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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유물을 몰래 묻다가 찍힌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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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藤村新一1950년 5월 4일 ~ ([age(1950-05-04)]세)
일본의 아마추어 고고학자이자 사기꾼. 미야기현 카미정 태생.
2. 조작 사건
2.1. 탄로 전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고등학교 졸업 후 1972년부터 독학으로 고고학을 연구했다고 한다.그러다 1976년 미야기현 오사키시에 위치한 사사라기 유적지에서 기와 유물을 발견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수사로 밝혀진 결과에 따르면 이때부터 유물 조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본인이 직접 답사단을 꾸리기 시작한 1975년에는 이미 석기 분야의 명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981년에 사사라기 유적지에서 발견된 기와 유물이 4만 년 전에 제작된 것임을 밝혀냈다. 당시 일본에서 발견된 유물의 연대는 가장 오래된 것이 3만 년 전의 것이었기에 일본의 구석기 연대를 1만 년이나 끌어올린 후지무라의 유물 발굴에 일본 열도 전체가 흥분하였고, 이후에도 계속 오래된 유물들을 속속들이 발굴해 내어 일본의 구석기 시대의 연대를 계속 앞당겼는데, 90년대 말엽에는 70만 년 전 구석기를 발굴하여 일본의 역사 연구에서 자신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했고 교과서에 그의 발굴 결과와 업적이 실리게 되었다. 그 일로 그는 유명인사가 되어 아예 신의 손(神の手), 갓 핸드(God Hand, ゴッドハンド)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고, 토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몰락하기 한 달 전인[1] 2000년 10월에는 아사히 신문에 자신이 80만 년 전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하면서 자신의 발견을 10만 년이나 더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하는 등 영광의 절정을 실컷 누리고 있었다.
2.2. 진상이 드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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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발굴 날조” 그의 몰락을 알린 마이니치 신문 기사. |
후지무라의 낚시극이 계속 펼쳐지던 2000년, 어떤 사람이 후지무라의 조작을 눈치채고 이를 마이니치 신문에 제보하였다. 마이니치 신문은 안 그래도 이전부터 후지무라의 유물 발굴을 수상하게 여겼던 터라 당시 홋카이도 지사 보도부장이었던 사나다 카즈요시(真田和義)가 취재팀을 꾸려 조사에 착수했다. 그렇게 마이니치 촬영팀은 10월 22일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영상 촬영에 성공했으나 곧바로 보도하지는 않았다. 바로 발표했다가는 “제자들의 발굴 실습을 위한 것이었다.”라는 등의 여러가지 변명이 가능할 터였고, 만약 그랬다면 난감해지는 건 오히려 신문사 쪽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후지무라 측은 57만 년 전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때 폭로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조작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 판단한 마이니치는 11월 5일자 신문에 진실을 게재하여 그의 조작을 만천하에 공개했고, 센다이시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를 가지며 조작현장을 촬영한 영상도 보여 주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후지무라는 자신의 조작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보며 “전부 조작한 건 아니다. 마(魔)가 낀 것 같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고 전해진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유물 발굴 알고 보니 조작〉이라는 충격적인 보도를 접한 일본 열도는 패닉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정밀 조사를 해보니 후지무라 신이치가 1970년대 이후 발굴에 관여한 유적 180곳 중 162곳으로 90%에 해당하는 유적에서 조작 흔적이 발견되었다. 조작 흔적이 확실하게 발견된 것만 162곳이기 때문에 나머지 18곳에서 발굴한 유물도 흔적만 없을 뿐이지, 진짜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가짜 유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지정 해제하고 교과서에서 후지무라 관련 내용은 삭제됐다. 후지무라는 고고학계에서 영구제명되었다. 후지무라의 책 또한 출판사에서 모조리 다 거두어가고 애지중지하던 그 모든 석기 유물은 죄다 폐기 처분하거나 증거품으로 보관되는 신세가 되었다. 당연히 각계에 큰 파장이 일었다.
사실 후지무라의 발굴은 너무나도 허술했고, 초기부터 숱하게 의혹을 받아 왔다.
- 뗀석기를 만든 수법이 수십만 년 전의 것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 수십 km 간격으로 떨어진 석기들의 아귀가 너무 정확히 들어 맞는다.
