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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드 페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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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99><colcolor=#fff> 피에르 드 페르마
Pierre de Fermat
파일:658px-Pierre_de_Fermat_(F._Poilly).jpg
출생 1607년 10월 31일~12월 6일[1]
프랑스 왕국 타른에가론주 보몽드로마뉴
사망 1665년 1월 12일 (향년 58세)
프랑스 왕국 타른주 카스트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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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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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변호사, 수학자
부모 아버지 도미니크 페르마
어머니 프랑수아즈 카제뇌브 페르마
학력 오를레앙 대학교 ( 법학 / 1626년 학사)
종교 가톨릭

1. 개요2. 그의 일생3. 그의 유산과 업적4. 3세기씩이나 풀리지 않은 난제를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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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uius rei demonstrationem mirabilem sane detexi hanc marginis exiguitas non caperet."
"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놀라운 증명을 알고 있으나 여백이 부족하여 여기에 적지 않는다."
프랑스 수학자, 법률가, 시인. 생전에는 저명한 법조인이며 시인으로 유명했으나, 현대에는 수학자로 유명하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인해 보통은 수학 마니아 또는 천재 아마추어 수학자라는 수식어로 그를 설명하곤 하는데 그 당시에는 아이작 뉴턴이 나타나서 미적분학으로 물리에 실적용하기 전이라서 어느 나라나 대학에서 수학을 잘하는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단, 페르마가 다른 수학자들에 비해서 꽤 늦은 나이에 수학을 시작한 것은 사실이고 어렸을 적부터 수학을 하며 각종 활동을 벌이던 그들에 비하면 취미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수학적 업적은 당시 기준이나 수학사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수학자라기보단 수학을 좋아하는 취미가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그를 수학 취미가로 보는 것은 페르마가 시대 상황 탓에 뒤늦게 수학에 발을 디뎠고 정규 학계에 편입된 적이 없어서인 듯 한데 그가 당대 수학자들과 적극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며 얻은 성과만 봐도 수학자로 보는 시각이 그다지 틀린 것만은 아니다. 사실상 우리가 프로라고 알고 있는 수학자들과 이 사람의 차이점은 그 프로로 알고 있는 인간들은 본 직업이 천문학자, 물리학자 같은 과학 계통이었다는 거고, 이 사람은 법조인이었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에 남긴 발자취는 매우 큰 인물이다. 그의 업적과 생애를 소개하는 것만 봐도 그를 단순히 대단한 낚시를 한 아마추어라고만 보긴 어렵다.
프랑스의 수학자. 수학을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수학자였으나 여러 방면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으므로,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힌다. 근대의 정수 이론 및 확률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나중에 아이삭 뉴턴(Isaac Newton)이 미적분학에 응용하였던 극댓값과 극솟값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창안하였다.
네이버 인물 정보 & 두산백과사전 인용

2. 그의 일생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 지방의 보몽 드 로마뉴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그 지역의 부유한 상인이자 지역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아버지는 페르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했다. 어머니는 법률가 집안 태생이었다.

1623년부터 오를레앙 대학교에 다녔고 1626년 민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후 보르도에서 법률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생전에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여 다양한 언어로 시를 지어서 당대에 시인으로도 매우 유명했다. 그의 시들도 평가가 높았다고 한다.

이런 언어적 재능을 바탕으로 그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들을 탐독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의 수학 저술을 접하면서 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가 20대 중후반쯤이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630년 툴루즈의 고등 사법재판소 참사관이 되었고 이름에 de를 추가하게 되었다. 평생 이 직위를 유지했다. 최종적으로 시장직[2]까지 올랐고,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수학은 취미로 한 것으로, 실제로 논문을 발표한 적은 없었다. 그냥 가끔가다가 지인들에게 증명에 대한 설명은 없이 '나 이거 증명했으니 풀어 봐라'는 식으로 골탕먹이는 것을 즐겼다. 자신의 증명과 정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도 않았다. 링크

3. 그의 유산과 업적

블레즈 파스칼과 함께 확률론의 기초를 만들어냈다. 또한 르네 데카르트와도 교류가 있었는데 서간을 통하여 연구 성과를 통보하였기도 했으며 그것과는 별개로 독창적으로 해석기하학을 생각해냈다. 이 해석기하학은 데카르트도 창안한 것이지만 페르마는 그와는 별개로 해석기하학을 만들었던 것이며 그 수준도 데카르트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미분적분 등, 수학의 여러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정식으로 수학을 공부했던 것은 아니며 수학계에 정식으로 참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연구는 대부분 그가 혼자 공부하고 생각해 낸 것이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그의 수학적 천재성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페르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리스메티카'[3]라는 책의 여백에 이것저것 끄적이는 버릇이 있었는데, 페르마 사후 그의 아들이 주석을 정리하여 출판함으로써 비로소 그의 발견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4]

