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00:58:20

Europe(밴드)

파일:Document_Protect.svg   편집 보호된 문서입니다.
문서의
ACL 탭
을 확인하세요.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0; border-radius:5px;"


{{{-2 {{{#!folding [ 전 멤버 ]

{{{#!wiki style="margin: 0 -5px -0px;
{{{#424560 {{{#!folding [ Studio Albums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ablewidth=100%>
Europe
1983
Wings of Tomorrow
1984
The Final Countdown
1986
Out of This World
1988
Prisoners in Paradise
1991
Start from the Dark
2004
Secret Society
2006
Last Look at Eden
2009
Bag of Bones
2012
War of Kings
2015
Walk the Earth
2017
}}}}}}}}}}}}}}}}}} ||
파일:유럽로고.png
파일:Europe-Members.webp
▲왼쪽부터 존 레븐, 믹 미카엘리, 조이 템페스트, 존 노럼, 이안 하우글랜드
결성 1979년[1]

[[스웨덴|]][[틀:국기|]][[틀:국기|]] 스톡홀름 우플란스 베스뷔(Upplands Väsby)
멤버 조이 템페스트 (메인 보컬)
존 노럼 (리드 기타리스트)[2]
존 레븐 (베이시스트)
믹 미카엘리 (키보디스트)
이안 하우글랜드 (드러머)
전 멤버
[ 펼치기 · 접기 ]
페테르 올손 (베이시스트)
토니 리노 (드러머)
마르셀 야콥 (베이시스트)
키 마르셀로 (기타리스트)
장르 하드 록, 글램 메탈, 블루스 록, 헤비 메탈
활동 1979년 ~ 1992년
1999년[3]
2003년 ~ 현재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
2.1. 초창기2.2. 전성기, 그리고 존 노럼의 탈퇴2.3. 밴드의 침체기
3. 디스코그래피

[clearfix]

1. 개요

파일:europewithkee1988.jpg
전성기 시절의 모습[4]

스웨덴 출신의 5인조 하드 록 밴드. ABBA의 인기를 잇는 스웨덴의 대표격인 밴드이다. 대표곡으로는 웅장하고 익숙한 인트로로 스포츠 경기나 행사에서 자주 쓰이는 The Final Countdown과 애절한 발라드인 Carrie가 있다.



2024년 현재도 여전히 초창기의 라인업 그대로 활발하게 활동중이며 40주년 투어를 돌고있는 장수 밴드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개봉과 새 앨범 출시를 곧 앞두고 있다.

2. 역사

2.1. 초창기

유럽의 역사는 1978년 베이시스트 얀 에릭 백스트룀[5],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인 존 노럼, 기타리스트 미케 클링, 드러머 토니 리노가 주축이 된 밴드 WC에서 출발한다.

1979년, 존 노럼과 록샌(Roxanne)[6]이라는 밴드에서 베이스 보컬을 맡고 있던 조이 템페스트는 서로의 공연을 보고 크게 감명받아 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고 어느날 존 노럼이 조이 템페스트에게 WC에 들어와 달라고 요청해 조이 템페스트는 WC의 보컬을 맡게 된다. 조이 템페스트의 영입 후 WC는 UFO의 앨범 Force It의 이름을 따서 팀명을 Force로 변경했다. [7]

1981년, 페테르 올손은 여자친구 문제로 조이 템페스트와 다투다 밴드를 탈퇴했다. 공석이 된 베이시스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비오는 날 저녁, 존 노럼은 당시 기타리스트였던 절친 존 레븐을 찾아가 베이스로 밴드에 들어와 달라고 요청했고 존 레븐은 흔쾌히 승낙한다. 81년 4월, 존 레븐은 잉베이 말름스틴의 밴드인 라이징 포스의 베이시스트 마르셀 야콥과 멤버 맞교환을 했으나 3개월만에 두 사람은 제 위치로 돌아가게 된다.[8]

1982년, 후에 유럽의 매니저가 되는 토마스 에르트만이 자신의 레코드 레이블인 핫 레코드를 홍보하기 위해 Rock-SM 이라는 대회를 개최하고 1등 상품으로 음반 계약을 내걸었다. 유럽은 그 대회에 전혀 나갈 생각이 없었으나 당시 조이의 여자친구였던 아니타[9]가 몰래 밴드의 데모 테이프를 주최측에 보냈고 예선을 통과해 참여한 4천개의 밴드들 중 485개의 밴드에 들게 되었다. 이들은 결국 우승을 거머쥐고 최고의 기타리스트 상과 최고의 보컬리스트 상 또한 수상하게 된다.[10]
또한 그들은 여기서 밴드 이름을 한번 더 바꾸었는데 이제부터가 우리가 아는 유럽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이유는 잉베이의 밴드 라이징 포스와 이름이 겹쳤기 때문인데 이 이름 역시 조이 템페스트가 지은 이름으로 당시 그들이 좋아했던 딥 퍼플의 라이브 앨범 made in europe에서 따왔다고 한다. [11] 유럽은 Rock-SM 우승의 결과로 1집인 셀프 타이틀 앨범 Europe을 녹음했다.

