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ee56f>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카를 3세 빌헬름 Karl III. Wilhelm, Markgraf von Baden-Durl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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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black> 이름 |
카를 빌헬름 (Karl Wilhelm) |
출생 |
1679년
1월 27일 바덴두를라흐 변경백국 두를라흐 |
사망 |
1738년
5월 12일 (향년 59세) 바덴두를라흐 변경백국 카를스루에 |
재위 | 바덴두를라흐의 변경백 |
1709년 6월 25일 ~ 1738년 5월 12일 | |
배우자 | 뷔르템부르크의 막달레나 빌헬미네 (1697년 결혼) |
자녀 | 카를 마그누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테 막달레나 |
아버지 |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 |
어머니 |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의 아우구스타 마리아 |
형제 | 요하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나 프리데리케, 크리스토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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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덴두를라흐의 변경백. 예산 편성, 의무 교육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스템을 실행한 최초의 지도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2. 생애
카를 빌헬름은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Friedrich VII Magnus)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의 아우구스타 마리아(Augusta Maria of Schleswig-Holstein-Gottorp)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1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고, 그의 밑으로는 여덟 명의 여동생과 남동생 하나가 있었다. 본래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장남이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둘째인 카를 빌헬름이 후계자로 지정되었다.위트레흐트, 제네바, 로잔에서 학업을 마친 후 카를 빌헬름은 잉글랜드, 스웨덴, 그리고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여행을 마치자 그는 1694년 여름 자신의 삼촌인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Ludwig Wilhelm)이 이끄는 군대 소속 대령으로 입대했다.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프리들링겐 전투, 회흐슈테트 전투, 블레넘 전투 등에 참전해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후 1709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4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작위를 승계받아 영지를 운영하기 위해 제대를 했다.
카를 빌헬름은 자신의 아버지가 끝내 이루지 못한 카를스부르크 궁전 재건 공사[1]를 중단시키고 대신 새로운 궁전을 축조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1715년 6월에 카를스루에 궁전 공사를 시작했고, 2년 뒤인 1717년 7월에 완공되었다. 현재 카를스루에 궁전은 카를스루에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1709년 카를 빌헬름이 막 영지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변경백국은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여전히 정부는 빚에 시달리고 있었고 경제 활동이 둔해져 있었다. 그의 궁극적인 과제이자 목표는 수입을 창출해 재정을 확보하고 담보로 묶여 있는 일부 영토가 뺏기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 세금은 평소처럼 걷되 자신의 궁전에 일하는 시종들의 인건비, 동식물원 운영 유지비를 제외한 건물 유지비, 공무원 급여 등에 대한 전반적인 정부 지출을 삭감하려고 해 반대에 부딪혔으나 결국 과감한 긴축 정책을 강행했다.
이와 함께 그는 국가 빚을 탕감하고자 정부가 직접 철강, 소금, 그리고 담배에 대한 독과점을 해 해당 품목에 대한 판매권은 전체 수익의 일부는 국가가 가져간다는 조건으로 지역 상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유럽 대륙에 수요가 제일 많았던 세 품목이었던 만큼 정부는 꾸준히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세수를 더 많이 얻기 위해 인지세, 물품세, 그리고 보유세 등을 귀족들과 부유한 평민들에게 중점적으로 부과했고, 예산 편성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 다음 해에 얼마나 지출이 들 것인지를 미리 알아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써 그는 무려 30만 플로린의 예산을 확보할 수가 있었고 긴축 정책이 실행된 지 어언 15년 동안 100만 플로린의 부채를 갚을 수 있었다.
한편 카를 빌헬름은 영국와 프랑스를 보고 산업을 증진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교육을 산업 발전의 시작이라고 여겨 1718년에 연 포르츠하임 공립 고아원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시작해 기계를 다루는 방법과 물품 제조 방법 등을 가르치는 의무 교육을 실시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예상보다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의무 교육이라는 새로운 교육 개념을 사용한 개척자로 평가받았다.
또한 그는 수출입을 할 때 자신의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왕래하기 위한 도로 체계가 부족하는 것을 확인해 기존의 오래된 도로는 넓고 깨끗하게 공사하고 도로가 없는 후미진 곳에 도로를 건설하도록 했다. 아울러 외국의 압력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지키고자 수입은 제한하고 수출은 와인과 곡물로 한정 짓는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한 정책을 펼쳤다.
카를 빌헬름은 1738년 화단에서 튤립을 심던 중 갑자기 뇌졸중이 일어나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생전 유언에 따라 카를스루에의 콘코르디아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과 내장은 함에 따로 넣어 포르츠하임의 궁전 교회에 보관되었다.[2] 현재 카를스루에의 시장 광장에는 그가 묻혀 있는 장소임을 나타내는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