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21:32:48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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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내용
3.1.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3.2. "그래도 나는 존재한다"3.3. 흔한 오해들
3.3.1. '생각한다'는게 꼭 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아니다3.3.2. 생각하지 않을 때 내가 존재하는지는 아직 모른다3.3.3.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3.3.4. 의심불가능한 '나'가 실제 나라는 보장은 아직 없다
3.4. 〈제2성찰〉 후
4. 의의와 한계
4.1. 관련 해석 및 반박들의 형태
5. 번역6.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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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네 데카르트가 제시한 논리. 이 말과 작은 책자인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이하 성찰)〉에 나오며 이말 하나로 데카르트는 철학계의 스타가 되었다. 물론 이 말은 〈성찰〉에서 직접 나온 말은 아니다. 〈성찰〉에서는 더 업그레이드 되어서, '나는 내가 사유하는 동안만 존재한다'라는 언급으로 주장을 더 명확하게 한다.

신선하고 기발한 발상이었지만 데카르트가 직접 집필하고 발행한 관련 서적의 숫자가 매우 적어서 수많은 논문과 서적을 내고도 주목을 받기가 힘든 현대의 심리학/ 철학 교수들은 데카르트가 철학계 희대의 행운아라고 농담하기도 한다.

데카르트가 맨 처음 생각한 개념은 아니며,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해당 개념을 이야기한 바가 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비슷한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있다.

2. 배경

사실 그가 완전한 원조는 아니고, 철학자 성 아우구스티노 인식론과 존재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말로 보는 게 적당하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감각이 인간을 속일 수 있으며(찬 물인데 뜨겁다고 느끼거나, 미지근한 물도 뜨겁다고 순간 생각하는 등), 또한 상대주의(똑같은 온도의 물에 대한 사람들의 제각각 다른 인식 같은 것)에 의해 객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상대주의, 회의주의를 극복하고자 했고, 진리가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지금 내가 물이 따뜻하다고 느낀다면, 그 인식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참된 것이다 라는 쪽으로 진리의 방향을 선회시켰다. 따라서 감각의 속임수로 인해 회의주의가 성립하는 것을 반박하면서, 만일 내가 진리를 잘못 알고 있다면 (또는 인식을 잘못하고 있다면), 나는 존재한다. (Si enim fallor, sum) 라는 명제를 도출했다. 이는 감각에 속으면서 의심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가 진실에 대해 의심하는 것을 인식하는 행위가 자신의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한다고 말했다.
플로티누스의 서적을 읽으면서 교부는 "만들어진 그것들을 통해서 진리가 파악되어 드러나고 있으니 진리가 존재하지 읺는다고 의심하기보다는 차라리 살아있음을 의심하는 편이 훨씬 쉬웠습니다."("고백록" 7,10,16)는 논지를 편다. 이 확신은 "내가 속는다면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라는 명제로 정리된다.
"그대가 의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지 않는지 식별하라. 그리고 만일 그대가 의심을 하고 있음이 확실하거든, 이 확실성이 어디서 오는지 살펴보라. ...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사유의 법칙을 확립할 수가 있다: 누구든지 자신이 의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자는 적어도 자기가 의심을 한다는 한 가지 진실은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대상, 의심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확실하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에 대한 확실이다. 누구든지 진리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는, 자기로서는 의심을 하지 않는 진실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 진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는 진실한 사물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종교(De vera religione)" (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20112) 39,73.]
-아우구스티누스. " 고백록"(성염 역주, 경세원) 역자 해제 24-25쪽

토마스 아퀴나스도 사람은 어떤 것을 생각하자마자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점을 지적하며, 모든 것을 의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in hoc enim quod cogitat aliquid, percipit se esse.
무언가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토마스 아퀴나스, 진리론 Quaestiones disputatae de veritae 10문 12절

3. 내용

3.1.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성찰〉에서 데카르트의 목표는 학문의 기초를 확고히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데카르트는 사람들이 갖는 믿음들을 검토하며, 티끌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생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잠정적으로 제쳐 놓기로 한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방법적 회의라고 부른다.[4] 〈제1성찰〉에서 데카르트는 크게 2가지 회의적 논변을 제안한다:

감각은 인간을 때때로 기만하므로, 감각으로 얻어지는 정보는 확신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지금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다는 식의 사소한 사실에 대한 정보조차도, 내가 사실은 꿈을 꾸고 있는 경우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경우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의심 가능하다.

