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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제5대 로마 왕국 국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Lucius Tarquinius Prisc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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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불명 | ||
즉위 | 기원전 616년 | ||
사망 | 기원전 578년 | ||
재위기간 | 로마 왕국 제5대 왕 | ||
기원전 616년 ~ 기원전 578년 (3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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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부모 | 父:데마라투스 | |
배우자 | 타나퀼 | ||
자녀 | 아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딸 타르퀴니아 | ||
가족 |
사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딸 타르퀴니아 외손녀 툴리아 마이너 외손녀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1] 외증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2],아룬 타르퀴니우스,티투스 타르퀴니우스 형 아룬 타르퀴니우스 조카 아룬스 타르퀴니우스 종손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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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5대 로마 국왕. 상인 출신으로 에트루리아계이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616년 ~ 기원전 578년.2. 생애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여러 상업을 하여 재산을 쌓았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의 모함으로 결국 자신의 고향을 탈출하게 되었고 어쩔수 없이 로마로 가던 중 독수리가 그의 모자를 뺐었다 주었고 이를 본 그의 아내 타나퀼이 "왕의 앉을 조짐이니 로마의 왕에게 자신의 가치를 보여줘라"라며 그에게 예언을 하였고 그는 예언대로 당시 왕이었던 안쿠스 마르키우스에게 가서 자신을 증명하여 마르키우스의 지원 아래 왕이 될 수 있었다.왕이 된 그는 원로원의 숫자를 300으로 늘렸으며 여러 귀족 가문들을 키워냈고 당시 목축업과 농업이 주축이 되던 로마 사회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왕 때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하여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부터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까지의 시기를 상업왕 시기라고도 한다. 내정을 안정화한 후 자신들을 약탈 하였던 '아피올라이'를 공격하여 승리, 라틴족들과 사빈족들을 차례로 격파하였다. 또한 자신의 친족인 아룬스 타르퀴니우스도 콜라티아 마을을 방어하는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전임자의 두 아들에게 암살당하며 허무하게 사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