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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크물의 모습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캄페체의 고대 마야 도시 칼라크물과 열대림 보호구역 |
영어 |
Ancient Maya City and Protected Tropical Forests of Calakmul, Campec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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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 |
Antigua Ciudad Maya y Bosques Tropicales Protegidos de Calakmul, Campeche |
|
프랑스어 |
Ancienne cité maya et forêts tropicales protégées de Calakmul, Campeche |
|
국가·위치 | 멕시코 캄페체 주 | |
등재유형 | 복합유산 | |
등재연도 | 2002년 | |
등재기준 | (i)[1], (ii)[2], (iii)[3], (iv)[4] | |
지정번호 | 1061 |
[clearfix]
1. 개요
멕시코 캄페체 주에 위치한 마야 문명의 유적.[5] 페텐 분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과테말라 국경에서 3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최전성기인 고전기 마야 문명에서 티칼과 자웅을 겨루던 양대 강대국들 중 하나였다.칼라크물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마야 도시 유적들 가운데에서도 티칼을 제외하면 독보적일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유적지이다. 상징은 뱀이었고, 전성기 시절에는 남쪽에 있었던 티칼과 함께 마야 세계를 양분하며 패권을 누렸다. 고전기 대부분의 시간 동안 번영을 누렸고, 최전성기 시절에는 인구가 50,000명에 달했으며 왕국의 영토는 심지어 150km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고전기가 지나가면서 점차 칼라크물도 쇠락했고, 결정적으로 티칼의 대왕 자소우 찬 카윌 1세에게 패배하면서 끝끝내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칼라크물은 고전기가 지나가면서 결국 버려져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이후 울창한 정글이 칼라크물을 뒤덮었으며 칼라크물은 수 백여 년동안 초목 속에 잠들어있었다. 그러다가 1931년 12월 29일에 키루스 L. 룬델이 비행기를 통해서 칼라크물을 재발견해냈으며 1932년 3월에 보고되었다. 이후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교통이 가기 어려운 곳에 위치한 탓에[6] 티칼만큼의 관광세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
2. 역사
2.1. 고전기 초기
마야 문명의 역사는 크게 선고전기, 고전기, 후고전기 이렇게 3개의 시기로 나눠지는데, 칼라크물은 이중 선고전기 시대부터 이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고전기에는 나크베와 엘 미라도르라는 2개의 거대한 대도시들이 등장하여 마야 세계의 패권을 잡고 있었는데, 당시 칼라크물은 딱히 패권을 드러내지 못하는 중대형 규모의 도시였다. 상황이 변한 건 두 도시들 중 하나의 왕족이 칼라크물로 이주했을 때부터였다. 한 그룹의 왕족들이 칼라크물로 이주해서 정착했고 그때부터 칼라크물의 권위는 크게 수직 상승했다. 나크베인지 엘 미라도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권위를 칼라크물이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선고전기에서 고전기로 변하는 전환기에 나크베와 엘 미라도르를 포함해 수많은 선고전기 도시들이 몰락했다. 그러나 칼라크물은 이 전환기에서 살아남았고, 이는 인근 대도시였던 티칼도 마찬가지였다. 칼라크물은 막강한 군사력과 권위를 바탕으로 활발한 확장 정복 정책을 펼쳐나갔다. 칼라크물의 국왕들이 자신의 상징을 뱀으로 삼았기에 고고학자들은 칼라크물의 왕조를 칸 왕조라고 부른다.[7] 500년대 즈음에 칸 왕조의 왕들은 칼라크물을 다스렸고, 주변의 수많은 중•소형 도시들을 직•간접적으로 다스렸다.
6세기 경 중반에 이르자 칼라크물의 영향력은 하늘을 찔렀다. 수많은 도시들과의 결혼 동맹을 통하여 거대한 동맹 연합체를 구성했고, 칼라크물은 동맹 연합의 수장으로써 마야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칼라크물의 성장을 곱지 못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똑같은 패권국의 입장이었던 티칼이었다. 칼라크물은 사사건건 티칼과 충돌하면서 패권을 두고 경쟁했고, 초반에는 칼라크물이 티칼을 앞서나가는 듯 보였다. 546년에는 툰 캅 힉스 왕이 나랑호를 침공하여 왕을 교체해버렸고 약스칠란의 왕을 사로잡으며 복속시키기도 했다.
