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2:50:55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colcolor=#000000> 러시아 제국의 여대공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великая княжна Татья́на Никола́евна России
파일:Grand_Duchess_Tatiana_Nikolaevna,_1914.png
<colbgcolor=#FFE4C4> 이름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Татьяна Николаевна Романова)
출생 1897년 6월 10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사망 1918년 7월 17일 (향년 21세)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에프 하우스
장례식 1998년 7월 17일
러시아 연방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신체 175cm[1]
아버지 니콜라이 2세
어머니 헤센의 알릭스 공녀
형제 올가,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
서명 파일:Signature_Tatiana.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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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4C4><colcolor=#000> 시성 1981년: 해외 러시아 정교회
2000년: 러시아 정교회
축일 그레고리력: 7월 17일
율리우스력: 7월 4일
호칭 해외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순교자[2]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수난자[3]
성인 추대 종파 러시아 정교회
해외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안티오키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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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2.2. OTMAA라 불린 5남매2.3. 화목한 가정과 고립된 황실2.4. 미모의 여대공2.5. 언니처럼 혼담을 내치다2.6. 러시아 혁명,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2.7. 비참한 죽음
3. 가족관계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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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3d9f1a755f4b842ac1f9aaef5b8abb6a.jpg
파일:Tatyana-Romanova.jpg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황제)인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1남 4녀 중 차녀. 러시아 혁명 때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2. 생애

2.1. 출생

파일:grand duchess tatiana.jpg
어머니 헤센의 알릭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앨리스 공주의 4녀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보인자였고, 그녀의 많은 자녀들[4] 유럽 여러 나라 왕족들과 결혼하면서 혈우병 유전자가 널리 퍼졌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작은오빠, 즉 타티야나의 작은외삼촌인 프리드리히도 혈우병을 앓다가 어린 나이에 죽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딸만 넷을 낳은 끝에 어렵게 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를 낳았다. 불행히도 이 아이 역시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났고, 이는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설치는 배경이 되었다.

참고로 그녀의 이름은 예브게니 오네긴의 등장인물 타티야나에서 따온 것이다. 오네긴에서 언니 올가와 동생 타티야나는 사이 좋은 자매로, 니콜라이 2세는 첫째 딸 올가와 동생이 우애깊은 사이가 되길 바래서 둘째의 이름을 타티야나라고 지었다.

2.2. OTMAA라 불린 5남매

파일:OTMAA_1910_in_court_dress.3.jpg
로마노프 황가의 남매들.
왼쪽부터 셋째 마리야, 둘째 타티야나, 넷째 아나스타시야, 첫째 올가, 다섯째 알렉세이. 하나같이 외모가 준수하다.[5]
언니 올가와 2살 터울이 나는 바로 아래 여동생으로, 올가와 함께 방을 쓰고 똑같은 옷을 입었다. 타티야나의 아래로는 여동생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남동생 알렉세이가 태어났다.

타티야나는 언니 올가와 제일 친했지만, 다른 두 여 동생 막내 남동생과도 사이가 좋았다. 남매들은 일상과 일기에서 서로를 각자의 머리 앞글자를 딴 애칭 'OTMA'(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또는 OTMAA(알렉세이를 포함)라고 했고, 당시 혼란스러운 러시아 제국과 달리, 황제 일가가 아들딸 차별 없이 자식들을 모두 사랑했기에 5남매 모두 구김살 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2.3. 화목한 가정과 고립된 황실

황실 가족들은 황녀들을 자주 애칭으로 불렀고 타티야나는 타샤, 타냐, 타누쉬카,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니콜라이의 딸 타티야나) 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자매들은 호화로운 생활 대신 철제 침대를 쓰고 스스로 침구 정리 등 검소하고 부지런한 일과를 교육 받았으며 가족끼리 소박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가정과 달리 타티야나를 포함한 차르 가족의 대외적 이미지는 좋지 않았고 차르 부부가 너무 귀족 사회를 등한시하고, 가정에서 너무 자기들끼리만 뭉쳐지낸 탓에 올가와 타티야나는 나이가 차서도 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식 칭호조차 낯설어 할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상태로 성장했다.