- 발굴된 석기의 재질이 주변 석재와 다르다. 구석기인이라고 굳이 힘들게 멀리 있는 석재를 가져와 쓸 이유가 없으니 주변에 있는 돌을 주워 쓰기 마련이고, 따라서 대체로 석기의 재질과 주변 석재의 재질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 땅을 파면 땅 속에서 대개 젖은 흙이 나오는 법인데, 그가 발견한 석기에는 마른 흙이 붙어 있었다.
- 구석기 시대 유물에서 철로 돌을 조각할 때 생기는 철선상흔이 발견됐다. 이게 가능하려면 일본이 철기와 석기를 동시에 사용하였다는 뜻인데 말이 될 턱이 없다. 물론 철기시대라고 해서 석기, 청동기가 바로 도태되는 것이 아니므로 동시에 공존이 가능하나, 문제는 구석기 시대 유물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면 필수적으로 그 석기를 떼어낸 원래의 큰 돌인 몸돌과 석기를 가공하며 생기는 돌조각인 격지가 같이 있어야 하며, 이는 어느 유적에서나 유물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런데 후지무라가 발견한 유물에는 몸돌도 격지도 없었다.
- 구석기 시대 유물인데 고도의 문화 흔적인 제사유적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 된 제사유적인 괴베클리 테페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일본에서 제사의식을 행했다는 것인데, 당시에는 괴베클리 테페가 발견된 이후이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94년부터 이루어져서 현재와 같은 유명세를 얻기 전이었다. 심지어 이 괴베클리 테베마저 신석기 시대 초기에 생긴 것이다. 신이치는 제사유적이 70만 년 전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주장대로라면 1만 2000년 전 괴베클리 테베유적에 비해 거의 60배나 오래된거다.
- 석기가 발견된 지층이 화산쇄설류가 퇴적된 지층이었는데, 그 석기가 실제 유물이라면 구석기 시대 일본인들은 화산 폭발의 현장 한가운데에서 석기를 제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홋카이도에서 백두산 화산재를 발견하여 국제 화산학계에 최초로 보고한 마치다 히로시라는 화산학자가 해당 석기발견에 의문을 제기하였다가, 학계로부터 무시당했다. 그러다가, 조작사건 발표 이후의 그가 조사한 화산쇄설류 지층 관련 연구보고서가 재평가를 받고 있다.
- 후지무라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같은 곳을 뒤져도 유물이 안 나온다. 출토된 유물이 왕관이나 장신구 같은 특수한 물품이 아닌 이상 거의 대부분 함께 출토되는 유물이 여러 개가 나와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먹도끼와 같은 유물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가위나 칼 같은 공산품이다. 실제 구석기 유적에선 서로 다른 용도로 쓰인 가지각색의 석기들부터 일대에 살던 짐승 화석, 불을 피운 자리, 사람 유골, 뼈로 만든 도구 등 수십 수백 가지가 출토된다. 관련 전문가들로서는 하나만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게 당연하다.
- 결정적으로 해외 학자들의 공동 연구 제의를 전부 거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적으로 조사가 자유로운 해외의 유적 발굴가와 고고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조사를 시작하면 결국 들통나니까. 해외 학자들의 연구 제의를 그럴 듯한 이유로 거절하면서 조작된 유물을 파내어 또 다른 업적을 세워 권위자의 위치를 공고히 함으로써 아무런 의혹을 제기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렇듯 수상한 점이 많았으나 어쨌든 고고학 지식은 있었던 후지무라가 자신의 석기를 치밀하게 구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지표를 골라서 묻었고 유물의 특성 상 대조가 어려우므로 그의 조작은 20년 간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후지무라의 발굴이 교과서에까지 오름으로써 학계의 인정을 받자 그 업적에 의구심을 품는 것 자체가 백안시되었다. 이로 인해 후지무라의 사기극 20년 동안 의혹 제기 논문은 단 두 편만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극우 세력도 좋아라 후지무라의 유물들을 자기들의 교과서에 실었다. 점입가경으로 극우단체에서 쓴 역사책에서 후지무라가 발견한 유적을 첫머리에 내세워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연대가 앞선 문명이 일본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며 일본을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하나로 끼워넣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후지무라를 의심하면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사실 마이니치 신문이 진실을 폭로하기 전에도 일각의 양심있는 학자들이 후지무라가 발굴한 유물의 형태나 성분이 해당 지역의 것과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는데, 후지무라를 맹신한 일본 정부와 학계는 해당 학자들을 오히려 배신자로 몰아가는 짓을 국가 차원에서 저질렀다.
