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6:27:33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영어: Trajan's Parthian campaign
파일: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jpg
시기 113년 ~ 117년
장소 레반트,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원인 파르티아를 정복하여 불후의 명성을 얻으려는 트라야누스의 야망
교전 세력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제국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파르티아 제국
파일:1920px-Standard_of_the_Arshakuni_Arsacid_dynasty_svg.jpg 아르샤쿠니 왕조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트라야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하드리아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시우스 퀴에투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아피우스 막시무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 율리아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파르타마스파테스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오스로에스 1세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미트리다테스 5세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메바르사페스†
파일:attachment/mon_256_9.png 사나트루케스†
파일:1920px-Standard_of_the_Arshakuni_Arsacid_dynasty_svg.jpg 파르타마시리스
파일:1920px-Standard_of_the_Arshakuni_Arsacid_dynasty_svg.jpg 볼로가세스 1세
병력 6개 군단, 7개 벡실라티오[1] 및 보조 부대 60,000~70,000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로마 제국 파르티아 정복 실패.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로마군의 원정 준비3.2. 성공적인 원정3.3. 전황 악화3.4. 트라야누스의 죽음과 전쟁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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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113~117년, 트라야누스 황제의 로마군 오스로에스 1세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를 교체한 것을 빌미삼아 파르티아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로마군이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바빌론까지 진출하면서 파르티아를 완전히 정복하려는 트라야누스의 야망이 실현되는 듯 했으나,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선과 파르티아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의 발발 등 여러 악조건으로 인해 끝내 실패했다.

2. 배경

기원전 53년 카르헤 전투의 참사가 벌어진 이래,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 파르티아 제국은 여러 차례 충돌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종신 독재관이 된 뒤 카르헤 전투의 참패를 복수하겠다는 명분으로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했으나 암살당했다. 그후 로마가 카이사르파와 '해방자파'간의 해방자 내전으로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파르티아는 기원전 40년 시리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당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가 맹활약하여 이들의 침략을 격퇴했지만, 로마는 그 과정에서 여러 총독이 죽고 동방 속주의 질서가 파괴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를 보복하고 카이사르가 이루지 못한 사명을 자신이 이뤄서 불후의 명성을 얻고자 기원전 36년 1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그후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꺾고 로마 제정을 출범시킨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0년 유프라테스 강변에 대군을 배치한 뒤 파르티아의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와 협상한 끝에 양 제국의 경계를 유프라테스 강으로 확정짓고, 파르티아로부터 지난날 빼앗겼던 군단기들을 돌려받았다. 또한 안토니우스를 따랐다가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도 돌려받았다. 다만 카르헤 전투 당시의 로마군 포로들은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다 죽어버렸기에 돌려받지는 못했다.

그 후 수십년간 평온했던 양국은 서기 51년 파르티아의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가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 아르메니아 왕국[2]의 군주로 앉히기 위해 로마 제국이 세운 아르메니아 왕 라다미스투스를 축출하면서 또다시 전쟁을 벌였다. 수 년에 걸친 전쟁 끝에, 로마 황제 네로와 볼로가세스 1세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중재에 따라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오르되 즉위식은 로마에서 거행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파르티아의 샤한샤와 같은 혈통의 군주들이 로마 황제의 승인하에 아르메니아 국왕을 꿰찰 수 있었고, 로마와 파르티아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많은 로마인은 이러한 상황을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 제일의 나라로 자부하는 자국이 파르티아만 온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것을 거슬려 했으며, 파르티아가 아시아와 유럽간의 중개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탐냈다.