1983년 3월, 1집은 발매 직후 앨범 차트 8위에 오르며 2주만에 3만장을 팔았다. 100,000크로나의 예산을 가지고 녹음한 저예산 앨범이였기에 비슷한 규모인 타 밴드들의 데뷔앨범들과 비교해보면 조악한 음질이 아쉬우나 작은 스웨덴 밴드의 첫 시작으로는 매우 좋은 실적이였으며 지금까지 전세계에선 총 100만장이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앨범은 유명 저널리스트인 이토 마사노라에 의해 일본에서도 소개되어 싱글 Seven Doors Hotel이 Top 10 히트를 찍는 기염을 보여주었다. 유럽은 1집의 성공으로 바로 새 앨범 Wings of Tomorrow 제작에 들어갔고 400,000크로나의 예산을 가지고 ABBA의 스튜디오인 폴라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했다.

1984년, Wings of Tomorrow가 발매되었고 1집보다 훨씬 개선된 음질을 보여주었다. 1집때와는 다르게 뮤직 비디오를 찍지 않았으나 발매 직후 3만 8천장을 팔았다. Open Your Heart 싱글은 스웨덴 라디오 차트 2위에 올랐으며 이때부터 미국 음반사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들은 앨범 투어를 돌며 키보디스트의 필요를 느끼고 유니버스라는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일한 키보디스트 믹 미카엘리를 임시 영입했다가 정식 멤버로 영입했다. 기존 드러머 토니 리노는 불성실한 태도를 이유로 해고됐고 새 드러머 이안 하우글랜드를 영입하며 현재의 클래식 유럽 라인업을 완성했다.[12]

2.2. 전성기, 그리고 존 노럼의 탈퇴

1985년, 유럽은 Rock the Night과 Seven Doors Hotel 싱글 작업에 들어간다. [13] 그러는 동안 매니저인 토마스 에르트만이 에픽 레코드와 계약을 따냈고 100장이 넘는 계약서를 들고 와 멤버들에게 서명하도록 했다.[14]

그 후, 스웨덴 노동조합 연맹에서 'On the Loose' 라는 영화를 기획하고 유럽에게 사운드 트랙 작업과 출연을 맡겼고 Rock the Night 과 On the Loose 싱글 두장은 같이 발매되어 두달만에 9만장을 판매하게 된다.[15]

유럽은 이제 본격적으로 유럽에게 축복이자 저주와 같았던 3집 The Final Countdown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활동들로 세계 시장에 진출할 발판인 인지도와 예산을 모두 쌓아둔 그들은 세계적인 프로듀서를 찾기 시작했고 저니의 프로듀서 케빈 엘슨을 섭외했다. 총 100만 크로나의 예산을 가진 그들은 케빈 엘슨의 제안대로 스위스 취리히의 파워플레이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는데, 조이 템페스트의 성대에 크게 문제가 생겼고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와 알러지 때문에 요양을 위해 다시 스톡홀름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더 많은 녹음 비용이 들었지만 에픽 레코드 관계자는 더 파이널 카운트다운을 듣고는 예산을 흔쾌히 2배로 늘려주었다. 그렇게 요양원에서 휴식을 취한 뒤 보컬 트레이닝까지 마친 조이 템페스트는 최고의 목 상태로 3집의 녹음을 마치게 된다.

이러한 힘든 녹음 과정을 거쳤음에도 3집은 발매와 투어조차 순탄치 못했는데 앨범 커버 아트가 너무 늦게 완성되어 발매일이 미뤄졌고 유럽은 앨범 없이 스웨덴 투어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1회 공연마다 상당한 비용이 들었는데 앨범을 들어보지도 못한 관객들이 해당 앨범의 투어에 그렇게 많이 참석할 리 없었고 모두가 유럽은 빚더미에 앉고 끝날 것이라는 혹평을 내렸다. 하지만 3집의 발표 후, 그것은 모두 엄청난 호평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The Final Countdown은 스웨덴에서 선주문량 5만 장, 두달만에 10만장을 판매하며 골드 레코드를 받게 되었다. 뮤비 또한 MTV에서 히트를 치며 유럽은 이대로 초대박이 나는 듯 싶었지만 일본 투어 도중 존 노럼이 급작스럽게 탈퇴 선언을 하게 된다.

이유는 유럽의 키보드 중심적 팝 사운드와 수많은 인터뷰와 사진 촬영, 매니저 토마스 에르트만과의 갈등이였다. 탈퇴 선언 이후의 밴드의 분위기는 얼음장 같았는데 조이 템페스트와 존 노럼은 서로 대화조차 하지 않고 매니저를 통해 말을 전달하는 수준까지 갔다. 결국 존 노럼은 계약된 투어까지는 그대로 진행하기로 밴드와 합의했고 유럽은 바로 그의 새 후임으로 이지액션에서 활동하던 키 마르셀로를 섭외하고자 그에게 연락을 취했다. 처음 연락을 받은 키 마르셀로는 거절했으나 포기하지 않은 토마스 에르트만은 키 마르셀로의 친구를 설득했고 10월 14일, 유럽과 존 노럼의 마지막 라이브가 끝난 직후 키 마르셀로는 토마스 에르트만에게 전화하여 합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87년, 키 마르셀로와의 첫 투어가 시작되었고 25개국 차트 1위를 한 그들은 전용기를 타고 미국의 23개 주를 돌아다니며 투어를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서의 히트곡은 '더 파이널 카운트다운'이 아닌 '캐리'였다. (각각 8위, 3위) 60주 이상 차트에 머물렀고 앨범 100만 장, 싱글 800만 장의 기록을 세워 유럽은 미국에서 플래티넘 레코드를 받게 된다.

