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1:42:21

타시로 토미오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9dec><tablebgcolor=#009dec> 파일: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엠블럼.svg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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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81 미우라 다이스케
1군 72 츠루오카 켄지로(오펜스 치프코치) · 74 카와다 유스케(외야수비·베이스·야수코치) · 78 신도 타츠야(벤치코치) · 79 오오하라 신지(치프 투수코치)
80 아이카와 료지(디펜스 치프·야수코치) · 94 코스기 요타(투수코치) · 97 타나카 히로야스(내야수비·베이스·야수코치)
2군 83 쿠와하라 요시유키(2군감독·투수 코디네이터) · 73 후지타 카즈야(디펜스치프·내야수비·베이스코치)
84 우에다 요시노리(외야수비·야수·베이스코치) · 86 야기 카이(투수코치) · 88 이리키 유사쿠(투수코치·어시스턴스 투수 코디네이터) · 89 나카이 다이스케(오펜스 치프코치)
1군 및 2군 70 카가 시게루(투수코치 보좌) · 71 무라타 슈이치(야수코치) · 75 이시이 타쿠로(야수코치) · 76 타시로 토미오(야수코치) · 77 스즈키 타카노리(야수코치) · 82 만에이 타카시(야수 코디네이터) · 85 야나기다 시게오(야수코치) · 90 오오무라 이와오(야수코치)
# 츠지 토시야(야수코치)
코칭스태프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육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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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시로 토미오의 수상 경력/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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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okohamaBaystars98champion.png 파일: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V1.svg 파일:2024DeNA우승.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코치
1998 2013 2024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등번호 26번}}}
콘도 카즈히코
(1958~1972)
타시로 토미오
(1973~1991)
래리 시츠
(1992)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번호 75번}}}
오야 아키히코
(1993~1995)
타시로 토미오
(1997~1998)
나카오 타카요시
(2000~2001)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번호 76번}}}
타케노우치 마사시
(1991~1998)
타시로 토미오
(1999~2009)
이시미네 카즈히코
(2012)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번호 78번}}}
타카기 요시카즈
(1993~2009)
타시로 토미오
(2010)
타카기 요시카즈
(2011~2013)
SK 와이번스 등번호 89번
결번 <colcolor=#fff> 타시로 토미오
(2011)
박정환
(2012)
{{{#ffffff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번호 82번}}}
요시다 토요히코
(2008~2011)
타시로 토미오
(2012~2015)
시미즈 마사지
(2018)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07번}}}
오미치 노리요시
(2012)
타시로 토미오
(2016)
아이다 유시
(2017~2018)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72번}}}
이노우에 신지
(2016)
타시로 토미오
(2017~2018)
이노우에 신지
(2019~2020)
{{{#fff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등번호 76번}}}
시노하라 타카유키
(2014~2018)
타시로 토미오
(2019~)
현역
}}} ||
파일:타시로토미오.png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No.76
<colbgcolor=#009dec><colcolor=#fff> 타시로 토미오
田代富雄 | Tomio Tashiro
생년월일 1954년 7월 9일 ([age(1954-07-09)]세)
카나가와현 오다와라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후지사와 상업고등학교 (카나가와)
신체 184cm, 88kg
포지션 3루수, 1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72년 드래프트 3순위 (타이요)
소속팀 타이요/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1973~1991)
지도자 쇼난 시렉스[1] 타격코치 (1997~2001)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타격코치 (2002)
쇼난 시렉스 타격코치 (2003)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타격코치 (2004~2006)
쇼난 시렉스 감독 (2007~2009)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대행 (2009)
쇼난 시렉스 감독 (2010)
SK 와이번스 타격코치 (2011)[2]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2)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타격코치 (2013~2015)[3]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순회 타격코치 (2016)[4]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격코치 (2017~2018)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수석 타격코치 (2019~2020)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순회 타격코치 (2021~2023)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타격코치 (2024)[5]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야수코치 (2025~)
스태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기록원 (2024, 코치 겸임)

1. 개요2. 선수 시절
2.1. 데뷔 전2.2. 타이요의 강타자
3. 은퇴 후4. 기타

1. 개요

파일:타시로코치 현역시절.png }}}||
현역 시절

일본프로야구 선수. 現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코치.

