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20 13:09:10

지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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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로
芝江路 | Jigang-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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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덕로
노선 번호
55번 지방도
817번 지방도
기점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효산삼거리
종점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 칠구재터널
연장
10.9km
관리
화순군
왕복 차로 수
2~4차로

1. 개요2. 특징3. 주요 구간4. 대체도로5. 대중교통6. 교통량7. 주요 시설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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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효산삼거리에서 출발하여 화순읍 세량리 칠구재터널에서 끝나는 도로. 55번 지방도, 817번 지방도의 일부이다. 도로 이름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양한묵 선생의 호인 '지강'에서 유래했다.

2. 특징

오성로와 함께 광주광역시로 가는 우회로 중 하나이자 광주광역시에서 화순군 도곡면으로 가는 빠른 길 중 하나이다.

3. 주요 구간

  • 효산삼거리
  • 도곡면천암리교차로
    • 천암1길과 만난다. 지강로는 이 천암리를 우회한다.
  • 도곡면원화리교차로
    • 온천1길과 만난다. 여기부터 원동마을 정류장까지 왕복 2차선이었다가 이 이후로 왕복 4차선으로 늘어난다.
  • 원화교차로
    • 여기서 도로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나주 방향으로 가면 화순읍앵남리교차로와 만나고, 그대로 직진하면 신앵남교를 건너 앵남교차로로 연결된다. 신앵남교 구간은 오성로를 확장하면서 동시에 새로 길을 만들었다.
      • 나주 방향으로 가면 화순읍앵남리교차로가 있고 동촌로와 만난다. 우회전하여 경전선 철도건널목을 건너면 앵남교차로와 만난다.
  • 앵남교차로
  • 세량교차로(가칭)
    • 세량제로 유명한 세량리로 진출입을 할 수 있다.
  • 칠구재터널
    • 이곳에서 끝나고 터널을 나오면 효덕로가 이어진다.

4. 대체도로

' 칠구재터널 ~ 앵남교차로' 구간은 그 유명한 너릿재터널( 22번 국도)를 우회하는 성격이 강하며, 이 이후는 화순읍에서 도곡면을 빠르게 이어주는 구간이라 대체도로는 없다.

5. 대중교통

5.1. 철도 도시철도

5.2. 버스

6. 교통량

7. 주요 시설

8. 기타


[1] 이는 1922년 5월 5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기사에서 " 화순군 도곡면의 선영에 이장했다"고 하는데, 선생의 묘소가 있는 앵남리는 예전부터 화순면(현 화순읍)에 속해있었다. 앵남리 바로 아래가 도곡면이라서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2] 양한묵 선생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영암 옥천(현재 해남군 옥천면)이지만, 결혼 이후 당시 능주군 오도면 율치리(현 화순군 도곡면 신덕리)에 정착하여 1897년 상경할 때까지 능주에서 살았다.