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6:25

가정 전투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제갈량의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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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2.1. 가정 전투의 중요성 2.2. 마속의 실패
2.2.1. 정리 - 마속은 왜 실패했나?
3. 곽충삼사

1. 개요

제갈량의 1차 북벌 중 벌어진 전투이다. 본 문서에서는 1차 북벌 전체를 서술한다.

2.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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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년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위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제갈량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227년에 그 유명한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을 개시한다. 제갈량이 5년간 뼈빠지게 육성한 촉군의 규모는 생각 외로 상당했던 듯한데 후주전 주석 제갈량집에 실린 유선의 하조인 '벌위조'에서는 북벌군의 규모를 20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한진춘추에도 제갈량이 언급하길 이 지역에서 촉군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각각 유선과 제갈량 본인의 언급인 데다 위략에도 당시 관중-농서 지방에는 촉군에 대한 방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력상 촉군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거기에 벌위조에서는 양주의 여러 국왕들이 군대를 파견해 도왔다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말한 국왕들이란 씨족장들로서 훗날까지 위나라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촉한과 이 지역 이민족인 강족과의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곽회가 이후 촉의 북벌에 호응하던 농서의 강족들을 격파한 사례가 있다.

이어서 228년 봄,[1] 미리 촉군 전체가 기곡으로 진출한다는 헛소문을 낸 이후 조운이 별동대를 이끌고 기곡으로 진출한다. 조운이 장안 등 옹주의 동쪽을 노리는 움직임을 취하자 옹주군 중 주력을 이끌던 조진의 본대가 즉각 조예의 명을 받아 미현으로 출동 조운과 맞선다. 하지만 이는 위군의 조진군을 돌리려는 훼이크였다. 그 사이 제갈량의 본대는 반대편인 서쪽으로 돌아 기산을 통해 옹주의 서쪽으로 진출한 것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2] 천수, 안정, 남안 3군이 이에 호응하여 순식간에 촉군에게 넘어가고 말았고 양주의 농서군도 동요하여 태수 유초가 한 달 내에 위나라의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관리와 주민들이 항복한다고 해버린 상태였다. 이로 인해 조운에게 붙잡혀 있는 기곡의 조진 서쪽으로 남아 있는 위군의 세력은 상규에 주둔한 곽회, 그리고 양주(서량)에 주둔한 서막만 남게 되었다. 당시 제갈량의 전략은 이렇다.

(1) 조운이 기곡에서 조진의 주력을 유인
(2) 제갈량이 기산으로 우회해 옹주 서부의 거점들을 점령
(3) 옹주 동부에 있는 위군 전력을 협격하여 격파
(4) 본래 위나라의 지배력이 강하지 않았던 관서-관중 지역 전체를 병탄
(5) 최종적으로는 장안으로 진격[3][4]

파일:1차북벌.png
'중국역대전쟁사'에 나오는 1차 북벌의 지도를 보면 조운은 북쪽(포야도)까지 진출하여 진창과 미를 노리는 형세를 갖춘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제갈량 본군은 기산과 천수 서현, 상규 인근에 머물면서 옹주 각지에 병력을 파견하여 농서 지역을 진압하고 가정에 마속을 파견해 그곳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역대전쟁사의 설명에 따르면 조운과 등지는 기곡에서 방어전을 펼쳤다는 식으로 언급되어있는데, 후일 조운이 '적안의 군수물자를 보관하다가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라'고 말한 촉한 영토 내 적안이 기곡 북쪽에 있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역대전쟁사에선 여기서 기곡의 설명으로 포야도 중 태백령의 서쪽 언덕 또는 고개에 있다고 나와 있다. 이는 포야도(남쪽 포중에서 출발하여 븍쪽 오장원으로 나오는 길을 말한다고 이해하면 된다)의 포중 정북쪽에 위치한다. 즉, 저 적안을 기준으로 북쪽 촉과 위의 경계선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적안 기준으로 관중 방향으로 기곡 전투가 있다고 보면 된다.

이후 제갈량의 본대는 천수에 주둔해 당시 북벌의 핵심이었던 가정을 점거하기 위해 선봉을 보낸다. 가정을 점거한다는 건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가정을 점거함으로써 위군과의 대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촉군과 위군이 제대로 맞닥들일 수 있는 곳은 가정이 거의 유일하고 이 길목만 잘 지키면 그동안 제갈량의 본대가 옹, 양주를 확실히 점거할 수 있는 것. 여기에서 제갈량이 조운의 군대를 나눈 또 하나의 이유가 보이는데, 제갈량의 본대가 천수 등을 점령하는 사이 조진의 본대가 한중을 점거하는 뒷치기 상황을 예방하는 것이고 다른 이유는 조진의 본대가 미친 척하며 험한 산길을 통과해 천수로 향하는 변수를 모두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제갈량의 꼼꼼한 성격이 여기에서 잘 나타난다.

제갈량이 기산으로 진출하여 위수 이북의 천수, 남안, 안정 등을 기습 후 정리할 때에 가장 염려했던 것은 조진을 위시한 관중의 지원병력이 불시에 들이닥쳐 그의 뒤를 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관중에서 옹양주로 들어오는 루트는 크게 두 곳이 있었다. 위수 북쪽 통로와 남쪽 통로가 그것이다.
파일:한중고도.jpg
한중에서 옹양주, 관중으로 나가는 고도들과 각 지점을 정리한 지도
파일:위수확대.jpg
천수에서 흐르는 위수 지역을 확대한 지도

지도를 보면 진창성에서 위수를 따라 상규로 올라가는 코스가 최단거리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그림의 떡이었다. 진창과 상규 사이는 천변 양안이 급경사여서 인마의 통행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옹양주로 들어오려면 위수의 북쪽이나 남쪽으로 우회해야만 했는데 북쪽 루트가 바로 가정 소로이고 남쪽 루트는 진창에서 기곡이나 야곡으로 내려와 기산 쪽의 무도군을 경유해 상규로 들어가야만 하였다. 조운과 등지는 그 남쪽 루트를 막아 진창과 미성에 조진을 묶어둠으로써, 제갈량 본진의 뒤를 치지 못하도록 방비함은 물론, 한중을 보호하는 완충 역할까지 떠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마속이 가정을 무사히 지켜내고 옹양주를 말끔히 평정하였다면 그 다음 순서는 진창과 미성이었을 것이다. 그 두 곳까지 빼앗길 경우 부풍군 바로 위쪽에 안정군이 위치하는 만큼 장안이 바로 코앞이어서 관동이 진동함은 물론, 위나라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관중(장안)에서 농서로 넘어오는 큰 길은 지금까지도 가정을 통하는 그 길뿐이고(물론 작은 길도 있겠지만)제갈량이 천수로 가는 길이 기산도고 도로에서 군대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기산, 다음이 천수다. 게임처럼 그냥 길에다가 놔둔다고 군대가 있는 건 아니고 군대가 머무를 곳을 만들어야 하는데 1차가 기산이고 천수(상규)를 함락시키면 2차가 된다. 그 이후는 농서 쪽 서막 조지기부터 해서, 다지기를 해나갈 것이다.

또 제갈량의 의도대로 가정이 장합을 상대로 버티고 있는 그 기간 동안에 기곡에서 조진과 맞서는 조운과 등지의 부대, 그리고 가정에서 장합과 대치하는 마속 군이 위군이 전투력을 유지하면서 천수에서 촉군과 대치하고 있는 위군과 합류하는 걸 방해하는 동안, 서쪽의 천수, 남안, 그리고 한 달 후에 합류할 농서 현지 3개 군의 호족과 강, 저 등의 이민족들이 모이고, 가정 북동쪽을 진수하고 있는 안정군이 버텨주는 사이 제갈량 본대 자체가 수비전에 대비하여 포진 및 상규 함락으로 기타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위군을 맞이해 싸웠다면, 그때까지 점령한 지역을 비롯한 농우 일대, 양주까지 확고히 촉의 영토로 굳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는 옹양주 점거 뒤의 국경선을 확실히 긋기 위해서인데, 전쟁에선 점령도 중요하지만 점령 후의 방어 역시 너무나도 중요한 사항이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가정을 제대로 점거하면 가정의 루트와 함께 북쪽의 안정 진창, 그리고 위수의 험난한 지형이 방어선을 만들어주게 된다. 쉽게 말해 안정, 가정, 진창, 한중으로 이어지는 자연국경이 생기는 것. 제갈량의 북벌은 장안의 점령이 최고 목적이 아닌 옹양주를 갈라 대치하기 위한 의도가 가장 먼저 확실히 보인다.

이렇게 되면 촉한-조위 전선은 다음 세 가지 형태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1) 옹양주 겸병에는 성공하지만 이 이상 진격하여 장안을 점령하지는 못할 것이며, 촉나라와 위나라의 국경은 이대로 고착화 될 것이다.
(2) 단기적으로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제갈량이 천천히 군세를 확장시키기 시작하여 장안을 점령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3) 위나라가 크게 흔들리며 장안을 지나 파죽지세로 진군하며 사예를 뒤집었을 것이다.

오장원이나 진창에서 제대로 눌러앉을 수 있다면 2 이상이 실현이 가능하며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어찌 되었든 2를 해내면 자연스레 3이 된다. 이렇게 되면 손권 역시 조예의 뒤를 찔러 위나라가 양면전선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조예 사후 조위가 개막장이 되는 걸 생각하면 한동안 버틴 후 2-3 루트를 밟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옹양주 겸병만 성공하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제갈량이 몇 살이나 더 살 수 있냐가 최대 문제일 듯... 제갈량도 장기적인 변수 생성을 보고 들어간 것이라고 보면 일단 성공했으면 량주를 먹은 다음엔 결국 오와 다시금 동맹을 맺고 위를 견제했을 거라고 보인다. 옹양주를 겸병했으면 제갈량이 다시 거기서 몇 년 둔전하면서 영혼의 한타 병력을 모았다가 장안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위가 패배 후 국경이 안정되는 경우엔 반대로 내부적으로 알력이 강해질 것이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 비해 위가 약해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2까지만 가면 그 뒤는 모른다. 거기서 장안을 먹는 데 성공하고 사예로 가는 길을 뚫는다면 역사는 알 수 없게 전개 되었을 것이다.