561년 경에는 하늘의 증인이라는 왕이 등장해 엄청나게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그는 나랑호 남쪽에 있는 도시이자 티칼의 봉신국이었던 카라콜을 점령하여 그 곳의 왕을 겸했으며, 결정적으로 562년에는 티칼 군대와 격돌해 티칼 왕 왁 찬 카윌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하늘의 증인은 왁 찬 카윌을 제물로 바쳤고, 티칼의 왕통을 끊어버리면서 티칼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칼라크물은 이 대사건으로 인해 유일한 마야 문명의 패권국으로 등극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티칼은 이 사건으로부터 무려 130여 년에 달하는 티칼 히아투스에 시달리게 되었다.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기에 보통 이를 기점으로 고전기 초기와 후기를 나눈다. 참고로 하늘의 증인은 572년 쯤에 승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2.2. 고전기 후기
티칼을 꺾어버리면서 칼라크물의 독주 시대를 연 하늘의 증인이 승하한 이후, 도끼를 휘두르는 자가 새로운 왕이 되었으며 대략 6년 정도 칼라크물을 다스렸다. 도끼를 휘두르는 자가 승하하자 579년에 우네 찬이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는 공격적인 정복전쟁을 펼치며 산타 엘레나의 왕과 함께 팔렝케를 침공했다. 당시 팔렝케의 여왕이었던 요흘 이크날은 칼라크물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당시 유일한 초강대국이었던 칼라크물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요흘 이크날은 우네 찬에게 패배했으며, 칼라크물 군대는 팔렝케를 약탈했다. 요흘 이크날은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아 계속 팔렝케를 다스렸지만 칼라크물에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팔렝케까지 꺾은 우네 찬은 한편 동부의 도시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611년 4월 7일, 그는 또다시 팔렝케를 침공했다. 당시 팔렝케의 왕은 아헨 요흘 맛이었는데, 그가 칼라크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바로 우네 찬이 칼라크물 군대를 이끌고 침략한 것이었다. 우네 찬은 요흘 이크날 여왕 이후 또다시 팔렝케를 굴복시켜버렸고, 이번에는 정말 철저하게 팔렝케를 약탈했다. 워낙에 칼라크물군이 대대적인 약탈 작업을 펼쳤기에 최소 2명의 최고위급 팔렝케 귀족들이 사망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브 파칼이었는데,[8] 이 사람은 거의 팔렝케의 왕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왕이나 다름없는 거물이 사망했다는 건 정말 팔렝케에 대한 칼라크물의 공격이 철저했다는 뜻이다. 결국 팔렝케는 자신들의 무역로를 완전히 박탈당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쇠퇴하게 되었다.
2.2.1. 유크눔 친 2세
유크눔 친 2세의 장례가면 | 전성기 시절의 칼라크물 |
629년에는 최대 경쟁자인 티칼이 페텍스바툰 지방에 새로운 개척도시인 도스 필라스를 세웠다. 도스 필라스는 티칼에서 남동쪽으로 1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식민도시로, 파시온 강 인근의 무역로를 감시하기 위하여 세워진 도시였다. 티칼의 왕족 출신이었던 발라즈 찬 카윌이 4세의 아주 어린 나이에 도스 필라스의 초대 국왕으로 임명되었고, 수년 동안 티칼의 충실한 동맹국으로써 숙적인 칼라크물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648년, 칼라크물이 티칼을 공격해 왕을 죽여버리자 상황은 급변했다. 발라즈 찬 카윌 역시 이 전투에서 사로잡혔지만 칼라크물에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풀려났고, 657년에는 티칼을 공격해 당시 티칼 왕이었던 누운 우졸 착을 쫓아내기까지 했다. 다만 도스 필라스가 티칼을 명백히 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티칼 출신이라는 뿌리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스 필라스의 문장이 티칼의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것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칼라크물은 기껏 얻어놓은 도스 필라스를 이용해서 티칼을 전방위적으로 포위하는 전략을 썼다. 티칼을 에워싸고 있는 도스 필라스, 엘 페루, 카라콜 등을 이용하여 연합군을 구성해 티칼이 일정 범위 이상으로 뻗어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계략을 짠 것이었다. 물론 티칼도 이를 가만 두고 보고 있지만은 않아서 도스 필라스를 공격해 발라즈 찬 카윌을 약 5년 가량 쫓아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677년에 칼라크물이 다시 재반격해서 도스 필라스를 티칼의 영향력에서 빼내왔고, 발라즈 찬 카윌을 다시 도스 필라스의 왕으로 세웠다. 