반면에 감각이 아닌 이성의 추리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 예를 들자면 수학적 추론은 꿈 속에서조차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5] 꿈이라고 1+1이 3이 되는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을 얻는 자신의 추론적 과정이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 오류를 범하도록 조작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요컨대 수학적 판단, 이를테면 '2+3이 뭐지?' 할 때에도 2+3이 원래는 6인데 5이라고 생각하도록 정신이 조작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아마도 이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나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증거를 가지고서는 내가 지금 전능한 기만자에 의해서 속고 있는지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확고해보이는 수학적 지식 또한 의심 가능하다고, 따라서 확실한 지식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 '방법적 회의'의 결과다.

이처럼 우리가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는 것 같은데...

3.2. "그래도 나는 존재한다"

만약 전능한 기만자가 나를 속이고 있다면, 나는 곧 의심의 여지없이 존재한다. 그가 아무리 날 속이고 있다고 치더라도, 나 자신이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한, 나를 아예 없게 만들 수는 없다. 이렇듯 모든 것을 깊이 숙고해보건대,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야말로 매번 생각이 들거나 생각을 할 때마다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다.[6]
데카르트, 〈제2성찰〉中

설령 내가 꿈을 꾸고 있고, 전능한 기만자가 나를 끊임없이 속이고 있다고 한들, 그 꿈을 꾸고 있고 전능한 기만자에게 속아넘어가고 있는 나 자신만큼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2성찰〉의 요지이다. 곧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3.3. 흔한 오해들

그 유명세로 인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며, 아래에 소개된 여러 '의의와 한계'들 가운데서도 일부는 그 오해를 답습하고 있다. 이런 오해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선 데카르트의 주장을 보다 명료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3.3.1. '생각한다'는게 꼭 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존재다. 그게 무엇인가? 이는 곧 의심하거나, 이해하거나,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욕구하거나, 욕구하지 않거나, 또한 상상하거나 느끼는 존재다.[7]
데카르트, 〈제2성찰〉中

이 시점에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은 꼭 이성적인 의식적 사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은 이성이 개입되지 않은 감성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생각’이라기 보다는, ‘인식’, 혹은 ‘정신’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하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이성적/의식적 사고에만 매몰되어 있다"라는 지적은 적어도 현 논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3.3.2. 생각하지 않을 때 내가 존재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 이건 확실하다. 그런데 얼마나 오래? 내가 생각하는 동안은 확실히. 왜냐면 내가 모든 생각을 멈출 때, 내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8]
데카르트, 〈제2성찰〉中

〈제2성찰〉 시점에서 데카르트는 '생각할 때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 이상의 주장은 펼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가 생각을 멈출 때마다 우리는 없어져버리고, 새로운 생각이 날 때마다 새로운 '우리'가 탄생하는 것이라는 가설을 이 시점에서 데카르트는 반박할 생각이 없다.

이러한 가설에 대한 반박은 〈제2성찰〉 이후에 고려된다.

3.3.3.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데카르트는 생각과 존재의 관계가 인과관계라고 보는게 아니며, 오히려 추론 관계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나는 생각(혹은 착각)한다'는 확고한 사실은 '나는 존재한다'는 것의 원인이 아닌 증거라는 것.

다음 사례와 비유해보자:
장기에 종양이 생겼기 때문에 특정 피부 조직이 괴사했다.

'특정 피부 조직이 괴사'한 것의 원인은 '장기에 종양이 생겼'다는 것이다. 반면 '특정 피부 조직이 괴사'한 것은 '장기에 종양이 생겼'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데카르트의 사례에 유비하자면, '특정 피부조직이 괴사'한 것에 대응하는 것이 '나는 생각한다'이며, '장기에 종양이 생겼'다는 것에 대응하는 것이 '나는 존재한다'라고 할 수도 있다. 즉 르네에 따르면 생각하는 것이 존재의 증거라는 것이다.

3.3.4. 의심불가능한 '나'가 실제 나라는 보장은 아직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내가 실제로 지금 나무위키를 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보장해주지 못한다. 나무위키가 존재한다는 점도, 나무위키를 조회할 수 있는 전자기기가 존재한다는 점도, 아예 내가 사람이라는 점조차도 보장해주지 못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장 데카르트는 '생각을 멈추는 순간 나는 죽는다'는 가설조차 이 시점에서는 배제하지 않는다.

