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 리보르노 1915 | |
US Livorno 1915 | |
<colbgcolor=#7a0136><colcolor=#da9a29> 정식 명칭 | Unione Sportiva Livorno 1915 |
별칭 | Amaranto (다크 레드) |
창단 | 1915년 2월 17일 ([age(1915-02-17)]주년) |
소속 리그 | 이탈리아 세리에 D[1] |
연고지 | 토스카나 주 리보르노 (Livorno) |
홈구장 |
스타디오 아르만도 피키 (Stadio Armando Picchi) (14,267명 수용) |
회장 | 파올로 토카폰디 (Paolo Toccafondi) |
감독 | 니콜로 파스칼리 (Niccolò Pascali) |
공식 웹사이트 | |
우승 기록 | |
세리에 B (2회) |
1932-33, 1936-37 |
세리에 C (3회) |
1963-64, 2001-02, 20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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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리보르노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2. 역사
2.1. 초창기
1915년 창단되었다.1919-20 시즌 이탈리아 축구 챔피언십에서 결승에 올랐으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 져서 준우승했고, 이듬해에는 준결승에서 지역 라이벌인 피사에 패배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1933년 현재의 경기장으로 옮겼고 원래의 명칭은 베니토 무솔리니 총통의 딸인 에다 치아노 무솔리니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리보르노는 세리에 A 원년 멤버이기도 한데 세리에 A에서 1929-31, 1933-35, 1937-39 시즌에 머물렀다. 그리고 1940년에 다시 세리에 A로 승격한 뒤 1942-43 시즌에는 최고성적인 2위를 기록했다. 당시 우승팀은 토리노 FC였다. 그러나 이후 7시즌을 더 머무르다가 1949년에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 1949년을 끝으로 리보르노는 55년 동안 기나긴 하부리그 세월을 보냈다.
2.2. 기나긴 하부리그 생활
1951-52 시즌을 마치고는 세리에 C로 추락하는 수모를 맞는다. 1955년에 세리에 B로 올라왔으나 한 시즌 만인 1956년에 다시 세리에 C로 강등되었다. 8년 뒤인 1964년에 세리에 B로 올라왔으나 다시 8년 뒤인 1972년에 세리에 C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1982-83 시즌은 역사상 최초로 4부리그인 세리에 C2로 강등되었다. 1년 만에 세리에 C로 돌아와 1989년까지 있었으나 1991년 파산하면서 팀이 해체되었다. 이후 두 번의 연속 승격으로 리보르노는 세리에 C2로 올라왔고 1997년에는 3부리그인 세리에 C1으로 승격했다. 1999년에 알도 스피넬리에게 인수되었다. 그리고 2001년에는 29년 만에 2부리그인 세리에 B로 승격하는데 성공했다.그리고 2003-04 시즌 세리에 B에서 3위로 마쳤고 마침 이때 세리에 A가 18팀에서 20팀으로 참가팀 수가 확대되면서 리보르노는 그 수혜를 입어 다이렉트 승격에 성공, 1949년 이후 무려 55년 만에 세리에 A에 복귀하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2.3. 55년 만에 세리에 A에 복귀하다
2004-05 시즌 55년 만에 세리에 A에 돌아온 리보르노는 당연히 강등 유력후보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개막전부터 디펜딩 챔피언 AC 밀란을 상대로 산 시로 원정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6라운드까지 2무 4패로 부침을 겪으며 혹독한 1부리그를 보내다가 7라운드 볼로냐를 상대로 홈에서 1-0 승리를 거두며 세리에 A 복귀승을 거두었다. 리보르노는 24골로 득점왕에 오른 크리스티아노 루카렐리의 놀라운 활약 속에 55년 만에 복귀한 세리에 A에서 9위라는 놀라운 선전을 했다. 디펜딩 챔피언이자 세계 최강팀으로 꼽히던 AC 밀란을 상대로 홈에서는 1-0 승리를 거두며 밀란에게만 1승 1무를 기록했다.2005-06 시즌에는 전반기 6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로베르토 도나도니가 돌연 사임을 발표하면서 알도 스피넬리 구단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도나도니의 빈 자리는 베테랑 카를로 마초네가 맡게 되었으나 7연패 등으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칼초폴리 스캔들의 수혜를 입어 UEFA컵 진출권을 따냈다. 클럽 역사상 첫 유럽대항전 진출. 마초네 감독은 시즌 후 사임하고 아리고니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6-07 시즌 UEFA컵 1라운드에서 오스트리아의 ASKÖ 파싱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조별리그에 진출했다. 조별리그에서는 레인저스 FC와 AJ 오세르, FK 파르티잔, 마카비 하이파를 상대했다. 리보르노는 홈에서 레인저스에 2-3 패배를 당했고 파르티잔 원정에서 1-1 무승부[2] 후 마카비 하이파에 홈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리고 오세르와의 최종전 원정경기에서 1-0 승리를 거두면서 극적으로 32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RCD 에스파뇰에 1,2차전 합계 4-1로 밀려 클럽 역사상 첫 번째 유럽대항전 여정을 여기서 마무리했다.