이런 마음을 품은 이들 중에는 당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제2대 황제였던 트라야누스가 있었다. 그는 서기 105년 다키아 전쟁을 벌여 로마 제국의 북방 전선을 위협하던 다키아 왕국을 정복해 막대한 수익을 얻어냈고, 이를 통해 대대적인 토목 공사와 공공 사업을 실시해 원로원과 민중으로부터 '지고의 황제'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제 파르티아를 정복하고 그들의 부를 거머쥔다면, 이제까지 로마의 어떤 인물도 누리지 못한 영원불멸의 명예를 얻을 것이었다. 트라야누스는 비티니아 총독을 맡고 있었던 소 플리니우스에게 군대가 행군할 때 필요한 보급품을 미리 마련하고 속주민들에게 추가 비용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는 등, 오래 전부터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던 113년, 파르티아의 샤한샤 오스로에스 1세가 로마 황제의 승인없이 아르메니아의 왕 악시다레스를 축출하고, 동생인 파르타마시리스를 아르메니아의 새 왕으로 옹립했다. 트라야누스는 이를 빌미삼아 아르메니아를 공략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파르티아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으며 전쟁을 감행했다.

3. 전개

3.1. 로마군의 원정 준비

트라야누스는 동방의 군단들에게 다음 봄에 있을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유럽에 기반을 둔 몇몇 군단에게는 새로운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시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황후인 폼페이아 플로티나와 함께 퀸투스 마르키우스 토르보가 지휘하는 로마 해군의 군함을 타고 그리스로 이동했다.

트라야누스의 새로운 원정을 위해 동방으로 파견된 군단 중 하나는 제1 아디우트릭스였다. 이들은 서기 68년에 설립되어 판노니아의 브리게티오에 주둔했다. 제1군단은 도나우 강의 또다른 군단 기지인 카르눈툼으로 이동해 제15 아폴리나리스 군단과 합류했다. 두 군단은 이탈리아 북동부의 라벤나로 이동한 뒤, 라벤나 항구에 정박한 군함에 승선하여 지중해를 통해 시리아로 이동했다. 한편, 105년 트라야누스의 지시에 따라 나바테아 왕국을 합병하기 위해 파견된 뒤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제2트라이아나 군단 역시 시리아로 북진했고, 아라비아의 보스트라에 주둔한 제3 키레나이카 군단은 이듬해 원정을 위해 무기, 탄약 및 식량을 비축했다. 카파도키아 총독 마르쿠스 유니우스 역시 휘하의 2개 군단인 멜리테네의 제12 풀미나타 군단과 사탈라의 제16 플라비아 군단에게 봄에 행군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샤한샤 오스로에스 1세는 로마군의 이같은 동향을 전해듣고, 침공이 임박했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그는 즉위 이래 파르티아 제국의 서부만 확보했고, 동부는 볼로가세스 3세가 장악하고 있었다. 파르티아가 단합되었다고 해도 로마군의 대대적인 침략을 감당하기 어려운 판국에, 파르티아가 양분된 상황에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오스로에스 1세는 급히 사절을 보내 평화협약을 제안했다. 트라야누스는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파르티아 사절단을 접견했다. 그들은 막대한 선물을 트라야누스에게 전하며, 지난날 볼로가세스 1세의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가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동의하에 아르메니아 국왕 대관식을 치렀던 것처럼, 파르타마시리스가 로마로 가서 대관식을 거행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선물을 받지 않으며 차갑게 대답했다.
"우정은 말이 아닌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 적절한 모든 조치를 할 것이다."
한편, 트라야누스의 5촌 조카였던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 전쟁 이후 집정관과 판노니아 총독을 역임한 뒤 113년 무렵에는 아테네의 아르콘 또는 총독을 맡고 있었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와 친밀한 관계였던 황후 플로티나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하드리아누스를 시리아 총독에 임명했다. 이후 트라야누스와 황실 일행은 겨울을 안티오키아에서 머물렀고, 그가 이끌고 온 함대의 대부분은 라오디케아에 정박했지만 미세움 함대의 선원과 해병들은 키루스에 있는 제10 프레텐시스 군단의 사막 군단기지에서 숙영했다.

