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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황제 북독일 연방 수상 · 바이마르 총리 · 나치 독일 총리 · 동독 각료평의회 의장 · 독일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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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제3대 수상 호엔로헤 후작 Fürst zu Hohenlo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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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Chlodwig Carl Viktor Fürst zu Hohenlohe-Schillingsfürst 클로트비히 카를 빅토어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후작[1] |
출생 | 1819년 3월 31일 |
헤센 대공국 로텐부르크안데어풀다 | |
사망 | 1901년 7월 6일 (향년 82세) |
스위스 바트라가츠 | |
직업 | 외교관, 정치인 |
작위 | 후작 |
정당 | 무소속 |
재임기간 | 1894년 10월 29일 ~ 1900년 10월 17일 (만 5년 11개월 18일)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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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fix]
1. 개요
독일 제국의 제3대 수상. 이름이 무척 긴 탓에 호엔로헤 후작(Fürst zu Hohenlohe)이라고 불린다.독일 제국의 역대 수상 가운데 가장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2]
2. 생애
헤센 지역의 후작가였던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가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가톨릭이었고 어머니는 루터파였는데 아버지의 종교를 따라갔다. 이 시기 독일 귀족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귀족 자제들은 장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전통이었는데, 죽어도 프로이센 왕국 군대에 입대하기는 싫었는지 외교관이 되기를 선택한다.[3] 이후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소유였던 라인팔츠의 법원에서 근무하면서 법학도 익히게 된다. 이 시기에 당시 독일 부르주아 층에 만연했던 자유주의 사상에 동조하게 됐고, 평생 자유주의 성향을 유지하게 된다.184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았으며 다음해에는 바이에른 왕국의 의회(Reichsrat)에 참여한다. 그렇지만 딱히 정치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고[4],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경작지를 관리하는데 정력을 기울인다.
그러다가 1866년 통일 독일의 주도권 문제를 놓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정면충돌하고 전쟁은 프로이센의 압승으로 7주만에 종결된다.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의 쫀심이 있지, 죽어도 프로이센 밑으로는 안간다.'라며 버텼지만 클로트비히가 간청한 끝에 결국 북독일 연방과 우호관계를 수립한다.[5]
어쨌든 1866년 클로트비히는 바이에른 왕국의 수상으로 임명되고 비스마르크와의 긴밀한 협조 하에 바이에른 왕국과 남부 독일의 제후국들을 프로이센의 든든한 아군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이는 빛을 발한다.[6] 독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 클로트비히는 자유 제국당(Liberale Reichspartei)을 창당하면서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친다.[7] 또한 통일 당시 협조에 대한 보답으로 비스마르크 역시 클로트비히에게 요직을 맡기는데 1873년부터 1879년까지는 프랑스 대사를 지냈으며, 1880년에는 외무부 장관을 지내다가 1885년에는 알자스-로렌(당시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의 총독으로 임명된다.[8]
1894년 카프리비가 사임하자 당시 독일 제국의 황제이자 클로트비히의 친척[9]이었던 빌헬름 2세는 클로트비히에게 총리직을 맡을 것을 부탁했고 고심끝에 클로트비히는 이를 수락한다. 빌헬름 2세의 세계 정책(Weltpolitik)에 발맞추어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 간 철도를 부설하는 3B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영국과의 건함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또한 근대 한국사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삼국간섭 역시 클로트비히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
하지만 이 시기 점차 보수화되고 있던 빌헬름 2세의 내치[10]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클로트비히와 맞지 않았고 결국 클로트비히는 1900년에 건강을 이유로 사임해버린다.[11] 그의 후임으로는 베른하르트 폰 뷜로가 임명됐고 클로트비히는 사임 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1901년 사망한다.
3. 가족
1847년 자인비트겐슈타인자인의 마리(1829-1897)와 결혼, 4남 2녀를 뒀다.조카 콘라트 추 호엔로헤발덴부르크실링스퓌르스트(Konrad Maria Eusebius Prinz zu Hohenlohe-Waldenburg-Schillingsfürst)는 1906년 몇 달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스라이타니아 총리였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
[2]
정확히는 완전한
리버럴보다는
자유보수주의나
국민자유주의 정도에 가까운
중도 ~
중도우파 포지션이였다.
[3]
모계쪽으로는
빅토리아 여왕의 피가 흘렀는데, 이런 혈통을 활용해서 프로이센 군대를 가는 대신에
영국군에 입대하려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4]
아주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1848년 혁명에서 자유주의 혁명세력들을 옹호하는 한편(물론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다.) 친척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의 부탁에 당시
독일 연방 정세에 관한 편지도 자주 써주었다.
[5]
사실 클로트비히의 역할보다는
비스마르크가 보오전쟁에서 줄 잘못 섰다가 망한
하노버 왕국의 재산을 바이에른 왕국에게 뇌물로 줬던 게 더 컸다.
[6]
나폴레옹 3세는 남부 독일의 국가들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 뭐 당시 민중 사이에 만연했던
민족주의 탓에 지도층이 프랑스의 편을 들었다간 당장 혁명이 일어날 판국이기도 했고.
[7]
여담으로 자유 제국당은
세속주의 성향이 강한 개신교 신자 + 자유주의자들의 정당으로, 제국의회에서는 주로
가톨릭 중앙당에 대항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표적으로
문화 투쟁 기간 내내 자유당은 비스마르크의 충실한 딸랑이 역할을 했다.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것은, 클로트비히 이 사람은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
[8]
클로트비히 본인은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에 비스마르크가 알자스-로렌 지역에서 펼친 강경책들(가령 강제징집, 가톨릭/프랑스어 탄압)을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쨌든 비스마르크가 까라면 까라는 대로 움직였고 그 덕에 19세기 후반이 되면 알자스-로렌에서는 독일화가 상당히 진척된다.
[9]
두 사람 모두
빅토리아 여왕을 외가로 두고 있었다.
[10]
대표적인 경우로 1894년의 국가 전복 기도 처벌 법안을 들 수 있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반정부 투쟁을 탄압하기 위한 법안. 물론 이 법안은 제국의회에서 압도적으로 부결됐다.
[11]
여담이지만 빌헬름 2세와의 충돌 및 본인의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클로트비히는 이전의 총리였던 비스마르크나 카프리비와 비교해서는 확연히 정치일선에 나서는 경우가 드물었다. 심지어 내각회의나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경우도 드물어서 독일에서는 그를 일컬어서 그림자 총리(Schattenkanzler)라고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