게다가 후지무라가 자작극을 주로 벌인 도호쿠 지방에서는 이를 지자체 돈벌이에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후지무라를 지원 사격해주어 후지무라의 입지를 든든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조작이 드러나자 같이 망신당했다.
그리하여 정작 진실이 까발려진 것은 20년 가까이 지나 2000년이 된 때였다. 학계가 국가적인 자존심 때문에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2.3. 여파
이 사람이 일으킨 조작 사건의 여파는 일본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무고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엄청난 피해를 끼쳤고 그 피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가장 대표적인 피해자는 카가와 미츠오(賀川光夫,1923~2001) 벳푸 대학 명예교수로, 1962년 오이타현 사이키시(佐伯市)에 있는 히지리다키 동굴(聖嶽洞穴)을 발굴하여 후기구석기의 석기와 뼈를 발견했고 이 소식은 교과서에도 반영되었다. 그런데 1999년 2차 조사를 하는 와중에 발견된 유골은 과학적 조사결과로는 아무리 봐도 구석기 시대 인골일 수가 없었다. 2차 조사팀은 카가와 교수가 한 1차 발굴에서 발견된 인골이나 유물도 외부에서 혼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소식을 접하고 2000년 8월에 일본 언론들은 히지리다키 동굴 유적이 실은 구석기 유적이 아닐 가능성을 보도했다. 이때 후지무라 신이치 조작사건의 열풍으로 주간문춘(週刊文春)은 카가와 교수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이 때문에 카가와 교수는 장난전화를 받고 조롱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자 억울함을 주장하여 2001년 3월 9일에 죽음으로 항의하겠다면서 자살했다.
결국, 후지무라 신이치의 악행으로 인해 최악의 상황으로 번진 일본 고고학협회가 2년간 검증에 들어갔다. 고고학협회의 결론은 딱히 카가와 교수가 조작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애당초 후지무라 신이치의 만행을 밝혀낸 마이니치 신문이 일본 4대 정론지인 것과 달리 카가와 교수에게 의혹을 제기한 주간문춘은 전형적인 황색언론이다. 또 카가와 교수가 발굴을 한 1962년은 조몬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기 이전이다. 또한 카가와 교수가 작성한 1차 발굴 당시의 보고서에서도 발굴기술이나 검증의 미흡함을 인정하고 후학의 연구를 기대한다고 문을 열어두었다. 따라서 카가와 교수가 조작했을 가능성보다는 단순한 연대착오, 또는 당시 일본 고고학계의 한계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정설이다. 게다가 이 사람은 가장 양심적인 고고학자로 평가받을 정도였으니 그런 의혹을 받는 것이 억울했을 만도 하다. 후일 유족들이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서 승소했다지만 죽은 사람이 그런다고 살아 돌아올 수는 없다. 저런 파렴치한 때문에 양심적인 사람까지 피해를 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전성기'였던 20세기 말에는 대한민국을 포함한 해외 학자들도 일본 열도가 인류 선사시대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할 정도였다. 그러나 30년에 걸친 발굴 이력이 모두 조작이었음이 밝혀지자 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어버렸고 일본의 고고학계 역시 신뢰가 바닥까지 추락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2001년 국제 고고학 회의에서 일본인 학자들은 진실성이 의심된다고 참가 거부를 당했고, 2002년에서야 참가했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 당시 말도 못 하고 죄인처럼 시무룩하게 앉아만 있었다는 당시 우리나라 학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이후에 나가노현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자 대한민국의 학자를 초빙해서 연대 측정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일본 고고학계의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진 탓에 우리나라 학자들을 통해 확실하게 인증을 받을 용도로 그런 것이다. 한일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각국이 너무나도 잘 아는 관계로, 대한민국이 이 유적의 연대를 인증하면 자연스럽게 검증이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아폴로 달 착륙 음모론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반박근거 중 하나가 바로 소련이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닐 암스트롱에게 훈장까지 수여하는 등 인정하고 칭찬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주작하다가 걸린 고고학자 하나 때문에 학계 전체에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으나 20년 동안이나 학계 전체가 신의 손이라 추앙했을 뿐만 아니라 조작을 밝혀낸 것 역시 학계가 아니라 언론사였던 만큼 당시의 일본 고고학계는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전체의 자질이 의심받아 마땅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일본 고고학 교수에 의하여 퇴출당했다면 자정작용은 했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저렇게 개쪽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인문학계는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2.4. 이후 근황