당시 트라야누스와 함께 온 장성들 중 제일 중요한 인물은 루시우스 퀴에투스와 루키우스 아피우스 막시무스였다.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무어인 출신으로, 다키아 전쟁 시기에 맹활약하여 트라야누스의 신임을 얻은 후 지난 7년간 법무관, 집정관, 유대 총독을 역임했다. 루키우스 아피우스 막시무스 역시 다키아 전쟁에서 활약해 트라야누스의 심복이 되었다. 한편, 소 플리니우스의 친구이자 후원자였으며 트라야누스의 유능한 참모였던 마르쿠스 에루시우스 클로루스, 코르불로의 부관으로서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제1차 유대-로마 전쟁 티투스 예루살렘 공방전에 참여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의 아들 또는 손자인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 율리아누스도 원정군의 장성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3.2. 성공적인 원정

서기 114년 봄, 트라야누스는 황후를 안티오키아에 남겨둔 뒤 동방 원정을 개시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시리아 총독으로서 원정군의 보급로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트라야누스는 4개 군단을 카파도키아의 멜리테네로 진군시켰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군대가 하루에 18마일씩 꾸준히 로마 가도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 트라야누스는 말을 타거나 가마에 타지 않고, 맨발로 군대의 선두에 서서 도보로 행진했으며, 행군 순서를 직접 결정했다고 한다. 114년 3월 말 멜리테네에 도착한 뒤 카파도키아에 본거지를 둔 2개 군단을 휘하의 군대에 추가했다. 그리하여 총 6개 군단을 확보하고 7개 벡실라티오 및 보조부대를 추가로 편성한 뒤, 트라야누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르메니아로 진격해 초여름에 아르메니아 남부를 점령했다.

마르쿠스 에루시우스 클로루스가 이끄는 분견대가 아르메니아의 도시 엘레게이아에 도착했을 때, 샤한샤 오스로에스 1세에 의해 아르메니아 왕에 선임되었던 파르타마시리스가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를 떠나 트라야누스의 진영으로 찾아왔다. 그는 트라야누스에게 경례를 하고 왕관을 벗어서 트라야누스의 발 앞에 놓았다. 이는 트라야누스가 50년 전 네로가 티리다테스의 왕관을 되돌려줬던 것처럼 하기를 바란 행위였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왕관을 되돌려주지 않고 파르타마시리스의 수행원들 중 파르티아인들을 멀리 보내고 나머지는 왕과 함께 억류했다. 이후 트라야누스의 로마군은 아르메니아 전역을 장악했다. 파르타마시리스는 나중에 트라야누스의 특명으로 처형당했다.

트라야누스는 티그리스 강을 건너 니시비스와 바트네를 포함한 주요 변경 도시들을 확보하고, 주전략적 요충지에 군사기지를 남겨둔 뒤 에데사로 진군했다. 에데사에 도착한 뒤 동쪽의 여러 거점들을 확보하고 남쪽의 고갯길을 통과한 후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현지에 군대를 숙영시킨 뒤 자신은 시리아로 돌아와 안티오키아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현지에 남을 병사들에게 니시비스 주변의 숲에 자라는 나무들을 벤 후 메소포타미아에서 새해 원정을 벌일 때 쓸 배를 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트라야누스가 안티오키아에 돌아온 직후, 안티오키아와 그 주변의 여러 마을들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중에는 로마 황제를 찾아왔던 외국 사절들과 로마에서 잠시 집정관을 지낸 뒤 시리아에 막 도착한 마르쿠스 베르길리아누스 페도도 있었다. 트라야누스 본인은 경미한 부상을 입고 게르만족 경호원들에 의해 페허가 되어버린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여진이 계속해서 안티오키아 일대를 뒤흔들었기에, 트라야누스는 안티오키아 전차 경주 경기장에 마련된 임시 천막에서 며칠 동안 살아야 했다.