현시점에서 데카르트가 확신하고 있는 '나'에 관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오직 1인칭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으므로, 데카르트가 보장하는 '나' 또한 어디까지나 1인칭적으로 접근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9]

3.4. 〈제2성찰〉 후

〈제3성찰〉에서부터는 적어도 내 마음속에는 내가 가지는 관념들이 있다는 논제가 제시된다. 여기서 관념들이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할 때 데카르트는 그 관념들이 정말 존재하는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사과를 떠올리고 있을 때 그 사과가 외부에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

사실 데카르트 본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이후이다. 데카르트는 나의 존재 및 여타 확실한 명제는 참이라는 입장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추론해낸 다음, 신에 기대어 다시 확실한 명제가 참이라는 입장을 개진한다. 즉 데카르트의 유신론이나 유명한 심신 이원론 같은 본격적인 논제들은 제2성찰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는 일단은 독립적이다.

이는 순환 논변처럼 보이기에 '데카르트의 순환(Cartesian circle)'이라 불리는 유명한 문제를 만들어낸다. 여튼 데카르트의 논의가 자신의 존재 증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확실한 수많은 지식에 대한 증명까지 미치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뒷부분이 순환 논변인 것처럼 보여서 문제일뿐(...)

4. 의의와 한계

이 간단한 한 마디는 인간이 몸 + 무언가(영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의 기초이다.[10][11] 수많은 창작물들이 시간을 넘어서 우려먹는 주제를 제공한 것은 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바꿔써서 반박하는 방법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력한 반박 중의 하나가 바로 장자 무아사상을 주장하기 위해 지은 고사들 중에 하나인 호접몽인데 사유를 하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되는 원론적인 '나'의 개념 자체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이기 때문.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매트릭스같은 가상현실을 생각해보자. 가상현실 속의 '나'는 여럿이 될 수 있지만 이들을 조작하는 '나'는 하나다. 가상현실 속에서 아무리 나비도 장자도 될 수 있다해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조작하고 꿈을 꾸는 존재인 '나'는 분명 한명이다. 즉 다른 말로 사유하고 있는 '나'는 하나뿐이다. 이를 근거로 내가 사유를 하는 주체인것이 아니라 사유 그 자체가 '나'라고 보는 관점또한 있을 수 있다. 간단히 게임을 예로 들자면, '나'는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라 게임을 하고있는 게이머인것이다.

그런데 내가 기억상실에 걸린 게이머라고 하더라도, 그 게이머는 분명히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데카르트가 증명하고 싶은 것은 이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무언가는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 같고, 이 무언가를 '나'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12] 그는 여기에서 마음의 직관적인 투명성에 기대어서(타인의 마음은 볼 수 없지만 자신의 마음은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게임을 하고 있는 구체적인 나' 말고 '무언가 내 마음을 돌이켜 생각하는 나'를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무의미한지는 여전히 논의 대상인 상태.
  • 프리드리히 니체 : 니체는 언어적 접근으로 비판한다. 인도-아리아 언어는 주어 + 술어의 구조의 문법을 가지는데 이 문법, 즉 언어적 습관은 주어가 존재한다는 숨은 믿음, 또는 전제가 이미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복수의 생각하는 행위들이 '나'라는 관념을 만든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선악의 저편>, 55.

여하튼 서양의 '주체로서의 자아'을 대표하는 기초가 된 말이기 때문에, '의심의 세 대가'로 불리는 근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많은 반박을 받은 명제이기도 하다. 프리드리히 니체이성은 존재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해당 어구를 '그 무엇이 생각한다'로 치환시킨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드, 자아, 초자아를 꺼내면서 '나는 생각한다' 이전의 단계를 설정하면서 '생각하는 나'의 절대성을 무너뜨렸고[13] 카를 마르크스는 물질적 토대와 사회에 기초해 개인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여 관념론적인 데카르트의 사고를 반박한 바 있다.

장폴 사르트르는 진리에 뿌리를 두지 않은 개연은 모두 허무속으로 와해되어 버릴 운명 이라고 했다. 때문에 확고한 개연을 세우려면 확실한 진리가 있어야 하고, 그 절대적 진리는 단순하고 중계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서 '코기토'에 절대적 진리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또한 자아가 스스로를 파악함으로서 얻어지는 이 이론에 의해 자아는 확고한 것이 되고, 반대로 바깥 세계의 모든 현상은 단지 있음직한 일이 되어 버림으로서, 코기토는 진리에 기반하여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며, 단지 물질로 여기지 않는 유일한 학설이라 주장했다.

