트라사문드와 결혼시켰다. 테오도리크는 아말라프리다의 지참금으로 시칠리아 서부와 릴리베아를 주었다. 아말라프리다는 1,000명의 전사와 5,000명의 하인으로 구성된 상당한 수행원과 함께 카르타고로 갔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이 결혼을 통해 반달 왕국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그는 별다른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507년 또는 508년에 동로마 해군이 이탈리아 해안가를 황폐화했을 때 해군을 보내주지 않았으며, 510년 또는 511년에 서고트 족의 왕위 주장자이며 테오도리크와 맞서던 게셀리크를 지원했다. 테오도리크가 게셀리크를 물리친 뒤 위협을 담은 서신을 카르타고에 보냈다. 이에 그는 자신이 무능했다며 사과하며 배상금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테오도리크는 서면으로 사과한다면 금은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답했다. 그 후 그는 죽을 때까지 테오도리크 대왕의 동맹자로 남으면서도 동로마 제국의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렇듯 국제 관계는 대체로 원활하게 진행되었지만, 왕국은 베르베르인들의 침략으로 쇠락했다. 트리폴리 인근에 사는 베르베르의 일족인 마우리시아 족을 무찌르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지만, 마우리시아의 지도자 카바온에게 참패했고, 마우리시아 족은 반격에 나서 팀가드와 바가이, 렙티스 마그나 시 등지를 파괴했다. 이런 상황에서 523년 사망했고, 후네리크의 맏아들이자 그의 사촌인 힐데리크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