115년 봄,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로 돌아온 뒤 파르티아 원정을 재개했다. 6개 군단은 나무가 죄다 베어져서 황량해진 지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이동했다. 수송 행렬은 새로 건조된 함대에 실린 채 강을 따라 니시비스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부대를 강 건너편으로 보내려고 했을 때, 강둑에 모인 적군이 화살비를 쏟아부어 저지했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파르티아 동맹국인 아디아베네 왕국의 병사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트라야누스는 일단 병력을 물린 뒤 배다리를 건설했다. 이 다리의 최전선에는 탑과 방패벽이 세워졌고, 궁수가 탑에 올라 강 건너편의 적군을 향해 화살을 쐈으며, 중무장한 보병대가 다리를 건널 준비를 했다. 이와 동시에, 다양한 로마군 부대가 강 서쪽 기슭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러 지점에서 배를 타고 건너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수적으로 열세인 적군은 건널목을 차단하고자 병력을 이리저리 분산시켜야 했다. 이리하여 적 본대의 방어가 약해지자, 트라야누스는 전군에 다리를 신속하게 건너라고 명령했다. 이후 짧은 전투 끝에 적군을 제압하고 도하에 성공한 로마군은 뒤이어 아디아베네 왕국을 공략했다.

트라야누스는 뒤이어 아디아베네 왕국의 남쪽에 자리잡은 아데니스트라 요새 공략에 착수했다. 그는 이곳 수비대가 항복할 기회를 주기 위해 센티우스라는 이름의 백인대장을 보냈다. 그러나 파르티아군 지휘관인 메바르사페스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백인대장을 감금했다. 센티우스는 지하감옥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자신을 돕도록 설득해 그들의 협조로 탈옥에 성공했고, 메바르사페스를 습격해 죽인 뒤 로마군이 요새에 다가오자 성문을 열어 무혈 입성하도록 했다. 트라야누스가 실로 큰 공을 세운 이 백인대장에게 어떤 보상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로마군은 아데니스트라 요새를 손쉽게 공략한 뒤 유프라테스 강 하류를 따라 진군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고, 그 운하를 통해 티그리스 강으로 이동한 뒤 에리트레아 해( 페르시아만)까지 항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프라테스 강이 티그리스 강보다 높은 고도에서 흐르기 때문에 운하가 실용적이지 않다고 기술자들이 경고하자, 트라야누스는 할 수 없이 운하 건설을 포기하고 병사들에게 배를 육로로 끌고 가서 티그리스 강에 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로마군이 티그리스 강 동쪽 강둑에 도착했을 때, 샤한샤 오스로에스 1세는 고위 관료들과 함께 일찌감치 도주했고, 파르티아의 수도이자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크테시폰에는 소규모의 수비대만 있었다. 이들은 잠시 동안 항전했지만 로마군에게 굴복했고, 크테시폰 인근의 셀레우키아도 얼마 안가 함락되었다. 트라야누스는 115~116년의 겨울을 크테시폰의 파르티아 샤한샤들의 궁전에서 보내면서, 로마 원로원에 승리의 소식을 알렸다. 원로원은 이 소식에 매우 기뻐하며, 황제에게 파르티쿠스(파르티아의 정복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16년 봄, 트라야누스는 함대의 군함를 타고 티그리스 강을 따라 항해했다. 강 하류의 물살이 밀려오는 조류를 만나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폭풍우가 배를 덮쳤다. 이에 로마인들은 강 위의 섬인 메세네로 피신한 뒤 현지 주민들의 접대를 받았다. 폭풍우가 잦아들자 항해를 재개하여 페르시아만에 도착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인도로 떠나는 배를 목격한 트라야누스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고 한다.
"내가 10년만 젊었더라면 인도까지 갔을텐데!"
그 후 로마군은 티그리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도 바빌론의 유적지에 도착했다. 트라야누스는 이곳에 도착한 뒤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를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파르티아를 정복하려는 황제의 야망이 실현되는 듯했지만, 곧이어 수많은 악재가 닥쳐왔다.

3.3. 전황 악화

트라야누스가 바빌론에서 승리에 취해 있을 무렵, 파르티아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며 들고 일어났다. 니시비스와 에데사, 셀레우키아는 로마군이 바빌론까지 깊숙히 들어간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군의 후방에 있었던 아디아베네 왕국 역시 파르티아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에 트라야누스는 루시우스 퀴에투스와 막시무스를 북쪽으로 파견하여 아디아베네를 탈환하게 했고, 에리키우스 클라루스와 율리아누스에게는 셀레우키아를 탈환하도록 했다.