촉-한중-옹양주-장안을 먹은 세력의 이점은 장안에서 방위선 긋고 국경선 고착하고 그 뒤에 늘어난 생산력을 기반으로 버텨볼 수준으로 뭉개고 있으면 중원에서 오는 공격은 막기가 쉽지만 반대로 중원으로 나아갈 때는 굳이 한 길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장안을 점령한다면 한나라 부흥의 대의 명분도 힘을 받는다. 손권이 합비 쪽을 두들기면 장안에서 완쪽으로 진군해서 허창 압박해도 되고 한왕조 부활한다는 명분으로 낙양으로 가도 되고...길은 많다. 위 입장에서 장안-사예를 지키기에 난이도가 상당히 높아지기 때문. 또 옹양주를 겸병하면 기병전력도 충분히 꾸릴 수가 있을 것인데 옹양주 세력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가정이면 잡거하고 있는 이민족만 끌어들여도 충분하다.[5]

어쨌거나 위나라의 대응은 다음과 같았다. 조진은 조예의 명으로 야곡으로 나와서 조운이 미와 진창으로 치고 나오는 군사를 막았다. 그 사이 옹주가 촉한에 넘어가자 조예는 장합으로 하여금 5만의 보기 병력을 이끌고 가정을 지나 촉에 넘어간 3군, 특히 천수 일대에서 이 지역을 삼키려 하고 있는 제갈량을 격파할 것을 명령한다. 3군만을 탈환할 것이었으면 가정 위에 있는 안정군부터 공격해야 하나 장합은 가정을 통해 천수로 바로 진격하는 것을 우선했다, 천수에 있는 제갈량을 몰아내지 않고는 3군을 되찾을 수 없고 안정군은 제갈량에 호응한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저길 공격하면 제갈량에게 시간을 주는 꼴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안정군 탈환은 마속이 격파되고 제갈량이 퇴각하고 조운이 후퇴한 다음에나 미현에 있던 조진이 실행한다. 또 위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창에서 바로 서남쪽 밑에 있는 산관으로 병력을 보내 촉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위진은 제갈량이 퇴각한 이후에나 장안에 도착했으므로 이 출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안에서 진창도, 기산도의 분기점까지 도달하는 게 제갈량이 기산도, 진창도 분기점에 도달하는 것보다 멀고 밑에서도 나오지만 당시 제갈량이 진창으로 통하는 남쪽 길인 수양소곡으로부터 이쪽 지역에 순찰병을 드나들게 했기 때문에 위진이 출발했다고 해도 제갈량이 3군(+농서군)을 정리하고 이를 눈치채고 방어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6]

어쨌거나 제갈량 또한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시간적/지리적으로 이곳을 선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마속에게 군대를 주어 장합을 저지하게 하고, 예비대로 열류성에 고상을 파견하여 대비를 단단히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제갈량의 결정적인 패착이 된다.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제갈량이 내린 명을 따르지 않고 군을 부적절하게 운영하다 장합에게 패한다. 장합전에 따르면 그는 성을 점거하지 않고 산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선봉이었던 왕평이 여러 차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정에 도착한 장합은 이를 보고 급수로를 끊은 후 들이쳐 마속을 궤멸시켰다. 열류성에서 가정을 백업하던 고상도 옹주 자사 곽회에게 진영이 격파당했고, 기산이 무너지자 기곡의 조운도 조진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 조진전에 따르면 조운의 의군을 상대로 미를 지키고 있던 조진이 마속이 가정에서 격파당한 후에 (조운과 대치하던 미에서) 안정 지역으로 움직여 월지성 등을 항복시켰다고 하므로 적어도 기곡 퇴각 시점은 가정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또, 조진전에는 그냥 마속 격파 이후 월지성으로 이동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 조운전을 보면 조진은 조운이 후퇴하자 곧바로 다른 쪽으로 이동한 게 아니라 조운군을 격멸하려는 자세를 취하나 조운은 잔도를 태우고 퇴각했다. 그 덕에 큰 피해는 입지 않았으나 강등되었고 조진은 자유로워져서 월지성까지 직접 출정하게된다.

또한 위서 서막전에 따르면 서막이 부임하자마자 보낸 금성태수에게 남안의 병력은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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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군은 4곳의 전장에서 모두 패했으나, 사실상 마속의 패배와 동시에 제갈량의 1차 북벌은 끝났다. '대군이 기산과 기곡에서 적 군세보다 많았는데 패한 건 나의 불찰'이라는 말을 보면 당시 촉군이 기산에서 충분한 세를 가지고 해당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제갈량이 본대에 남긴 게 위연, 오의인데 나중 북벌에서 곽회나 비요의 군세를 격파한 전적이 있는 걸로 봐선 이때 당시 서막이나 곽회를 격파할 여력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서막은 남안 지역의 반란을 토벌했으나 곽회가 이후 서쪽으로 이동해 강족 유력자인 당제를 농서군에서 격파한 공으로 공훈 포상에서 건위장군에 오른 것만 봐도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한) 해당 지역의 강족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했다고 보기 어렵다. 애당초 서막이 관할하는 양주의 농서군 지역도 삼군이 호응하자 불안에 떨었고 해당지역 태수인 유초가 촉한군에게, 한 달간 위나라의 지원군이 오지 않으면 농서군 관리와 주민들은 항복할 것이라고 통보까지 해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10일 만에 마속이 격파되고 장합의 지원군이 와 제갈량이 퇴각하는데 만약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3군이 아니라 옹양의 4군이 넘어왔을 수도 있었던 것. 당시 제갈량이 천수군의 치소인 기현의 주민들을 맞이하기도 전에 퇴각했어야 했던 만큼 당시 상황이 그렇게 급박하였고 시간이 무턱대고 흐른다면 서막의 양주 장악도 한계가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상규에 있던 곽회가[7] 사방의 촉군 호응에 고립된 상황이었고 바로 앞인 기산과 천수군 서현에 있던 제갈량 본대를 무시하고 바로 이동해서 열류성에 가있는 고상의 진영을 격파할 수는 없다. 당시 옹주 서편에서는 서막, 곽회밖에 위군이 없었고 제갈량이 천수, 남안, 안정에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되었을 때다. 곽회는 당시 천수군 상규현에 틀어박혀 있어서 천수 서현에 있던 제갈량을 견제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곽회는 이 당시 천수군의 처소인 기현까지 포기하고 상규로 급하게 내달렸고 사방에 퍼져 있는 제갈량의 군이 상규 북쪽으로 이동하는 걸 방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곽회가 상규를 나와 열류성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장합이 가정을 돌파하면서부터라고 봐야하며 곽회가 제갈량의 군이 있는데도 서쪽으로 이동해 당제를 격파할 수는 없기에 장합이 가정을 돌파하고 촉군이 무너진 상황에서야 이들을 격파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8] 실제 곽회가 1차 북벌을 막은 공으로 포상을 받은 것도 고상 격파 후 이어 당제 격파의 공으로 건위장군이 된 것이고 조예의 조서에서도 마속, 고상 격파는 왕사(왕의 군대)를 이끌었던 장수(장합)의 파견의 공이라고 돌리고 있다.[9]

즉, 상규를 빼앗기면 곽회 자신과 옹주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거길 비울수가 없던 것이다. 핵심은 곽회가 제갈량이 고상, 마속을 각각 열류성, 가정으로 보낼 걸 알고 있었다면 자기가 거길 먼저 선점해야지 이미 성으로 들어가고 진지 구축이 완료된 상황에서 뒷북 칠 이유가 없고 그렇게 된 이유는 저기 위에서 보이는 제갈량의 1차 북벌 지도에서처럼 이미 상규 주변이 제갈량의 군대로 장악된 와중에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갈량이 눈앞에 있는데 상규를 비우면 바로 기산에 있던 제갈량이 상규를 차지할 것이고 곽회는 천수, 안정, 남안 삼군이 모두 배반한 상황에서 근거지도 없이 고립될 수가 있다. 따라서 곽회전에도 장합이 가정을 친 다음에야 곽회가 열류성을 친 기록이 나왔다는 것이다. 제갈량이 천수(상규)를 노림이 확실하니, 못 움직인 거라고 추측해도 된다.

어쨌거나 제갈량은 자신을 포함한, 본대 병력의 퇴로가 완전히 끊기기 전에 한 신속하게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정이 뚫리면 아직 점령도 다 하지 못한 천수에서 위군을 맞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직 천수지역을 촉의 영역으로 다지지도 못한 상태인 만큼 천수가 가정보다 수비하기도 어렵고 이미 선봉이 대파로 꺾여 사기가 떨어지고 장합의 대군에 농서에 남은 위군까지 협공에 가세한다면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불리하기에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왕평전에서는 병사들이 산산히 흩어졌다고 하고 명제기, 장합전에도 모두 대파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정의 피해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곽충오사 중 곽충 4사엔 제갈량이 수천명을 약탈하고 강유를 사로잡아 촉인들이 축하했지만 제갈량이 정색하고 "널리 하늘 아래 한(漢)의 백성이 아닌 이가 없는데, 국가의 위력이 미치지 못해 백성들이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의 주둥이에서 고통받도록 하고 있소. 한 사람이 죽어도 모두 나의 죄인데, 이 정도 일로 서로 축하한다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배송지에 따르면 제갈량이 퇴각하면서 서현[10]의 1천 가구를 뽑아(拔) 돌아왔음에도 이 손실을 보충하기엔 부족했고 제갈량이 이미 위를 병탄하려 함은 다 알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냐며 이 기록을 비판한다.[11] 다만 가정의 피해가 컸어도 그나마 수습이 가능했던 것은 왕평의 공이 컸는데 촉서 왕평전에 따르면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 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장합이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왕평은 천천히 여러 군영의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두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되돌아왔다.'라고 적혀있다. 기곡에서는 조운이 몸소 부대의 후미를 막았기 때문에 병력이나 물자의 손실은 패배에 비하면 적었다. 대체로 전투에서는 큰 이변이 없는 한 퇴각할 때의 피해가 가장 심각하며 또 공격받기에도 좋다.