동료학자들이 갈굼을 먹고 있을 동안 후지무라는 병원에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이혼 절차를 밟았다. 해리성 장애는 이후의 일로 정확한 병명은 불명이다. 이혼 절차는 당시 주변의 비난이 심해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아내가 후지무라에게 이혼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자리보전하고 있을 때 환자로 있던 한 여성을 알게 되어 2003년에는 이 여성과 재혼했다.재혼 무렵에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판정을 받고 정신장애 3급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장애 판정이 나온 게 단지 꾀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이때 후지무라는 화훼용 작두로 오른손 중지와 검지를 절단한 상태였다. 사고였는지 자해였는지는 불분명하나 후생노동성 심사관의 눈에는 일단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후지무라는 후쿠시마현 장애인 취업센터에서 자원봉사자(NPO)로 근무하다가 2010년에 아내의 지병이 도지자 간병을 위해 자원봉사를 그만두고 연금을 신청해 후쿠시마현 동북부에 위치한 미나미소마시에서 연금을 받아 먹으며 살게 되었다. 당연히 도호쿠 대지진 당시에는 피난 생활을 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날조에 관한 기억은 기억상실로 망각했다고 한다. 영구제명당하고 손가락을 잃고 이혼을 하면서 겪었을 스트레스로 기억이 상실될 가능성이 아예 없지야 않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기억상실이 될 정도면 뇌의 구조적인 문제가 일어나기에 해당 사건만 싹 잊기는 어렵고 기억 전반에 걸쳐 문제가 생긴다. 후지무라가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니라면 기억상실보다는 트라우마성 기억부정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설사 사실이라 해도 자업자득으로 벌어진 일이니 정상참작될 사유가 못 된다.
2019년 TBS에서 한 인터뷰에선 후쿠시마현에 거주하고 있으며, 예전의 날조에 대해선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떠올려 보려고 해도 몸상태만 나빠질 뿐이라고 답했다. 영상 댓글을 보면 이 사건으로 일본의 구석기 연구는 지금도 신용을 회복하지 못하고 백지 상태의 괴멸 수준이며 교과서 내용까지 바뀌어서 입시에도 구석기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하고 있다.
2020년대에는 연락이 두절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근황은 없다.
3. 여담
- 후지무라가 유물을 조작한 계기 및 일본 열도 전체가 그의 사기극을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인 것에는 연천 전곡리 유적의 구석기 유물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발견된 구석기 유적인 동관진 유적의 경우 조선에 후기 구석기 이전 시기가 있을 리 없다는 논리로 일본 학자가 발굴했음에도 흐지부지되었다. 허나 해방 후 1977년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27만 년 전의 구석기가 발견되자 상황이 역전되었다.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자 일본의 고고학계에서 "대한민국에도 수십만 년 전 구석기가 있는데 일본 열도에도 없을 리가 없다." 라고 열폭하여 후지무라가 조작하기 쉬워지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물론, 연천 전곡리 유적은 한국인이 조작한 것도 전혀 아닌데다 미군으로 근무하던 고고학자 그렉 보웬이 우연하게 유적지를 발견한 것이 먼저였다. 게다가 나중에 세계적인 고고학자들이 전곡리를 직접 찾아와서 검증을 하고 연구한 뒤 증명이 된거라서 당연히 조작하곤 거리가 멀다. 더구나 연천 전곡리 유적의 역사적 의의는 대단한 것인데, 바로 서양에서만 출토된다고 여겨졌던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굴된 것이다. 그동안 동아시아에서는 올도완 주먹도끼만 발굴되어왔다. 올도완 주먹도끼는 아슐리안 주먹도끼보다 기술적으로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므로 아프리카, 중동, 유럽 일대에서는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굴되는데 반해 동아시아에서는 아슐리안보다 뒤떨어지는 올도완 주먹도끼만 발굴되다보니 동아시아 일대는 서부에 비해 뒤떨어졌다는 것이 그동안의 정설이었다. 이것이 바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환호했었던 모비우스 학설이다. 연천 전곡리에서의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발굴은 모비우스 학설을 학계에서 완전히 사장시킨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의의는 전세계적으로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일본 고고학계로선 한국에서 이런 역사적 의의를 가진 고고학 유적이 출토됐으니 부러웠을테고 한편으로는 구석기 유적이 발굴이 안 되는 상황을 안타까워 했을 것이다. 물론 유럽 입장에서 어찌할 수 없던 것도 미국의 힘이 적용되어 그런 것도 사실이긴 하다.