3.1. 페르마의 미분

페르마는 1629년에 수학사상 최초로 미분을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17세기 초에 요하네스 케플러는 함수가 최댓값, 최솟값의 근방에서는 함수의 변화량이 매우 작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때 페르마는 케플러의 관찰을 보고 역으로 함수의 변화량이 매우 작을 때 최대, 최솟값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으로 표현하면 [math(f)]가 최댓값을 갖고 [math(h)]가 매우 작을 때 [math( f(x)\approx f(x+h))] 이고 이때 구해지는 [math(x)]값에서 [math(f)]가 최댓값을 가질 것이라 예상했다.[5] 그리고 나서 페르마는 [math(f(x)=x(a-x))][6]라는 함수를 택한 뒤 [math(x(a-x)=(x+h)(a-(x+h)))]로 놓고 정리하여 [math(2xh-ah+h^2=0)]을 얻었다. 이제 양변을 [math(h)]로 나누어 정리하면 [math(x=\dfrac{a-h}{2})]가 되고 [math(h)]가 매우 작다고 했으므로 [math(x)]에 [math(h=0)] 을 대입하면 [math(x=\dfrac{a}{2})]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math(f)]는 최댓값을 갖는다.

간단히 말해 페르마는 [math(\displaystyle\lim_{h\to 0}\frac{f(x+h)-f(x)}{h}=0)]이 되는 [math(x)]값을 찾고 바로 그 지점에서 최댓값이 나온다고 이야기한 셈인데, 이는 미분을 이용해서 최대, 최솟값을 구하는 요즘의 방법과 꼭 같은 방법으로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에서부터 언급되는 방법이다. 물론 페르마는 미분계수가 [math(0)]이 되더라도 최댓값과 최솟값을 구분하려면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고, 미분계수가 [math(0)]이면 반드시 그 지점에서 함수가 최댓값을 갖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수학사에서 나타난 최초의 미분이라는 점에서 페르마의 천재성을 볼 수 있다.

3.2. 페르마의 소정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페르마의 소정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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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페르마의 소정리(Fermat's Little Theorem)[7]
소수 [math(p)]와 [math(p)]로 나눠지지 않는 자연수 [math(a)]에 대해서 [math(a^{p-1})]을 [math(p)]로 나누었을 때 나머지가 [math(1)]이 된다.
[math(p)]가 소수(약수가 [math(1)]과 자기 자신)일 때, [math(a^p-a)]는 [math(p)]로 나누어떨어지는데 이는 같은 식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페르마의 소정리는 오일러의 정리의 특수한 경우로서, RSA 공개 키 암호 방식은 이 페르마의 소정리에 수학적 기초를 두고 개발되었다. 참고로 오일러의 정리는 오일러의 공식과는 다른 것이다. 참조: 오일러의 정리 한국어판 위키백과

3.3. 페르마 소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페르마 소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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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F_n=2^{2^n}+1)] 꼴의 수가 모두 소수일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처음 5개까지만 소수인 것으로 확인 되었으며, 이보다 큰 소수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런 꼴의 소수가 더 있는지 없는지는 증명되어 있지 않다.

4. 3세기씩이나 풀리지 않은 난제를 남기다

페르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리스메티카'의 여백에 훗날 페르마의 대정리(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8]로 알려진 정리를 쓰며 끝줄에 "이 문제의 증명 과정은 전부 알고 있는데 페이지가 너무 짧아서 더 이상 안 쓴다" 라고 써놓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떡밥/낚시글 중 하나이다. 구체적으로는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놀라운 증명을 알고 있으나 여백이 부족하여 여기에 적지 않는다." 라고 했다. 백괴사전에도 여백 부족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내용은 이렇다. (원문은 해당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math(3)] 이상의 정수 [math(n)]에 대해 [math(x^n+y^n=z^n)] 이 성립하는 [math(x,y,z)]가 모두 [math(0)]이 아닌 정수쌍 [math((x,y,z))]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구는 그대로 357년 동안 전 세계의 모든 수학자들에게 최종 보스로 군림했다.

