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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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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anedatomehiro.jpg
이름 | 카네다 토메히로 (金田留広) |
출생일 | 1946년 11월 17일 |
사망일 | 2018년 10월 2일 (향년 71세) |
출신지 | 아이치현 나고야시 |
국적 | 일본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68년 드래프트 4위 |
소속팀 |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 (1969~1973) 롯데 오리온즈 (1974~1978)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9~1981) |
지도자 경력 | 롯데 오리온즈 2군 투수코치 (1987~1988) |
1974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선수( MVP) | ||||
1973년 노무라 카츠야 ( 난카이 호크스) |
→ |
카네다 토메히로 ( 롯데 오리온즈) |
→ |
1975년 카토 히데지 ( 한큐 브레이브스) |
1972년 퍼시픽리그 최다 승리 | ||||
1971년 키타루 마사아키 ( 롯데 오리온즈) 24승 |
→ |
카네다 토메히로 ( 토에이 플라이어즈) 야마다 히사시 ( 한큐 브레이브스) 20승 |
→ |
1973년 나리타 후미오 ( 롯데 오리온즈) 21승 |
1974년 퍼시픽리그 최다 승리 | ||||
1973년 나리타 후미오 ( 롯데 오리온즈) 21승 |
→ |
카네다 토메히로 ( 롯데 오리온즈) 16승 |
→ |
1975년 히가시오 오사무 (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23승 |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로 불리는 카네다 마사이치의 친동생이었으며, NPB에서 투수로 MVP까지 해본 경력이 있다. 일본 국적의 재일교포로 한국명은 김말홍.2. 선수 시절
아이치 고등학교를 졸업 후 아이치가쿠엔 대학에 진학하여 1학년 때 투수로써 7승 4패의 우수한 성적을 남겼으나 대학을 중퇴하였다.[1] 이후 사회인야구팀 닛폰통운 우라와[2]에서 뛰다가 1968년 드래프트 4위로 토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했다.데뷔 시즌인 1969년부터 선발, 구원을 가리지 않고 뛰며 59시합 등판(리그 최다), 18승 13패, 방어율 3.63을 기록. 신인으로써는 매우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2년차인 1970년엔 24승[3], 246탈삼진을 기록했으나 전부 다 1개 차이로 다승왕, 탈삼진 1위 기록을 놓치기도 했다. 이후로도 주전 투수로써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4년차인 1972년엔 20승으로 다승왕을 수상했으나 이듬해인 1973년엔 7승 16패로 심한 부진에 시달렸고, 시즌 종료 후 친형 카네다 마사이치가 감독으로 있던 롯데 오리온즈에 트레이드된다.
롯데에서의 첫 해인 1974년, 카네다는 16승을 거두어 2번째 다승왕을 수상하며[4] 롯데의 후기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포스트시즌에서도 플레이오프에서 2차전을 승리로 이끌고 우수투수상을 수상하며 4년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 공로로 그해 퍼시픽리그 MVP를 수상하였고,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일본시리즈에서도 4차전 승리투수가 되는 등 활약하며 양대리그 원년( 1950년) 이래 24년만의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이후로도 주전 선발투수로써 뛰었지만 7승 이상을 거두지 못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1978년 시즌 종료 후 형의 감독 퇴임과 동시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트레이드되었다. 히로시마에선 주로 구원투수로 뛰었고 3년만인 1981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통산성적은 434시합 등판, 128승 109패 2세이브, 1317탈삼진, 방어율 3.25이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엔 1987~1988년 롯데 오리온즈의 2군 투수코치를 역임한 것 이외엔 일본프로야구계와 떨어져 건강식품 회사를 운영하면서 지내왔으며, 한편으로는 일본 장애인 야구대회 후원, 자선 골프대회 개최 등 사회공헌 활동에 힘쓰기도 했다.2018년 10월 2일, 형 카네다 마사이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세. 사망 소식은 타계 9일 후인 2018년 10월 11일 치바 롯데 마린즈 구단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리고 형 가네다 마사이치도 1년 뒤인 2019년 10월 6일 세상을 떠났다.