3군의 호응을 받았으나 데려온 것은 점령했던 천수군 서현의 인구 천여 가구밖에 없었다. 큰 패배인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제갈량은 스스로 벼슬을 깎아 우장군으로 강등된다. 그리고 군법에 따라 마속을 참했다. 삼국지 연의 때문에 단순히 명령을 무시하고 패전한 책임으로 참수된 걸로 나오기에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사 기록에는 마속은 패배하자 도주하다가 잡혀서 죽게되는데 기록이 서로 상충해서 옥에서 죽은 건지 잡혀와서 처형을 시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사건이 바로 사자성어인 읍참마속의 기원이 된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은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오자, 이후 병사와 장수의 수를 줄였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촉의 1차 북벌은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북벌이었으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결국 1차 북벌의 실패로 촉이 가졌던 기습의 이점은 사라지고 이후 제갈량은 매 북벌마다 위의 강력한 전략적 방어에 맞닥뜨린다.

이런 패배 중에도 제갈량에게는 강유라는 큰 인재를 얻는 소득[12]은 있었으나 아직 이 시점에서 강유의 위상은 옹주 3군에서 따라 온 여러 투항자들 가운데 제갈량에게 촉망받는 기대주 정도였다. 실제로 제갈량 사후의 직속 후계자 위치는 내정/군정 모두 장완이었고, 장완이 죽은 후 그 후임자는 비의였다. 그리고 비의가 253년 곽순에게 암살된 후 그의 후임자는 없었다. 내정에서는 그의 상서령직을 이어받은 진지가 있었지만, 그가 맡았던 대장군직은 256년까지 비게 된다. 강유가 대장군이 된 것은 256년, 적도 전투에서 왕경의 군사를 대파한 공으로 대장군이 된 것이다. 강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대장군이 된 것이지, 처음부터 제갈량의 후계자로 낙점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제갈량이 강유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계자인 장완 등에게 편지를 보내 훌륭한 인재라며 열심히 그를 칭찬해 항장인 강유가 촉한 정계에서 순조롭게 높은 위치에 편입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것은 강유를 당장 후계자로 삼는다는 것보다 장완 이후 촉한을 이끌만한 차세대 유망주 중 하나로 본 것에 가까울 것이다.[13]

2.1. 가정 전투의 중요성

실제 가정고전장의 위치
가정의 옛 전장터
마속과 장합의 본진 예상도
흔히 가정성이 있던 곳을 육반산맥(류판산맥)[14] 높은 곳으로 가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정성이 있었던 위치는 육반산맥 한 가운데가 아니라, 산맥에서 서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분지 내 골짜기이다. 위 링크에서 실제 위치를 알 수 있다. 사실 육반산맥 한 가운데 높은 곳이었다면 오히려 마속처럼 고립되었을 확률도 높다. 마속이 실제 가정 인근 산에 오른 것과 똑같은 형세가 될 수도 있으니까.[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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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료대로 물과 성을 버리고 남쪽의 산에 진을 쳤을 경우 가정에서의 마속과 장합의 군 배치. 서쪽에 악양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옛 이름은 가천정, 한가성.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가정은 곧 동한(후한)시기의 약양고성으로 당시에는 악양현이었다.

위나라의 장안에서 출발한 군대가 천수를 구원하기 위해서 직선거리로 가장 빠른 길은 위수 타고 넘어가기가 있는데, 이 길의 경사 문제로 갈 수 없다. 그렇다고 더 북쪽으로 가면 돌아가야 하는게 심하다. 위에 나온 중국역대전쟁사와 그 지도에 따르면 장합은 옹(雍)과 견(汧)을 지났고 농성(隴城, 농현)에서 가정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장합군의 행군경로를 보자면 이들의 목적은 당연히 제갈량 북벌군 격파일 텐데 장안에서 천수로 일직선상으로 가지 못하고 가정까지 곡선을 그리며 진군하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상황의 위급함을 볼 때 이 경로가 최단 경로임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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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류성 위치의 근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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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른 열류성의 대략적 위치, 보면 청수현 북쪽의 농현(농성) 근처인데 가정을 백업할 뿐만 아니라 혹시나 장합이 올지 모르는 농관고도나 가정 남쪽 길을 막고, 천수를 둘러싸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농성(현재의 청수현 북쪽 장자촨 후이족 자치현) 인근 실제로 농현(농성)은 가정고전장과 21km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謖違亮節度,舉措煩擾,舍水上山,不下據城。張合絕其汲道,擊,大破之,士卒離散。亮進無所據,乃拔西縣千余家還漢人。
자치통감 70권의 내용이다. 마속이 제갈량을 떠나 절도를 어기고 행동거지가 번잡스러웠으며 물을 버리고 등산하다가 장합한테 격파당했다가 앞의 내용이고, 뒤를 보면 제갈량이 철군할 때 서현 천여 가구를 데려갔다가 나온다. 그리고 제갈량(亮)이 나아가는데(進) 의지 할 장소(所據)가 없다(無)가 철군의 이유이다. 기산은 잠시 군대를 두었지만, 의지하고 더 나아가기 위한 장소로는 천수(상규)가 제일 좋았으나, 확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이 가정(街亭)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리 떨어져 있었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원자
즉, 가정 전투는 단순하게 '마속 vs 장합'이 아닌 '제갈량의 선봉 vs 장합'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래 자료에서도 마속을 '제갈량의 선봉'이었다고 쓰는 사료가 많다. 이는 작전상 기산 진출 → 상규의 점령 → 가정에서 직접 대치 후 타군으로 지역 다지기(또는 위 대군과의 결전)이어야 하나 예상보다 빠른 장합의 도착으로 상규 점령을 이후로 미루고 장합과의 대치를 먼저로 본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과적으로는 가정의 패배로 의지할 장소가 없이 퇴각했다는 것은 상규를 점령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주어졌다면 설령 가정이 돌파 당하더라도 상규에서 위수 방어를 통한 대치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것.

자치통감을 보면 마속에게 제군(여러 부대)를 감독하게 하여 선봉으로 가정에서 싸우라고 보냈다고 한다. 즉, 제갈량은 동쪽 가정을 통해 오는 위나라의 군세를 마속의 선봉대[16]를 가정에 투입해 처음부터 싸우게 할 작정이었고 실제로 장합은 다른 길이 아니라 가정길로 가는 것을 선택했으며 이는 제갈량의 판단이 들어 맞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거의 모든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언이며 마속이 장합과 맞서는 선봉으로서, 육반산맥을 넘은 위군이 추가적인 진출을 시도할 때 결전의 장소로 촉한 수뇌부와 위나라 수뇌부 양측 모두 예측하고 있던 가정에 와서 성을 점거하지도 않고, 물을 버리고 산에 올라 부적절한 운용으로 패배했던 것도 모든 사료에서 교차 검증된다. 제갈량은 자신이 남긴 저술인 병요에서 "무릇 군대가 행군을 하고 진영을 구축할 때는 먼저 심복(지혜와 언변을 갖춘 간첩)이나 향도(그 마을 사람을 사용하는 것)를 보내 전방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라고 신신당부 했다. 따라서 촉군의 선봉이 제갈량의 병요에 맞는 충분한 군 운용을 했다면 이런 정찰을 통해 제갈량이 보낸 목적지 가정이 적의 진출방향인 것을 알고 장합군이 넘어오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제갈량은 마속이라면 가정에서 충분히 싸울 수 있으리라 봤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위에서 추천하던 인물이 위연이나 오의와 같은 촉군 최고위급 장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속에게 주어진 임무는 기본적인 전술적 우위를 토대로 기초적으로 주어진 절도를 준수하면서 적군의 움직임에 따라 자주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해야 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갈량이 따로 절도까지 마련해서 준 것도 이런 기본적인 논의에 바탕을 두고 마속이 그 일을 해주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촉군의 인재상황이나 병력 규모상, 정확히 시키는 대로만 하는 편장 하나를 보낸 것이 아니라 마속 휘하에 왕평 이외에도 여러 부장을 딸려 보낸 것도 그 일원이었을 것이다. 조운 조진군을 막아주고 있는 사이, 가정과 그 인근도 틀어막고 혹시라도 장합이 다른 도로를 이용해 우회하면 뒤를 끊으면서 고사시켜 버리고, 제갈량은 그 사이에 상규를 함락해 천수 다지기를 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해야할 마속의 역할은 아주 뚜렷했는데, 바로 기곡에서 조운/등지가 했던 그 역할이다. 최대한 전면전을 피하고 요지를 점령해 제갈량이 옹양을 안돈할 때까지 시간을 끌며 가정부터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후방까지 이중, 삼중으로 지연방어를 하든가, 대치 상황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장합이 혹시나 다른 길로 이동하려고 하면 먼저 가서 방어를 하든가 그 뒤를 후려치는 역할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가정성은 위군이 육반산맥을 넘는 것을 막는 위치가 아니라 육반산맥을 넘은 위군이 추가적인 진출을 시도할 때, 상황에 따라 적에 맞서 길을 막거나 병력을 이끌고 후방을 끊어 진출을 저지하기 알맞은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가정성 진수는 길을 막을 때 제갈량의 절도를 따라서 끊임없이 정보를 취득하여 각 지역에 올 수 있는 위군 병력을 예상하고 능동적으로 막아야 하는데다 상황에 맞춰 장합군을 격파하거나 유격하는 등의 전술적 변화를 유연하게 실시간으로 판단하여야 했으므로 흔히 오해하듯 아무 장수나 시켜도 되는 쉬운 역할은 아니였다.