5월 17일, 말이 많았던 투어가 필라델피아에서 끝나게 됐다. 멤버들은 세무사의 조언으로 모두 스웨덴의 어마무시한 세금을 피해 바하마로 이주했고 최종적으로는 서인도의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로 가서 살게 된다.

더 파이널 카운트다운의 히트로 어마무시한 인기를 얻은 유럽은 CBS 레코드에서 마이클 잭슨에 이어 최우선 순위를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전작의 히트로 대부분의 곡 작곡가였던 조이 템페스트가 심한 압박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였을 것이다.

2.3. 밴드의 침체기

1988년 3월, 유럽은 런던으로 가서 네 번째 앨범인 "Out of This World" 작업을 시작했다, 프로듀서로는 키스, 레드 제플린 등의 유명 밴드들의 앨범을 프로듀싱한 론 네비슨을 섭외하였으나 밴드는 론 네비슨이 내놓은 결과물에 만족하진 못했다. 사운드에 대한 너무 많은 간섭과 그의 프로듀싱 방법 때문에 데모 테이프에 있던 거칠었던 사운드가 더 팝적으로 부드러워져버렸기 때문이다.

3. 디스코그래피

  • 1집 Europe (1983.03.14)
  • 2집 Wings of Tomorrow (1984.02.24)
  • On The Loose EP (1985.04)
  • 3집 The Final Countdown (1986.05.26)
  • 4집 Out of This World (1988.08.09)
  • 5집 Prisoners In Paradise (1991.09.23)
  • 6집 Start from the Dark (2004.09.22)
  • 7집 Secret Society (2006.10.25)
  • 8집 Last Look at Eden (2009.09.09)
  • 9집 Bag of Bones (2012.04.18)
  • 10집 War of Kings (2015.03.02)
  • 11집 Walk the Earth (2017.10.20)


[1] 이때는 WC였으나 보컬 조이 템페스트를 영입하며 포스(Force)로 이름을 바꿨고 1982년까지 이 이름을 썼다. [2] 리드 기타리스트가 키 마르셀로에서 존 노럼으로 다시 바뀌었다. 존 노럼은 유럽의 창단 멤버이지만 1986년 10월 소속밴드인 유럽의 매니저와 갈등을 겪고 밴드의 방향성 때문에 탈퇴한 바 있고, 키 마르셀로는 그를 대신하는 기타리스트였다. 2003년 유럽이 재결성할 때 17년만에 재합류했다. [3] 99년에서 00년대로 넘어갈 때 스웨덴에서 밀레니엄 라이브를 하며 단 하루동안 재결합하였다. 두명의 기타리스트가 동시에 공연한 유일한 유럽 라이브이다. [4] 키 마르셀로 재직 시절의 사진이다. [5] 곧 페테르 올손으로 바뀌게 된다 [6] 조이 템페스트는 이를 록산느 라고 불렀다. [7] WC는 화장실이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겠다고 계속 우기다 티비쇼 출연도 거절당했기 때문에 이는 좋은 결정이였다. [8] 마르셀은 존 노럼이 리허설에 자주 불참했기에 트러블이 있었고 존 레븐은 잉베이 말름스틴을 인격적으로 싫어하게 된 것이 이유였다. [9] 페테르 올손의 전 여자친구로 페테르와 조이가 싸운 이유이기도 하다. [10] 미래에 유럽 드러머가 되는 이안 하우글랜드 또한 이 경연에 참가했었고 조이 템페스트를 보며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놈 같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11] 무조건적인 반대에 가로막힐것 같아 두려웠던 조이 템페스트는 우선 멤버들에게 술을 잔뜩 마시게 하고는 이 이름을 발표했다. 처음엔 조이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결사 반대한 멤버들이지만 새벽이 되고 술이 계속 들어가면서 '나쁘지 않네' 로 의견이 변했다고 한다. [12] 토마스 에르트만이 토니 리노에게 밴드 몰래 무통보 해고 편지를 보냈고 망연자실한 토니 리노는 오랜 친구였던 존 노럼에게 전화하여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13] 1집에 있었던 모든 노래를 재녹음하려고 했으나 예산 문제로 취소되었다. [14] 방대한 문서의 양으로 멤버들은 내용을 다 읽지도 못하고 서명했다. 당시 레코드 산업을 생각하면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불보듯 뻔한 일.. [15] 영화는 30분 가량의 짧은 저예산 영화였지만 스웨덴 전역의 학교와 클럽 등지에서 상영됐으며 '당시에는'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존 노럼과 존 레븐은 최근 이 영화를 다시 회자하며 세계 역사상 최악의 영화라고 인정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