작가 마광수는 인간에 대하여 중 '인간은 '문자'의 굴레 속에 있다'에서 비판했다.

여하간 데카르트의 이원론에까지 이어지는 추론은 이후의 과학계와 철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미 근대에서부터 라이프니츠와 같은 사람들은 실체 일원론을 주장했고, 칸트나 흄과 같은 사람들은 코기토 논변 자체는 명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자아 개념에서부터 신의 존재에까지 나아가는 추론은 정당하지 않다고 보기도 하였다. 철학이 아닌 현대 경험과학쪽 근거를 보면, 애초에 뇌의 이상이 의식의 이상으로 이어지는 물질적 선후관계가 있는 데다가, 20세기 말부터 시행된 과학적 실험들의 결과로 의식은 뇌의 반응 이후에 따라오는 현상이라는 것이 최근의 결론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경험하는 표면적 의식이 독립적으로 기능한다거나, 혹은 사고실험의 시발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추론은 어려워지고 있기도 하며 21세기에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등장한 가상 현실 개념을 접목시킨 형태의 반박도 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는 시뮬레이팅 중인 가짜 세계이며 그 안의 모든 생명은 단순히 프로그래밍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일 뿐이라는 식인데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지구멸망 문서의 모의 실험 중단 항목을 보면 된다. 아무튼 데카르트의 이원론적인 통찰은 다소 낡은 입장으로 분류되므로 어디에서 섣불리 인용하지는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듯 현대에는 부정되는 쪽으로 기우는 추세지만 계몽주의의 효시격으로 일컬어지는 한 마디로 역사적인 의의는 충분하다. '자아'와 '세계'를 완전히 분리해서 보는 근대철학의 태도는 이 말에서 기반을 얻었으며 신앙공동체(교회)와 정치공동체(영주)의 명령에 따르는 부품으로서의 '주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 서게 한 것도 이 고찰이다. 이 문장으로 표현되는 사상적 경향이 결국 시민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이므로 의외로 큰 의의가 있다.[14]

4.1. 관련 해석 및 반박들의 형태

지식은 명석하고 판명해야 하므로, 의심 가능한 명제는 지식이 될 수 없다. 내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명제들은 사실 꿈속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꿈 속에서 이러한 명제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들은 거짓일 것이고, 따라서 의심 가능하다. 따라서 경험적 명제들은 지식이 될 수 없다. 수학과 논리학과 같은 비-경험적인 지식들은 꿈을 통해서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항상 틀리도록 나를 오도하는 사악한 악령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들을 단 한번도 맞게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역시 의심 가능하다. 따라서 비-경험적 지식들 역시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이 틀릴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내 마음을 관찰할 때에 내 마음속에 여러 명제가 왔다갔다하고 있는 것, 수많은 명제를 지금 이 순간 명확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무언가를 떠올릴 때에, 그 무언가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2차적 의미의 생각이 진행되고 있음은 명확하다.(이를테면, 내가 사과는 붉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내 눈에 악마가 붙어있어서 사실은 사과가 검은데 내가 붉다고 착각하고 있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내가 사과가 붉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틀릴 수가 없다.) 이 생각의 주체는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으리라.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내 생각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는, 바로 이 순간에 한해 존재한다.
코기토 명제의 해제 및 비판은, 데카르트 스스로가 직관에서 도출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위의 논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종의 추론 형태를 띄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코기토 명제 전체 - 생각이 있으므로 그것은 나이며 나는 존재한다 - 가 직관적인지, 혹은 그 부분 - 나는 존재한다 - 만이 직관적인지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차적인 논쟁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해당 명제가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게 나뉘어지고, 해당 명제의 문제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려는 작업도 한창이다.

이와 관련, 명제 자체를 분해해 보면, 이 논리적 구조와 그 전제가 생각처럼 자명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인가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인가? 이것이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충분한 회의를 거친 뒤에도, 정말로 자명한가? 등의 비판이 따른다.

