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맥더모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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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잉글랜드의 축구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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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맥더모트 Terry McDermot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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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테렌스 맥더모트 Terence McDermot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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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1년 12월 8일 ([age(1951-12-08)]세) | |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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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90cm / 체중 92kg | |
직업 |
축구 선수 (
중앙 미드필더 / 은퇴) 축구 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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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유스 | 베리 FC |
프로 |
베리 FC (1969~197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73~1974) 리버풀 FC (1974~1982)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82~1984) 코크 시티 FC (1985) 아포엘 FC (1985~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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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 코치 |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2~1998) 셀틱 FC (1999~2000)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5~2008) 허더즈필드 타운 AFC (2008~2012) 버밍엄 시티 FC (2012~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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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25경기 3골 ( 잉글랜드 / 1977~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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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축구인.현역시절 밥 페이즐리의 '붉은 제국'시절 리버풀 FC의 일원으로 전성기를 보낸 리버풀의 레전드 중 한명이다.
2. 클렵 경력
리버풀 태생의 맥더못은 뉴캐슬에서 본격적인 프로생활을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페이즐리의 눈에 띄어 1974년 11월 £175,000의 이적료로 고향팀 리버풀로 이적했다.초반 두시즌간 후보 선수에 머물던 그였지만, 76-77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주전경쟁에서 앞서나가게 되었다. 특히 해당시즌 유로피언컵(챔피언스리그의 전신) 결승전에서 해당년도 발롱도르를 수상한 알란 시몬센이 이끌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선발 출전해 선제골을 넣으면서 구단역사에 있어 처음으로 빅이어를 들어올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맥더못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다음시즌 FA컵 준결승전 머지사이드 더비에서의 환상적인 칩샷은 팀을 결승전으로 이끈 동시에 'BBC 올해의 골'에 선정되었다. 함부르크와의 UEFA 슈퍼컵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클뤼프 브뤼허 KV와의 유로피언컵 결승전에도 선발출장해 팀의 유로피언컵 2연패를 도왔다.
77-78시즌 도중 이적해온, 후대의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리버풀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라고 불리는 그레이엄 수네스와 함께 중원을 구성하며 리버풀의 황금기를 지탱했다.
79-80시즌 리그서 첫 두자릿 수골을 포함, 시즌 16골 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리그우승을 이끌었는데 이 활약으로 해당시즌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것은 물론, PFA 올해의 선수와 FWA 올해의 선수까지 수상하며 해당시즌 잉글랜드 풋볼리그 최고의 선수라는 영광을 누렸다.
이러한 활약은 이후로도 이어져 80-81시즌 리그 13골 7어시, 81-82시즌 리그 14골 6어시를 기록하며 2시즌 연속 공격포인트 20개를 쌓았고 특히 이 2시즌간 시즌당 20골 이상씩을 집어넣으며 미들라이커로서의 면모를 뽐내기도 했다.
80-81시즌 유럽 축구 최고의 강호 레알 마드리드와의 유로피언컵 결승전에서도 출전해 밥 페이즐리 감독의 3번의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모두 선발출전했다. 특히 해당시즌 유로피언컵에서 6골로 득점왕을 수상하며 팀의 유로피언컵 우승을 이끌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30대가 된 맥더못은 당시 유럽 최고의 팀이었던 리버풀에서 더이상 1군 주전자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친정팀이었던 뉴캐슬로 돌아갔다.[1]
리버풀에서의 기록은 329경기 출전, 81골 57어시스트였다.
뉴캐슬에서 두 시즌간 리그 74경기 12골을 기록한 맷더못은 이후 코크 시티를 거쳐 키프로스의 아포엘로 이적했고, 현역은퇴를 선언했다.
리버풀시절 동료였던 '킹케니' 케니 달글리시는 자서전에서 맥더못을 칭찬했는데, 믿을 수 없는 체력을 가진 동시에 헌신적이었고, 시야와 패스마저도 탁월해 자신이 침투해 들어가면 이미 그가 패스한 공이 자기 발앞에 있었다고 언급하며 그를 찬사했다.