리그에서는 전반기를 마치고 아리고니 감독은 경질을 당했으나 선수단의 강력한 반대로 철회되었다가 결국 3월 21일에 경질되어 페르난도 오르시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리보르노는 강등 경쟁에서 살아남으며 4시즌째 세리에 A에 잔류하게 되었다.
2007-08 시즌을 앞두고 프란체스코 타바노, 디에고 트리스탄, 비카쉬 도라수를 영입했으나 클럽의 간판스타 크리스티아노 루카렐리가 우크라이나의 샤흐타르 도네츠크로 이적하는 악재를 맞았다. 개막전부터 세리에 A로 1년 만에 복귀한 유벤투스에 5-1 대패를 당하며 복귀승의 희생양이 되었고 7라운드까지 승점 2점에 그치자 오르시 감독은 경질되었다. 새 감독은 잔카를로 카몰레제. 감독 부임 후 초반에는 효과가 있었으나 다시 부진에 빠졌고 2008년 4월 28일 카몰레제는 경질. 오르시가 감독으로 재부임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늦은 시점으로 결국 리보르노는 최하위로 4년 만에 세리에 B 강등을 당했다.
2.4. 승격과 강등을 반복했던 시기
2008-09 시즌 5시즌 만에 세리에 B로 내려간 리보르노는 3위로 시즌을 마쳤고 플레이오프 끝에 그로세토와 브레시아를 꺾고 한 시즌 만에 세리에 A로 되돌아왔다.2009/10 시즌에 20위 꼴찌로 강등당해 1년 만에 2부 리그인 세리에 B로 내려왔다. 그리고 11/12 시즌은 리그 18위로 자칫하면 3부 리그로 강등 당할 상황에 처했다. 아직 4경기가 남아있긴 하지만 3부 리그 강등권인 20위(2~4부리그는 22개 구단으로 이루어져있다.)와 승점 차가 1점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 3경기에서 2승 1무를 하면서 17위로 잔류를 확정지었다. 강등 플레이 아웃을 펼치게 되었던 18위 비첸자와는 단 승점 1점차이였다.[3]
2012년 4월 14일, 팀의 미드필더이자 이탈리아 청소년 대표팀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피에르마리오 모로시니가 심장마비로 경기장에 쓰러져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4]. 볼턴 원더러스 FC의 파브리스 무암바가 경기도중 심장미비로 쓰러진 사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사건이라 축구선수들의 경기중 심장마비 사고에 대한 논란이 커치고 있다.
2012/13 시즌은 19차전까지 리그 2위를 지키고 있다.1위인 사수올로 칼치오랑 같은 42점이지만 골득에서 밀려있다. 3위인 헬라스 베로나와 7점차이자 4위인 바레세랑 13점차라서 이대로 가면 승격 가능성이 크다. 현재 42차전을 끝난 상태이며 헬라스 베로나에게 승점 2점으로 밀려 리그 3위를 했다. 플레이 오프에서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상태가 되었는데, 플레이 오프에서 엠폴리 FC를 2-1로 꺾어 세리에 A 승격에 성공했다.
2013/14 시즌 초반 3승을 하며 같은 승격팀 엘라스 베로나 FC와 함께 돌풍의 주역으로 부상했으나...이후 멸망했다. 이후 시즌 내내 고작 3승을 더 추가하는데 그치며 꼴찌로 다시 강등되었다.