이후 도스 필라스와 칼라크물은 밀월 관계를 유지해서 결국에는 티칼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칼라크물과 다른 도시들 간의 분쟁은 동쪽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카라콜과 나랑호 사이에 불화가 끊임없이 지속되었고, 680년에는 나랑호가 카라콜을 꺾어버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랑호의 왕조가 단절되어 버리면서 발라즈 찬 카윌의 딸이 682년에 나랑호의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아마 강대국이었던 칼라크물이 나랑호의 왕위 계승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칼라크물의 대왕이었던 유크눔 친 2세는 수많은 봉신국들의 왕들을 입맛대로 갈아치웠는데, 키니치 발람을 엘 페루의 새로운 왕으로 임명하고 칼라크물의 공주를 시집보내기도 했다. 또한 남쪽의 대도시 칸쿠엔의 왕을 3대에 걸쳐 꾸준하게 임명했으며 656년과 667년에 사절을 보내 왕들을 교체하기도 했다. 또한 칼라크물의 귀족들을 각지에 파견해 도시의 제례 의식들을 주관하도록 만들었고 인근 모든 도시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티칼이 사라진 마야 문명에서의 칼라크물은 말 그대로 무적의 최강대국이었고, 유크눔 친 2세가 80대의 나이에 승하하기까지 칼라크물은 명실상부 마야 세계의 패권국이었다.
2.2.2. 패배와 몰락
칼라크물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대왕 유크눔 친 2세가 죽은 이후 유크눔 이차악 칵이 686년 4월 3일에 그의 뒤를 이어 새로운 칼라크물의 국왕이 되었다. 칼라크물은 바로 이 유크눔 이차악 칵의 재위 기간부터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유크눔 이차악 칵이 처음부터 칼라크물의 쇠퇴를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즉위 직후 도스 필라스와 카라콜의 합법적인 인정을 받았으며, 얼마 가지 않아 나랑호를 포함해서 인근 대도시들의 인정과 충성 맹세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크눔 이차악 칵이 티칼의 대왕인 자소우 찬 카윌 1세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그때까지 칼라크물이 쌓아올린 모든 업적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칼라크물은 이 싸움에서 대패하며 심지어 도시의 수호신상마저 빼앗겼고, 칼라크물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끝장났다. 반대로 티칼은 130여 년에 달하는 암흑기인 '티칼 히아투스'를 끝내고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유크눔 이차악 칵의 생사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티칼의 벽화에 잘린 머리들과 흘러넘치는 피의 묘사가 가득한 것을 보아 아마 티칼 군대에 잡혀 죽었거나 제물로 바쳐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어쨌든 유크눔 이차악 칵이 티칼군에 대패해 칼라크물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된 이후, 갈라지는 땅이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 이 왕이 칼라크물 정통 왕조의 후계자인지 아니면 티칼의 괴뢰 왕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건 칼라크물 왕의 권위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후 칼라크물의 역대 왕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그나마 기록이 남아있는 왕은 유크눔 툭 카윌 왕이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유크눔 툭 카윌 왕은 도스 필라스, 라 코로나 등 일부 도시들에 대한 영향력은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칼라크물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분명한 것은 칼라크물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으며 티칼에 비하여 확연하게 밀리는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티칼과 칼라크물은 그러나 꾸준하게 충돌을 계속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퀴리구아와 코판 사이에서 일어난 대리 갈등이었다. 당시 퀴리구아는 전통적으로 남부 지방의 대도시 코판의 속국이었다. 724년에 코판의 국왕 우악사클라운 우바 카윌이 퀴리구아의 새로운 왕으로 칵 틸리우 찬 요팟을 임명했다. 10년 후인 734년에 칵 틸리우 찬 요팟은 종주국인 코판을 상대로 독립을 선포했고, 스스로를 높여서 '쿠훌 아하우'로 칭했다.[10] 당연히 코판은 속국인 퀴리구아의 반란을 진압하려 들었고, 코판이 전통적인 티칼의 핵심 동맹국이었기에 이 분쟁은 티칼과 칼라크물 간의 대리전이 되었다.
