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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가우 전투


7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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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프랑스-작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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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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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10월 29일,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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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토르가우 전투
Battle of Torgau
<colbgcolor=#ABCDED,#0E0F37> 시기 1760년 11월 3일
파일:M-Torgau-LEAD-FEATURED-Jul18.jpg
장소

토르가우
교전국 <rowcolor=black> 프로이센 왕국
(공세)
오스트리아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프리드리히 대왕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치텐 백작
지휘관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다운 백작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레이시
병력 프로이센 왕국군: 48,500명
- 보병: 35,000명
- 기병: 13,500명

대포: 280문
오스트리아군: 51,900명
- 보병: 35,000명
- 기병: 16,900명

대포: 400문
피해 사상자: 16,600명 사상자: 15,200명
포로: 7,000명
대포: 49문
깃발: 31개
결과 프로이센 왕국의 승리
-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략적 목표 달성
- 프로이센 왕국군의 막대한 피해로 인한 전투의 어려움
영향 프로이센 왕국의 수세 전환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3.1. 전초전3.2. 대왕의 공격과 실패3.3. 치텐 백작의 공세
4. 결과

[clearfix]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0년 11월 3일 작센 선제후국 토르가우에서 프로이센군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긴 했지만 더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공세를 포기하고 수비에 전념한다.

2. 배경

1760년 8월 15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슐레지엔을 침공한 오스트리아군과 리그니츠 전투를 치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대왕은 베를린을 잠시 점령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몰아낸 뒤 작센에 주둔하고 있는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고자 병사들을 이끌고 작센으로 진격했다. 11월 2일, 대왕은 토르가우에서 남쪽으로 약 11km 떨어진 실다우를 향해 진격하면서 병력을 추가로 모집했다. 이때 다운 백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그로즈비히와 진나 사이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정찰대로부터 적의 진지 주변의 지형 정보를 전달받고는 남쪽 방면은 가파르고 늡지대가 많아 희생이 클 테니 상대적으로 완만한 북쪽으로부터 적을 공격하기로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병력을 둘로 나눴다. 41개 보병대대와 48개 기병대대는 돔미츠셔 하이데 방면으로 거의 18km를 시계 방향으로 돌아간 후 북쪽 방면에서 다운 백작의 진지를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21개 보병대대와 54개 기병대대는 치텐 백작 한스 요아힘의 지휘하에 남쪽에서 적의 퇴로를 막고 있다가 북쪽 방면에서 아군이 공격을 개시했을 때를 맞춰 수프티츠 고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11월 2일 오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치텐 백작에게 구두로 지시를 내렸다.
군대는 내일 6시 30분에 공세를 개시할 것이다. 우리의 좌익은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할 것이다. 따라서 장군은 상호 지원을 위해 제한된 공세를 가하라.전선 사이의 거리는 250걸음일 것이다. 적을 언덕에서 축출한 뒤 중포 진지를 배치하고 대대들을 집결하라. 가능한 한 많은 분대를 요구대로 전진시켜야 할 것이다.

한스 요아힘 폰 치텐 백작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폐하께서는 장교들의 솜씨에 자신이 있으시며 완전한 승리를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의심치 않으십니다.

이렇듯 장군들에게 작전 계획을 설명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음날인 11월 3일 오전 6시 30분경에 공세를 개시한다.