가정은 1차 북벌의 핵심 방어지역이며 최우선으로 적이 올 가능성이 높은 곳이라는 건 확실했다. 실제로 장합은 육반산맥을 넘어선 후 농성을 거쳐 좁은 가정으로 진입했고 이는 애당초 마속을 천수로 통하는 길 중 방어하기 쉬운 가정으로 먼저 보낸 제갈량의 예상대로였을 것이다. 왜냐면 먼저 가정을 장악한 촉군의 선봉을 피해 농성에서 설령 다른 길로 간다고 해도 결국엔 가정, 악양에 주둔 중인 촉군의 선봉이자 후방의 적인 마속이 두고 볼 리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군대가 칭하길 총 20만의 군대였다는 사서의 기록이 있었고 가정에서 왕평이 말 그대로 대패를 당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해 무사귀환했음에도 1천 호 이상의 전사 피해가 났다는 점을 보면 마속의 군대도 상당한 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리 시급한 상황이라지만 빠른 기동 중에 배후의 적을 두고 우회하다간 장합이 육반산맥을 나올 때부터 마속이 정찰병으로 어느쪽으로 갈지 알아차려 처음부터 그곳의 좁은 길을 막거나, 후미를 끊고 추격하여 치중을 공격하면서 보급선을 마르게 하거나, 급히 빠져나가는 병력의 배후에서 대놓고 추격해 공격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장합 자신이 위험해 질 수가 있다.

가정에 마속이 있는 이상 다른 길은 거리상 별동대의 보급 및 연락 체계 모두 위험도가 높아 진군루트가 가정에 있는 마속 정면 격파로 고정될 수밖에 없었는데 가정의 길은 다른 길과 달리 규모가 어찌되었던 '성'이라는 방어적 이점이 있었다. 또 장합이 알았을지는 의문이지만 청수현 북쪽 열유성에선 고상이 백업을 하며 아랫쪽 길을 막고 있어 아래쪽으로 갈 수도 없다. 사실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 상대로 시간을 끄는 사이 열유성에서 고상이 나와 장합의 뒤를 끊을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17] 장합의 가정 진군도 안전하지만은 않았다는 게...장합이 5만 병력을 그대로 가정성으로 진군시킨 것은 여러 가능성을 상의해보고 마속의 선봉군이 살아있는 한 계속 시간을 지연시키러 들 것이니 우선 마속의 가정군을 전력으로 격멸해야 한다고 판단해 결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촉군 측에서 준비했던 것이었으니 마속 측이 '정상적인' 대응을 했다면 이 공성전 또한 시간을 끄는 것이 되었겠으나...

게다가 가정까지 산맥을 넘어 곡선을 그리며 진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급하게 움직이는 이 군대는 치중에 신경쓰기보단 빠르게 천수를 구원하기 위해 신속한 기동을 우선하면서 직선거리로 가지 못하고 산맥을 넘어 돌아서가기 때문에 보급선에 문제가 생겨 보급에 취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속이 성에서 버티거나 의지하면서 5만이나 되는 보병과 기병이 합쳐진 대군의 식량과 마초의 보급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지연작전을 폈다면 장합 입장에서도 난감했을 것이다.

2.2. 마속의 실패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선두에서 제군(諸軍)을 이끌게 해 가정(街亭)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당했다.
제갈량전
건흥(建興) 6년, 참군(參軍) 마속(馬謖)에게 소속되어 선봉(先鋒)이 되었다. 마속은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으므로 왕평은 계속 마속에게 규간(規諫, 옳은 도리로 간함)하였으나 마속이 이를 쓰지 못하여 가정(街亭)에서 크게 패하였다.
왕평전
제갈량의 장수인 마속(馬謖)과 가정(街亭)에서 맞붙었다. 마속은 험한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은 그 급도(汲道-용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대파했다.
장합전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작전명령)를 어기고, (군사)행동이(擧措) 매우 번거롭고 어지러웠으며(煩擾),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니, 내려가서 성(城)을 점거하여 (지형의) 이점(利點)을 다투지 아니하였다. 비장(裨將) 왕평(王平)이 힘써 간하였으나 (마속이) 쓰지 않으니, 마침내 대패(大敗)하여 사졸(士卒)이 모조리 궤멸(潰滅)하였다.
소상(蕭常) 속후한서
마속은 제갈량의 절제(節制-작전명령)을 어겼고, (군사)행동이 번잡스럽고 어지러웠으며,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니, 내려가 성을 점거하지 아니하였다. 장합이 그 급도(汲道-물을 수송하는 길)을 끊고 이내 공격하니, 마속은 패주하고 사졸은 흩어졌다.
학경(郝經) 속후한서
마속에게 여러 부대를 감독하여 선봉에 서도록 하면서 장합과 가정에서 싸우게 하였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를 지키지 아니하면서 행동거지(舉措)가 번요(煩擾-번거롭고 어지러움, 혹은 혼란스러움)했으며, 물을 버리고 산을 올라, 아래에 있는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이 그 급도를 끊고 공격해 대파하니 (마속의) 병사들이 이산(離散-구성원이 헤어져 흩어짐)되었다.
자치통감
마속은 뜻밖에 (제갈량의) 절제(節制)를 일부러 어기고 산 남쪽을 의지하고 아래의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이 그 급도를 끊으니 마속의 진중에는 물이 없었고 이로 인해 대패했다.
중국역대전쟁사

그러나 제갈량의 바람과 달리 제1차 북벌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마속을 가정 전투로 보낸 것이 되고야 만다. 남만 정벌 당시에 마속이 제갈량에게 남만은 군사적 점령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조언을 제갈량에게 했고 제갈량도 이에 호응했다는 기록이 마속전에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마속은 나름대로의 능력이 있었고 이에 제갈량도 마속을 나름대로 총애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마속의 나이도 30대 후반이며, 각종 행정, 참모 경험도 있어서 절대 풋내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로서는 마속은 나이를 충분히 먹었다. 당장 마속의 선배격인 방통이 낙성에서, 친형인 마량이 이릉에서, 각각 유비와는 독립적으로 부대를 이끌다가 전사했을 때, 그들의 나이는 마속보다도 적었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으니 위연, 오의, 조운[18]등을 보내라고 하는 것이지,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참모로만 활동하고 지휘관으로서 기회를 안 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다. 당장 촉한에서 비슷한 사례로 당시 기곡에서 조운과 고생 중이던 중감군, 양무장군 등지의 예도 있었고 말이다.

가정으로 파견할 장수로 거론된 인물은 위연, 오의 등이였지만, 제갈량은 마속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거라고 판단한건지, 아니면 본대에 위연, 오의를 남겨서 후방을 빨리 정리하는게 더 낫다고 판단한건지, 마속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속이 지휘경험이 없음을 고려해서 왕평[19]을 포함해 부장을 4명이나 붙여주고, 백업으로 열류성에 고상을 주둔하게 하고, 행동 방침(절도)까지 가르쳐주며 가정으로 보냈다.[20] 그런데 설마 유능하고 전략에도 밝아 기대를 가지게 했던 마속이 실패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어처구니 없게 실패할 줄은 제갈량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갈량전과 왕평전, 장합전을 조합하면 제갈량이 명령한 게 장합과 가정에서 맞붙을 때 산에 올라서 장합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이 때문에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옳은 도리가 아니라며 왕평이 간했다는 사실, 물이 있고 지형을 지킬 수 있는 성을 점거하는게 지시 목적임을 알 수 있다. 마속이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고 산에 의지하자 장합이 용수로를 끊은 것이 패배의 원인이며 왕평도 마속의 산을 점거하는 전략이 아니라고 규간하였는데 여기서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겼다고 나온다. 그럼 결국 장합이 가정으로 진입할 시 물이 흘러 보급을 받을 수 있는 평지에 위치한 가정성을 점거하고 진을 튼튼히 해 버티라는 게 제갈량의 의도이자 명령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마속 본인 문서에도 나오지만 전군을 위로 올리지 않고 일부 부대만 기각지세로 산위에 올리고 협공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했다. 실제로 오늘날 가정 인근 산지는 위에 농지까지 있을 정도로 완만한 산인데 성을 점거하고 남는 시간에 일부 병력을 산에 올려 점거할 수 있다. 다만 장합전에는 분명 마속이 '험한 남산에 의지했다(謖依阻南山)'고 했기에 그 당시에는 험한 산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21] 어쨌거나 그랬다면 성, 산지라는 요충지, 유리한 지형과 물의 보급이라는 군사운용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전부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제갈량의 절도를 어긴 것 외에도 기본적인 식수의 공급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굳이 군사를 운용하기 번잡한 곳에 전군을 몰아넣은 것, 전투가 대패로 끝나자 도주한 것 등 그동안 마씨오상의 일원으로서 준걸이라고 평가받았던 인물이 이렇게 일선 지휘관으로서 전술적인 면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을 보면 참으로 아쉬운 부분.