3. 국가대표 경력
리버풀에서의 활약으로 맥더못은 삼사자 군단의 일원으로 뽑혔고, 77년 9월 스위스와의 친선전에서 풀타임을 뛰며 데뷔전을 치뤘다.80년 유로 당시 대표팀에 승선한 맥더못은 2경기 출전했지만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는 못했고, 82년 스페인 월드컵 예선 노르웨이전에서 멀티골을 넣으며 국가대표 데뷔골을 기록했다.
이후 월드컵 본선 대표팀에 승선했지만 1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이후로 국가대표팀에 불리지 못했다.
4. 플레이스타일
밥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패스 앤 무브를 강조한, 필드 위의 모든 선수들이 4-4-1-1 전술을 기반으로 유동적인 움직임을 가져가길 원했다. 이 전술에서 맥더모트는 수네스와 함께 투 미들을 형성했는데, 기본적으로 두 선수 모두 엄청난 활동량을 기반으로 경기장 전체를 뛰어다니는 박투박 유형의 선수였다.굳이 스타일을 세부적으로 나누자면 수네스는 좀 더 밑으로 내려와 포백앞에서 수비진을 보호하고 패스 앤 무브를 통해 상대 수비라인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거나 템포를 조절하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했고, 맥더못은 좀 더 위쪽의 공격진영에서 활동하며 상대 수비의 빈틈을 찾아내 침투하거나 공격수를 향해 바로 킬패스를 찔러 넣어주는 공격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후대의 스티븐 제라드가 2000년대 중반 프리미어리그에서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2]
그 덕에 맥더못은 리버풀에서 보낸 시즌 중 3시즌간 리그서 두 자릿수 골을 기록할 수 있었고, 이 중 2시즌간 시즌 20골 이상을 넣는 미들라이커로서의 능력을 뽐내기도 했다. 비록 주목도는 4명의 미드필더의 중축을 담당했던 수네스에 비해 떨어졌지만, 득점력은 수네스보다 뛰어나 수네스도 받지못한 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5. 지도자 경력
선수 현역시절 리버풀에서의 인연은 지도자 경력에서도 이어졌다.뉴캐슬 코치 1기 시절에는 리버풀 현역시절 전 동료인 케빈 키건과 케니 달글리시를 감독으로 보필했다.
이후 셀틱시절에는 후배인 존 반스를 감독으로 보필했고, 반스가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후에는 뉴캐슬 시절에 이어 다시 킹 케니와 함께 팀을 이끌었다.
뉴캐슬 코치 2기 시절에는 현역시절 함께 리버풀의 중원을 구성했던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과 다시 만났으며, 수네스가 경질되자 1기 시절과 마찬가지로 중도부임한 키건감독을 보필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73~1974, 1982~1984)
- 텍사코컵: 1973-74
- 앵글로이탈리아컵: 1973-74
- 리버풀 FC (1974~1982)
- 아포엘 FC (1985~1987)
- 키프로스 퍼스트 디비전: 1985-86
- 키프로스 슈퍼컵: 1986
6.2. 개인 수상
- BBC 올해의 골: 1976-77
- PFA 올해의 팀: 1979-80
- PFA 올해의 선수: 1979-80
- FWA 올해의 선수: 1979-80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80-81
7. 여담
2021년 8월 22일, 치매 진단을 받았다.원투펀치에서 한준희 해설위원이 좋아했던 선수라고 언급한바있다.
[1]
이는 덕장으로 알려진 페이즐리의 냉혹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임감독 샹클리가 리빌딩에 있어 주저함을 보여, 리버풀이 한동안 고생하는 것을 코치로서 지켜본 페이즐리는 본인이 감독이 된 후 리버풀 레전드인 존 토샥, 클레멘스와 같은 선수들이 더이상 전성기 폼이 아니라고 생각되자 곧바로 방출시키는 과감함을 보여줬고, 맥더못도 예외는 아니었다.
[2]
제라드의 커리어 하이인 2000년대 후반 제토라인 절정시기의 경우, 세컨 스트라이커 포지션에서 뛰었던 케니 달글리시와 더 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