논리적 논증에서의 공격이 많은데, 버트런드 러셀은 상기 인용한 데카르트의 논변에 대해 '생각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들어 공격한 바 있으며, 쇠렌 키르케고르의 경우, 이 명제는 논리적 논증이 아니라 직관에 호소하는 심리적 논증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마광수는 수학적인 진리조차도 의심하면서, 심지어는 '악마가 모든것을 잘못 알도록 하지는 않았을까?'까지 의심하면서 그런 사실이 문자로 쓰여진다는 것에는 어떠한 의심조차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위키백과 항목

5. 번역

I think, therefore I am[15] - 영어
Ich denke, also bin ich - 독일어
Ik denk, dus ik ben - 네덜란드어
Penso dunque sono - 이탈리아어
Pienso, luego existo - 스페인어
Σκέφτομαι, άρα υπάρχω - 그리스어
我思う、故に我在り[16] - 일본어
我思故我在[17] - 중국어

6. 패러디

패러디될 때는 별 철학적 고려 없이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 혹은 존재 그 자체라고 할 만한 목적성을 규정하기 위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절대 다수의 경우, 앞의 내용과 패러디는 별 상관이 없다.

나는 의욕한다. 고로 존재한다(Volo, ergo sum)라는 말도 있다. 이것만큼은 아래의 패러디들과 달리 르네 데카르트의 사상과 관련이 있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멘드비랑(Pierre Maine de Biran)이 남긴 말이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서도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我反抗 故我在")라는 문구가 문구가 등장한다.

Charlotte 1화에서 주인공 오토사카 유우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을한다. 후에 자신이 왜 자신이고 저사람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니 그 사람이 되었다.

파일:external/i1.kym-cdn.com/028.jpg

' Give her the Dick'이라는 데카르트와 관련된 Pornhub 발 인터넷 에서도 이 말을 패러디했다. 뜻은 나는 좆을 준다, 고로 존재한다.

Lobotomy Corporation의 핵심 설정으로 '코기토'라는 이름의 약물이 등장하며, 마지막 세피라인 케테르의 미덕이 '생각하는 나'이다.

가면라이더 고스트의 오프닝 주제가인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가 여기서 따왔다.

강철의 연금술사에서는 밸리 더 쵸퍼가 흠좀무하게도 "나는 죽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의 존재는 그 정도면 충분해" 라고 말한다. 다만 이 부분이 마냥 철학적(?)인 면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말을 하기 직전 밸리 더 쵸퍼가 알폰스에게 "니는 니 형이 만든 강철 인형이 아니냐" 라고 정신공격을 가했고 이에 알폰스가 그럼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밸리 더 쵸퍼는 과거 자신이 정육점 주인이었다가 살육에 맛들려 23명을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던 인물로 말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과거가 어찌 되었든 지금은 살육마로서의 자신만이 진정한 자신이라는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말이지만 이쪽은 애초 살육에 단단히 맛들린 놈이란걸 유념해두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플레이한다라는 피를로의 자서전에서 패러디되었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의 AM은 이 대사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응용한다. 육체 없이 정신만 존재하는 인공지능인 자기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얼마나 심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다.

데이트 어 라이브 11권에서 시도의 스푼을 핥으려는 오리가미의 내부갈등으로 패러디되었다. 아래는 그 내용의 본문.
올바름은 대체 뭐고, 그릇됨은 대체 뭘까. 옳고 그름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그런 애매한 것이 오리가미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을까? 아니, 비난할 수 없다. 그 이전에 그릇됨이란 대체 무엇일까. 오리가미가 지금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주의 섭리에 반하는 행동이 아닐까. 과거 철학자 오리링·토비잇치는 말했다. 누구도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내가 시도의 스푼을 핥는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이곳에 존재한다고. 즉, 나는 [ruby(핥는다. 고로 존재한다, ruby=날름날름 · 에르고 · 숨)], 인 것이다.

라이브 어 라이브의 여러 시나리오중 sf편의 무대인 우주를 항해하는 수송선 이름이 ’코기토 에르고 숨’이다.

박사 붐의 폭심만만 프로젝트의 중립 전설 카드 실험체 9호의 등장 대사는 "나는 굶주렸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스타워즈의 현상금 사냥꾼 로봇인 IG-88 시리즈를 다루는 짧은 소설에서는 이 로봇들의 신념으로 패러디되어 나온다. "나는 파괴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2005년에 나온 학습만화인 ' 신데렐라 백설공주의 환상 미술여행'[18]에서는 이 말을 변형한 말인, "나는 상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라틴어로 한 "Sómnĭo, ergo sum(솜니오 에르고 숨)"을 주문으로 쓴다.