마속을 보낸 이유는 요지를 막고 구원군 장합을 최대한 가정 인근에서 지연시킨 다음 숙장들을 이용해 바로 옹양주 일대를 빠르게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최훈은 삼국전투기에서 이 의견과 비슷하게 기산을 지키면서 제갈량이 미에 있는 조진 등을 치려고 했다고 보았다. 실제 제갈량의 편군이었던 위연과 오의는 2년 후 각각 양계와 남안에서 곽회와 비요를 털어버린다. 곽회야 농서 붙박이였고 비요의 본군이 농서군이나 관중 지원군이냐가 애매하지만 이를 볼 때 관중군의 지원이 없는 농서군은 제갈량과 휘하 장수들의 역량으로 충분히 제압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계와 강중은 양주 쪽 영토고 남안은 가정 쪽인데 편군이 여기까지 진출해 승리를 거뒀으니 1차 당시 제갈량이 있던 본군이 있던 곳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 관중군을 마속이 막는 것이 중요했는데... 양주를 통제할 인물로 서막이 있다고는 하나 이 사람은 군사적인 재능보단 행정 분야에 특화된 인재라고 보여지고 양주 역시 농서군의 예처럼 제갈량의 진군에 흔들리고 있었다. 즉 장안에서 대규모의 지원이 없는 한, 옹양의 겸병은 충분히 가능했다는 것이다. 마속은 남중 정벌 당시에도 전략적 식견을 보여준 적이 있으니 제갈량이 이 의미를 이해할 만한 인재라고 봤던 듯하다. 가정 수비와 장합군을 붙들어 놓는것은 1차 북벌의 핵심이며, 조운과 나눈 군대에서 최소한 2개 군대가 위나라에서 올건데, 장합이랑 병력수를 예측 못할 수가 없고 또한 남의 나라땅을 갔는데, 그 길을 그 군대가 모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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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전투도.

전술하였듯 마속의 역할은 분명했다. 최대한 전면전을 피하고 요지를 점령해 길을 막고 시간을 끌며 대치상황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장합이 가정말고 다른 길로 이동하려고 하거나 가정 대치 중 다른 길로 이동하려 들면 그 뒤를 후려치는 역할이다.[22]

그런데 위군보다 먼저 가정에 도착해 장합이 가정으로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마속은, 길을 막으라는 제갈량의 지시를 따르는 대신에 가정의 정상으로 올라가 진을 친다. 부장이었던 왕평은 가정 산지의 지형이 복잡해 병력 운용이 까다롭다는 이유로 마속에게 여러 차례 반대했으나 마속은 왕평의 진언을 무시한다. 결국 왕평은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따로 진을 쳐서, 이후 촉군이 위군에게 패퇴할 때 위군을 제지하여 시간을 벌고 군사들을 수습하는 공을 세워 승진하게 된다.

'왜 산에 올랐는가'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대답은 확실한 전과를 올려 장합이라는 까다로운 상대를 속히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것으로 보인다. 원래 장합이 가정으로 오면 그곳을 지키고 만에 하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장합의 뒤를 후려치거나 끊어버리며 장합을 묶어두는 게 마속의 제1작전목표였으나, 단지 지키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전과를 늘리기 위해 산 위에 자리를 잡고 장합이 오면 고지를 점령한 기세를 타고 쳐서 장합의 부대를 격멸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풀이 된다.

촉군 입장에서 1차 북벌은 매우 순조로운 상황이었고 제갈량의 전략부터가 기곡에 의군을 보내 적의 총사령관을 묶어두는 기책을 쓰고 옹, 양주를 석권하는 완벽한 기습이었으니 마속 역시 이를 보고 특출한 기책으로 장합의 군세를 격멸하여 큰 공을 세우고자 욕심이 들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5만이나 되는 백전노장 장합의 군대를 붙잡아 두는건 계속해서 상대방의 병력 이동을 체크하고 품이 많이 들고 지난한 군대 통솔과 전술적 수고가 들어가는 반면, 장합을 여기서 격멸하면 손쉽게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마침 마속 자신이 있는 가정의 지형은 촉군에게 전술적 우위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나름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제갈량의 판단은 마속의 욕심과는 달랐다. 냉정하게 전황을 보고 '기책으로 기습을 성공시켰으니 이제는 진지하게 나올 위군 상대로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는 대 논리였다. 그러나 제갈량의 의견을 믿고 따른 게, 아직 부장급이었던 왕평 뿐이었던 것이 비극이었다.

반면 장합 입장에서 본다면, '천하의 제갈량이 상대인데 가정을 지키는 병력이 하나도 없다?' 당연히 어딘가 복병이 있을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장합이 지형이 번잡한 산에 매복한다는 것을 확인 한 이상, 도망갈 곳이 없으니 들킬 경우 리스크는 어마어마할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장합군의 기병을 의식하고 산에 올라 기병을 막으려 했다는 설도 있지만, 애시당초 장합의 부대는 기병만 있는 부대가 아니라 보병과 기병이 섞인 부대라고 분명히 사서에 나온다. 기병이 산을 오르지 못한다면 기본적인 물 보급도 안 되니 보병으로, 산을 오를 필요도 없이 포위해서 말려 죽이면 그만이다. 역시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가정이 넓은 벌판도 아닌 이상, 기병을 의식했다면 성을 점거하고 기병이 힘을 못 쓰는 공성전으로 가는 방법도 있었다. 산에서는 마속군도 똑같이 번거로울 뿐더러 보급에도 난점이 많았다. 몽땅 올라갈 필요 없이 일부만 산에 올려 견제만 해도 된다. 단순히 '기병'만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에 대응한답시고 전군을 물 보급도 금방 끊기도 움직이기도 어려운 위치에 있는 산 위로 올라간 거라면 기본적인 정찰이나 지형파악, 적군의 상황파악도 못하는 머저리라고밖에 볼 수 없다. 설령 장합군이 기병만 있었다고 해도 똑같이 산 아래에서 물 보급을 끊고 고사할 때까지 기다려도 되는 상황이다.

당시 촉군은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이 지역에 대해서 자세히 살폈다. 일단 기만술로 위군의 방어가 허술한 지역을 재빨리 찔러 옹주를 순식간에 장악한 다음 충분한 논의와 계획, 넉넉하게 방어 진지를 구축할 시간을 가지고 가정을 먼저 선점해 그에 대한 대비를 단단히 하려 준비했던 대목이 정사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우선 가정에 병력을 보낼 때 제갈량이 휘하 장수들과 계속 논의를 하여 결국 마속을 파견하는 것으로 의견을 정했고, 제갈량은 이 과정에서 특별히 가정에 도착하면 마속 부대가 장합부대를 상대해야 할 때 쓸 전술적인 세부 지시까지 자세히 당부할 정도로 신경을 썼으며, 열류성에는 따로 고상까지 파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이후 가정에 도착한 마속 부대가 가정에서 산 위에 진을 치는데, 이 과정에서 왕평이 마속이 옳은 도리를 들어서 (제갈량의 전술 지시를 어기는 것을) 수차례 지속적으로 반대하면서 간언했으나 마속이 듣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즉 마속의 부대가 가정에 도착하고 나서 진을 설치할 때까지 어떤 군사적 행동을 취할 것인가 마속과 부장들 간에 꽤 지속적으로 회의가 벌어졌음을 뜻한다. 또 마속은 비교적 좁은 길에서 막을 있는 성과 요지를 버리고 산 위에다가 진을 치는데[23] 상식적으로도 군대가 평지에 진을 치는 것보다 군장을 매고 이런 산 위에 올라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더 오랜 시간과 힘을 들여야 한다는 건 명백하다. 심지어 마속이 구축한 진지엔 그 산악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급도까지 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런 준비 상황이라면 원래 제갈량의 명령대로 일을 진행했다 가정 했을 시 더욱 탄탄한 진지가 더 일찍 구축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촉군에게는 위군을 방어할 시간적, 전술적인 우위가 있었는데 마속은 이를 내다버린 것이다. 공격보다 방어가 쉽다는 것은 필연적이고 촉군 입장에서 가정은 공격보단 방어지점으로 적당한 곳이었다.

제갈량의 명령이 "장합군 방어하라, 장합이 가정으로 오면 가정에 주둔후 거기서 방어하라" 정도였다면 왜 하필 마속만 이렇게 콕 집어 기술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당장 바로 열유성의 고상도 곽회한테 패배하였음에도 말이다. 이는 제갈량의 지시가 단순한 방어지시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는 방어, 차선으로는 지연, 만약의 경우 유격이라는 더 큰 전술적 목적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며,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다른 곳에 진을 치고 싸웠는데 너무나 쉽게 격파되어 시간도 끌어 주지 못하고 패전하였기 때문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즉 보통의 패전이 아닌 군령을 어긴 패전이었고, 그마저도 어떠한 전술적 목적마저도 달성하지 못한 완벽한 참패. 항상 군기와 상벌에 엄정했던 제갈량을 가까이서 봐왔기에 그 자리에서 패닉이 오고 탈영한 것일 터이다. 맨 처음에 말한 대로 제갈량의 이 명령은 한중에서 제갈량이 1년을 머물고 3군의 함락 뒤 나왔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불확실한 정보 토대위의 명령이라고 보기가 힘들다.