타티야나가 세상물정을 넘어 기본적인 황실 예절조차 모르고 살아다는 걸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일화가 항상 티티아나는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니콜라이의 딸 타티야나)' 라고 불리다가, 친한 귀족 시녀가 공식 자리에서 자신을 '황녀 전하' 라고 호칭하자 기겁해 테이블 밑에서 시녀의 다리를 걷어차며 귓속말로 "미쳤냐? 지금 무슨 소릴 한 거냐?" 라고 한 일이다. 그저 정식 호칭으로 부르며 예의를 갖췄을 뿐인데 왜 이 정도로 놀랐냐면, 왕족이라도 가족들끼리 애칭으로 부르는 건 당시 서양 국가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평소에 이런 애칭을 자주 즐겨 쓰고 제대로 된 호칭(= 황녀 전하)을 잘 부르지 않았고, 부를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타티아나는 황녀의 신분임에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황녀라는 호칭으로 불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외부 행사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소리이다.

이처럼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은 거의 가정에 틀어박혀 살았기 때문에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이 아닌 타인들은 황실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를 정도였다. 측근들은 올가와 타티야나가 나이는 스물 전후인데 둘이서 노는 건 초등학생 수준이라고들 했다. 할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가 나서서 사교계 데뷔 나이가 찬 올가와 타티야나를 가장무도회에 억지로 등 떠밀어 보냈지만, 신분을 감춘 두 자매는 무도회장에서 아는 사람도 소개해 줄 사람도 없어서 또래 귀족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마침 조카손녀의 결혼식 참석 때문에 러시아에 있던 고모할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부인 마리야[6]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어색하게 서있는 올가와 타티야나, 그런 황녀들을 지켜보는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도 피곤하다는 기색으로 어색하게 구경만 하는 모습[7]에 충격을 받아서 이건 황후가 딸들을 너무 싸고 돌아 키운 탓이라고 비판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후에도 허영과 사치, 문란한 러시아 사교계는 가급적 접근하지 말라라는 어머니의 철저한 교육도 있었지만 본인도 아는 사람 없이 불편한 사교계보다 부모님과 남매들이 있는 가족을 더 좋아하는 타티야나는 혼란스러운 러시아 제국의 상황을 모른 채 안락하고 평안한 나날을 보내며 성인으로 자라났다.

2.4. 미모의 여대공

파일:grand-duchess-tatiana-nikolaevna.jpg
파일:628px-Grand_Duchess_Tatiana_Nikolaevna_1910.jpg

타티야나의 키는 175cm로 형제 자매들 중에서 키가 가장 컸다. 심지어 아버지보다도 키가 컸고 어머니를 닮은 적갈색 머리와 회색 눈동자의 미인이었다. 니콜라이 2세의 자녀들은 모두 수려한 미남미녀였는데 그 중에서도 타티야나는 가장 특출난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미모 덕분에 당시 사람들에게 "황제의 네 딸들 중 가장 아름답고 조각 같다"고 알려져 있었다.

위의 평가에 걸맞게 황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당시 러시아에서 손에 꼽히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황실에서 무도회라도 열리면 남자 귀족들은 타티야나의 댄스 파트너가 되어 보려고 줄을 서고 유럽의 내로라하는 왕국에서도 많은 혼담이 들어왔다고 한다.

점잖고 다정한 성격이지만 자기 주장이 확실한 올가와는 정반대로, 타티야나는 매우 순종적이었고 동생을 보필하는 라스푸틴을 믿었다.[8]

타티야나는 차분하고 집중력이 강했지만 성격이 매우 수동적인 데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서 일기에 오자가 많았다. 하지만 타티야나는 사무능력이 뛰어나 아버지 니콜라이 2세의 비서로 일했다고 하며, 덕분에 자매들에겐 '총재'란 별명으로도 불렸다. 네 자매 중 어머니와 가장 친했고 전쟁 부상자들을 돌보는 간호사 자질도 훌륭해서 연금 생활 때는 예카테린부르크로 먼저 보내진 알렉산드라 황후가 타티야나에게 알렉세이 돌보기를 맡긴 적도 있었다.

