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의 성문 및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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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1호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서울 흥인지문 서울 興仁之門 | Heunginjimun Gate,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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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8 (종로6가)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
시설 | 1동 |
건축시기 |
조선 시대,
1396년 재건 1453년, 1869년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관리 |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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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흥인지문[1] | |
흥인지문 변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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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1904년 흥인지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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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의 흥인지문[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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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의 흥인지문. 앞에 노면전차가 지나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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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흥인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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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8( 종로6가 69)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문으로, 서울 한양도성의 동문이며,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불린다. 한양도성 사대문(四大門) 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조선시대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로[3][4], 대한민국의 보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2. 역사
1396년( 조선 태조 5년)에 처음 지었으며[5], 이후 단종 1년(1453) 중수를 거쳐, 고종 6년(1869)에 지반을 돋우고 문루를 새로 지은 것이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진다.3. 특징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인 숭례문과 다르게 흥인지문의 누각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다.또한 흥인지문은 한양도성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 그 이유는 공식 기록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나 주로 지형적 문제가 거론된다. 흥인지문이 위치한 곳은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수문 근처라 한양 내에서도 가장 낮고 평평한 곳이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볼 때 가장 취약한 곳이라 옹성 등 방어 시설을 최우선적으로 갖춰야 했으며, 특히 고려 ~ 조선 전기에 크게 유행했던 비보풍수(裨補風水) 차원에서도 흥인지문은 경복궁에서 볼 때 좌청룡으로 동쪽에 있는데, 경복궁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 현무봉인 북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하기 때문에 한양은 동쪽이 약해 동쪽 방향에 있는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아 유일하게 옹성을 쌓았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침입에 취약하다고 해석하는 점은 같다. 영조 대에 이르러선 결국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4 ~ 6개의 치성(雉城)을 추가로 쌓았다.[6] 실제 구한말 ~ 일제시대의 사진과 지도에서 확인된 것은 5개이다.[7] 치성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건설하면서 1개소가 재현되었다.
동문에만 옹성을 쌓은 것은 조정에서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대신이 많아 주기적으로(주로 명종, 선조 대에) 다른 문에도 옹성을 쌓자는 논쟁이 일어났다.[8] 반대측에서는 주로 도성은 방어용 성곽이 아닌 점, 민가가 이미 옹성 부지를 많이 침입하여 허물어야 한다는 점, 국고가 넉넉하지 않다는 점 등을 지적하여 이 주장이 실현된 적은 없다.
또한, 대문과 소문을 막론하고 서울 한양도성에 존재하는 다른 문의 명칭은 세 글자로 되어있지만( 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혜화문, 광희문 등) 흥인지문만 유일하게 네 글자와 정사각형 현판으로 되어있다. 이 역시 한양 비보풍수의 하나로, 한양 동쪽 다른 삼면에 비해 물이 흘러나가므로 전체적으로 토대가 우묵하게 낮아 지기가 약하다는 이유로 그 기운을 북돋는다는 의미에서 이름에다 어조사 지(之)를 집어넣어 넉 자로 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之에 큰 의미는 없으며, 실록에서는 (단순 검색으로) 흥인문이란 표현이 190번, 흥인지문이 5번, 동대문이 174번 등장한다. 승정원일기에서는 흥인문이 640, 흥인지문이 445번, 동대문이 218번 등장한다. 조선시대의 정식 명칭은 흥인문이라 볼 수 있다.[9]
4. 기타