2년 후인 736년에는 아예 칼라크물의 왕 와마우 카윌이 퀴리구아를 친히 방문했다. 이는 대놓고 칼라크물이 퀴리구아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의미로, 애초에 퀴리구아가 코판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할 수 있었던 뒷배경에 칼라크물이 있었다는 것을 의심하게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시 칼라크물은 온갖 물산들이 풍부하게 오가는 몬타구아 계곡의 무역로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 일대의 도시인 퀴리구아를 밀어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퀴리구아는 칼라크물의 힘을 빌어 결국 종주국인 코판의 우악사클라운 왕을 사로잡아 738년 4월 27일에 처형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코판은 철저히 약탈당했으며, 코판의 목재 신상은 퀴리구아로 끌려가 산산조각이 났다. 코판이 당시 퀴리구아보다 명백한 군사적 우위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퀴리구아에게 털린 이유는 칼라크물의 존재 때문이었다. 칼라크물의 힘이 두려워 함부로 대응하지 못하다가 결국 퀴리구아군에게 함락당한 것이었다. 이로써 칼라크물은 티칼의 핵심 동맹국인 코판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퀴리구아를 통해 무역로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
741년에 5개의 거대한 석비가 칼라크물에 더 세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크물의 영향력과 군사력은 확실히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칼라크물의 핵심 동맹국이었던 나랑호와 엘 페루는 이미 티칼에 함락당해 망가져버렸고, 남은 것은 칼라크물 하나 밖에 없었다. 751년에도 석비가 하나 더 세워졌지만, 장식마저 제대로 완성되지 않을 정도로 이미 국력이 크게 소진된 상황으로 전락했다. 800년에 하나, 810년에 하나 더 신전들이 세워졌으나 830년에 중요한 종교 기념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념물이 세워지지 않은 것을 보아 830년에 이르렀을 때 즈음에는 제대로 된 건물을 세우지도 못할 정도로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889년까지 그나마 도시의 건물들에 대한 보수 공사는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900년까지도 도시의 지배층은 남아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900년이 넘어가자 거의 대부분의 왕족들과 엘리트 지배 계급이 칼라크물을 비우고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났다. 아마 칼라크물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쇠락했거나 아니면 지력, 가뭄, 천재지변 등으로 도시를 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부 부족들이 칼라크물의 폐허에 터를 잡고 살긴 했지만 칼라크물은 다신 옛 영광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1,000여 년 가까이 정글 속에 묻혀있었던 칼라크물은 1931년에 키루스 L, 린델에 의해 항공에서 발견되었으며 1932년에 카네기 재단의 후원을 받은 탐사팀이 처음으로 유적을 방문했다. 이후 1938년까지 고고학 작업이 진행되다 중단되어 1982년까지 아무 작업이 벌어지지 않았고 1982년부터 다시 활발하게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는 멕시코 고고학국의 최대 역점 발굴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3. 유적
사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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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건물 (Structure I) 높이가 5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이다. 칼라크물 유적의 동편에 있으며 기단부에는 731년에 유크눔 툭 카윌 왕이 세운 거대한 석비들이 여러 개 세워져 있다. 1번 건물이 약간 솟아오른 언덕 부분에 세워져 있어서 후술할 2번 건물보다 더 높아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낮은 높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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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건물 (Structure II) 칼라크물 유적군의 핵심인 거대한 피라미드이다. 마야 문명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로, 기단의 길이는 120m, 높이는 45m에 이른다. 시간이 흐르며 여러 피라미드들을 위에 겹쳐서 쌓아올린 구조이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옆에서 보면 마치 2개의 피라미드가 겹쳐져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측면과 기단 부분은 거대한 스투코 가면과 복잡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어 매우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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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건물 (Structure III) 발견자인 키루스 룬델의 이름을 따서 '룬델 궁전'이라고도 불린다. 4번 건물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러 개의 방들을 가진 꽤나 거대한 건물이었다. 