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08:57:32

18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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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56 United States presidental election
파일:ElectoralCollege1856.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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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colcolor=#003585> 선거 일시 1856년 11월 4일
선거인단 296명
투표율 79.4%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미국)|
민주당
]]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
부통령 존 C. 브레킨리지
[[공화당(미국)|
공화당
]]
대통령 존 C. 프리몬트
부통령 윌리엄 L. 데이턴
[[무지당|
무지당
]]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
부통령 앤드루 잭슨 도널슨
득표
1,836,072
45.3%
1,342,345
33.1%
873,053
21.5%
{{{#!wiki style="margin: -16px -11px" <rowcolor=#fff>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
파일:1856DemocraticPoster.jpg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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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개요2. 선거 과정3. 선거 결과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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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56년 치러진 미국의 18번째 대통령 선거. 주요 이슈는 노예제였다. 공화당 창당 후 첫 번째로 치른 대선이다.

2. 선거 과정

당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노예제 문제, 그 중에서도 캔자스 준주의 노예제 허용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1854년 스티븐 A. 더글러스가 주도하여 통과시킨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은 캔자스의 노예제 문제를 준주 주민의 투표로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캔자스는 루이지애나 매입 영토에 속했고 미주리 협정의 북위 36도 30분선 이북에 있었기 때문에 원래라면 노예제를 허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글러스는 지역구 일리노이, 시카고의 숙원사업인 대륙횡단열차를 위해 남부 민주당과 손잡고 법안을 통과시켰다. 북부인들은 이에 반발했고, 투표에서 승리하기 위해 캔자스 준주로 남부(주로 미주리) 출신 노예주들과 존 브라운 등 북부 노예제 반대 운동가들이 동시에 집결, 유혈충돌하여 대혼란이 발생했다. 더글러스와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이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여당 민주당은 주영대사로 해외에 나가 있던 제임스 뷰캐넌을 후보로 선출하여 후폭풍을 피하고자 했다.

한편, 민주당과 함께 양대정당이었던 휘그당은 1854년 중간선거에서 치명타를 입고 상당 세력을 신생 공화당과 반이민주의 무지당에 빼앗겼다. 공화당은 남부에 지역 기반이 거의 없었기에 선거에서 이기는 것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윌리엄 H. 수어드, 살몬 체이스 등 유력 후보들은 1860년의 다음 대선 쪽이 더 승산이 높을 것으로 보고 스스로 후보에서 사퇴했다. 그 결과 서부 개척자로서 신선한 이미지를 가진 존 C. 프리몬트가 압도적인 차이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한편, 무지당은 세력은 컸지만 대선주자급 정치인이 별로 없었고, 무지당에 입당한 휘그당 출신 인물들이 주도하여 밀러드 필모어 전 대통령을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휘그당 잔존 세력은 따로 전당대회를 열었지만 단독 후보를 내세우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무지당의 필모어를 후보로 선출하여 독립된 정당으로서의 힘을 거의 상실했다. 필모어는 무지당 소속이긴 했지만 반이민 정책보다는 국가의 화합을 강조하는 선거운동을 펼쳤다.

필모어의 노예제 유화적인 태도에 불만을 가진 북부 무지당 세력은 필모어를 거부하고 너새니얼 P. 뱅크스 전 하원의장을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뱅크스는 자신이 대선 후보로 나서는 대신 공화당 후보 프리몬트를 지지했고, 북부 무지당원들은 프리몬트에게도 불만이 있었지만 대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를 지지했다.

3. 선거 결과

옛 휘그당 지지 세력이 분열된 가운데 민주당의 뷰캐넌이 무난하게 승리하여 대통령직을 가져갔다. 뷰캐넌은 필모어가 가져간 메릴랜드를 제외한 남부 전역과 펜실베이니아, 인디애나, 일리노이 등 몇몇 중요한 중북부 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프리몬트는 뉴잉글랜드 뉴욕주를 석권했지만 중북부 지역에서 뷰캐넌에게 밀리며 당시 공화당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4. 여담

  • 민주당이 뉴잉글랜드에서 모든 주를 잃었음에도 승리한 유일한 선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