원래 흥인지문은 1943년 경성부에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7개 구인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성동구, 영등포구가 설치될 당시에도 종로구 관할[10]이었으며, 당시에는 흥인지문을 나서자마자 동대문구가 시작되었다. 이후 1975년 동대문구 관할이었던 숭인동, 창신동(흥인지문 바깥 지역) 일대가 종로구에 편입되면서 동대문 밖도 종로구가 되었다. 이 때문에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11][12]숭례문과 흥인문이 국보, 보물 각각 지정번호 1번을 차지한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문화재 당국에서 숭례문을 조선 보물 1호, 흥인지문을 2호로 지정했던 데에서 그대로 내려온 것이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에도시대와 조선시대의 쌓아올린 일본과 조선의 성곽 및 문을 모두 헐어 옛 모습을 없앤 후 새로운 도시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려 했고 조선의 서울 역시 남대문은 교통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동대문과 서대문은 전차궤도 복선화를 이유로 모두 철거하려 했다.[13] 하지만 당시 일본인 거류민 대표가 남대문, 동대문은 각각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문이라며 헐지 말 것을 설득했다고 하며, 결국 서대문만 철거하고 동대문은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다. 총독 측에서는 1924년 1차 지정까지는 이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14] 이후 갑자기 남대문과 동대문의 문화재적 가치를 제고하여 1934년 일괄 문화재 지정 당시 각각 보물 1호, 2호로 지정하였다. 이는 정황상 둘이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건축물이며 특히 일본에 있어서는 개선문과 같은 기능을 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후 1962년 우리 정부에서 문화재 보호체계를 만들고 국보와 보물을 지정할 때 일본 관리체계를 벤치마킹하면서 이 지정번호는 그대로 굳어졌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문화재보호법 지정 당시 숭례문은 국보로, 흥인문은 보물로 "차등 지정"한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보통 역사적/건축사적 가치의 차이로 접근하는데, 먼저 숭례문은 건축 양식에 있어서 임진왜란 이후 거의 남지 않은 "조선 전기" 다포집을 대표하며, 여말선초는 건축사적으로 한반도에 다포 양식이 보급되는 과정에서 과도기 역할을 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흥인문은 조선 후기 중건을 거치면서 이미 다포 양식이 완전히 정착되고, 장식이 많아지며 부재가 섬약해지는 시기의 건축 양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당시 당국은 숭례문보다 가치가 한 단계 낮다고 평가한 것으로 해석한다.[15]
석축 전면부를 보면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기관총 탄흔으로 추정된다.[16]
2011년 7월 중부지방을 강타한 호우로 인해 지붕의 기왓장과 내림마루 일부가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서울 한양도성 복원의 일부로 낙산의 한양도성과 흥인지문을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복원공사를 처음 시작할 때 개신교 측과 마찰이 있었는데, 성곽 바로 앞에 있는 교회를 철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단에서는 1892년 처음 교회를 세운 이후 100여년이 지나서 근대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있으므로 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울시의 조사 결과 남아 있는 교회 건물은 1973년에 신축한 일반 건물로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철거한 후 성곽 복원 공사를 진행했다. 이 교회는 감리교 동대문교회였는데, 물론 그냥 쫓겨난 것은 아니고 수백억 원의 보상을 받았다. 이후 교회를 옮기자는 서기종 담임목사와 계속 그 인근이라도 남아야 한다며 서기종의 목사직을 인정하지 않는 신도 및 교단 간의 분쟁이 있었으나, 법원에서 서기종 목사의 손을 들어주며 일단락되었다. 이후 동대문교회는 2017년 성남시 분당구의 분당새롬교회와 통합해서 분당으로 이전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기운다는 전설이 있다. 광해군 말년에 북서쪽으로 기울었다던가, 임오군란 때 남동쪽으로 기울었다던가.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되며, 단순한 설일 뿐이다.
2018년 3월 9일,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에 의해 화재가 발생해 숭례문의 악몽이 재현될 뻔했으나, 다행히 4분 만에 조기 진화되어 담벼락이 조금 그을렸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니스로 불을 붙인 숭례문과 다르게 종이 박스에 불을 붙였기에 불이 쉽게 번지지 않았으며, 우연스럽게도 숭례문 방화범이 출소한 다음 달이다. 구속 후 초기 경찰수사 때는 교통사고 보험금을 못 받아서 저질렀다고 범행 이유를 밝혔으나, 2차 취재진이 물어봤을 때는 불을 지른 것이 아니라 불을 피웠고 동대문은 자기 구역이니 뭐니 하며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찰은 불이 옮겨붙지 않아 방화로 구속하기 어렵다고 판단, 방화미수 혐의로 구속했다.
5. 같이 보기
[1]
사진 출처 -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현재는 철거되고 없는 경성궤도 동대문역, 초대 이대동대문병원이 내려다보인다.
[3]
돈의문(서대문)은 일제강점기에 헐려 흔적마저 사라졌고,
숙정문(북대문)은 조선시대에도 원체 잘 사용되지 않았던데다 복원 전에는 수풀 속에서 방치되고 있었으며 문루(門樓)도 없었다.
숭례문(남대문)은 2008년
방화 사건이 발생하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부실 복원 논란까지 빚어졌다.
[4]
8문을 전부 따지면 흥인문과 창의문 2개소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5]
숭례문보다도 완공시기가 빠르다.
[6]
영조 28년 11월 29일,
영조 28년 12월 3일,
영조 29년 2월 13일
[7]
김영수, 송인호, "18세기에 축조된 한양도성 치성의 형식과 위치", 건축역사연구 2021, vol.30, no.2, 통권 135호 pp. 19-28
#
[8]
세조 2년 3 28일
성종 10년 1월 17일
명종 10년 7월 30일
명종 10년 8월 12일
명종 10년 8월 13일
선조 30년 5월 27
[9]
...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태조 5년 9월 24일
[10]
종로6가 69번지, 당시 종로6정목 69
[11]
흥인지문 뿐만 아니라 인근의
동대문 패션타운(중구 소재)도 동대문구에 있다고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2]
심지어는 일부
동대문구 주민조차도 동대문이 동대문구에 있는 줄 안다. 인근 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동대문구에 산다고 하면 흔히 동대문을 떠올린다. 하지만 동대문구는
신설동역 부근부터 시작하며, 북쪽 끝인
이문동은 동대문에서 상당히 멀다.
[13]
북대문인 숙정문은 산 속에 있어서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14]
당시 보물 1호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이었다.
[15]
문화재청은 일본의 "경성에서 가까운 순"의 지정번호를 그대로 수용하였다고만 설명한 적이 있다. 두 문화재의 건축적 가치는 이처럼 잘 구분되나, 당시 지정 사유 자체는 사후적 해석일 가능성이 있다.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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