어느 정도 자라자 올가와 마찬가지로 한 부대의 명예 연대장으로 임명된 적이 있으며, 실제로 군복을 입은 사진이 남아있다. 올가와 함께 부대를 시찰하며 병사들을 만나곤 했다 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어머니, 올가와 함께 적십자 간호사가 되어 부상병들을 돌봤다. 올가보다 간호사 역할에 최적화되었다는 칭찬을 들었다고.

1911년에는 아버지 니콜라이 2세와 언니 올가와 함께 오페라 하우스를 방문했다. 그런데 여기서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이 암살 당했는데 눈앞에서 이를 목격한 자매는 기절하게 놀라고, 그날 밤에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 울다가 잠을 설쳤다고 한다.

2.5. 언니처럼 혼담을 내치다

타티야나에겐 러시아 제국의 공주라는 신분과 아름다운 미모 덕분에 전세계 유럽 왕실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하지만 언니 올가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의 곁을 떠나기 싫어서 끝내 모든 혼담을 내쳤다.[9]

당시 20세기 초 사회는 공주들이 유럽 각국의 왕실과 공실 사이를 오가며 정략결혼으로 양국 간 물건 취급 협상 도구로 시집가는 게 당연하다고 인식되었으니 타티야나의 행동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유는 좀 다르지만 과거 루이 15세의 세 딸들도 저런 식으로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남았는데, 때문에 루이 15세는 항상 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악소문에 시달렸다. 사실 황제 부부도 자신들처럼 자녀들이 연애 결혼을 하길 바라서 정략결혼에 크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은 아니었는지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의 왕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운 알렉산다르 1세와 혼담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혼담이 중단된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에 서로 편지를 교환했다는 것으로 보아 둘의 관계는 상당히 진척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국의 에드워드 8세와도 혼담이 오갔다.

타티야나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가 에드워드 8세의 아버지 조지 5세와 이종사촌이라서[10] 자주 만나기도 했으며 두 사람의 나이대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드워드 8세의 할머니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도 가끔 러시아의 황녀가 에드워드의 적합한 신붓감이 될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타티야나 뿐만 아니라 언니 올가와도 혼담이 있었던 에드워드 8세는 두 사람 중에서 타티야나가 더 좋다고 했다는데 알렉세이 황태자를 돌보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자매들 중에서 가장 예뻐서 그랬다고도 한다.[11]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타티야나는 총살당해 생을 마감했고,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다르 1세는 그녀의 죽음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알렉산다르 1세는 루마니아 왕국의 공주 마리야[12]와 결혼한다. 여담으로 알렉산다르 1세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우스타샤의 결탁을 받은 불가리아계 마케도니아인에게 살해당했다.

2.6. 러시아 혁명,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고, 황후와 공주들과 황태자도 함께 폐위되었다. 황제 일가는 볼셰비키 감시 하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볼셰비키 당원들은 황녀들의 침실 문을 못 잠그게 하고 심지어 욕실까지 따라왔다. 황녀들은 길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경멸과 비난과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감시하는 군인들이 농담이랍시고 성희롱을 해대 황녀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타티야나가 충격을 받고 울면서 뛰쳐나가자 여동생 마리야가 그 군인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그래도 군인들과는 서로 가족에 대한 얘기도 하거나 영국으로 망명해서 그곳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 같은 얘기를 하는 등,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성적인 농담도 군인이 악의 없이 실수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상당한 미녀였던 타티야나에게 반한 군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안드라스라는 헝가리계 군인은 타티야나에게 꽤 진지하고 열렬한 관심을 가져 본인이 지갑에 늘 넣어 다니던 고향의 어머니 사진을 타티야나에게 보여주곤 했다고.[13] 아무튼 그나마도 감시 책임자가 바뀌면서 군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도 금지되었다.