막시무스는 파르티아 기병대의 습격으로 전사했고, 휘하 부대는 전멸했다. 반면에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파르티아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하고 니시비스를 포함한 몇몇 주요 도시를 수복한 뒤 에데사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엔 실패했다. 또한 클라루스와 율리아누스는 셀레우키아를 함락시키고 파르티아 장군 사나트루케스를 처단한 뒤, 도시를 철저히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렇듯 로마군이 반란군 진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민심이 여전히 로마군에 적대적인 양상을 보이자, 당초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를 로마 제국의 속주로 삼으려던 트라야누스는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으로 돌아온 뒤 도시 외곽의 평야에서 휘하 군대와 근처에 있는 모든 파르티아인 유력자들을 불러모아 파르타마스파테스를 파르티아의 새로운 샤한샤로 선포했다. 파르타마스파테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와 로마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파르티아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크테시폰에 남았다.

그후 트라야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티그리스 강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요새 도시이며 파르티아 제국의 속국으로 아라바 왕조의 본거지인 하트라로 향했다. 하트라는 규모가 크지 않고 사막의 가장자리에 자리잡았는데, 인근에 물은 거의 없고 나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일단 숙영지를 세우고 도시를 포위한 뒤, 병사들에게 성벽을 허물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병사들이 하트라 성벽의 일부를 허물어 돌파구를 만들었다. 트라야누스는 즉시 기병대를 그쪽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하트라에 주둔한 수비대와 주민들은 맹렬한 반격을 가해 로마 기병대를 물리쳤다. 기병대는 혼란에 빠진 채 로마 군영으로 도주했고, 하트라 수비대는 그들을 추격한 끝에 로마군 진영까지 밀려 들어왔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하트라군의 궁수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황제의 자주색 망토를 벗었다. 그러나 하트라군 궁수들은
"그의 장엄한 회색머리와 위엄있는 얼굴을 보고"
트라야누스가 로마 황제임을 직감하고 화살을 쐈다. 트라야누스 본인은 부상을 입지 않고 탈출했지만, 그를 경호하던 기병 한 명이 화살비에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그 후 로마군이 반격에 나서자, 하트라 수비대는 곧바로 요새로 돌아간 뒤 무너졌던 성벽을 삽시간에 수리했다.

이리하여 하트라 포위전이 길어지자, 로마군의 장병들은 맹렬한 더위와 파리떼의 습격에 시달려야 했다. 자연히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서 하트라 요새를 공략할 가망이 없자, 트라야누스는 전군에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강철 같았던 그의 건강은 이때를 기점으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5세가 이끄는 파르티아군 유격대가 로마군 수송 부대를 잇따라 습격했다. 아르메니아 왕국에서는 볼로가세스 1세가 이끄는 반란군이 현지에 주둔한 로마군을 몰아붙였다. 이리하여 보급로가 끊어져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아르메니아와 카파도키아에서 겨울을 보내게 한 뒤 자신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대도시의 재건 작업을 감독하던 황후 폼페이아 플로티나와 5촌 조카인 시리아 총독 하드리아누스와 합류했다.

117년 초,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봄 공세를 계획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 한쪽이 마비되는 증세를 보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원정 계획을 보류하고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그해 봄, 지중해 동부 각지에서 유대인들이 봉기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북아프리카의 키레나이카에서는 220,000명의 로마인과 그리스인이 유대인들에게 피살되었고, 이집트와 키프로스 섬에서는 240,000명이 살해당했다고 서술했다.

이에 트라야누스는 유대인들의 대반란을 제압하는 걸 최우선 순위로 두고, 우선 제6 페라타 군단을 유대인 영역의 심장부에 있는 나사렛에서 15마일(24km) 떨어진 갈릴리의 카파르코나에 주둔시켰다. 이와 동시에, 루시우스 퀴에투스와 다른 고위급 지휘관들에게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 키레나이카, 키프로스 섬의 유대인 반란을 제압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아르메니아 남서부에 있는 사모사타에 제16 플라비아 군단을 파견해 그곳에 새로운 기지를 세워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로마 제국의 지배력을 유지하게 했고, 제15 아폴리나리스 군단은 사탈라에 있었던 제16 플라비아 군단의 이전 기지를 새로운 기지로 삼게 했다.