4. 기타
- 입단 첫해인 1969년,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면서 퍼시픽리그 측 투수로 올스타전에도 출장했는데, 이때 마찬가지로 센트럴리그 측 투수로 출장하게 된 카네다 마사이치와 전대미문의 형제 대결을 펼친 바 있다. 1차전 5회 말, 이날 경기에서 퍼시픽리그 측 4번째 투수로 등판한 토메히로를 상대로 마사이치가 대타로 출장했는데, 결과는 2루수 쪽 플라이로 토메히로의 승리. 3차전에서는 형제 모두가 등판하는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마사이치는 1969년 시즌 종료 후 은퇴하면서 이해가 현역으로써 마지막으로 출장하는 올스타전이 되었다.
- 형 마사이치만큼이나 타격 성적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통산 107안타 13홈런 45타점[5]에 타율 .217을 기록했는데, 타율로만 따지면 1할대인 형 마사이치보다 더 높은 성적을 기록했고 은퇴 시즌인 1981년엔 4할을 쳤을 정도다, 1972년 9월 22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는 무려 만루홈런을 치기도 했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퍼시픽리그 최후의 투수가 친 만루홈런이다.[6]
- 제일 윗형 카네다 마사이치 뿐만 아니라, 형 카네다 타카요시(1938년생)와 카네다 호시오(1941년생), 조카 카네이시 아키히토(1960년생)도 프로야구 선수였다. 이들 중 형 마사이치는 일본 프로야구 역대급 선수이며 타카요시와 호시오는 1군 기록 없이 은퇴하였지만, 조카 아키히토는 히로시마, 닛폰햄 등에서 선발, 구원 등으로 활약하며 통산 329시합 72승 60패 80세이브 방어율 3.38을 기록했다. 참고로 토메히로가 1979년 히로시마로 이적함과 동시에 아키히토도 드래프트 번외로 히로시마에 입단하여 데뷔하면서 삼촌과 조카가 한 팀에서 뛰게 되었는데, 아키히토가 입단한 데는 삼촌 마사이치와 토메히로가 히로시마 측에 아키히토를 입단시켜 줄 것을 요청해서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 아키히토는 1998년 큰아빠가 뛰던 요미우리에서 은퇴했다.
- 투수 본인이 친 홈런으로 1-0 완봉승을 마사이치와 토메히로 모두 경험했다.
- 1971-72년 2년 연속 퍼시픽리그 최다 피홈런 허용투수였다. 1971년 42개는 야마다 히사시, 이모토 타카시(井本 隆)[8] 와 함께 퍼시픽리그 최고기록이었고 일본 최고기록이었다.[9]
5. 관련 문서
[1]
공교롭게도 형
카네다 마사이치도 고등학교 중퇴 후 바로 창단한지 얼마 안된
고쿠테츠 스왈로즈에 입단하여 프로에 데뷔했다.
[2]
現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인
츠지 하츠히코가 뛴 팀이기도 하다.
[3]
20선발승(본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20선발승 이상)으로 기타루 마사아키와 공동 선발승 2위
[4]
퍼시픽리그 사상 첫 20승 미만 다승왕 기록이었다.
[5]
형 마사이치는 38홈런 177타점을 기록했으며 홈런 수는 투수 통산 1위이다.
[6]
1975년
지명타자 도입 이래 현재까지
퍼시픽리그에서 투수가 타석에 서는 방법은 경기 도중 지명타자가 소멸되는 방법 이외엔 없다.
오타니 쇼헤이 같은 경우는
지명타자까지 겸임하는 투타겸업이라 제외.
[7]
조부모 산소가 대구 인근에 있다.
[8]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1973~1982),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1983~1984)에서 뛰었으며 1980년에 42개의 피홈런을 기록했다. 통산 81승 75패 6세이브를 기록했으며 2015년에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4세.
[9]
훗날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피홈런 최고기록은
히로시마 토요 카프의 이케가야 코지로(池谷公二郎)가 1977년에 48개로 경신했다. 카프에서만 뛰었으며(1974~1985) 통산 103승 84패 10세이브를 기록했다. 훗날 카프(1989~1992)와
요미우리 자이언츠(1998~2001, 2004)에서 코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