어떤 마술의 인덱스땅에서는 " 나는 무시당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패러디.

오버워치 젠야타의 대사 중에 이것이 있다.

우주해적 코브라에서 해적길드의 인공지능 포탑에 "Cogito, ergo sum"을 입력하여 서로 다른 존재를 부정하도록 하여 파괴하도록 한다.

총몽에서는 작가인 키시로 유키토가 각주를 통해서 '얕은 생각이다'라며 비판했다. 이에 대하여 총몽이라는 작품이 사이버펑크 트랜스휴머니즘을 토대로 하여 "기계 몸에 인간의 뇌, 칩 뇌에 인간의 몸. 이 중 어느 쪽이 인간인가?" 하는 식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점을 부여하는 소재가 많이 나오니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하지 않는 잘못된 비판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데카르트의 해당 논리는 불교의 무아사상과 데이비드 흄의 사상으로도 충분히 비판이 가능했고 작품의 두뇌칩도 자아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는 소재이므로 이를 잘못된 비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 대응일 뿐이다. 다만 작중 자렘인들은 바이오 칩의 형태로서 엄연히 존재했으니, 그것은 그저 생각하는 존재의 "형태"에 대한 의문일 뿐, 생각하는 존재의 유무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까지 나아갔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데카르트는 이미 작중의 의료감찰국이나 멜키제덱에서 더 나아간 악령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이를 숙고하였으니, 작가의 "앝은 생각"이라는 비판은 여러모로 핀트가 어긋난 것으로 보인다.

켄간 아슈라의 등장인물 카노우 아기토"나는 싸운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살벌하게 패러디한다.

펌프 잇 업 XX 2.04.0 업데이트의 추가 미션인 Skeptic D28의 부제는 Windforce steps; therefore Skeptic exists다.

팬택 베가 브랜드 광고 베가 시크릿 노트 광고에서 부터 고로 존재한다드립 문구를 광고들에 썼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에 등장하는 모드론인 노돔도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말 끝에 소심하게 "...I think.(아마도.)"라고 덧붙인다.

이런 유머도 있다.
데카르트와 그의 아내가 있었다. 저녁시간이 되자, 데카르트가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근사한 식당에서 외식이나 합시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아내는 과자를 잔뜩 먹었던 터라
"전 별로 생각이 없네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그의 아내가 사라졌다.
생각이 없다는 생각을 했잖아
물론 데카르트는 결혼을 안 했으니 절대 아내가 있을 수 없다
있었는데 없어진거라면..?

파일:고로케존맛.jpg

25일의 아마추어 웹툰이자 먹툰인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밥 먹어에서 패러디되었다.

2020년 코로나 19로 화제가 되자 이런 유머도 생겨났다.
"나는 마스크를 쓴다. 코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코로 나는 존재한다." 몇 수 앞을 내다보신건지... 데카르트좌
알베르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 1951)이라는 책에서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Je me révolte, donc nous sommes)라고 주장했다.