실제로 마속이 어처구니없이 대파되고도 왕평의 천 명 군사가 북을 두드리고 공습을 준비하는 듯한 페이크 모션을 취하자 장합이 쉽게 진군하지 못하고 주저했으며, 이를 틈타 왕평이 대파된 군세를 수습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그만큼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의 스페셜리스트인 왕평이 가정 인근의 지리와 제갈량의 절도를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장합에게 자신의 군세가 쉽게 발각되지 않는 지역에 진을 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수만의 군사를 거느린 장합 역시 가정의 지리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해 왕평의 불과 천 여명에 불과한 군사를 발견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마속의 본군을 격파하고도 혹시나 모를 복병에 대비해 함부로 대군을 이끌고도 공격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달리 생각하면, 마속이 전체 군세를 가지고 했다면 충분히 방어가 가능했다는 것. 그만큼 전투를 말아먹은 상태에서도 양측의 전술적, 지형적인 상황 파악면에서 촉군이 위군에게 앞섰기에 가능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제갈량이 적은 군대를 딸려 보낸 것도 아닌 것이 당시 마속에게 붙여준 부장들이 왕평을 비롯해 4명 정도 되었는데 왕평은 주장인 마속의 명을 거부하고도 부장의 권한으로 천여 명의 군사를 따로 동원해 다른 곳에 진을 칠 수 있었다. 따라서 주장인 마속이 이끄는 부대는 최소 그 몇 배는 된다고 봐야 한다. 1차 북벌에서 촉군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가정인데 '왕평이 패잔병을 수습하고 제갈량이 후퇴하면서 서현의 1천여 가(家)를 한중으로 데려 왔음에도 완전히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다'는 배송지의 기술이 있을 정도다. 이는 그만큼 제갈량이 마속에게 붙여준 군세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마속은 심지어 이 패배를 수습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도주까지 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줬고 이는 다른 부장들도 매한가지 상황이었다. 왕평이 정말 냉정하게 판단해 이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고 각 진영에 있던 패잔병을 일일이 무사히 수습했으니 망정이지[24] 그게 아니었으면 가정 전투는 촉군에게 더욱 끔찍한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산악전의 특성상 적군 도주 시 추격하더라도 생각보다 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경우가 드문데 산으로 뿔뿔히 흩어지면 적을 완전히 섬멸하기에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정 전투는 대파당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각 부대 간 이동이 산에 막혀 있어서 도주 및 퇴각로로써 상당히 불리했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군사를 움직이기 번잡한 곳에 진을 세웠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남산에 고립된 채 있다가 물 공급이 끊겨 최후의 항전으로 일제히 치달아 내려왔다가 학살당했다는 패턴도 가능하지만, 이러면 마속의 평가는 더욱 어두워진다. 물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은 짧고 즉각적이다. 그만큼 치명타이며 단기간 빠르게 싸울 기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큰데 마지막 기력을 짜내서 항전했다면 이건 안 봐도 비디오다. 거기에 모두 도륙났는데 정작 본인은 장억처럼 전장에서 죽지도 못하고 도주까지 했다. 답이 없는 것이다.

한편 원자의 서술에서는 '제갈량이 가정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리 떨어져 있었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라고 언급이 있다. 이 이야기는 '제갈량의 전군'이었던 마속이 격파되자 '제갈량의 둔영'을 이끌던 왕평이 마속의 구원을 포기하고 병사를 수습해 후퇴한 것을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꽤 높다. 원자의 이 서술은 왕평전에 나오는 '마속은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으므로 왕평은 계속 마속에게 간하였으나 마속이 이를 쓰지 못하여 가정(街亭)에서 크게 패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 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왕평은 천천히 여러 군영의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두고 장사(將士)들을 인솔하여 되돌아왔다.'과 합치하기 때문이다. 여러 기록을 보면 제갈량의 본대는 천수와 기산, 상규 인근에 대군으로 머물면서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기록에 대충 들어 맞는다고 할 수 있다.[25]

결국 마속이 패퇴하고 가정이 뚫리면서 천수, 상규 방면에 본진을 두었던 제갈량의 북벌 본대는 후퇴한다.

2.2.1. 정리 - 마속은 왜 실패했나?

본대와 꽤 거리 있는 가정에 마속을 주둔시킨 이유는 역시 장합군 저지말고 없다. 그리고 그 저지는 대치국면, 장기전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곽회전을 참고하면 마속을 백업하기 위해 고상군이 열유성에 주둔한다.

마속의 임무는 장합군 저지 및 장합군이 가정 인근을 벗어나지 못하게 최대한 붙들어 놓음이 틀림없으며 제갈량은 227년부터 1년동안 상주하여 직접 북벌을 기획하였고 이 과정에서 처음엔 주력이 상용과의 연계였더라고 천수, 안정, 남안 등 량주의 군사 이동경로, 현재 군사 배치 파악을 소홀히 하였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 3군이 제갈량에게 항복한 상황에서 아무리 서량이 위나라 홈그라운드라도 촉 역시 준비한 1년과 서량 현지 지역 세력의 항복으로 최소한 대군이 이동할만한 경로, 위나라 중앙군 지원 경로에서만큼은 위나라에 비해 정보가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조진이 이끄는 부대라면 모를까 장합이 이끄는 부대는 중앙군이 다수라고 볼 수 있는 측면에서 더더욱 그렇다.

이미 전투 시작전부터 고저차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선봉 부장이 말했다. 왕평전을 통해 우리는 이미 전투가 시작하기 전부터 마속이 왕평을 통해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다고 직언했다고 알 수 있다. 이 행동하기 번잡하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유추하는 마속이 산을 올라간 이유인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여 장합군을 공격하는 포지션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지적을 받고 배수진 전략을 위해 마속이 강행했다면 정말 등산바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에 앞서 장합군이 우회기동하여 산에서 평지인 마속군을 공격할수도 없다는 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우회기동해봤자 산에서 평지로 내려와야 하는데 마속이 척후만 잘 배치한다면 결국 산에서 내려오는 장합군은 능히 막을 수 있다. 척후만 잘 된다면 장합군이 내려올 방향에 병사들을 배치하여 대기시킬 수 있다. 산에서 이동하는 것보다 평지에서 이동하는 것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이 없어서 돌파해야 되는 마속군도 못 하는데 돌파하지 못하면 본진으로 돌아가면 되는 장합군이 돌파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마지막으로 애초에 주위 지형이 번잡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 어렵다면 장비한테 털릴 기억이 있는 장합이 그렇게 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인다.

성이 왜 거기 있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성은 방어 목적인 동시에 읍성의 기능 중 하나인 교통의 요충지라는 표식이기도 하다, 그 지역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그나마 그 일대에서 교통로이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성이 있다. 그러므로 장합전의 기록인 '마속은 험한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는 길목과 방어의 이점을 버리고 산으로 기어올라간 마속을 묘사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굳이 촉서에서도 언급하지 않은 성을 언급한 것은 길목을 지키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것을 표현하였다고 봐야 한다.

분명히 험하다고 나온 산까지 식량을 옮기고 진채를 세우고 용수로를 팔 시간이면 길목에 주둔하여 이중, 삼중 방어망 구축할 수 있다. 식량과 화살 등 병장기를 다 끌고 올라가면서 용수로를 팔 시간이면 아무리 평지라도 비교적 좁은 길목에서 해자를 파고 이중 삼중 방어선을 치는 것을 못 할 것이 없다. 거기에다가 마속이 용수로를 잃자마자 속절없이 고립되어 힘을 못 쓴 것을 보면 그 용수로를 위군이 한눈에 보기 쉽게 해놓았을까? 나무판자를 가리고 흙을 덮든 해서 위장을 하였을 것이다. 물론 마속이 배수진을 쳐서 위에서 아래로 장합군을 공격하여 격퇴를 생각하였다면 용수로를 정말 전투전 사용목적으로 쓸 목적이라면 그냥 노출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고저차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한다고 지적받았다는 점에서 바보짓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산이 그나마 방어하기 좋아서라면 용수로를 사서에는 없지만 최소한의 감출 노력은 했을 것인데 이 전략이 어디봐서 장수의 선택에 맡길 문제라고 보여지는가? 정말 이정도의 노력을 길목에서 분지에서 했다면 장합군에게 속절없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최소한 지연만큼은 제대로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길목방어는 제갈량의 명이었다고 유추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마속의 탈영과 제갈량전의 '절도를 어겼다.'는 서술을 보자면 제갈량의 명이 길목을 지키라로 봐야 한다. 정사 삼국지에서 절도라는 말 자체는 많이 나와도 제갈량전처럼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 당했다.' 라는 식의 기록은 이 기록이 유일하다.

마속에게는 장합이 가정에 오면 길목 방어라는 제갈량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 타당하고 자신이 현장 도착 후 생각해낸 등산은 왕평이 반대했다. 물론 그 상황에서 길목 방어했다고 장합군을 상대로 승전했을 것이다라고 장담은 못하지만 최소한 전투는 마속의 실제 전투보다는 더욱 길어질 것이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다. 적어도 한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더라면 양주의 농서군이 항복해왔을 거라는 점이나 천수군의 치소 기현의 주민들이 제갈량을 영접하기도 전에 장합이 가정을 돌파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갈량의 예상보다 너무나도 일찍 뚫렸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상관의 명령을 어기고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
장합이 나서서 군사들을 통솔하고 진영을 안돈하고 제장들이 모두 장합의 절도(節 度-지휘, 명령)를 받게 되자 군심이 안정되었다. -장합전-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 당했다. -제갈량전-

보통 절도라 함은.
  • 하나부터 열까지의 세부 지침까지는 아니더라도
  • 대략적으로. 어디에 가서 '어떤 방식'으로 뭘 하라는 지침인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론할 수 있는 '상식'이다.
  • 그렇기 때문에 제갈량의 절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 마속이 하지 않았던 행동을 제갈량의 절도로 추측하는 것.
  • 가서 막으라는 '절도'를 내렸는데 못 막았기 때문에 '위반'했다는 주장은 억지다.
  • 그래서 정사에 언급되는 급도와 성. 등산으로 인한 행동의 번잡함을 절도의 기준으로 본다.
建興六年,屬參軍馬謖先鋒。
건흥 6년, 참군 마속에게 소속되어 선봉이 되었다.