3. 전투 경과

3.1. 전초전

11월 3일 오전 6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보병 제1열을 출발시켰다. 그 뒤를 이어 뮐센 장군이 보병 제2열을 이끌고 갔다. 기병 제3열은 프린츠 게오르그 루트비히 폰 홀슈타인-고토프 공작 프린츠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지휘하에 그 뒤를 따랐다. 한편 치텐 백작이 이끄는 군대는 작전 대로 전장을 빙돌아가다가 전장 남쪽으로 진군했다. 이윽고 치텐 백작이 이끄는 군단은 오전 6시 30분 경에 크로이츠 초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반격에 나섰다. 라시 장군은 기병대를 급파하는 한편 보병 9개 대대를 남쪽 전선에 배치해 적의 공세를 저지하게 했다. 치텐 백작은 곧 적이 수트비치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다는 걸 눈치채고 원래 계획대로 수트비츠를 공격하지 않고 에일렌부르크-토르가우 방면 도로를 따라 공세를 가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공세 역시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보병 여단의 반격으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라시 장군은 남쪽 방면의 적이 그다지 공격에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적의 주요 공세는 남쪽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적이 후퇴하는 걸 내버려두고 자신은 본대로 돌아가 적의 주요 공세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북쪽 방면의 방비를 강화하게 했다. 이후 치텐 장군은 오후 2시까지 숲을 빠져나온 병력을 재편성하고 적에게 포격을 가할 뿐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전 6시에 군대를 출발한 이래 6시간 동안 숲을 헤맸다. 그는 진로를 잘못 판단해 원래 계획해둔지점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가는 실수를 범했다. 그렇게 헤매던 중 오스트리아군 정찰대가 그들을 목격하자마자 사격을 가했다. 프로이센군은 이에 응사해 대부분의 오스트리아군 정찰병들을 사살했지만, 다운 백작이 프로이센군의 주력군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간파하는 걸 막지 못했다. 다운 백작은 즉시 리드 장군에게 위덴하인-그로즈비히 도로를 따라 아군의 좌익 측면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3.2. 대왕의 공격과 실패

오후 1시경, 프리드리히 대왕은 마침내 숲을 벗어나 스트라이바흐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먼저 제3열이 아직도 숲길을 헤매고 있어서 병력 배치에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은 사전에 적이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해두고 있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원래 계획은 오스트리아군의 위치가 진나의 동쪽이라는 가정에 기초했고, 진나 동쪽 지역은 넓고 평탄해 그의 기병대를 제대로 써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진나 동쪽이 아닌 서쪽까지 대규모 진지를 구축해두고 있었다. 이 진나 서쪽에는 뢰트리히라고 불리는 작은 연못과 여러 구릉이 있었으며 땅이 질퍽하고 깊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공세를 펼치기에 부적절했다. 이러니 프리드리히 대왕으로서는 전술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2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크로아츠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대포 소리를 듣고 치텐 백작이 이미 오스트리아군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고 잘못 판단했다. 또한 그는 오스트리아군 보급대가 엘베강 쪽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칫하면 다운 백작이 양면 공격으로 전멸하는 걸 회피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 좌익으로 공격 축을 변경하여 보병 만으로 즉각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오후 2시 15분, 슈터하임 여단의 10개 대대가 에셜론의 숲에서 나와 겨우 800보밖에 떨어지지 않은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공격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군 포병대가 즉각 응사했고, 두 여단 지휘관들이 이 포격으로 인해 부상당했다. 첫번째 공세는 곧 좌절되었고, 슈터하임 여단은 거의 절반이 죽거나 부상당한 후 후퇴했다.

뒤이어 불로우 장군 휘하의 10개 대대가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지만 적의 거센 반격에 직면했다. 이후에도 많은 프로이센 병사들이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적 진지로 돌진했지만, 그때마다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이 그들을 밀어냈다. 그 과정에서 최전방에서 군대를 직접 지휘하던 다운 백작이 다리에 총탄을 맞았고, 프리드리해 대왕은 근처에 떨어진 포탄의 충격으로 말에서 굴러 떨어졌지만 다치지 않았다. 전체적인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매우 유리했고, 프로이센군은 패주하는 과정에서 5개의 깃발을 빼앗겼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때까지 치텐 백작의 공격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식을 접하지 못했으며 치텐 백작에게서 어떤 메시지도 전달받지 못했다. 그는 그저 치텐 백작이 공세를 퍼붓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병사들이 현장에 도착하는 대로 전투에 투입시켰다. 그러다가 오후 4시경에 마침내 기병대가 도착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들을 즉시 적의 측면에 투입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 라이드 경기병대가 이들의 측면을 갑작스럽게 공격했고, 보병대 역시 수적으로 우세한 적의 맹렬한 역습으로 고전했다. 결국 프로이센군의 공세는 실패했고 불로우 장군을 비롯한 많은 장교와 부하들이 포로로 잡혔다.