[1] 최초로 작성했을 때에는 프랑스어로 썼다. 나중에 자신이 한 말을 다시 인용하면서 아래의 라틴어 표현으로 바꿔 썼다. [2]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가 '나는 생각한다', ergo가 '고로', sum이 '나는 존재한다'. 라틴어는 주어에 따라 동사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굳이 '나는'이나 '너는'을 안 붙여도 주어를 알 수 있다. 문법적으로는 꽤 간단한 문장이라서 라틴어 수업을 들으면 1교시에 배울 수도 있다. [3] 아래에서 11번째 줄 [4] 아우구스티노나 데카르트나 회의론자로 구분 지을 수는 없다. 아우구스티노는 절대적 존재, 전지-전선-전능한 존재로서의 신의 존재를 믿었고(의심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회의를 사용한 것이다.(방법론적 회의-이 회의적 사고의 결과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회의를 위한 회의를 한 회의론자와는 다르며, 오히려 두 명 다 절대적 진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모두 의심해야 하는 회의론자와는 정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5] 데카르트는 '연장'(밀랍의 맛과 향 따위는 감각의 영향이지만, 밀랍의 질량이나 부피 등은 직관적인 사실이다)에 대한 앎 역시 포함시킨다. [6] haud dubie igitur ego etiam sum, si me fallit, et fallat quantum potest, nunquam tamen efficiet, ut nihil sim quamdiu me aliquid esse cogitabo, adeo ut omnibus satis superque pensitatis denique statuendum sit hoc pronuntiatum: _ego sum, ego existo_, quoties a me profertur, vel mente concipitur, necessario esse verum [7] Sed quid igitur sum? Res cogitans. Quid est hoc? Nempe dubitans, intelligens, affirmans, negans, volens, nolens, imaginans quoque, & sentiens. [8] ego sum, ego existo, certum est. Quandiu autem? nempe quandiu cogito; nam forte etiam fieri posset si cessarem ab omni cogitatione, ut illico totus esse desinerem [9] '사유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어떤 회의를 하든, 그 어떤 사유를 하든 결국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의 존재가 결론적으로 나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입장이다. 다만 이것을 문장으로 표현한 방식이 3단 논법인지라, 대전제인 '사유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가 선행해서 입증되어야 한다는 반박이 있다. 데카르트는 상술한 대전제와 완전히 같은 의미로 '사유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말을 했겠지만... 그러므로 문장이 맛깔나지는 않지만, "사유가 있다"는 표현이 반론의 여지가 적다. [10] 물론 이러한 사고의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플라톤까지 끄집어낼 수 있다. [11] 다만 데카르트에서 이 명제 자체는 사유하는 주체의 존재, 혹은 정신의 존재가 물질이나 육체보다 더 판명하게 인식 가능하고 보다 의심 불가능하다는 것일 뿐, 곧바로 이원론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가 이원론을 확실히 주장하는 것은 성찰의 마지막인 6성찰이며, 여기에서 그는 경험적 지식에 대한 신의 보증을 전제로 사용한다. [12] 애초에 저 문장이 반박이 되지 못하는게, 여기서 존재의 증명이 되는 것은 생각한다는 행위 자체이다. "생각한다"고 하건 "생각한다고 생각한다"고 서술하건, 무언가가 생각을 하고 있단 것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생각을 할 주체 자체가 없다면 그걸 인식할 수조차 없으니까.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 (착각)하기 때문에 이는 내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없는게 "생각한다는 생각" 자체가 그냥 생각이기 때문에 "생각한다"로 대체될 수 있는 것. "실제론 생각하지 않는데 생각한다고 생각한다"는 건 말 자체에 모순이 있어 성립하지 않는다. "사고한다" "추정한다"와 달리 단순히 머리 속으로 뭔가 떠올리는게 생각이기 때문에 어떤 존재건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고, 반대로 그 내용이 뭐든 생각 자체를 하고 있다면 그 존재는 부정할 수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나"라는 게 인간이건, 고도로 프로그램된 AI건, 심리학에서 자주 드는 예인 통속의 뇌건, 이미 죽은 시체의 뇌조각이 활동하며 만들어낸 마지막 생각이건, 인류가 멸망한 지 수만년이 지난 시점에 남아있는 의식(영혼)의 파편이건, 유령이건, 생각이 있다면 어쨌건 그 주체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13] 프로이트의 이론이 경험론적 한계로 인해 사실상 매장되기도 했고, 현대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을 부정하긴 하지만, 반면 경험과학적으로 의식에 앞서 행동이 이루어진다는 연구가 있기 때문에, 의식 이전의 단계가 있다는 공통적 요소에서는 상기할 만하다. [14] 심지어 이런 시각 조차도 어쨋든 데카르트가 이런 논리 전개를 처음 펼쳤기 때문에 이후에 명제의 참을 가르기 위해 싸운 결과물이다. 데카르트가 이런 말 조차 하지 않었더라면 이런 부정 자체도 없었을 것이다. 어쨋든 이 발언 자체는 데카르트의 허세적 발언이나 대충 내뱉은 발언이 아닌, 몇년간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쨋든 이 모든 걸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 자체는 참인 거 같다."라는, 그 당시에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던 셈이다. 현대인들이 당시의 데카르트의 고뇌를 고려하지 않고 쉽게 헛소리로 치부할 정도로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15] 이게 공식 번역이다. # [16] われおもう、ゆえにわれあり [17] 한국 한자음으로는 아(난)사(생각한다)고(고로)아(나는)재(있다). 중국어 발음으론 Wǒ sī gù wǒ zài. [18] 2014년 당시 주니어김영사 편집자인 고영완이 2005년 당시 나무(그림나무)라는 집단에 속해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