謖舍水上山,舉措煩擾,
마속은 물을버리고 산에 '오른데다'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으므로

平連規諫謖,謖不能用,大敗於街亭。
왕평이 계속해서 마속에게 규간했으나 마속은 그 계책을 쓰지 않았음으로 가정에서 대패했다.
왕평전
이렇게 물과 산 두개를 동시에 규간의 대상으로 번역하는게 한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더 매끄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
  • 급도: 汲道: 물을 길어 나르는 길, 물이 산속에 있는지. 도시에 있는지. 강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으니 추론 해보자.
마속은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왕평전-
장합은 그 급도(汲道-용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대파했다.-장합전-

물을 버리고 올라갔다고 하니. 일단 산에는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결국 산 위의 본대-급도-물이 되는데 장합이 그 중간을 잘랐다는 소리.
在小镇的镇中心,有一口很深的井,人们习惯称为其"关井"。
이 진의 중심 안에 한 개의 깊은 우물이 있는데 사람들이 관정이라고 부른다.
"关井"的历史相当悠久,虽据说已经历好几个朝代,但几乎没人能说出它的具体开凿时间。
관정은 역사가 상당히 유구한데,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미 여러 왕조에 걸쳤지만 그 구체적인 기간은 알 수 없다. #

부근에는 커다란 우물도 있다. 가정 또는 가천정이라고 하는 이름도 이 우물에서 유래되었다.

가정의 또다른 이름 가천. 가수.街泉(거리 가, 샘 천) 거리에 있는 샘, 街水(거리 가, 물 수) 거리에 있는 물
  • 가정의 성 안에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 그렇다면 마속이 물을 버리고 산에 올랐다는 구절이 이해가 간다.
三国街亭古战场遗址位于秦安县陇城镇,古名街泉亭、汉街城
삼국고전장유지는 진안현 농성진에 있다. 옛 이름은 가천정, 한가성
据专家考证,街亭即东汉时期的略阳古城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가정은 곧 동한(후한)시기의 약양고성이다.[26]
三国时期魏蜀街亭之战就发生在这里。
삼국시기 위촉이 가정에서 싸웠는데 바로 이곳에서 발생했다. #
한대 략양도(略阳道) 가천현(街泉县)의 치소(治所)로 속칭은 한가성(汉街城)이며 마속(马谡)이 패전한 장소이다.(중략)룽청고성(陇城古城)은 진대(晋代) 설치한 략양군(略阳郡), 략양파(略阳坡), 북위에서 당에 이르는 룽청현(陇城县), 송대의 룽청채(陇城寨), 명대의 룽청순검사(陇城巡检司)의 치소(治所)였다. 북위, 북주 시기의 룽청고성은 당 대종(代宗) 보응(宝应) 연간에 토번의 침범으로 훼손되었으며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있다. [27]
  • 적어도 당시에는 현의 치소 역할을 했던 성이 존재했다.
  • 이 성은 삼국시대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북위, 북주 시기까지도 유지되었다.
  • 당나라 때 토번의 침입으로 성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 당 이후 송/명 대에 치소 역할을 맡은 걸로 보아 최소한의 기능은 유지했던 것 같다.
  • 성벽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하는데 규모는 알 수 없다.
마속은 험한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전-
왕평은 계속 마속에게 규간(規諫)하였으나 마속이 이를 쓰지 못하여 가정(街亭)에서 크게 패하였다. -왕평전-
  • 장합전에서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 왕평의 규간은 쉽게 말해 산에 올라가는 걸 반대한다는 것이다.
  • 성안에 큰 우물이 있고 현의 치소인 가성(街城)이 존재하지만 마속은 산에 오른다.

가정/열류성을 촉이 확보한 구체적인 전투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당시 위의 주력은 기곡의 조진, 상규의 곽회, 남안의 서막으로 압축된다. 1차 북벌에 위의 3군이 호의적이었고 촉의 진군로가 기곡을 통한 장안 루트로 예상되었으며 가정과 열류는 전선의 후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대처가 미흡했거나 투항했을 가능성도 높다. 물론 이렇기 때문에 가정, 열류성의 상태가 낙후되었을 가능성도 높지만, 가정에 있는 약양성은 약양도의 치소 및 1차 북벌 이전, 이후에 기록이 남아 있다. 가정고전장과 실제 주둔했어야 할 '가정'인 악양성의 거리는 멀지 않다.

그리고 가정과 열류성은 위나라의 대촉 수비라인에서 후방에 위치한다. 위나라가 들어서면서. 대촉 수비라인의 핵심이었던 천수군의 속현이었는데 3군의 반란 영향인지. 제갈량. 강유의 북벌로 인한 영토 상실과 대촉 수비라인의 재점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광위군을 신설하면서 천수군 속현에서 광위군 속현으로 옮겨버린다. 당시 약양의 가정과 열류성은 제갈량에게 호응해서 항복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그렇기 때문에 제갈량이 이미 자기들 영토인 것마냥 마속과 고상을 가정과 열류성에 보내서 막으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고상이 공성전을 해서 열류성을 뺏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가게 되고.

가정의 행정단위가 가천(가정)현이었다가 정으로 강등된 것도 단순히 가정 지역이 낙후되었다고만 볼 수도 없다. 행정적인 필요성. 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수시로 군의 속현들이 늘었다 줄었다하고 넓게는 주의 치소가 변화하기도 한다. 서주의 주현이 팽성에서 하비로 변했다거나, 유비가 적벽대전을 거치며. 공안을 설치한다든가 많은 사례가 있다. 가정과 함께 천수군에 속했던 약양만 해도 전한 때 가천현 - 약양도. 후한 때 약양현 - 가정, 진나라 이후에는 농성진(가정)으로 개칭하면서 가정에 통합되다가 가정성채는 당나라 때 토번의 침입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오늘날 지명인 농성진(룽청진)으로만 남는다.
  • 행동의 번잡함
고지대를 선점한 가장 큰 이유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형세,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파죽지세로 들이치는 것 또한 급도가 끊긴 이후의 상황을 봤을 때 말할 것도 없는 오판이었다.
장군 마속을 가정까지 파견하고, 고상은 열류성에 주둔하도록 했다. 장합이 마속을 공격하였고, 곽회가 고상의 진영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켰다. -곽회전-
  • 열류성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으나 남동쪽 감숙성 청수현 북쪽이다, 장자촨 후이족 자치현으로 보기도 한다.
  • 가정의 남동쪽인 열류성에서 상규의 곽회를 저지하면서 혹시 모를 장합의 우회를 막고.
  • 상황에 따라 가정을 지원 할 수 있는 포지션을 맡긴 것 같은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마속에게도. 상황에 따라 열류성을 지원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전체적인 흐름이 열류성과 가정성에서 길목을 틀어 막으면서 서로간의 연계플레이로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는 게 제갈량의 절도였을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마속은 대패를 했지만 패전 처리 과정에서 실수를 만회하려는 조금의 노력이라도 보여줬어야 했는데 가정전투는 참전 장수 대부분이 처형 및 중징계를 받았고 패전의 과정은 명령위반에 그로 인한 부대 궤멸은 물론 뒷수습도 제대로 못한 엄청난 졸전이었다.
승상 제갈량은 마속 및 장군 장휴(張休), 이성(李盛)을 주벌(誅罰)하였고 장군 황습(黃襲)등의 병사를 박탈하였으나 왕평에게는 특별히 공적을 높이 드러내[崇顯] 주었으니[見] -왕평전-

명령위반, 급도 미비, 가정성 유기, 행동제약, 패전 수습과 탈영까지 가정 전투에서 마속의 패전은 총체적 난국 그 자체였다.

3. 곽충삼사

촉지 제갈량전에 주석으로 달린 곽충삼사에서는 제갈량이 양평관에서 공성계(空城計)를 썼다고 나와 있다. 사마의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양평관 인근에 도달했는데 이때 촉군의 주력 병력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러자 제갈량은 군사들이 함부로 진영을 나가지 않도록 하고 성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하듯 준비했다. 그러자 의심이 많은 사마의는 오히려 복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병력을 후퇴시켰다. 이후 뒤늦게 안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당했다며 크게 후회했다. 두우가 저술한 통전 153권 시강(示強)편에도 이 일화가 실렸다.

이 공성계에 대해 배송지는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당시 사마의는 형주 도독으로 완성(宛城)을 진수하고 있었고, 제갈량과 충돌할 일이 없었다. 또한 곽충의 말대로라면 사마의는 당시 촉군의 규모 자체는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복병을 우려했다면 잠시 공격을 멈추고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정도로 족하지 곧바로 후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제갈량의 공성계 일화는 정사에서 기록된 이야기이나 배송지가 거짓된 내용이라고 반박한 내용이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극적 재미를 위해 이를 차용하여 제갈량의 1차 북벌에 사마의도 참전한 것으로 각색했다.

곽충삼사에서는 시점이 1차 북벌을 실행한 직후로 나와 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내용을 차용해서 가정의 패배 후 촉군이 한중으로 총퇴각하면서 물자와 백성들을 이동시키던 도중 제갈량이 있던 서성(천수, 남안, 안정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어난 일로 묘사한다. 여기서 제갈량이 성루에서 홀로 거문고를 연주하는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내용은 대충 곽충이 말한 공성계 일화와 비슷하게 나온다. 제갈량은 꾀를 써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루로 올라가 금을 연주했다. 의심이 많은 사마의는 매복이 있을 것이라 염려하고 퇴각한다. 다른 판본이나 2차 창작물 중에서는 이후 제갈량이 비운 성을 사마의가 점령하고, 그제서야 제갈량이 공성계를 썼음을 알아챈 뒤 '이번 싸움은 내가 이겼다. 하지만 지략에선 아직도 제갈량에 못미치는구나.....'라고 탄식하는 장면도 나온다.

사마의 : 최후의 승자에서는 사마의가 주인공인 작품답게 단순히 제갈량에게 속아서 튄 게 아니라 제갈량이 현금을 타면서 조예가 의심이 심하고 종친은 능력자를 견제하는 상황인데 "나 여기서 죽고 촉 망하면 전쟁도 끝났는데 네가 돌아가서 무사할 것 같냐? 너야 이름을 남긴다 해도 니 아들들은 어쩔?"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이에 사마의가 아직은 촉을 멸망시킬 때가 아니라 판단해 복병 핑계를 대며 철수하는 것으로 각색했다. 조위 정권이 사마의에게 가한 수많은 견제와[28] 이에 대한 사마의의 뒤집기를 공성계와 버무린 재해석이라 하겠다.


