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황룡사지금동보살두, 사진 출처2: Google Arts & Culture - 반가사유상 얼굴
1. 개요
皇龍寺址金銅菩薩頭.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고신라시대 사찰인 황룡사지에서 발견된 6세기 후반 경 신라의 금동 반가사유상 머리 파편.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안동 옥동 금동반가사유상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모습
머리 크기 8.3cm.
6세기 후반 경 신라에서 만들어진 금동제 반가사유상의 머리 파편으로, 지금은 폐허가 된 경주 황룡사지에 발굴되었다. 현재는 머리의 일부분만이 남아 있지만 그 것만으로도 크기가 10cm에 가까워 파손되기 전 원래 전체 크기는 40c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78호와 83호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존 금동반가사유상들은 가장 큰 것조차 20cm 후반 정도의 크기이기 때문에 본 불상이 만약 파손되지 않고 원본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었다면 우리나라 금동반가사유상 중 역대 세번째로 큰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황룡사는 고려 후기, 여몽전쟁 때 몽골군의 방화로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이 반가사유상도 그때 변을 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팔, 다리 및 신체 전체와 대좌, 광배 등은 완전히 소실되어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있는 얼굴 또한 정면 부분과 이마, 코 끝의 손상이 심한 것으로 보아 앞쪽에서 무언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가 불탄 후 이 머리 파편마저 회수하지 못하고 800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폐허가 된 부지 내에서 굴러다니다가 현대에 들어서야 겨우 보존 처리를 받을 수 있었다.
사진 출처: 경향신문 - '잃어버린 국보 78호 83호' 반가사유상..이름을 찾습니다 이기환의 Hi-story
본 불상의 머리에는 세 개의 반원으로 이루어진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데 비록 화마를 견디지 못하고 앞부분이 깨어져 있지만 전체적으로 국보 제83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의 보관과 동일한 형식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삼산관 형식의 보관은 신라 지역의 반가사유상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다. 또한 오른쪽 턱 옆에는 사유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손가락 끝을 대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국보 제83호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머리와 거의 똑같은 도안을 하고 있으나, 국보 83호보다는 약간 더 통통한 아기같은 느낌이다. 제작 시기는 6세기 후반으로 국보 제83호보다는 조금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이 보살머리는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이 짓고 있는 웃음과 거의 유사하지만 보다 애뜻하고 푸근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삼국시대 최고의 미소보살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은 이를 신라의 천년 미소라 표현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보 83호와 거의 똑같은 재질과 형식을 하고 있으나 좀 더 살이 오른 둥근 얼굴에 눈은 지그시 감고 있고, 입술 양 끝을 살짝 눌러 미소 띤 표정을 짓고 있는 불상으로, 성숙한 어른의 느낌이 드는 국보 제83호보다는 좀 더 어린아이의 얼굴과 같은 천진난만한 느낌을 준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에 경주 황룡사에서 만들어진 금동반가사유상의 파편으로, 당시 신라의 불교 문화 및 금속공예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