현역 시절엔 베이스타즈의 전신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프랜차이즈 스타 강타자로 활약했고, 은퇴 후 여러 구단에서 코치를 맡아 수완을 발휘했다.

2. 선수 시절

2.1. 데뷔 전

초등학교 때 소프트볼 투수로 야구를 시작해 고등학교 2학년 때 3루수로 전향했다. 고등학교 시절 통산 42홈런을 날리며 야구부의 주포로 활약했으나 3년 내내 코시엔 대회 예선에서 번번히 탈락하는 바람에 한신 코시엔 구장을 밟지 못하고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고졸 시즌인 1972년 드래프트에서 당시 카와사키 구장을 쓰던 타이요 훼일즈의 3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했다. 이때 당초엔 계약금 700만엔, 연봉 100만엔으로 입단 계약을 제안받았으나 본인이 "이런 금액으론 프로에 갈 수 없다"고 우겨서 결국 구단에서 계약금 800만엔, 연봉 120만엔으로 올려줬다는 일화가 있다.

2.2. 타이요의 강타자

입단 직후엔 3년 간 2군에서만 담금질을 거듭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아키야마 노보루[6]가 "입단한지 3년 째인데 더 이상 성장할 부분이 없다"는 낮은 평가를 내린 데다 당시 막 주전 좌익수였던 타카다 시게루[7] 장훈의 입단으로 3루수로 옮기게 되면서 내야 적응에 실패할까 우려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3루수 후보 겸 거포 보강을 위해 타시로의 트레이드를 제안하며 요미우리로 이적할 뻔했으나, 당시 내야수비 코치였던 클리트 보이어[8]가 "타시로는 가까운 미래에 클린업을 맡을 수 있다. 내년에 내가 1군에 발탁하겠다."라고 반대해서 무산되었다.[9]

보이어 코치의 말대로 4년차인 1976년에 1군에 데뷔해 후반전부터 주전 3루수로 정착하며 89시합에 출장해 타율 .255, 8홈런 21타점을 기록했고, 다음 해인 1977년엔 단박에 타격 포텐을 터뜨리며 전 시합(130시합) 출장에 타율 .302, 35홈런 88타점의 좋은 성적을 기록함과 동시에 주전 자리를 굳혔다.

1977년 이후엔 단 한번도 3할을 치지 못하며 2할대 중반의 타율에 머물렀지만, 팀이 카와사키시를 떠나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로 이전한 1978년엔 타율 .288, 27홈런 104타점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시즌 100타점을 기록했고 1980부터 1985년까지 2년 연속 30홈런을 포함한 6년 연속 20홈런을 치는 등 준수한 장타력을 발휘하며 약체였던 타이요에서 몇 안 되는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주포로 활약을 이어갔다.

현역 후반인 1985년부터 1루수로 전향했으나 1986년 시즌 도중 1루수 수비를 보다가 타자 주자였던 쇼다 코조와 충돌해 왼쪽 손목을 골절하는 부상을 입는 바람에 후반전을 거의 날려먹은 채 시즌 막판에야 겨우 복귀할 수 있었고, 이 시즌부터 서서히 하락세를 타면서 주전에서 밀려 백업 멤버로 뛰다가 1991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10] 은퇴 시합이었던 1991년 10월 10일 한신 타이거스 전에선 카사이 미노루를 상대로 2번째 타석에서 만루 홈런을 터뜨렸고, 이것이 1991년 시즌의 유일한 안타이자 본인의 생애 마지막 안타, 홈런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 만루 홈런을 날린 선수는 타시로가 유일하다.

통산 성적은 1526시합 출장, 1321안타 278홈런 867타점 타율 .266/OPS .816이다.

3. 은퇴 후

은퇴 후 야구해설가를 겸임하며 라멘집을 잠깐 경영하다 1997년 요코하마에 코치로 돌아왔고, 이후 1, 2군을 오가며 선수들을 지도했다. 2009년엔 시즌 도중 성적부진으로 해임된 오야 아키히코 감독을 대신해 감독대행을 맡았으나 팀의 2년 연속 최하위를 막지 못했다. 2010년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 프런트 전임을 제안했으나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기 원했던 본인이 이를 거절하며 요코하마에서 퇴단했다.