2.5. 다시 시작된 기약 없는 하부리그 생활
2014-15 시즌에는 중위권으로 9위를 하였고 2015-16 시즌은 10승 12무 20패 최종순위 20위로 리가프로로 강등되었다.
17/18 시즌 세리에 C에서 A그룹 우승을 하면서 세리에 B로 복귀했다.
18/19 시즌 세리에 B에서 9승 12무 15패 승점 38점으로 14위를 했다.
19/20 시즌은 현재 4승 6무 18패 승점 18점으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강등이 유력해보인다. 감독도 5번이나 바뀌었다. 크리스티아노 루카렐리- 로베르토 브레다- 파올로 트라메차니- 로베르토 브레다- 안토니오 필리피니. 하지만, 결국 7승 13무 18패. 20위 꼴지로 3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2020-21 시즌 세리에 C 그룹 A에서 최하위를 기록하며 세리에 D로 강등될뻔 했으나, 팀을 재창단하면서 애첼렌차(5부 리그)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21/22 시즌 5부 리그에서 4부 리그로 승격에 성공하였다.
22/23 시즌 4부 리그에서 중상위 성적을 달리고 있으며 승격하려면 플레이오프를 노려야 한다.
2.6. 요약
- 1부/ 세리에 A: 1929-1931, 1933-1935, 1937-1939, 1940-1949, 2004-2008, 2009-2010, 2013-2014 (18시즌)
3. 성향
1999년에 설립된 리보르노의 울트라스는 좌파 성향이 굉장히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연고지인 리보르노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태동이 이루어진 도시이며, 지지층 자체가 사회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 것도 리보르노에서 열린 이탈리아 사회당 전당대회가 계기가 되었다.
리보르노 출신이자 이 클럽에서 4개 시즌을 뛰며 146경기에 출전해 92골을 넣으며 클럽을 세리에 A로 승격시키고 득점왕도 먹었던 크리스티아노 루카렐리가 "우리 리보르노는 심판으로부터 불리한 판정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공산주의자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5]
때문에 우파 성향이 강한, 같은 리그의 SS 라치오를 증오하며, 그 밖에 우파 성향을 가지고 있는 클럽들과도 대체로 사이가 나쁘다. 그러나 (나쁜쪽으로) 우파의 정점을 찍고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구단주로 있었던 AC 밀란과의 사이는 그저 그랬다. 베를루스코니가 우익 정치인인거지 AC 밀란 팬덤이 파시스트인게 아니기 때문이고, SS 라치오와 비교해 보면 이건 중요한 차이다(...). 2020년대에는 AC 밀란은 미국 헤지펀드 소유가 되어버렸지만.
여담으로 원래 쓰던 홈구장 이름이 베니토 무솔리니의 장녀의 이름인 '에다 치아노 무솔리니'로 바뀌자 1933년에 지금 쓰는 구장으로 옮겨왔다.
해외의 좌파 성향이 강한 클럽들인 셀틱 FC, AC 오모니아, 스탕다르 리에주, 하포엘 텔아비브, FC 장크트파울리, AEK 아테네등과 친분이 있다.
[1]
이탈리아의 4부 리그로 세미프로이다.
[2]
마르코 아멜리아 골키퍼가 후반 42분에 득점에 성공했다.
[3]
그리고
파올로 로시,
로베르토,
마시모 암브로시니,
루카 토니 등이 뛰었던 비첸자는 엠폴리와의 경기에서 패하면서 3부 리그인 세리에 C로 강등당할 뻔했으나, 3부 리그 강등 징계를 받는 팀이 있어(US 레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4]
우디네세로부터 임대된 선수였으며, 그에게 장애인인 여동생 하나가 있는데, 모로시니가 죽자 그 여동생을 현재
안토니오 디 나탈레가 돌보고 있다고 한다.
[5]
루카렐리 본인도 열렬한 공산주의자다. 덕분인지
루카 토니에 버금가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루카렐리는
국대에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했다. 물론 루카렐리 스스로가 벌인 막장적인 멘탈도 한몫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