3.4. 트라야누스의 죽음과 전쟁 종결

서기 117년 여름, 로마군은 루시우스 퀴에투스를 비롯한 여러 장군들의 활약으로 유대 반란군을 진압했다. 키프로스 섬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유대 지방으로 추방되었고, 유대인들의 키프로스 이주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가기로 하고 7월 말에 황후 플로티나와 함께 이탈리아로 출항했다. 한편 하드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에 남아 후속 조치를 맡았다. 중병에 걸린 황제가 탄 함선은 킬리키아 지방의 셀리누스에 도착했다. 117년 8월 9일, 트라야누스는 원정 실패에 대한 자책과 뇌졸중에 시달린 끝에 황후가 지켜보는 곁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64세였다. 플로티나 황후는 남편이 죽기 직전에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하여 후임 황제가 되게 했다며, 하드리아누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시리아 총독으로 있었던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전쟁 후반에도 무리한 원정을 고집한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는 그가 전쟁 불가론자인 이유보다는, 현실적으로 전쟁에 쏟아 붓는 비용이 커지면서 지속할 이유가 적었던 것도 컸다. 하드리아누스는 내정 전문가, 제장들과 장시간의 토론 후 이를 결단지었다. 그는 제위에 오른 뒤, 트라야누스의 승리를 공표하고 그것을 기념했다. 대신 로마군이 점령했던 파르티아 영토를 지키기 보다는 전부 포기했다. 이는 하드리아누스가 파르티아 측의 반격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 로마군의 피해와 피로도가 누적되는 문제, 병참 조달 문제, 트라야누스의 무리한 전쟁 지속 의지 아래 주화의 은함유량을 18% 절감시키는 조치 등으로 벌어진 위기 조짐의 현실화, 동방 속주 내에서의 전시체제에 대한 피로감 등을 고려해 내린 결단이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의 지시 아래, 로마군은 기존의 기지로 철수했다. 다만, 그는 전임자이자 5촌 당숙인 트라야누스의 공로를 분명히 하고,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등의 필요한 조치를 취해 잡음을 최소화했다. 이와 함께 교전국인 파르티아와의 관계 개선 등의 노력도 병행했다. 따라서 원정에 동원된 로마군에게 상당한 전리품이 주어진 것 외에는, 트라야누스의 원정은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118년 여름, 로마에 도착한 신제 하드리아누스는 공식적으로 동방 원정의 종료를 선포했다. 그는 이 전쟁의 핵심 전력이었던 제1 아디우트릭스 군단을 모이시아 속주의 다뉴브 강 전선 기지로 돌려보냈다. 그해 말, 선제 트라야누스의 주요 고문들과 장군들이 하드리아누스에 대해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네 명의 집정관 사건) 이중에는 다키아 전쟁과 동방 원정, 유대 반란 제압 등 수많은 공적을 세운 무어인 장군 루시우스 퀴에투스도 있었다.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샤한샤 오스로에스 1세는 로마군이 철수한 틈을 타 세력을 규합한 뒤 수도 크테시폰에 복귀했고, 파르타마스파테스는 로마로 도주했다. 그러나 로마와의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소진해버려 동방의 볼로가세스 3세에 대항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129년 볼로가세스 3세가 크테시폰에 입성했고, 오스로에스 1세는 이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파르티아는 수십 년간 잠자코 있다가 181년 볼로가세스 4세의 영도하에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 동시에 기습 침공했다. 이에 루키우스 베루스 휘하의 로마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다.(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


[1] 임시 기동 분견대 [2] 볼로가세스 1세는 장남이긴 했지만 서자였던 반면, 티리다테스 1세는 적통이어서 정통성이 더 강했다. 그러나 티리다테스가 형인 볼로가세스에게 샤한샤를 양보했다. 볼로가세스는 동생에게 이를 보답하고, 반대파의 반발도 누그러뜨릴 겸 동생을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앉히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