[1]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228년 정월. 맹달이 사살된 그 시점이다. [2] 타임라인을 생각해보면 맹달의 예에서처럼 사전작업이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3] 제갈량의 북벌은 천수와 안정을 발판삼아 진창 → 미 → 장안 으로 가는 계획으로 최소한 진창을 확보해야 북벌 성공이라 볼 수 있다. 진창의 위치를 보면 평야지대 + 강으로 둘러싸인 방어의 요충지이다. 또, 1차 북벌 성공해서 장안을 먹고 나면, 상용의 가치는 떨어진다. 굳이 한중에서 상용으로 진출할 필요없이, 장안에서 완을 먹어버리면 상용은 샌드위치가 된다. 또한 완을 촉이 공격하는 시도만해도 오나라는 자기들 이익을 위해 형주에서 북벌을 당연히 하게 된다. 장안 → 완 → 번성 vs 강릉 → 양양 → 번성 식으로 촉나라와 오나라의 양공을 위나라는 이겨내야 한다. 여기서 완을 공격하는 이유는 제갈량의 북벌에, 형주에서 양양 → 완을 치는 계획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며, 이를 다시 재현하고자 할 것이다. 또한 장안 → 낙양이 아니라 완을 친다면 허창과 낙양을 동시에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제갈량이 1차 북벌을 성공해서 장안까지 확보하면, 완을 함락시켜 형북에서의 세를 늘리고, 낙양과 허창을 동시에 견제했을 가능성이 크다. [4] 한편으로는 성공했으면 서북방선을 조위와 끊어버리고 서량강족과 유대관계를 가지며 기마보급과 함께 장안 북쪽으로 진격로를 잡을 수도 있는 좋은 거점이 마련되는 수였으니...장안 북쪽으로 돌아가면 병주 지나서 업성이 나온다. [5] 주변의 강, 저족을 끌어들여도 되고 4차 북벌처럼 선비족과 연계해도 된다. [6] 대군이라고 호칭될 정도니 적은 수의 병력은 아니었을 거고, 따라서 제갈량은 옹양주 각지에 병력을 파견함과 동시에 자신은 기산에 머물면서 한편으로는 눈앞의 천수를 공략하고 만에 하나 있을 보급로 습격에 대비한 것으로 보여진다. 산관에 위군이 넘어오면 제갈량은 뒤가 위급하다. 물론 넘어온 군대도 한중에서 오는 군대에 갇힐 수도 있어 난전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위에서 나오듯이 의군인 조운/등지군이 그래서 나뉜것(각각 진창과 미를 견제하기 위해, 유사시 한중을 통해 산관에서 오는 병력의 뒤를 끊기 위해)이라는 의견이 있다. 아마도 제갈량에게 있어 기산은 지리적으로, 무도, 음평과 천수, 기현, 그리고 별동대로 파견한 조운군 및 위의 조진군, 혹시나 내습할지도 모를 산관 쪽의 위군까지 모든 지역을 굽어보고 제어할 수 있는 머리(headquarters)에 해당되는 요지로 보인다. 제갈량이 기산으로 두 번이나 진출한 건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진수의 평에 따르면 관중 악의의 자질 중에 관중적인 요소가 더 강했을 제갈량에게 그런 고도의 군사적 통찰력이 구비되었다는 게 좀특이한데 그게 수하 참모들의 능력을 효율적으로 수렴하는 그만의 뛰어난 행정적 자질에 연유한 것인지. 아니면 제갈량 특유의 군재로 인정해야 할 것인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7] 마준으로 대표되는 휘하 군장들이 근처 주민들을 아예 적이라고 판단했던 것도 덤. [8] 곽회전에서도 장합의 마속격파 기사 바로 뒤에 곽회의 고상의 진영 격파 기사를 싣고 있으며 곽회전에만 곽회의 고상 진영의 격파 사실이 실려 있다. [9] 곽회가 고상을 격파했을 때 열류성이 아니라 고상의 진영을 격파했다고 나오므로 퇴각하던 고상의 임시 진영을 마침 가까이 있던 곽회가 격파했을 가능성도 있다. [10] 제갈량이 주둔한 기산과 서한수 일대의 바로 북쪽 인근이다. [11] 다만 이 일화는 제갈량에게 아부를 하려던 촉나라 사람들을 보고 제갈량이 엄중하게 아부를 막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12] 제갈량이 강유를 얻은 직후 그를 칭찬하는 편지를 장예 장완에게 보낸 것만 봐도 제갈량 개인도 인재를 얻었다고 여긴 듯하다. [13] 강유의 투항 경위를 촉서 강유전과 위략을 교차 검증 및 절충하면 천수 지역이 촉에 투항 의사를 알릴 사자로 강유를 제갈량에게 보내 이후 일을 의논하려고 했으나 강유가 촉군에 도착한 이후 장합이 마속을 격파해 촉군을 몰아내자 천수는 항복 여론을 없던 걸로 하려고 꼬리자르기로 강유를 버려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 강유가 촉에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14] 六盘山脉, 룽산(陇山)이라고도 불리며 닝샤 후이족 자치구(宁夏回族自治区) 남부, 간쑤성, 산시성(陕西省, 섬서성) 경계지대에 있는 해발 3,000m 내외의 산맥. [15] 이런 고지대에 대규모로 식량이나 물을 보급할 시설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일일이 고개 밑으로부터 보급해야 한다. 또 적이 이곳을 넘는다는 보장이 없다. 고갯길을 피하고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이 정석이다. 정황상 장합 역시 골짜기를 통해 육반산맥을 넘었을 가능성이 높다. [16] 당장 기산과 기곡에서 위군보다 병력이 많았으며 제갈량이 촉군이 대군(大軍)이었다고 증언하고 있고 그곳의 여러 부대를 통솔하게 했다는 점에서 결코 적은 병력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며 대군의 선봉인 만큼 병사들의 양과 질도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속의 상대 장군인 장합조차도 중요 부장으로 비요만 확인되는 정도인데 마속은 이름이 확인되는 부장만 4명이다. [17] 물론 장합이 아랫쪽 길로 가면 그 반대도 가능했다. [18] 이미 언급되었다시피 당시 조운은 나름 중요한 임무를 받아 기곡에 있었고 가정전투는 시간싸움이었으므로, 애초에 조운을 보내자는 건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다. [19] 또한 당시 왕평은 낙양까지 다녀오는 등 실제 지휘관 중에 한중 산 넘어 북쪽을 경험해본 사람이라, 선봉 부장의 보좌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후일 강유를 중용한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20] 마속이 점거한 가정은 남안, 천수, 안정에 도달할 수 있는 제갈량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는데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근거지가 없어서 퇴각했다고 나온다. 이러한 근거지를 지키는데 조운의 의병이나 열류성과 같은 곳에 주어지는 병사들보다 마속의 군이 더 정예병이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마속이 제갈량의 절도를 지켜 가정을 사수해 시간을 벌었다면 장합이 가정을 뒤늦게 돌파하더라도 준비만만의 제갈량의 본대와 맞붙을 수 있는 상황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21] 벌써 1800년 전의 상황이기에 세부적인 지형은 픙화, 침식으로 인해 매우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지금은 가정산이 완만한 산이라도 과거에도 그랬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 [22] 이 사이 위연, 오의, 조운 같은 숙장들이 '망치'가 되어 집중해서 다른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고 여차하면 이들을 산관 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는 위군을 요격하러 보낼 수도 있다. [23] 사실 마속이 진을 친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들은 그리 높지 않아서 오늘날에는 꼭대기까지 논밭이 들어서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일부 병력만 산에 올려 감제고지만 하고 산 밑에서 주둔하고 있는 주력군과 연계하는 방법도 가능했다. [24] 기록에는 마속이 여러 부대를 이끌고 출정했다고 나오는데 왕평 역시 천천히 여러 군영의 패잔병, 장수와 병사들을 수습한다고 나와 마속의 군이 제갈량이 모아준 여러 부대의 모음이라는 기록이 교차검증됨을 보여주고 있다. [25] 만약에 제갈량이 정말 장합의 군대와 맞붙었다면 그는 천수를 넘어서 가정 인근까지 진출해 주변을 정리하면서 마속을 보내 장합을 기다리고 있다가 마속의 갑작스러운 등산으로 가정의 요충지를 이미 빼앗기고 선봉이 대파된 상황에서 요충지 탈환을 포기하고 장합의 5만 군대 + 곽회, 서막 등 농서군과 교전하면서 천천히 퇴각하며 기산과 천수에 들러 서현의 민간인 1천여 가까지 한중으로 데려와서 무사히 후퇴를 완료했다는 얘기인데 진짜 이랬다면 제갈량의 용병술은 매우 무시무시한 것일 수밖에 없다. 정황상 제갈량 본대는 왕평이 가정에서 수습한 부대를 받은 후 안정적이면서도 신속하게 후퇴한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이런 행보로 가정 이후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곽회가 고상을 격파한 후 바로 제갈량 본대와 교전하지 않고 농서로 이동해 강족을 토벌할 수 있었을 것이다. [26] 현재 구글 지도에 가정고전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서쪽에 있는데 도보로 한 시간 반 안 되는 거리에 있다. 약 6km 거리다. [27] 네이버 지식백과, 룽청진(陇城镇) (중국 국가급풍경명승구총람, 2011. 7. 1., 도서출판 황매희) [28] 다만 실제 역사에서 조위정권이 사마의에게 견제구를 날리기 시작한 건 조방 치세 초기 조상이 사마의를 견제할 마음을 품고부터이다. 이 드라마는 사마의의 고평릉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마의에게 지속적으로 견제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 조비-조예 치세에 사마씨 일족은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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