오후 5시, 대왕은 모든 공세가 실패하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전군에 스트라이바흐로 재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만 그는 철수는 고려하지 않았고 전 부대에게 항상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 밤새도록 무장하게 했다. 그는 여전히 오스트리아군이 큰 손실을 입은 것에 동요해 밤중에 그들의 위치를 포기하기를 바랐다. 한편, 다운 백작은 다리에 입은 총상으로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전투가 끝났으며 아군이 이겼다고 확신한 채 본진으로 가서 피로 가득찬 장화를 벗었다. 그는 지휘권을 상급 장교 오도넬에게 넘기고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아군이 승리했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그러다가 라시 장군으로부터 치텐 백작이 남쪽으로부터 수프티츠를 공격했으나 아군의 저항으로 패퇴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운 백작은 전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걸 알게 되자 라시에게 본군 제2선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그는 치텐 백작과의 전투는 조만간 종결될 거라고 확신했다.

3.3. 치텐 백작의 공세

한편, 치텐 백작은 오후 2시부터 적군에게 포격을 가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후 3시 30분경, 그는 자신의 군단을 슈퍼티츠 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가 프리드리히 대왕이 보낸 전령들에 의해 공세를 펼치기로 한 것인지, 치텐 혼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걸 감지하고 내린 결정인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 공세 역시 오스트리아군의 맹렬한 반격에 직면했고 비록 슈퍼티츠 마을을 공략하긴 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오후 6시 30분, 오스트리아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던 뫼렌도르프 중령은 샤프테헨에서 슈퍼티츠까지의 능선이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이 정보를 자신의 여단 사령관인 살데른 장군에게 넘겨줬다. 이에 살데른 장군은 군대를 좌측으로 이동시켜 그 능선을 공략하기로 했다.

이 회심의 일격은 성공했고 프로이센군은 마침내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포를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은 더 많은 병력을 보내 그들을 밀어내려 했지만, 프로이센군은 탈취한 포를 적에게 마구 퍼부으며 결사 항전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고지를 되찾지 못하고 패퇴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점점 커지는 소음과 불타는 마을의 빛을 감지하고 스트라이바흐에 집결한 군대에게 다시 공세를 개시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탈진해버린 그들은 적을 밀어내지 못하고 패퇴했다. 한편 치텐 백작의 군대 역시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고전하느라 탈진해버려서 추가 공세를 감행하지 못했다.

오후 9시경,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혹독하게 추운 11월의 밤이 전장에 쓰러진 병사들을 덮쳐 많은 이들을 동사시켰고 많은 전사자들과 부상자들의 소지품들이 약탈당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더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자정이 지날 무렵 엘베 강을 도하해 본국으로 질서정연하게 철수했다. 라시 장군의 부대는 주력군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엘베 강의 좌측 강둑에 남아 있다가 드레스덴 방향으로 후퇴했다 이때 프로이센군은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추격할 기력이 없었다.

4. 결과

토르가우 전투의 결과는 적군을 전장에서 이탈시킨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기록되었지만 그 대가는 실로 컸다. 그들의 피해는 약 16,600명에 달했으며 수많은 정예병들이 이 전장에서 죽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오스트리아군은 15,800명의 병사들을 잃었고 7,000명의 포로가 발생했으며 49개의 대포와 31개의 깃발들을 잃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비록 적을 몰아내긴 했지만 아군의 손실이 훨씬 커서 백성들이 동요할 것을 우려해 이 손실의 공개를 금지했다. 또한 그는 오스트리아군을 궤멸시키지 못한 것에 좌절했고,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 수비에 전념했다. 본래 공세 지향적인 전술을 추구했던 그가 수비에 전념하기로 한 것은 당시 프로이센의 상황이 매우 암울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다운 백작은 패장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프로이센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힘으로서 자신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호적수임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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