- 일본은 후지무라 이전부터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보다 역사적으로 더 먼저였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한 바 있다. 칭기즈 칸이 일본인이라며 고고학으로 무덤을 발굴하려 한 적이 있었고[2]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있던 베이징원인 해골이 일본인이라고 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뼈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이 또한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베이징원인은 현생 인류도 아닌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었다. 이 논리를 조금만 더 과장하면 먼 고대의 가시두더지 화석도 일본에서 나왔으니 일본이 포유류의 발상지라는 주장도 할 수 있다. 현재 베이징원인의 해골은 행방불명되었는데 전쟁 때문에 유골을 포장해서 미국으로 수송하던 도중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강탈하진 않았지만 결국 그 전쟁을 일으킨 게 일본이라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 후지무라를 포함한 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렇다할 고고학적 발견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그럴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 왜냐하면 문명의 발전은 대륙에서 반도, 섬으로 전파되는 게 당연하기 때문.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야마토을 비롯한 일본열도의 많은 고대 부족,국가들이 한반도의 국가들에게 영향받은 증거는 숱하게 많으며 구석기 유물도 한반도의 연대가 더 높다.
-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2권 역사편에서 구석기시대를 다루며 이 사건을 언급하고 지나갔다. 역사적 우월성을 갖고 싶어한다는 맥락에서 언급되었다.
- 2010년 10월 3일과 2022년 10월 23일 방영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를 다룬 바 있다.
- 애니메이션 별의 커비에서도 이 사건을 패러디한 이야기가 있는데, 몰래 가짜 유물들을 묻어놓고 그걸 나중에 파내어서 시민들에게 발굴을 선보이는 기행을 보여주는 등, 위의 사건과 전개가 매우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스스로 발굴했다는 행세를 한 후지무라 쪽과는 달리 디디디 대왕이 자신의 이미지를 내세우기 위해서 큐리오 박사에게 몰래 시켜서 했다는 점이다. 이 짓을 한 큐리오 박사는 진심으로 디디디 대왕의 말을 믿은 게 아니라 너무 지원금이 없던 차에 디디디 대왕이 지원금을 준다니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 게다가 나중엔 훔의 설득을 받아들여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진실을 폭로한다. 실제로 독재국가나 폐쇄적인 집단에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역사왜곡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경우는 흔하다.
- 고우영 수레바퀴에서 무학대사에 대해 음모론을 제시할 때 "가짜를 땅에 묻고 다시 발굴하는 것은 일본인도 할 줄 안다." 라는 의미심장한 글귀를 적었는데, 수레바퀴가 스포츠투데이에 연재되던 시기가 2001년에서 2002년으로, 아무리 봐도 당시 화제가 되었던 후지무라 신이치를 에둘러 언급한 것이 확실하다.
- 2017년 방영된 명탐정 코난의 872화 코난과 헤이지의 누에 전설에 나오는 "탄자와 미치키는 유명한 역사 연구가였으나 출토품이 위조품인 게 들켜서 매장되었다" 는 말로 봐서 이 후지무라 신이치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 학계에서는 이와테현에서 발견된 7만 년 전 가네도리(金取) 유적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여긴다. 물론 2009년에 또 시마네 현(島根県)의 이즈모 시(出雲市) 다기 정(多伎町)에 위치한 스나바라(砂原)라는 곳에서 또 구석기 유물이 확인되었고 해당 유물이 11만 년에서 12만 년 전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조사 결과가 나왔긴 한데, 일본 학계에서는 전례가 있는 이상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는 듯하다.
- 일본의 국민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소설 중 ‘돌 뼈(石の骨)’가 구석기시대 유물을 발견한 고고학자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이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측되는 실존 인물 중 하나인 ‘세리자와 쵸스케(芹沢長介)’는 후지무라 신이치의 은사뻘 되는 인물이다. 이 소설은 50년대에 출간된 것으로 본 문서의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지만, 구석기 시대의 유물에 목말라 있던 일본 고고학계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