참고로 왜 망명지로 영국이 거론되었냐면 어머니 헤센의 알릭스 공녀의 외가였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는 본래 독일 헤센 대공국의 공녀 출신인데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로 헤센의 대공비가 된 앨리스 공주의 4녀였다. 앨리스는 자녀들을 영국풍으로 키웠고 앨리스의 사후 자녀들은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자주 교류하며 어려서부터 외가인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4] 그 때문에 황후의 외가인 영국으로 가서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 같지만, 영국의 조지 5세가 미적거리다 볼셰비키가 들어서고 러시아 황족들을 다 잡아죽이면서 무산되었다.

구하고는 싶은데 국내의 반대에 부딪치고, 설마 진짜 해치리랴 싶어 미적대던 조지 5세는 그 사이 황제 일가의 처형 소식에 충격을 받고 태도를 바꾼다.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이모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가 망명을 신청하자 재빨리 군함 HMS 말버러 호를 보내 마리아와 딸 올가와 함께 안전하게 영국으로 피신시켰다. 이후 그리스 왕국 콘스탄티노스 1세가 폐위당하자 콘스탄티노스 1세의 동생 안드레아스 왕자의 아내 앨리스 왕자비[15]가 영국에 구조 요청을 하자 재빠르게 데려왔다. 여기서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왕자비의 외동아들이 바로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이 될 필립 마운트배튼.

살해당하기 전날인 7월 16일엔 어머니와 함께 성경의 오바디야서와 아모스서를 읽었다. 그날 밤엔 볼셰비키 군인들이 요리사 조수이자 알렉세이의 친구인 레오니드 세드네프를 데려가자[16] 타티야나는 의사 봇킨과 함께 사령관 유롭스키를 찾아가 그를 돌려 보내달라고 청했다 한다.

2.7. 비참한 죽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로마노프 왕가의 몰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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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로 이송되었고, 새벽에 유대인 출신의 유롭스키가 황제 일가를 깨워서 2열로 세워 지하실로 인도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사진을 찍는 거라며 가족들을 안심시켰으나 유롭스키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총으로 쏘아 죽였다. 황제 일가는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들의 시신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사람 손길이 가지 않는 곳에 무참히 버려졌다.

타티야나는 가장 친했던 언니 올가의 앞에서 죽었다. 당시 타티야나는 만 21세였다. 다음 날에는 둘째이모인 옐리자베타 대공비 및 다른 황족들이 광도에서 살해당하고 그 이전에 숙부 미하일 대공 등을 비롯한 로마노프 황족들도 대거 처형되었다.

황제 가족의 처형 후 관련 조사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증언이 엇갈리고 의심스러운 내용이 난무해 실제로는 어디서 어떻게 처형됐는지 모른다는 가설도 있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이파티에프에서 살해된 것이 정설. 그 의혹들은 아나스타샤 공주의 생존설에 계속 힘을 실어주었고 남동생 알렉세이 황태자 생존설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후 유해는 일가족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당에 안장되었으며, 2001년 러시아 정교회는 황제 일가를 성인으로 시성함으로써 타티야나 로마노바 역시 성녀로 시성되어 '성녀 티티야나 황녀'(СВ. ТАТЬЯНА ЦАРЕВНА; Святая Царевна Татьяна)라고 불리게 된다.