다만 현재는 대부분이 무너져내려 방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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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건물 (Structure IV) 칼라크물의 중앙 광장 동편에 있는 3개의 신전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4번 건물'이라고 이름 붙여놓았다. 크게 4a 건물, 4b 건물, 4c 건물 이렇게 3 부분으로 나뉘며 가장 가운데에 있는 4b 건물은 제작 연대가 선고전기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광장 맞은편에 있는 6번 건물과 함께 일식과 월식을 관찰했던 천문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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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건물 (Structure V) 2번 건물 북쪽에 자리한 광장 인근의 큼직한 건물이다. 10여 개에 달하는 높은 석비들이 5번 건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비석들은 대략 7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만 5번 건물 자체는 7세기보다 훨씬 이전인 선고전기에 제작된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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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 건물 (Structure VI) 중앙 광장 서쪽에 위치한 건물. 상단에 소개한 4번 건물인 4a 건물, 4b 건물, 4c 건물들과 함께 거대한 E-그룹 건물군을 형성한다. E-그룹 건물군이란 마야 문명의 도시들에서 별들을 관측하던 천문대 건물들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1989년의 관측 결과 3월 21일 춘분에 6번 건물에서 광장 반대편을 바라보면 정확히 4번 건물의 4b 건물 방향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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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건물 (Structure VII) 중앙 광장 북측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이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높이는 무려 24m에 이른다. 피라미드의 정면 계단이 있는 남측 방향에는 총 5개의 비석들이 세워졌고 고전기 후기부터 후고전기까지 여러 차례 증축 과정을 거쳤다. 원래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3개의 방이 있는 거대한 사원이 세워져있었고 그 안에는 신상이 모셔져 있었다. 신전의 방들 중 한 방의 바닥에는 마야식 보드 게임판이 새겨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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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 건물 (Structure VIII) 중앙 광장 북쪽에 있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마찬가지로 북쪽에 있는 7번 건물의 동쪽에 있다. 근처에 1번 석비와 제단이 세워져 있다. |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5]
칼라크물이란 이름은 발견자인 키루스 룬델이 새로 지은 이름이다. 마야어로 카는 '둘'을 의미하고, 락은 '가까운'을 뜻하며 물은 '피라미드'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세 음절을 합친 '칼라크물'은 두 개의 가까운 피라미드라는 의미이다.
[6]
일단 이곳으로 가려면 체투말이나 에스카르세가, 비야에르모사에서 ADO 시외버스를 이용한 후 Xpujil까지 이동한 다음, 타 교통수단으로 환승하여 이동해야 한다. 수도 멕시코 시티에서도
직통노선이 있긴 하나
멕시코시티 TAPO에서 매일 오후 4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이용할 경우 18시간이나 걸린다. 비행기를 탄다고 해도 칸쿤이나 체투말, 비야에르모사에서 갈아타야해서 그냥 시티에서 버스를 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단, 시티에서 바로 발권할 경우 1,600페소나 되는 비용을 그대로 내야하기 때문에 일찍 예매할 경우 할인이 되는 에스카르세가나 비야에르모사 등지에서 연결하거나 다른 버스로 갈아타는 것으로 분리발권을 하는 것이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된다. Xpujil 지역은 해당 유적과
멕시코 시티,
베라크루스에서 벨리즈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 외에는 별 볼일 없는 곳이다.
[7]
마야어로 칸은 '뱀'을 의미한다.
[8]
그 유명한
파칼 왕과는 다른 사람이다.
[9]
기록에는 먹었다라고 적혀 있다.
[10]
일반적인 국왕은 그냥 '아하우'라고 불렀다. 그러나 속국을 거느린 강대국의 왕은 따로 '쿠훌 아하우'라고 높여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