그 후 그가 남긴 정리가 착착 증명되었지만, 마지막까지 페르마의 대정리는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는지,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준다는 상금도 걸렸고, 이 문제를 풀다가 자살하거나 돌아버리는 사람도 속출했으며, 그 반대로 이 문제 풀다가 자살 타이밍을 놓쳐 죽다 살아난 사람도 있었다[9]. 그리고 이 문제에 도전한 수학자 전원이 고배를 들었고, 이 문제에 호되게 데어 손도 대지 않는 수학자 시간이 너무 걸려서 손을 대지 않겠다는 수학자도 속출했으며, 이윽고 페르마를 비난하는 수학자들 역시 등장했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357년 동안 노력한 끝에 1995년에야,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가 해법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페르마 사후에 이루어진, 수학적 발전이 누적된 성과들 덕에 겨우겨우 풀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페르마가 본래 생각한 정리는 한정된 상황에서만 가능한 정리였을 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허나 현대 기술로만 가능하다고 여긴 많은 유물이 실은 간단한 도구로도 만들 수 있다고 입증된 경우도 있고, 우리가 생각 못 하는 의외의 방법을 페르마가 발견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10] 게다가 페르마가 '입증했다.'라고 스스로 명기한 증명의 경우, 전부 다 후세의 수학자들에게도 실제로 증명 가능함이 확인되었다. 물론 그가 낸 문제 중에 틀린 것도 있기는 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페르마 본인도 입증했다고 단언하지 않고 '증명할 수 있다고 예상된다'고 적은 종류의 문제뿐이었다고 한다.

페르마의 정리를 극복해 낸 와일스의 증명은 문고판 도서 한 권 분량이다. 만약 페르마의 증명과 와일스의 증명이 동일하다면, 도저히 책 페이지 구석에 적을 만한 양이 아니다. 사이먼 싱이 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책을 보면 100쪽이 넘는다고 나와있다.


[1] 1601년생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2007년에 실제 생년이 밝혀졌다. 세례 명부에 적혀 있던 1601년생의 인물은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의 이복형인 피에르(Piere)였다고 한다. # [2] 그러나 페르마가 잘했다기보다는 건강했던 탓이다. 왜냐하면 흑사병으로 고위직이 다 죽었기 때문에, 말단 법률가였던 페르마는 빠르게 고위직까지 오른 것이다. [3] 페르마가 수학에 입문한 계기가 된 책이다. [4] 후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던 오일러는 너무나도 문제가 안 풀려서 페르마의 후손이 가지고있던 이 책의 원본을 살펴본 다음 [math(n=4)]일 경우의 증명을 발견했고 오일러는 그 증명의 핵심을 [math(n=3)]일 때에 적용했다. 그리고 이때 복소수가 사용됐기 때문에 복소수가 받아들여진 이유 중 하나가 됐다. [5] 사실 [math(h)]가 매우 작으면 [math(f)]가 정칙(holomorphic)이라는 가정하에 모든 [math(x)]값에서 이 식이 성립한다. 도중에 [math(h)]로 나누는 바람에 특정한 [math(x)]값이 정해지는 것. 페르마가 이것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으로 알아낸 건지는 불분명하다. 왜냐면 페르마 시절엔 요즘에 정의하는 ' 연속함수'라는 개념이 잡혀 있지 않았고, 연속임에도 미분이 되지 않는 함수가 있는 것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6] [math(a)]는 상수. 당시에는 이런 기호를 쓰지 않았다. 페르마 시절에는 변수는 모음(vowel)으로, 상수는 자음(consonant)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7] 페르마의 대정리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8] Fermat's Last Theorem로 불려지며 줄여서 [math({\rm FLT})]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특정한 수에 대한 경우에는 지수가 [math(n)]일때 [math({\rm FLT}(n))] 이라고도 쓰인다. [9] 볼프스켈 상의 볼프스켈이다. [10] 와일스 이전에도 이 정리를 증명했다고 주장한 사람은 많았다. 그중에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엉터리 말고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수학자들도 많았고, 그럴싸한 증명들도 많았다. 그리고 사실 단계적으로 수학의 다른 증명들을 쌓아올렸다. 이는 와일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아직도 페르마의 진정한 증명이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려는 사람들도 많았고, 실제로 김민형 교수가 위상수학적 시각으로 접근해서 놀라운 업적을 세웠다. 그래도 페르마는 혼자 풀었기 때문에 뭔가 매우 놀라운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실제로도 계속 도전하니까 새로운 실마리가 계속 나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