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2 18:36:14

신한청년당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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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배경 파리 강화 회의 · 민족자결주의 · 러시아 혁명 · 고종
사건 2.8 독립 선언 · 파리 장서 사건 · 제암리 학살사건
인물 / 단체 우드로 윌슨 · 블라디미르 레닌 · 신한청년당 · 여운형 · 민족대표 33인( 손병희) · 유관순 ·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타 삼일절
독립선언서 }}}}}}}}}

1. 개요2. 상세3. 여담

1. 개요

융희 황제가 삼보(영토, 인민, 주권)를 포기한 경술년(1910)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의 마지막 날은 즉 신한국 최초의 날이니 (하략)
『1917년 대동단결선언』[1]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은 1918년 8월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 단원들을 주축으로 조직된 한국의 독립 운동 단체로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이다.[2][3] 당수는 여운형이며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이었으며, 그 밖에도 1919년 4월에 서병호, 김구, 이광수, 신규식 등도 관여하였다.

2. 상세

당의 강령은 '대한 독립·사회 개량·세계 대동' 등 세 가지였다.

1918년 12월 독립 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4] 1919년 1월에는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도쿄, 연해주, 미주와도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신한청년당은 일본·만주·연해주·서울 등 국내외로 동지를 파견하여 파리강화에 대표를 파견하였음을 알리고, 독립 운동자금을 모금하고, 나아가 국내외에서 거국적인 독립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며, 1918년 12월에 부산에 파견된 장덕수는 백산상회로부터 파리강화회의 참석 경비 3000원을 모금하였다. 일본 도쿄에 파견된 신한청년당 인사들은 일본 동경 유학생들과 접촉하였다. [5]

신한청년당의 이러한 활약으로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한국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3·1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축을 이루었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독립 운동가 신규식의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1923년에 해체하게 된다.

3. 여담

신한청년당이라는 이름은 1908년에 혁명 성공으로 국제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청년 투르크당(터키 청년당)에서 따온 것이다.[6] 그리고 신한 청년당 당수 별명이 터키 청년이었다.


[1] 1917년 7월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신석우, 박용만, 한진교 등 14명의 명의로 발표된 선언문이다. [2] 동제사는 1912년 상하이에서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로 쑹자오런, 천치메이 등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연합하여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하기도 했다. [3] 한인사회당이 1918년 5월로 날짜상으로는 이르지만, 공산주의 계열의 '당'은 일반적인 민주국가에서 정당정치 활동을 하는 정당과는 좀 다른 개념이다. [4] 이 부분에 대한 배경은 1918년 11월, 윌슨의 특사 찰스 크레인이 중국 상해에 와서 '민족 자결주의'를 강연하는데, 마침 그자리에 있던 여운형이 찰스 크레인을 찾아가서 조선 독립에 대한 개인 면담을 나눈다. 그리고 여운형은 '이 민족 자결주의 원칙은 조선독립의 희망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는등, 장덕수를 국내로, 이광수를 일본으로 파견하면서 독립 운동 자금을 모았다. [5] 이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된 우사 김규식은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후 임시의정원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과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 위원 겸 주(駐) 파리한국통신국 대표위원으로 임명되고 신임장을 발송받았다. 이때부터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식 외교대표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김규식이 파리 시내 '샤토당'가 38호에 설치된 '강화회의 한국민대표부'는 이후 대한민국 주파리위원부통신국(Bureau de Information Coréenne, '파리한국통신부', '파리위원부', '파리통신부' '파리주재 한국위원부' 등으로 불리움)로 바뀌어 파리강화회의 이후에도 재 유럽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역할을 했다. [6] 더 거슬러 올라가면 주세페 마치니의 ' 청년 이탈리아당'이 청년 투르크당에 영향을 주었으므로, 이탈리아의 민족운동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