3. 가족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colbgcolor=#FFE4E1>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Татьяна Николаевна)
<colbgcolor=#FFF3E4> 니콜라이 2세
(Император Николай II)
<colbgcolor=#FFFFE4> 알렉산드르 3세
(Император Александр III)
<colbgcolor=#E4FFEC> 알렉산드르 2세
(Император Александр II)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Императрица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마리야 표도로브나
(Императрица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크리스티안 9세
(Kong Christian 9.)
헤센카셀의 루이제
(Louise von Hessen-Kassel)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Императрица 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Großherzog Ludwig IV. von Hessen und bei Rhein)
헤센의 카를 공자
(Prinz Karl von Hessen-Darmstadt)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17]
(Prinzessin Elisabeth von Preußen)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Queen Victoria)

4. 관련 문서



[1] 가족, 정확히는 니콜라이 2세 부부와 그 자녀들 중 최장신. [2] Царственные мученики [3] Царственными страстотерпцами [4] ' 유럽의 할머니'라 불릴 정도로 많은 자손들을 두었다. 자세한 것은 빅토리아 여왕/가족 관계 참조. [5] 여담으로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은 모두 미인이었지만 특히 둘째인 타티야나가 가장 미인이라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타티야나 황녀가 무도회에 참석하면, 그녀와 꼭 춤을 추고자 하는 남자 귀족들이 줄을 섰다고. [6]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여동생으로, 니콜라이 2세의 고모이다. 또한 외가 쪽으로도 친척인데 마리야의 남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삼촌이어서 마리야는 알렉산드라의 외숙모이기도 했다. [7] 왜냐하면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본인들도 사교계에서 친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기 가정내에서만 틀어박혀 살았기 때문이다. [8] 다만 언니 올가도 자기 주장이 확실한 성격과는 별개로 어머니와 다른 자매들처럼 라스푸틴에게 빠져 있었다.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라스푸틴을 멀리 하라고 조언한 올가 여대공은 동명이인이자 황녀들의 고모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이다. [9] 올가는 혈우병을 앓던 병약한 동생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때문에 장녀의 계승이 가능하도록 계승제도를 고치자는 논의가 나오던 상황이라 시집 가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10] 조지 5세는 타티야나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와도 사촌이다. 알렉산드라의 어머니 앨리스 공주가 조지 5세의 둘째 고모. [11] 만약 에드워드가 타티야나와 결혼했다면 웬 미국 출신 이혼녀와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피워서 조카딸이 여왕이 되는 일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아주아주 오래 산 방계 왕족 중 한 명으로 기억됐으리라. 감히 러시아 황녀와 이혼하고 미국인+평민+이혼녀인 여자와 재혼한다면 그 후폭풍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2]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드 1세 에든버러의 마리의 3남 3녀 중 차녀(셋째). 마리가 니콜라이 2세 부부 모두와 사촌이라 마리야는 타티야나에게 부계와 모계 기준으로 모두 육촌이다. [13] 안드라스는 후일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살해 명령이 떨어졌을 때도 황제였던 니콜라이는 죽일 수 있지만 여성들은 죽일 수 없다고 반대했다. 물론 유롭스키는 상큼하게 무시했고 안드라스는 그냥 황제 일가 살해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어 다른 장소로 보내졌다. 당시 동료 군인들은 안드라스가 '그 회색 눈의 예쁜 애(타티야나)'를 좋아해서 그렇게 나섰을 거라고 다들 짐작하고 있었지만 유롭스키는 다행히(?) 그 사실까진 몰랐다고. [14]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라 불릴 정도로 자손들이 전 유럽의 왕가에 널려있었고 증손자들을 볼 정도로 장수해서 외국 왕족인 자기 후손이 도움을 요청하면 영국 왕실에서 지내게 해주는 걸 허락하기도 했다. [15]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의 장녀. 앨리스의 어머니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알렉산드라 황후의 언니에 조지 5세의 사촌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보호를 받으며 영국 왕실과 가까이 지냈고 빅토리아의 딸 앨리스도 이 가족 관계 덕분에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16] 볼셰비키들은 황실 일가를 처형하면서 황실을 수행하던 시녀와 시종들도 철저히 세뇌돼서 갱생불가하단 판정을 내리고 모두 죽이기로 결정하였는데 세드네프만은 아직 어려서 갱생 가능성이 있다고 판정하고 일부러 빼돌렸다. [17]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