이후 2011년에 SK 와이번스 타격코치로 부임했지만 시즌 도중 김성근 감독이 해임되자 코치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돌아갔고, 다음 해인 2012년엔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코치로 취임해 2013년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했으나 2015년 시즌 도중 갑작스럽게 사임하며 두 구단에서 모두 중도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키타니 히로시 구단주가 현장에서 선발 멤버 구성이나 1, 2군 승격, 강등 등 팀 구성에 관해 간섭을 일삼으며 코칭스태프들의 권한을 계속 침해했고 여기에 불만을 가졌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중도 사퇴를 선택했다고 한다.[11]

직후인 2016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로 취임해 2군 유망주들을 지도했고, 2018년 요미우리에서 퇴단하고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 9년 만에 복귀해 현재까지 코치를 맡고 있다.

4. 기타

  • 라멘을 매우 좋아해서 상술했듯 은퇴 직후인 1992년에 치가사키시에 있는 자택에 '타시로 라멘'이라는 라멘집을 만들기도 했다. 선수 시절의 이름값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오직 으로만 인정받기 위해 현역 시절 사진을 일절 가게에 전시하지 않을 정도로 나름 진지하게 운영에 임했고 TV 방송에 나오기도 했으나, 1997년에 요코하마 코치로 취임하게 되면서 폐업했다.

[1] 2000년부터 2010년까지 2군 마케팅의 일환으로 연고지인 요코하마시가 포함된 지역인 쇼난과 바다의 왕을 뜻하는 신조어인 시렉스(Sea+Rex, 이 중 Rex는 라틴어)를 합친 쇼난 시렉스란 명칭을 2군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했다. [2] 시즌 도중인 8월 18일에 중도 사퇴. [3] 2015년 7월 30일에 중도 사퇴. [4] 같은 해 신설된 3군의 타격지도와 병행해서 맡았다. [5] 다만 실제 업무는 함께 겸임한 기록원이 중심이었다. [6] 1950년대 중반~1960년대 초반 타이요의 에이스 투수로 1960년 첫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하여 리그 MVP를 수상했고, 통산 193승을 거둔 뛰어난 투수였다. 은퇴 후 코치를 거쳐 1975~1976년에 타이요 출신으로썬 처음으로 팀의 감독까지 맡았으나 5위-6위에 그치며 2년 만에 물러났고, 직후 1년간 2군 감독을 맡고 퇴임 후 야구해설가로 일하다 2000년에 호흡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66세. [7] V9 시대의 주전 좌익수로 활약한 선수. 훗날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GM을 맏게 되었다. [8]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뉴욕 양키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출신 3루수로,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1396안타 162홈런, 골드글러브 1회 수상 등의 준수한 실적을 가진 선수였고 1972년 타이요 훼일즈에 입단해 타율은 높지 않았으나 좋은 수비와 나름의 장타력을 가진 3루수로써 2년 연속으로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괜찮은 활약을 펼쳤다. 현역 도중인 1973년부터 코치를 겸임하다 1975년 은퇴(당해엔 선수로만 뛰었다) 후 1년 간 전임 코치를 맡은 뒤 일본을 떠났고, 이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뉴욕 양키스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2007년 뇌출혈로 향년 70세에 사망. [9] 내야수비 코치에 불과했던 클리트가 이렇게 선수 발탁까지 운운할 정도로 강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내야수비 코치는 명목상 직책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수석 코치에 가까운 위치에서 감독을 보좌하는 역할이었기 때문. 실제로 아키야마가 감독을 맡은 타이요가 계속해서 하락세를 달리자 보다 못한 구단으로부터 1976년 시즌 도중 대신 지휘권을 넘겨받고 차기 감독으로 점쳐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명목상 감독과 실질적 감독인 코치가 따로 노는 광경에 선수들이 적응할 리가 없다 보니 결국 팀의 하락세를 막지 못한 것에 더해 코치 인선에서 구단과 보이어의 의견이 갈렸고, 결국 그 해 시즌 종료 후 1972년까지 감독을 맡았던 벳토 카오루의 감독 복귀와 함께 아키야마는 2군 감독으로 전임했고 보이어는 코치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10] 사실 1990년에 은퇴할 생각이었으나 당시 막 취임한 스도 유타카 감독의 만류로 은퇴를 철회했다고 한다. [11] 전 해인 2014년에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건강 문제로 퇴임할 때 자신도 퇴임하려 했으나 호시노의 만류로 단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