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옥타비우스 라틴어: Marcus Octav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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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평민 귀족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옥타비우스(조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아버지)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조영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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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옵티마테스파 해군 지휘관으로서 활약했다.2. 생애
평민 귀족 집안인 옥타비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조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133년 호민관을 맡아 그라쿠스 형제와 대적했다. 아버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76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51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키케로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한 걸 볼 때,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집안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기원전 50년 조영관에 선출된 그는 동료 조영관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루푸스와 함께 킬리키아 속주를 다스리던 키케로에게 경기에 표범을 동원하고 싶으니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한 속주의 총독은 어떤 경우에도 로마를 위해 동물을 잡으라고 강요받을 수 없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폼페이우스 편에 섰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의 지휘하에 대규모 폼페이 함대 중 1개 편대를 이끌고 적군을 이탈리아에 가두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달마티아에서 격파하였고, 가이우스 안토니우스가 새로 모집된 24군단과 신편 28군단의 절반을 맡아 일리리쿰으로 수송하는 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함께 저지하여 쿠릭타 섬에 가두었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는 기아에 시달리다가 15개 코호트들과 함께 항복했다.( 쿠릭타 공방전)
이후 살로나 시를 포위공격했지만 저항에 부딪쳤다. 급기야 수비대는 모든 성인 노예를 풀어주고 무기를 쥐어준 뒤, 성문을 열고 그들을 앞세워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은 그는 본군과 합류하기 위해 디라키움으로 떠났다.( 살로나 공방전) 기원전 48년 여름 파르살루스 전투 후 함대를 이끌고 달마티아에 나타나 주민들을 징집하여 병력을 보충한 뒤, 카이사르파 총독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를 압박했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이를 막으려 했지만, 식량이 부족해져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가 몇 달 후 병사했다.
기원전 47년 초, 그는 연이은 승리로 달마티아 전체를 공략하는 듯했다. 그러나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가 브룬디움에서 달마티아로 건너와 압박을 가했다. 당시 에피다우로스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그는 적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포위를 풀고 타우리스 섬 인근에서 해전을 벌였다.( 타우리스 해전) 그러나 이 전투에서 참패한 그는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해서 간신히 탈출했다. 이후 살아남은 배 몇 척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항해했다. 기원전 46년 2월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와 함께 함대를 이끌고 아기무르 섬에서 카이사르파 함대를 격파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탑수스 전투 패전 소식을 접한 그는 2개 군단과 함께 우티카 근처에 진을 치고 소 카토에게 "당신은 정치를 맡으시오. 나는 군대 지휘권을 맡겠소."라고 제안했다. 카토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고 오직 친구들에게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권력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심연의 끝자락에서도 떠나지 않으니, 우리의 대의가 허물어진 게 어찌 놀랍겠는가!"
이후 옥타비우스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 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휘하 해군 제독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동명이인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