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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스티미로비치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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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950년에서 960년 사이 |
재위 | 세르비아 크냐지 |
927년에서 933년 사이 ~ 950년에서 960년 사이 | |
아버지 | 클로니미르 |
가문 | 블라스티미로비치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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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세르비아 공국 10대이자 마지막 크냐지(Knyaz).2. 행적
제5대 공동 크냐지 스트로지미르는 860년대에 형 무티미르에 의해 동생 고이니크와 함께 불가리아로 축출되었다. 그 후 불가리아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불가리아 여성과 결혼해 클로미니르를 낳았다. 클로니미르는 896년 불가리아의 지원을 받고 세르비아로 돌아와 크냐지를 쟁취하려 했지만 페타르에게 패사했다. 클로니미르의 아들 차슬라프는 아버지 사후 오랫동안 불가리아 제1제국의 수도 플리스카에 지냈다.917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시메온 1세는 자기와 전쟁을 벌이는 동로마 제국과 손잡을 기미를 보이는 페타르를 몰아내기 위해 테오도르 시그리차와 마르마이스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을 세르비아로 파견했다. 불가리아인들은 페타르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페타르는 이에 응해 협상하려고 찾아왔다가 체포된 뒤 불가리아로 끌려갔다. 이후 무티미르의 차남 브란의 아들 파블레가 불가리아군의 추대로 크냐지에 올랐다. 920년, 프리비슬라프의 아들 자하리야가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1세의 지원을 받고 세르비아로 진군했다. 파블레는 이를 물리치고 자하리야를 생포한 뒤 시메온에게 넘겼다. 하지만 시메온은 훗날을 대비해 자하리야를 살려뒀다.
921년 파블레가 동로마 제국과 손잡으려 하자, 시메온은 군대를 파견해 파블레를 몰아낸 후 자하리야를 새 크냐지로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922년 봄 세르비아를 장악하고 크냐지가 된 자하리야는 시메온 1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오래도록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면서 동로마 제국에 경도되었고, 자기를 가뒀던 불가리아를 질시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불가리아는 이웃이니, 불가리아에 예속되는 것보다는 동로마 제국의 가신이 되는 편이 주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할 거라 여겼다. 이에 자하리야는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메온은 배신자 자하리야를 토벌하기 위해 테오도로스 시그릿사와 마르마이스에게 군대를 맡겨 세르비아로 출진했다. 그러나 자하리야는 불가리아군을 격파했고, 테오도로스와 마르마이스 외 여러 불가리아 장군을 척살한 뒤 그들의 수급과 무기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선물로 보냈다. 이에 시메온은 924년 9월 9일 로마노스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한 뒤, 차슬라프를 앞세워 세르비아로 진격했다.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전역을 파괴했고, 자하리야는 크로아티아로 망명해 토미슬라브의 보호를 받았다.
자하리야를 축출한 뒤, 시메온은 차슬라프를 새 크냐지로 세울 테니 모든 세르비아 귀족들에게 경의를 표하러 오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이 모이자 전부 사로잡은 뒤 불가리아로 압송했으며, 세르비아 전역을 불가리아의 영역으로 삼았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불가리아 가신으로 통치하던 류토미르가 세르비아에서 시메온의 대리인으로 통치하다가 림과 이바르 인근의 전투에서 파블리미르라는 인물에게 패배했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인물이 차슬라프이며, 차슬라프가 불가리아에서 도망친 뒤 동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고 류토미르를 물리쳤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이 기록은 오직 두클랴 대공 연대기에서만 나오며, 이 역사서의 초기 기록은 신빙성이 매우 부족하다는 평을 받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927년, 시메온 1세가 사망했다. 그 후 차슬라프는 세르비아로 귀환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저서 <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에 따르면, 차슬라프는 동료 4명과 함께 프레슬라프에서 세르비아로 도망친 뒤 동로마 제국의 도움으로 세르비아 공국을 회복했다고 한다. 대다수 세르비아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지만, 일각에서는 동로마 제국과 불가가리아 제국이 판노니아에서 떠오르는 강자 헝가리 대공국이 세르비아에 침투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차슬라프를 세르비아 크냐지로 세웠을 거라고 추정한다. 차슬라프가 세르비아에 돌아온 연도도 불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은 927년에 돌아왔을 거라고 추정하고, 일각에서는 931년이라고 추정하며, 다른 학자들은 933년일 거라고 본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차슬라프가 세르비아에 돌아왔을 때 조국이 불가리아군에게 완전히 파괴된 걸 확인했고, 아내와 자녀가 없는 남자 약 50명만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등 주변 국가에서 온 세르비아 난민들이 차슬라프가 돌아온 걸 알게 되자 조국으로 돌아왔는데, 특히 동로마 제국에서 가장 많은 난민이 돌아왔다고 한다. 또한 동로마 황제는 차슬라프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여 세르비아를 복원하고 강화하는 것을 더 쉽게 했으며, 차슬라프는 이에 힘입어 모든 세르비아 땅을 통합했다고 한다.
945년 크로아트 왕국 3대 국왕 크레시미르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미로슬라브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직후 또다른 아들인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가 프리브나 반의 지지를 받으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크로아티아 전역이 내란에 휘말렸다. 이로 인해 군대는 크게 약해졌고, 해군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변경 지역들은 잇따라 이탈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에 따르면, 이때 차슬라프는 보스니아 동부(현재 사라예보 주변 지역) 및 크로아티아의 일부 공국을 접수했다고 한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차슬라프[1]는 드리나 강둑에서 마자르족 분견대를 격파하고 마자르족 군 사령관 키쉬(Kiš)를 사살했다. 이에 키쉬의 미망인은 복수를 다짐하고, 세르비아에 맞서 더 큰 군대를 소집했다. 이후 사바 강변의 스렘에 주둔하던 세르비아군은 한밤중에 세르비아군의 기습 공격으로 궤멸되었고, 차슬라프는 친적들과 함게 사로잡힌 뒤 사바 강에 던져져 익사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차슬라프가 마자르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게 사실이라고 보며, 950년에서 960년 사이에 이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두클랴 사제 연대기의 초기 기록은 신빙성이 매우 부족하므로 믿을 수 없다고 간주한다.
차슬라프 사후, 세르비아는 사분오열된 뒤 동로마 제국에 합병되었고, 971년경 동로마 제국의 속주인 카테파니키온 아르시스(Κατεπανίκιον Ἄρσης)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976년 사무일이 세르비아 일대를 석권하고 세르비아 귀족들을 봉신으로 삼았다. 이후 세르비아는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000년경, 두클랴의 지도자 요반 블라디미르가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두클랴가 세르비아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1]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서는 키아슬라부스(Ciaslavus)로 명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