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 라틴어: Quintus Cornific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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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2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프리카 속주 우티카 |
지위 | 에퀴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아버지) 아우렐리아 오레스틸라(아내)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해방자 내전 |
직업 | 일리리아 속주 총독, 아프리카 속주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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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일리리아 및 아프리카 속주 총독.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일리리아 총독으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따랐고, 해방자 내전 때는 아프리카 총독으로서 해방자파 편을 들었으나 티투스 섹스티우스와 아라비오에게 패해 목숨을 잃었다.2. 생애
에퀴테스 신분으로, 아버지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는 기원전 69년 호민관을 맡았고 기원전 67년 또는 66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64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는 기원전 50년경에 기원전 71년 집정관을 역임한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 오레스테스의 딸이자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전 아내였던 아우렐리아 오레스틸라와 결혼했다.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했으며, 로마에서 재무관을 맡다가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동방으로 달아나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추격하러 가는 카이사르에 의해 일리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곤경에 처했다. 당시 일리리아 부족들은 로마가 내전에 휘말린 틈을 타 독립하려 했고, 로마 정부로부터 반란군으로 규정된 폼페이우스 일당과 협력해 카이사르에 적대했다. 여기에 마르쿠스 옥타비우스가 함대를 이끌고 일리리아에 나타나 주민들을 징집하여 병력을 보충한 뒤 코르니피키우스를 압박했다.
카이사르는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코르니피키우스를 도우라고 명령했고, 가비니우스는 기원전 48년~47년 겨울에 15개 보병 대대와 3,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탈리아에서 일리리아까지 행진했다. 그러나 도중에 달마티아 부족의 공격을 받고 큰 손실을 입고 간신히 살로나로 향했다. 그곳에서 폼페이우스 측 지휘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의 공격에 맞서 항전했으나, 식량이 부족해져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가 몇달 후 병사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고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고자 이집트로 향했기에 코르니피키우스를 당장 도와줄 수 없었다. 이에 코르니피키우스는 마지막 희망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 도시인 브룬디시움에 주둔하던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바티니우스는 중병에 걸렸지만 출진하기로 마음먹고, 카이사르가 브룬디시움에 남겨둔 병사들을 민간 상선에 태워서 발칸 반도로 건너가 타우리스 해전에서 옥타비우스의 해군을 격멸했다. 코르니피키우스는 바티니우스의 활약 덕분에 일리리아를 보전할 수 있었다.
기원전 47년 로마로 돌아간 그는 카이사르에 의해 범무관에 선임되었고, 기원전 46년 봄 또는 겨울에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의 반란에 휩싸인 킬리키아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바수스를 상대했으나, 도중에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로 교체되었다. 기원전 45년 로마에서 법무관을 재차 역임했으며,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직후 원로원에 의해 아프리카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내쫓고 자신의 측근인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를 아프리카 총독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군인,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웅변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글라우쿠스(Glaucus: 스킬라를 사랑한 해신(海神)>라는 제목의 서사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학가였던 카툴루스, 키케로와 친밀한 관계였다. 키케로는 기원전 43년 3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신에게 모든 힘을 다해 국가의 대의를 위해 헌신할 것을 충고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가져야 할 존엄성이며 희망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키케로는 그해 3월 말에 서신을 재차 보냈다.
"나의 퀸투스, 우리와 함께 해주십시오. 그리고 선미에 서 주십시오. 이제 모든 정직한 사람이 한 배에 탔으며, 우리는 곧은 길을 따라 가려고 합니다."
그는 키케로의 설득에 따라 해방자 내전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이 이끄는 해방자파 편을 들기로 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지원해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기원전 42년, 삼두정치를 결성한 뒤 아프리카를 담당한 옥타비아누스는 코르니피키우스에게 아프리카 속주를 누미디아 총독 티투스 섹스티우스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그가 거절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티우스에게 코르니피키우스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섹스티우스는 아프리카 속주의 내륙 지역을 장악했지만 코르니피키우스의 부하 벤티디우스에게 포위되었고, 코르니피키우스의 또다른 부하 랄리우스는 누미디아를 침공하여 키르타를 포위했다. 다급해진 섹스티우스는 누미디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아라비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코르니피키우스 역시 아라비오에게 자신 편에 서라고 권유했다. 아라비오는 처음에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옛 지지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걸 고려하여 코르니피키우스 편을 들려 했지만, 나중에 해방자파가 결국 패할 거라 여기고 섹스티우스 편에 섰다.
섹스티우스는 아라비오의 도움 덕분에 포위망을 돌파하고 벤티디우스를 처단한 뒤 코르니피키우스를 상대로 우티카로 진군했다. 랄리우스는 키르타 포위를 해제하고 우티카로 달려왔지만, 우티카 성벽 아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했다. 코르니피키우스는 누미디아 기병대에게 둘러싸여 전사했고 랄리우스는 자살했다. 이리하여 아프리카 속주는 삼두파의 수중에 넘어갔고, 섹스티우스는 누미디아와 아프리카 속주를 동시에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